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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블랑
[ 전 세계 산악인들의 메카, 샤모니 ]
알프스란 단어에는 청량함이 있습니다. 알프스라고 발음을 하는 순간 머릿속에는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가 가득 찹니다. 한여름의 알프스는 더욱 특별합니다. 산 아래의 폭염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의 높은 산은 언제나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설국이기 때문입니다.
그 알프스에 오르기 위해 프랑스 중부의 샤모니로 갑니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샤모니에서 바라보는 4,810미터의 몽블랑은 유럽 대륙의 최고봉으로 연중 산으로 덮여 있습니다. 몽블랑 등반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곳은 아르브 강 근처의 조그마한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1786년 자끄 발마와 파까르가 몽블랑 등정에 성공(아래에서 상술)한 뒤부터 여름에는 피서, 등산, 패러글라이딩, 암벽타기, 겨울이면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일약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아담한 샤모니 시내는 거의 모든 곳을 걸어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샤모니 역을 마주보고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몽블랑의 우람한 모습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오고 그 옆으로는 아르브 강의 빙하수가 우윳빛 회색을 띠며 유유히 흘러갑니다.
* 샤모니 대표 음식, 퐁뒤 요리
샤모니 시가지에는 퐁뒤 식당이 즐비합니다. 추운 알프스 지방에서 열량을 보충하는 데 적합한 퐁뒤 요리는 철제 그릇에 화이트 와인, 그뤼에르나 에맹탈 치즈를 넣고 끓인 뒤 긴 포크에 꽂은 빵을 찍어 먹습니다.
중세 샤를마뉴 대제가 사원에 세금 대신 치즈를 내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치즈 소비량이 높은 프랑스 치즈는 에맹탈, 로크포르, 카망베르, 그뤼에르 등 그 이름도 다양합니다. 비교적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다는 카망베르는 1791년 노르망디 지방의 농촌 여인 마리 아렐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목초지의 다양성과 젖소, 양, 염소 등의 다품종 그리고 오랜 전통과 기술이 축적되어 프랑스에서는 오늘날 약 400여 종의 치즈가 생산되고 있습니다.
치즈는 제조 공정의 다섯 단계별 특성에 따라 색깔, 맛, 함유 성분, 고유한 향기가 달라집니다. 응고 ->유장 분리(응고 덩어리에서 유장을 분리하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 성형(틀에 붓거나 천을 이용한 성형 압착) -> 간 맞추기(소금을 뿌리거나 소금물에 담그는 과정) -> 숙성(온도 조절이 가능한 지하 저장고에서 적정 기간 숙성시키는데 이 기간 중 규칙적으로 뒤집거나 닦고 솔질을 해준다) 같은 여러 단계를 거친 후에도 보관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치즈는 만들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숙성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 카망베르 치즈
치즈는 가능한 보관 기간을 짧게 잡고 구매해야 합니다. 또한 치즈의 고유한 맛과 부드러움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먹기 한 시간 전에 실온에 보관하여 온도를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치즈 냄새가 거북한 사람들은 위해 치즈 대신 기름을 뜨겁게 달구어 작은 사각 모양으로 자른 쇠고기를 역시 포크로 찍어 익혀 먹는 고기 퐁뒤 요리도 파카르 거리 레스토랑 곳곳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이때 함께 제공되는 샐러드와 감자의 양이 엄청나게 푸짐합니다.
[ 등산의 효시-몽블랑 등정 ]
260년 전, 두 사나이가 몽블랑에 오르기 전까지는 '등산'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산꼭대기마다 무서운 악마가 산다고 믿었습니다. 산이란 나무를 베고 사냥을 하는 곳일 뿐,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이 목숨을 걸고 올라야 할 까닭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등산이 스포츠로서 자리잡은 것은 176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이 해는 유럽 알프스 산맥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몽블랑(Mont Blance ·4,807m)에 올라가 보려는 생각을 사람이 처음 가졌던 때입니다. 1760년 어느 날, 알프스 기슭의 가난한 마을 샤모니에서 이탈리아 제네바 태생 광물학자인 스무 살의 소쉬르가 몽블랑을 가리키며 외쳤습니다. 그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아무도 올라가 보지 못한 신비의 산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습니다.
* 샤모니
그때까지 알프스의 산마을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무서운 악마가 산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소쉬르는 과학의 힘을 빌어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죠.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지구위에 히말라야 산맥 같은 엄청난 산이 있다는 것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그 무렵,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은 그저 두렵고 존경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소쉬르가 상금을 내건 지 26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 없이 세월만 흘렀습니다. 1783년 마침내 부우리라는 사나이가 등산대를 짜서 몽블랑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첫 모험은 나쁜 날씨 탓에 실패했고, 1785년의 두번째 모험도 물거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다고 이 두 번의 도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 멀리 보이는 몽블랑
등산대원 중에 끼어있던 의사 파까르가 이때 겪은 일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뒷날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다졌기 때문입니다. 샤모니 마을에는 파까르 말고도 쟈끄 발마라는 사나이가 몽블랑에 오르는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면서 수정을 캐며 살았는데, 몽블랑에 올라 단번에 많은 돈을 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1786년 8월 7월 오후 3시. 의기 투합한 파까르와 발마는 샤모니 계곡을 벗어나 몽블랑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밤 9시쯤 2,392m 높이에 닿아 비박(1)했습니다. 다음 날은 새벽 4시 30분부터 등반을 시작해 다섯 시간 만에 보송 빙하와 타꼬나 빙하가 합치는 곳을 지났습니다.
자일도 없이 크레바스(2)를 건너고, 8월의 뜨거운 햇빛에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눈덩이 위를 지났습니다. 뒤이어 눈쌓인 벌판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 곳을 두 시간 만에 빠져 나갔습니다. 요즘처럼 아이젠(3)도 없이 어떻게 그 미끄러운 눈 언덕을 뚫고 지나갔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 샤모니의 등산객들
언덕을 올라 거센 바람이 몸을 날려 버릴 듯이 몰아치는 눈벌판을 1km쯤 걸어갔습니다. 그곳의 높이는 3,900m였습니다.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지는 곳을 러셀(4)하며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앞장섰던 발마가 지쳐 쓰러지자 파까르가 그의 짐을 받아 앞으로 나섰습니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그들은 눈벌판을 벗어났습니다. 그 다음은 산등을 따라 길게 이어진 바위 마루터기사이로 몽블랑의 북동쪽으로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이 길은 눈벌판에서 몽블랑 꼭대기에 이르는 루트가운데 가장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햇볕 들 틈이 없이 얼음에 덮인 이곳 역시 자일과 아이젠 없이 가까스로 넘어섰습니다.
발마와 파까르가 4,807m의 몽블랑 꼭대기를 밟은 것은, 1786년 8월 8일 오후 6시 32분으로, 2.392m의 비박했던 곳을 떠난 지 14시간 30분만에 이룩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파까르가 지팡이로 쓰던 긴 막대기를 세우고 거기에 빨간 천을 매달았습니다. 아무런 지식이나 장비도 없이, 그렇다고 등산을 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바위와 얼음을 뚫고 몽블랑 꼭대기에 우뚝 선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꽤 좋았던 날씨도 한몫을 거들었지만...
두 사람은 먹을 것이 떨어지고 잠이 모자란 데다 동상과 고산병까지 겹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내 달빛 속을 4시간 30분이나 헤치고 별일없이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몽블랑 등정에 성공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자끄 발마가 파까르에 대하여 누명을 쒸우고 혼자 등정했다고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몽블랑 등정은 오랫동안 자끄 발마의 단독 등정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 샤모니
* 발마의 중상 모략
하산 후 얼마 안지나 발마가 몽블랑 초등의 영예를 독차지하기 위해 "파까르는 한 일이 거의 없고, 모든 일은 내가 다 했다. 정상에도 내가 먼저 올랐다. 나중에 파까르를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산을 내려가 그를 데리고 와야했다."고 나발을 불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적 열정과 지적 호기심으로 몽블랑에 오르기를 꿈꾸었던 파까르는 짐꾼 겸 가이드로 고용했던 발마에게 소쉬르의 상금도 전액 양보하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착하디 착한 그에 대한 대가는 중상모략으로 돌아왔습니다. 배은망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 샤모니의 퐁뒤 레스토랑
탁월한 용기와 모험심에 비해 발마의 성품은 비열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산을 오른 동지의 발등을 내리 찍다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은 신의가 사라진 오늘의 세태만인줄 여겼는데 면면한 전통을 가진 터였습니다. 들끓는 논쟁에 기름을 들이부은 건 당대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5)였습니다.
그는 이 모험담에 얽힌 온갖 추문을 발마의 이야기에 기반한 소설을 구상해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당연히 대중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발마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파까르는 많은 고통을 겪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 후에도 이 사건은 등반사상 가장 큰 논쟁거리의 하나로 남았습니다.
샤모니 광장에 몽블랑 초등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될 당시까지만 해도 몽블랑 등정은 발마만의 성공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파까르는 제외된 채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만 세워졌습니다.
* 쇼쉬르와 발마의 동상
* 밝혀진 진실
파까르의 등정 의혹을 둘러싼 150년의 논쟁이 끝나게 된 것은 영국의 산악인 프레시필드 덕분이었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은 그는 마침내 소쉬르의 증손자가 보관해 온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발마에 의해 기록된 일기에는 파까르가 발마의 도움없이 정산에 올랐음은 물론, 그가 발마보다 정상에 먼저 올랐음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기장이 공개됨으로써 마침내 등정 의혹에 대한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프레시필드는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 옆에 오랫동안 멸시를 받아온 진정한 몽블랑 초등자인 파까르의 동상을 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파까르의 동상이 샤모니 광장에 들어섰습니다.
* 외로운 파까르 동상
[ 몽블랑 초등 이후 ]
이와 같이 파까르와 발마에 의해 몽블랑이 초등된 이후에도 19세기 중반까지 몽블랑을 오르는 일은 대단한 고통과 위험이 따르는 등산이었습니다. 실제로 두 번째로 몽블랑을 오른 소쉬르는 무게가 68kg이나 나가는 이불(1.5kg의 거위털 침낭으로 8,000m급의 산에 오르는 오늘의 시대와 비교하면 엄청난 무게인 것이다)과 불을 피울 수 있는 장작더미, 전원이 잘 수 있는 대형천막, 크레바스를 건널 때 사용하는 사다리 등을 10명의 짐꾼들에게 지게하는 대규모의 원정대를 꾸려서야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초등 이후 100여 년간 여전히 몽블랑 등반은 죽음을 향한 행보로 불리웠습니다. 원정대가 떴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들을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고, 성공 가능성을 점치며 원정대의 귀환을 기다렸습니다. 등반이 성공하는 경우에는 계곡에서 축포를 쏘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머물던 호텔에서도 축포를 쏘아올리고 손님의 계산서에 기념으로 그들의 등정기록을 첨부하기도 했습니다.
등반가들이 마을로 돌아오면 꽃다발과 환영 인파에 묻혀 샴페인으로 축배를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1853년을 기점으로 끝났습니다. 몽블랑으로 향하는 길에 첫 산장이 들어서면서 등반대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고,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도 시들해져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1) 비박(bivouac)
등산 도중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한데서 밤을 지새는 것을 말한다. 비박은 암벽 위나 눈 위에서도 하게 되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을 경우 고통스런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전문 산악인들은 이런 경우에 대비해 비박장비를 챙기고 나선다.
(2) 크레바스(crevasse)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을 말한다. 빙하지대를 지나는 산악인들이 크레바스 때문에 곤경에 빠지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 크레바스와 크레바스 사이의 고립된 빙하덩어리를 세락이라고 한다.
(3) 아이젠
등산화 바닥에 부착하여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등산 용구를 말한다. 빙벽을 오르내리거나 빙판, 혹은 눈 위를 걸을 때 사용하는데 독일어로는 슈타이크아이젠(steigeisen), 영어로 크램폰(crampons)이라고도 한다.
(4) 러셀(russell)
눈 덮인 산에서 앞선 사람이 눈을 파헤치고 단단히 다져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5) 알렉상드르 뒤마
19세기 프랑스의 극작가·소설가로 소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백작>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 수는 무려 250편이 넘었으며,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장면전환과 등장인물들의 활기찬 성격묘사 등 작가로서의 수완은 천부적이었다.
[ 마터호른 초등정 - 에드워드 윔퍼 등반대, 1865년 7월 14일 ]
체르마트는 스위스 알프스의 다른 마을처럼 조그마한 산간 마을이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위의 밋밋하고 푸른 초지로 이루어진 산등성이 너머로 완벽한 이등변 삼각형의 뾰족한 봉우리인 마터호른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는 것뿐. 영국의 산악인 에드워드 윔퍼는 이 봉우리를 등정하기 위해 여덟 번이나 이곳을 찾았습니다.
* 에드워드 윔퍼
몬테 로자 호텔 앞에서 보이는 마터호른(4478m)은 수줍은 처녀처럼 정상 부근을 얇은 구름으로 덮고 있었습니다. 윔퍼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산악가이드 장 앙뜨안느 카렐에게 마터호른 등반을 제안하고 함께 등반하기 위해 발뚜르낭쉬로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등반을 이유로 윔퍼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바로 전날 떠나고 없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산악인들이 이탈리아 피에드몽의 첨봉인 몬테 비소를 초등하자, 이탈리아 산악회는 마터호른 초등반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 카렐을 앞장 세워 마터호른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들의 출발을 알게 된 윔퍼는 초조해진 나머지 유능한 가이드를 고용하기 위해 떼오뒤르를 넘어 체르마트로 갔습니다.
* 마테호른
마침 그곳에는 가벨호른을 再登한 프란시스 더글라스 역시 카렐을 고용하기 위해 왔다가 허탕을 치고 윔퍼와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페터 타그발더가 마터호른 동벽을 조사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체르마트에서 그를 고용했습니다. 몬테 로자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 윔퍼는 호텔 벽에 기대앉아 있는 그의 옛 가이드 미쉘 크로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크로는 찰스 허드슨 목사에게 고용되어 마터호른을 등반하기 위해 방금 그곳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허드슨은 가이드 없이 새로운 루트를 통해 몽블랑을 등정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산악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허드슨을 따라온 더글라스 해도우는 19살의 젊은이로 몽블랑을 최단시간에 등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력은 좋았지만 산악인으로서의 경험은 별로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습니다. 윔퍼와 더글라스, 그리고 허드슨은 우연하게도 이곳 체르마트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마터호른 초등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나게 된 것입니다. 1865년 7월 13일 새벽 5시 30분, 윔퍼와 허드슨, 더글라스, 해도우, 크로, 타그발더, 그리고 짐꾼으로 고용된 타그발더의 두 아들을 포함한 8명은 체르마트를 출발했습니다.
* 체르마트
오전 11시 30분, 마터호른 산 밑에 도착한 그들은 등반을 시작하면서 푸르겐 빙하나 다른 쪽에서 바라볼 때 등반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곳들이 의외로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3355미터 지점에 텐트를 친 후 크로와 타그발더가 루트 정찰을 나갔습니다.
세 시간 뒤에 돌아온 그들의 입에서 전해진 말은 등반하는데 전혀 장애가 없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타그발더의 막내아들은 다시 체르마트로 돌아가고 그들은 곧바로 출발했습니다. 등반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간혹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돌아가면 천국의 계단처럼 신기하게도 올라가는 길이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루트에는 로프가 필요 없었으며, 윔퍼가 앞서 가거나 허드슨이 앞서 갔을 뿐입니다. 그들은 오전 9시 55분에 4270미터 지점에 도달해 5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눈에 덮인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이 능선 끝의 가파른 벽에는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당시 윔퍼 등반대는 북벽 쪽을 오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크로는 앞장서서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조심스럽게 올라야 했으며, 몇 군데는 손잡을 만한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경사는 그리 가파르지 않았지만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틈에는 눈이 가득 차 있는데다 추위로 결빙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경험이 없는 해도우는 등반에 익숙치 않아 계속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 마테호른
그들은 한시간 반 동안 어려운 지점을 돌파하고 한참 걸으니 눈 덮인 평이한 능선이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등정에 대한 회의와 의심은 사라져 버렸지만 또 다른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보다 이틀 전에 출발한 이탈리아 등반대가 마터호른 정상에 도달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루트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상에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갖가지 헛된 상상 때문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정상에 접근할수록 흥분은 더욱 심해졌다. 경사는 점점 쉬워졌으며, 마침내 우리는 서로 로프를 풀고 정상을 향해 돌진했다. 오후 1시 40분, 온 세상이 우리 발밑에 놓였다. 드디어 마터호른을 정복한 것이다. 정상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초등정의 보장은 없었습니다. 정상은 약 100미터 가량 길게 뻗은 평평한 능선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등반대가 다른 쪽 끝에 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윔퍼는 남쪽 끝으로 가서 열심히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의심과 기대감으로 절벽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순간 200미터 아래쪽으로 여러 개의 점들이 보였습니다. 그는 목이 쉴 정도로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으며, 크로는 가지고 온 텐트의 지주 한 개에 셔츠를 벗어 매달았습니다. 체르마트와 뚜르낭쉬, 브레이유에 있는 사람들은 마터호른 정상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습니다. 이탈리아 등반대는 슬픔과 좌절 속에 침울한 마음으로 되돌아왔습니다.
* 슬픔과 좌절 속의 하산 길
윔퍼 등반대는 한 시간 동안 정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에 도취했기 때문에 하산시의 안전에 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한 듯 했습니다. 윔퍼는 등반자들의 이름을 병속에 담아 정상에 남기고 타그발더와 로프를 연결한 다음 사람들의 뒤를 따라 내려갔습니다. 하강 지점에서 그들은 나머지 사람들과 서로 로프를 연결했습니다.
“크로가 먼저 하강한 다음 해도우의 다리를 잡아 주기 위해 피켈을 옆에 놓았다. 그러나 해도우가 미끄러지면서 크로의 비명소리와 함께 둘이 밑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허드슨이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질질 끌려갔고, 곧 이어 더글라스가 허드슨의 뒤를 따라 끌려 내려갔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로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은 타그발더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위에 몸을 끼웠다. 그들을 연결하는 로프가 팽팽해졌으며 근육의 긴장 속에서 바위를 꽉 잡고 버티었다. 그러나 타그발더와 다글라스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의 한 가운데가 갑자기 툭 끊어졌다. 불과 몇 초 동안 우리는 친구들이 미끄러지면서 손을 뻗으며 살아나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절벽에서 절벽으로 굴러 내려가며, 1200여 미터나 아래의 마터호른 빙하에 떨어졌다. 로프가 끊어지는 순간 그들을 구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30분 동안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윔퍼가 끊어진 로프를 살펴보다가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다른 예비 로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그발더와 더글라스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는 그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그들은 오후 6시 기진맥진한 상태로 겨우 산 밑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참담한 심경으로 밤을 지샜으며, 동틀 무렵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마터호른 초등과 더불어 알프스의 황금시대(아래에서 설명)가 끝나고 은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그 후로도 정상 등정의 대가는 흔히 피로 얼룩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 샤모니의 산악인들의 묘지
[ 알프스 등반의 시대적 구분, 황금시대->은시대->철시대 ]
* 알프스 황금시대 - 초등시대
알프스 몽블랑 등정으로 시작된 근대 등반은 사람들의 정복 심리를 자극하여 알프스 미답봉들이 하나둘씩 등정되는데, 이 무렵의 등반방식은 비교적 등반이 쉬운 산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것이 주류였습니다.
이를 피크 헌팅 또는 등정주의 방식이라고 하며, 1865년 알프스 4000미터 급 마지막 산인 마터호른이 에드워드 윔퍼에 의해 초등정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이 시기를 편의상 등반사에서는 등반의 황금시대라고 합니다.
* 알프스의 은시대 - 보다 어려운 루트로, 가이드 없이 등정하는 시대
은시대는 1865년 마트호른 초등 이후부터 1882년 당 뒤 제앙(4013m)이 초등될 때까지 17년 동안을 말하며, 황금시대와 다음에 도래할 철시대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더 힘들고 어려운 길로 오르는 본격적인 암벽등반이 시작되었으며 가이드의 안내 없는 가이드리스 등반이 성행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실천한 사람이 은시대의 주연 영국인 등반가 머메리였습니다.
* 알프스의 철시대 - 능선 등반이 아닌 직등시대, 북벽 등정의 시대가 열리다
철의 시대는 머메리에 의해 주창된 머메리즘(1) 탄생 이후부터 1938년 알프스 3대 북벽의 하나인 아이거가 초등되는 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머메리즘이 극대화되어 암벽에서 직등과 인공등반이 이루어지고 암벽등반 기술과 장비가 개발되어 암벽등반이 한층 더 활기를 띠며 발전했습니다.
1904년 구스타프 하슬러와 프리츠 아마터가 두 번의 비박을 감행한 끝에 핀스터아오호른(4275m) 북벽을 오름으로써 알프스에서 북벽시대가 개막되었고, 1931년 마터호른 북벽이 독일의 슈미트 형제에 의해 초등되자, 그랑드 조라스와 아이거 북벽은 줄기찬 도전을 받게 됩니다. 1938년 7월, 마침내 아이거 북벽이 프리츠 카스파레크, 하인리히 하러, 안데를 헤크마이어, 루트비히 푀르크 등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동대에 의해 초등정됩니다.
이로써 알프스 3대 북벽(2)이 등정되면서 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럽의 산악인들은 본격적으로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1) 머메리즘
영국의 등반가 알버트 머메리가 1880년 제창한 등반 정신으로, 등로주의(登路主義)라고도 한다. 가이드를 앞세워 가장 쉬운 코스를 선택해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는 전통적인 등정주의(登頂主義)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쉬운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르기보다는 절벽 등 어려운 루트를 직접 개척해 가며 역경을 극복해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 등반계에서는 머메리의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1931년 마터호른의 북벽이 정복되고, 1960년대에는 히말라야산맥의 8,000m급 봉우리 14개가 모두 등정되면서 현대의 등반 사조로 정착되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알파인 스타일이나 무산소 등반 역시 머메리즘에 입각한 등산의 형태로, 험준한 암릉(巖陵)이나 암벽 등의 난코스를 선택하는 정신을 일컫는다.
제창자인 머머리는 '근대 등산의 아버지', '등반사의 반역아'로 불리는 인물로, 1855년 잉글랜드의 켄트주에서 태어났다. 16세 때부터 암벽 등반을 시작해 1879년 마터호른의 츠무트릉을, 이듬해에는 푸르겐릉을 처음으로 등반하였고, 1895년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 원정 도중에 행방불명되었다.
(2) 알프스 3대 북벽
알프스의 3대 북벽이라고 하면 그랑드 조라스 북벽, 마터호른 북벽, 아이거 북벽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알프스 산봉의 북벽들은 1년 내내 얼음이 얼어 붙어있는데 특히 이들 3대 북벽은 경사도 가파른데다가 지독한 강풍과 낙석, 그리고 벼락 등이 시도 때도 없이 때리곤 해서 최악의 난코스로 알려져 왔다.
많은 등산가들이 이들 북벽을 오르다가 참변을 당했는데 우리나라 산악인들도 많이 희생당했다. 일반적으로 알프스 등산과 희말라야 등산의 차이점은 알프스의 경우에는 낙석, 벼락 등이, 히말라야의 경우에는 크레바스, 눈 사태, 고소증 등을 최대의 장애물로 치고 있다.
* 그랑드 조라스
* 마테호른
* 아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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