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들이
이 수 영
내 글 속에 내가 있다. 옛날이 있고, 생각이 있고, 잊혀지지 않는 그 날들이 있다. 나는 지금 그동안 내가 쓴 글들을 뒤적이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 글 속에 함몰되어 추억 여행을 떠나곤 한다.
어쩌면 거기가 나의 나나랜드라도 되는 양, 흠뻑 젖었다 깨어나면 지금 여기 ‘나’ 라는 백발노인 하나가 끙끙대거나 히죽거리고 있다.
나는 가끔 집 근처에 있는 나무공원으로 가는 길 한쪽 모퉁이 찻집을 찾는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마담이 반쯤 반가운 얼굴을 하고 맞는다. 혼자 카공족이라도 되는 양 수필집 한 권과, 낡은 수첩을 펼쳐놓고 커피 한 잔 뒤에 숨어서 되지도 않은 글을 쓴다고 끄적이고 있는 내 모습이 가당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자기 혼자 손톱을 만지는 등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는 그녀나 나나 같은 신세다. 나는 돈을 내고 그는 돈을 받고, 차 한잔 그리고 말 한마디의 공식적 서비스가 끝나면 각자의 세계로 들어간다.
처음엔 제법 그럴듯하게 시작되던 글이 겨우 몇 줄을 끄적이다 보면 슬그머니 샛길로 빠져든다. 원래의 생각과는 다른 글 길에서 망설이다 그만 연필을 놓고 만다. 명작을 쓰겠다고 몇 날을 끙끙대다가 모처럼 괜찮을 듯한 생각에 연필을 잡았지만 그 놈의 생각의 고리는 늘 엉뚱한 샛길로 빠져드니 이런 맹랑한 노릇이 없다. 그 샛길에는 똘이, 순이 등의 소꿉동무들과 검정 고무신이 있고 무지개 뜨는 골짜기가 있고, 쇠꼴 담던 다래끼와 숫돌에 갈아낸 날 선 기역자 낫이 걸려 있다.
다시 숨을 돌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손바닥 크기의 수첩에는 휘적휘적 날려 쓴 몇 줄의 글이 기러기 날개처럼 펄럭이고 조금 전의 유치한 생각들이 떠난 글 속에는 영혼 없는 늙은이의 어린 시절과 무료한 일상사만 남아 있다.
폼나게 다리 꼬고 앉아 차 한잔 즐기는 내 모습, 그러나 아무도 봐 주는 이 없는 공간에서 이마에 주름잡고 천장 한 번 쳐다보고 메모지 한 번 내려다보고 다 식어 서늘한 차 한 모금 더해도 닫힌 머리가 열리려면 한 번 더 방랑을 해야 할까 보다. 몇 자 더 끄적이다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이건 내 착각인지 모르지만 그 마담이 아쉬운 듯 나를 쳐다본다. 다시 앉을까?
밖은 다시 현실이다. 그새 두꺼운 구름으로 어두워진 하늘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고 드문드문 흩날리는 가랑눈이 마음을 동여맨다. 외로운 카공족의 즐거움도 함께 날아간다.
요새도 이런 곳이 있었나? 인도 블록이 제멋대로 들썩인다. 울퉁, 삐뚤…, 낙상하기 딱 좋다. 하늘 볼 여유가 없어 신경을 온통 발끝에 모아서 용을 쓰며 걷는다. 이런 길에서 넘어지면 이건 대형 사고다.
흩날리는 눈발이 내 머릿속에서 온갖 잡념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름 잰걸음으로 인도 블록 길을 벗어났다. 다시 오솔길을 걷는다. 생각이 이렇게 이기적이고 변덕이 심하다. 금세 험한 길의 두려움이 사라진다. 아둔하기는 하지만 이건 생존의 법칙이기도 하다. 나무공원 경내로 들어서면서 생각은 다시 활개를 친다.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엘슨의 공식이 생각난다. ‘행복 = 소유 / 욕망’ 곧, “소유가 불변하는 삶이라면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지수는 높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욕심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라는 말이 아닌가.
오늘 나의 조그만 욕심이 좋은 생각들을 멀리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비우고 또 비우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 아닐것인가.
며칠 전 우리 지방신문에 인근 고을에 사시는 87세 할머니가 뒤늦게 한글을 깨치고 쓴 시 한 편이 실렸다.
가는 꿈 박 o o
인지 아무거또 업따. / 묵고 시픈거또 업또
하고 시픈거도 업다. / 갈 때대가 곱게 잘 / 가느 게 꿈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주름진 얼굴의 노인의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낼 모래가 구십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철학자인 것 같다. 이 시가 내 가슴에 와 닿는 걸 보니 나도 철학자가 다 되어 가는 모양이다.
오늘 내가 쓴 몇 줄의 글은 할머니의 글에 비하면 개똥철학이다.
오늘은 나의 부끄러운 일면을 깨달을 수 있었던 즐거운 날이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 나도 곧 도사이다.
2023 . 2. .
첫댓글 이 글을 읽고 카공족이 뭔지 배웠습니다. 제 아들에게서 카페갔다 올게요.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차마시러 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 안오길래
'무슨 차를 그렇게 오래 마시지 ?' 친구를 만났나? '하며 생각했거든요. 알고 보니 차도 마시고 공부를 하러 갔나 봅니다.
카공족을 지척에 두고도 몰랐으니---ㅎㅎ.
박 할머니 시를 감상하니 철학자 맞는 것 같습니다.
이 회장님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선생님의 글, 잘 읽고 감동 받았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올린 글인 것 같은데, 그 속에는 우리 삶의 일상을 사진 이상으로 투명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정면에서 시선이 가는 부분만 보이지만 이 글에는 움직이는 활동사진 이상으로 실감을 느낄 수가 있음은 물론, 대화나 행동이 없었는데도 주인 마담의 마음까지도 읽어서 표현해 놓은 내용에 박수를 보냅니다. 또한 이 속에는 역사의 변천이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의 행복지수도, 한글을 겨우 깨친 .박 할머니의 시 한편에도 깊은 철학을 담아 놓을 수 있는 글에 대단하다는 말씀을 댓글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