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35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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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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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doQ5V0Fb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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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멸망의 유황불을 피해 안전하게 구원의 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롯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랑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자비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꽤나 의외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리 외쳐도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여겨집니다. 표현 하나 하나가 세상 섬뜩하고 무시무시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복음17장 34~36절)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은신처를 떠나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출발점입니다. 그날은 약속에 따라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하느님께서 주재하시는 법정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정은 어떤 사람에게는 포상과 기쁨의 법정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징벌과 두려움의 법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야속하게도 그 법정이 언제 벌어질지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인간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리게 됩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지혜롭고 생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선인들입니다. 구세주의 재림을, 다시 말해서 인류의 마지막 날을 미리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지상에서 열심히 봉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 때 부류의 사람들,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들은 그날이 결코 오지 않으려니 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흥청망청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날이 번갯불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칠 것입니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한방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복음 17장 31절)
옥상에서 내려오지 마라는 말씀은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에로 내려오지 말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라 나선 신앙 여정 안에서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지 말고, 롯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멸망의 유황불을 피해 안전하게 구원의 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롯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주님만 신뢰하고 그분만 바라보며, 서둘러 그분께로 달려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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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해할 수 없는 주인의 태도>
채무 이행자들에게 주인 몰래 자기 마음대로 막대한 빚을 탕감해준 불의한 집사의 스토리는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할 복음구절입니다. 자칫 잘못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불의한 집사의 행동 하나 하나를 따라가 보니 참으로 몹쓸 사람이었습니다. 집사란 직책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꽤나 비중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아무 집이나 집사를 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지역 유지나 명망가 집사를 고용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대신해서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주인 대신 돈을 빌려주기도 했고 거기에 따른 이자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마구 낭비한다는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죄질이 워낙 좋지 않아 더 이상 그 자리에 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주인은 집사에게 정식으로 해고를 통고합니다.
기한을 정해주며 그때 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집사에게 인수인계할 것을 명했습니다. 해고의 사유는 공금 유용 및 횡령죄입니다.
해고 된 후 앞날이 캄캄해질 것을 예상한 집사는 더 좋지 않은 악수(惡手)를 두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조용히 사라져도 부족할 판에 더 큰 비리를 저지릅니다.
주인 허락도 없이 채무자들을 한명 한 명 불러들여 그들이 지고 있는 막대한 빚을 탕감해줍니다. 탕감의 정도도 어마어마합니다. 기름 백 항아리를 오십 항아리로 고칩니다. 밀 백 섬에서 팔십 섬으로 경감시킵니다.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알게 된 주인이 그 불의한 집사에게 큰 형벌을 내려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를 크게 칭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불의한 집사의 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일생일대의 큰 위기 앞에서의 불의한 집사가 취한 신속하고 영리한 대처입니다.
우리는 불의한 집사에 대한 주인의 칭찬을 교회적, 종말론적 시각으로 해석해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을 통한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의 목전에 도래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눈먼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한 강한 경고 말씀이 불의한 집사에 대한 칭찬인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리는 세속의 자녀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죽기 살기로 머리 싸매 고민하고 할 수 있는 백방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의 전형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유가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목전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언젠가 맞이하게 될 작은 종말인 우리 각자의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머리를 싸매 고민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금쪽같은 시간들, 어찌 보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들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인 영원한 생명의 획득과 구원을 위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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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qMruuhv2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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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재물로만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역시 ‘회개’에 관한 내용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이것을 알고 집사를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집사는 주인의 재산으로 자신이 쫓겨났을 때 맞아들일 친구들을 사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집사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사용한 재물은 의롭지 못한 재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재물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의한 재물로만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하와도 자신이 가진 선악과로 아담을 사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내어줌은 죄를 퍼뜨리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를 ‘나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나의 것을 내어줄 때가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내어줄 때 만들어집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면 언제나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친구가 아닌 거래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나를 받아 줄 사람은 거래처 사람들이 아닌 부정한 재물로 사귄 친구들입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을 공동소유하였습니다. 재물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것을 주장할 수 없었고 그들은 서로 친구요 가족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의롭지 못한 재산으로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이렇게 행복한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고 수많은 이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하여 그 수가 날로 증가하였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약삭빠른 청지기를 수없이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입니다.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2009)은 한 청년이 돈의 노예였다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사람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 실화입니다. 1969년 뉴욕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부모님이 파산 직전에 놓여 전 재산인 모텔을 넘겨야 하는 처지가 된 엘리엇은 고민에 사로잡힙니다. 누나는 돈만 밝히고 괴팍한 성격의 어머니를 떠나 독립하였고 동생 엘리엇에게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꿈을 좇으라고 하지만 엘리엇은 부모님의 희망이 자신뿐이라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을 상인 협회 회장을 맡아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던 중 이웃 동네에서 열리기로 한 ‘록 페스티벌’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것을 자신의 마을에 유치해 부모님의 힘겨운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러 나선 엘리엇은 우여곡절 끝에 페스티벌을 유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수천 평의 농장을 축제 장소로 제공하고, 부모님의 낡아빠진 모텔은 페스티벌의 공식 숙소가 되며 난생처음으로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게 됩니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 주차비까지 다 챙겨가며 돈을 긁어모읍니다.
점점 많이 몰려드는 히피족들과 친분이 생기던 차에 엘리엇은 그들이 준 대마초를 피우고 광고 방송에서 헛소리를 해버립니다. 페스티벌도 공짜고 음악도 공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고요하기만 하던 마을에 무려 50만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됩니다.
히피족은 본래 베트남전 패전을 본 2030 세대들이 기존 어른들의 경쟁과 성공 문화에 저항하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자고 생겨난 하나의 불같은 문화였습니다. 엘리엇은 그들의 공동체를 보며 무언가 각성하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가 호텔을 넘기지도 않아도 되는 만큼의 돈이 있으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을 겪고 있었고 50만 명이나 되는 자유로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비로소 이 길이 이상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돈에 얽매이는 삶이 아닌 히피들처럼 자신의 꿈을 찾고 친구를 사귀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엇은 자신이 만난 친구들, 같은 자유를 갈망하는 그 수많은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나누고 자유롭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공동체였습니다. 만약 한두 명이 그러면 큰 변화를 겪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대조되는 50만 명의 공동체는 이제 돈이 그의 것이 아닌 친구를 사귀는 도구로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해 준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아버지의 우상을 낙타 위에서 깔고 앉았습니다. 라반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가 섬기는 우상은 돈입니다. 야곱과 결혼한 라헬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돈을 엉덩이로 깔고 앉았을 때 교회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본래 주님 것이기에 의롭지 못하게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른 이들도 자기 것을 주장하며 노예 생활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가 정당하게 일하여 번 돈은 자기 것이라고 가르치면 더는 세상에서 매력을 발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돈에 대해 자유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는 나머지 십의 구도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의롭지 못한 재물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이 어차피 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정신이 죽으면 내가 가진 것이 나의 것이라 믿게 되고 그러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 믿으면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바칠 수 있었을 때 그들이 나누는 재물은 진정 그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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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노예이기는 하였지만, 주인의 큰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일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청지기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 역시 교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지주들에게 지불되는 빚이란 흔히 임대료를 말하는데 그것은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는 소출로 지불되었다.
이 때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약은 청지기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을 하며 그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즉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청지기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들이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들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집사가 횡령을 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은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 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 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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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약은 집사의 비유>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 16,1-2)”
여기서 “집사 일을 청산하게.” 라는 말은 해고를 통보하는 말이지만, 장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즉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준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는 바로 지금’입니다.)
이 이야기를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2-46)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집사(관리자)입니다. 목숨도, 인생도, 이 세상도, 모두 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하느님께 자기 인생의 장부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3-8)
1) 이 이야기를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집사가 자기 먹고살 길을 찾아서 잔꾀를 부린 이야기’로 생각한다면, 그의 ‘신속한 대처’를 본받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실 내용을 보면 많이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해서 해고된 집사가 반성을 하기는커녕 자기 먹고살 길을 찾으려고 또다시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일을 했는데 그런 집사를 주인이 칭찬했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빚을 줄여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그 집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할까? 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떻든 ‘신속한 대처’를 본받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면,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말씀은, “세속 사람들은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서 전력을 다 쏟아 붓는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는 너희는 왜 이렇게 굼뜨냐?”라고 신앙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됩니다. (집사가 잔꾀를 부리는 것을 본받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리하다.’ 라는 말은 머리가 좋다는 뜻이 아니라, 최선을 다 한다는 뜻입니다.
2) 이 이야기를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집사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에 동족에게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율법이 있습니다.(신명 23,20) 집사가 사람들의 빚을 줄여 준 일을, 이자를 모두 없애 준 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처음에 이자를 받으려고 한 사람이 주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것을 생각하면, 집사가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이자를 받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여간에 빚을 얻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빚이 줄어들어서 기뻐했을 것이고, 주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을 것이고, 집사는 사람들의 환심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것은 잘못한 일을 신속하게 바로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도 예수님 말씀의 뜻은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신속하게, 또 최선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3) 집사가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고 해도 그것을 ‘회개’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사는 자기가 잘못한 일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빚을 줄여 준 일도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먹고살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그의 모습과 사람들의 빚을 줄여 준 의도와 목적을 생각하면, 그가 한 일은 회개가 아니라 그냥 머리를 잘 쓴 일인데, 그래도 회개의 출발점은 될 수 있습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1코린 9,24-26) 이 말은,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운동선수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말은, 한 사람만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끝까지 완주해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전부 다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는다는 말과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신앙생활은 대충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되는 생활이라는 것, 철저하게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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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수도자들은 서원을 하면서 3가지 서약을 합니다. ‘청빈, 정결, 순명’입니다. 본당에서 수도자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면 작은 가방이 전부였습니다. 청빈은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표징입니다. 정결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순명은 자신의 뜻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청빈, 정결, 순명은 수도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천상의 삶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성직자들도 서품을 받기 전에 3가지 서약을 합니다. ‘신앙고백, 독신, 순명’입니다. 신앙고백은 말씀을 선포할 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독신은 오직 하느님의 일만을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독신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순명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약속입니다.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순명으로 조선으로 왔고,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가 3가지 서원을 하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성직자는 청빈 서약을 하지 않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듯이, 사제는 교회의 재산과 조직을 관리하게 됩니다. 지금은 자리를 옮기면 가방 2개면 만족하지만 예전에는 자리를 옮길 때면 작은 트럭이 필요했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많았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았지만 사제가 소유에 집착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는 소유보다는 비움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재산을 투명하게 보존하고, 관리하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성당의 땅에 집을 짓고 사는 분들이 10명 정도 되었습니다. 매월 임대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유를 인정하게 되고, 나중에는 성당의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대계약서를 작성했고, 모두에게 서명을 받아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임대계약서를 토대로 사람들이 이사를 가면 땅을 정리 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을 하면서 3가지를 신경 쓰게 됩니다. 하나는 매주 신문을 제작하는 것입니다. 한국 본사에서 오는 기사와 미주 지역의 기사를 편집해서 신문을 제작합니다. 필진을 섭외하고, 미주 지역의 행사들을 취재합니다. 보람 있고, 즐거운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직원들과의 관계입니다. 편집, 취재, 회계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직원과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매주 수요일은 편집회의 합니다. 이것도 제게는 큰 어려움이 없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신문사의 유지와 운영입니다. 지난 2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거의 갈 수 없었습니다. 신문사의 재정은 구독료와 후원금으로 이루어집니다. 홍보를 가야 독자를 늘릴 수 있고, 사람을 만나야 후원을 받을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으로 운영되는 본당과는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신문사는 복음 전하려는 사명과 운영하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본인을 위해서는 건강, 기도, 학식을 쌓아야 하지만, 재정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어렵게 낸 헌금과 교무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제가 해야 할 직무입니다. 돈은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잘 관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교회의 재정은 세상의 일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의 재정은 공정하고, 올바르게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선교를 하는 곳에 쓰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교육과 피정에 많이 쓰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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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약삭빠른 청지기>
오늘 복음은 꾀많고 교활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노예이긴 했지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횡령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이것을 알고 그 사람을 파면 시키려고 하자 그 관리인은 자기가 그 직책에서 쫓겨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일자리가 떨어지게 됐을 때 그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하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러한 능력있는 직책을 맞고 있는 동안 최소한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한 그의 행동을 보고 오히려 주인은 그의 약삭빠른 행동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세속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할짓, 못할짓을 다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자신의 영신적인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얼마전에 신문에 어떤 중공사람의 생활을 소개한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에서도 역시 이러한 생활의 유형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공사람은 극장에서 입장권을 판매하는 관리인이었는데, 그는 그 입장권을 잘 이용하여 많은 친구를 갖게되고 아쉬울 것 없이 생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빵집에 가서 빵을 먹을 수 있었고 고급식당에 가서 값비싼 음식도 무료로 먹을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때 역시 중공이라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유형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능력을 갖고 있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저마다 서로를 필요로하고 협력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맡고 있는 직분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남을 도와줄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직책과 재산은 가지고 많은 친구를 만든다는것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현명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물질과 재산을 받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물질과 재산을 잘 관리하고 사용함으로써 영신적인 이익을 구해야 합니다.
남에게 베푸는 자선행위, 남을 돕는 행위를 통해 많은 친구를 만들수 있고 또 그것은 어느날엔가 저 세상에서 댓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각자 갖고 있는 직책과 재산을 유용하게 이용함으로써 영신적 이익을 얻도록 힘씁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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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별지기 신부의 복음 묵상#
유튜브 듣기 : https://youtu.be/6VgoyjEhBzg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이지만 세상의 틈바구니 한 가운데 사는 이들은 하느님과 세상이 내미는 헛갈리는 기준 속에 힘겹기도 합니다. 그러나 솔직한 인상은 고민보다는 성당이라는 성과 그 밖을 구분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당연히 오래 머무는 곳에서의 삶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을 들려 주십니다. 곧 ‘약은 청지기의 비유’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청천벽력과 같은 해고의 이야기 앞에 고심하는 청지기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참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방법을 떠올립니다.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에게 이제 ‘집사’는 떠나고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그들과 공모한 내용을 빌미로 살아갈 생각을 합니다. 그게 그의 노력의 전부였습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채무자들에게 건넨 그의 이야기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주인이 그를 칭찬하였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그는 어떻게 집사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져다 줍니다. 그는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 열쇠는 채무자들, 곧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런 집사를 두고 있는 것이 그들에겐 이익이었으니 그들은 반대로 집사의 발목을 잡아 둔 셈입니다. 그렇게 공생이 이루어지고 손해를 본 줄도 모르는 주인은 그 집사에 대한 소문이 다시 돌아선 것에서 결심을 바꾼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께서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라는 같은 말씀을 하시고 구해주시려는데 깨닫지도 따르지도 못하는 우리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심판 대신 용서를 주신 이유, 그 속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려주신 주님의 사랑에 이제 조금은 느려도 제대로 된 우리의 회개가 필요한 듯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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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성서를 읽다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고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인지 의아스러운 대목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그런 대목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속의 청지기는 아주 교활한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꽤 많은 횡령을 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쫓아내려고 하자 다시 잔머리를 굴리며 술수를 짜내고 있습니다.
청지기는 빚진 사람을 불러서 그 액수를 고쳐주며 장부를 조작하기 시작하지요. 빚진 사람들은 좋아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렇게 청지기나 빚진 사람이나 교활하게 일을 처리하여 오히려 이 사실을 모르는 주인에게 일을 잘 처리했다는 칭찬을 받는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도대체 오늘 복음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비윤리적인 일도 얕게 잘 처리하면 괜찮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지기가 윤리적인 인물인지 아닌지, 혹은 살 궁리를 어떻게 해나가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 청지기가 살기 위해서 세속적으로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청지기처럼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를 쓰면서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또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얕다고 하신 말씀에는 영적인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적인 이득이나 승진, 또 자녀 교육이나 재산 축적과 같은 일에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또 밤과 낮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무슨 아파트 청약이 있다고 하면 총알같이 달려가서 줄을 서고, 무슨 유치원이 좋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텐트까지도 치고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요.
오늘 복음은 그렇게 수고하고 애를 쓰는 만큼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는 신앙에 있어서는 별 노력 없이 있어도 저절로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시간이 흐르면, 또 주일미사에 빠지지만 않으면 내 신앙이 저절로 성숙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소한 것에 걸려 넘어져 상처를 입고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옹졸한 삶을 살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노력한 그만큼 우리는 성장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서 쓰기>에 이어 <100권 신심서적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참여하여 성서를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일년이 지나서 하늘과 땅 차이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신심 서적 읽기 역시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서를 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성서를 쓰기 전에는 단지 선반 위에 올려놓은 책 한 권에 지나지 않았던 성서가 이제는 살아 있는 책이 되어 깊이 있게 내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성서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성서를 쓰느라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심 서적을 읽으면서도 놀라운 변화는 많았습니다. 한 주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어찌보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많은 분들의 높은 참여로 놀라운 영적 성숙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신앙에 대해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이 꽉 채워진 느낌이라는 분, 이제야 신앙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는 분, 책을 통해 얻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선정된 도서들을 이웃에게 선물로 전하시는 등 많은 분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모습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있는가 하면 나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방 어디까지 기를 쓰고 내려가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는 이런 일은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 관계되는 일은 놓치면 큰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 일은 나의 영적 생명에 있어 너무나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도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을 하듯이 하느님을 알고 따르기 위해서도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면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아마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질 것입니다. 똑같이 세상을 살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도 품위가 다르고 지혜와 삶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도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듯이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서도 부단히 노력을 하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밤 낮 없이 연구하고 애를 쓰며 살아가듯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이런 노력들 역시 우리의 삶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분명 하느님은 노력하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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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열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고 칭찬하신다. 이것은 청지기의 속임수나 뻔뻔스러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장래를 대비하여 현재의 위치를 이용한 대담한 수완에 대한 칭찬이다. 예수님은 청지기의 부정직한 행동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장래를 대비한 기지를 칭찬하고 계신 것이다.
청지기는 세속의 자녀이다. 세속의 자녀는 오직 현세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하느님의 뜻이나 약속, 종말에 대한 준비는 안중에도 없다.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것만을 얻기 위해 모험도 하고 단호한 처신도 한다. 그에 비해 빛의 자녀들은 현세의 삶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다가올 세상, 이 현세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약삭빠르지만 모든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빛의 자녀들보다 약삭빠르지 못하다.
세속의 자녀들의 시야는 이 세상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다가올 세상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보다 더 어리석다.
하느님의 일에도 세속에서 거래할 때처럼 모든 노력과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내 영신적인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당히, 대충 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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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 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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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당신이 맡기신 이 몸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저를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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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16,8)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세상 일에 매우 밝은 우리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부잣집의 어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다가 주인에게 발각되어 쫓겨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자기 마음대로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주인의 처사가 세상 가치에 눈이 밝은 우리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로 다가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자신도 살고 너도 살리는 일에 영리하게 대처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가 이런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너를 바라보지 말고, 먼저 나를 바라보라는 메시지!
내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얼른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
그 영리한 대처가 바로 회개라는 메시지!
더 나아가 너를 살리는 일에도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른 민족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긴다고 말합니다.(로마15,14-21 참조)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명예로 여깁시다!
하느님을 위한 일은, 하느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일에 영리하게 대처하는 것인데, 이 영리한 대처가 바로 '나와 너의 구원인 회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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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의 자녀들과 빛의 자녀들>
루카 16,1-8 (약은 집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세상의 자녀들과 빛의 자녀들>
세상의 자녀들은
살리는 것보다
사는 것이
먼저이고
빛의 자녀들은
사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살기 위해서
나누고
빛의 자녀들은
살리기 위해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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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배우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습니다. 이 시상식에서 그는 누가 자신의 영웅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열다섯 살 때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이 ‘너의 영웅이 누구니?’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10년 뒤의 나”라고 했죠. 그리고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10년 전에 질문했던 그녀가 다시 물었죠. “이제 넌 네 영웅이니?”
저는 대답했죠. “아직 멀었어! 아니, 아니야!”
그녀가 왜냐고 묻더군요. 저는 “내 영웅은 서른다섯 살의 나야.”라고 말했죠. 그러니까 제 인생의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저의 영웅은 항상 10년 후의 저입니다. 저는 결코 제 영웅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계속 10년 뒤의 저를 쫓아갈 테니까요.
현재 생각하고 있는 미래의 나를 쫓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점점 성장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훌륭한 건축가는 설계를 아주 꼼꼼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웅인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미래의 나를 지금 잘 설계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되고, 지금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 주저앉아 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많은 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금 이상한 내용입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관리인의 부정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해고를 통보하지요. 이때 집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주인의 해고를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그 뒤의 일이 걱정입니다. 그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주인의 재산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사가 행한 재산의 낭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의 무능력으로 일을 잘못 처리했을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그러면서도 앞날을 위해 잔꾀를 씁니다. 빚문서를 고칩니다. 주인으로서는 분명히 간교하고 부정한 방법입니다.
그런데도 책망하지 않고 칭찬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윤리적인 문제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약삭빠른 꾀를 쓰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앞날을 위해 빠르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의 힘든 상황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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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아픔이 더 클까요?>
한 어머니가 울고 있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딸 때문입니다. 헌신적으로 간호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너무 슬퍼 울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자매님도 울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새로 구입한 차가 배달되었는데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왜 이렇게 운이 없냐면서 울고 있습니다.
누구의 아픔이 더 클까요? 당연히 첫 번째 경우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아파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픔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 경우 역시, 차 문제만으로 슬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사이에 계속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겹친 상태에서 차까지 속 썩이니 더 아팠던 것입니다.
다른 이의 아픔과 슬픔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인정해 주어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늘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정해 주고 또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의 이웃에게 말하기보다 듣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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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리한 선택>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 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한편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의 혜택이 돌아갔으니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영리함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는 세상의 것에만 영리하면 됩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던 부모의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는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하늘과는 멀어집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적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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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삶>
-선하고 지혜롭고 유능한 삶-
어제는 참 유쾌하고 홀가분한 하루를 지냈습니다. 11월15일 마감인 ‘수도원 계간지 <분도> 원고’ 청탁을, 거의 보름 동안 묵상하다 어제 오전 4시간에 걸려 완료했기 때문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남은 10일 정도는 게시판에 붙여놓고 틈틈이 수정 보완할 예정입니다.
겨울호 특집 주제는 ‘희망의 의미와 실천’이었고, 원고청탁서 마지막 애교스런 글귀에 -‘원고료는 죄송하지만 재능 기부로 받고 있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미소를 지었습니다. 참으로 생생한 희망을 지닐 때 유비무환, 희망이 동인動因이 되어 역동적 충만한 현재를 착하고 지혜롭고 유능하게 살 수 있겠습니다.
희망하면 언젠가 인용한 ‘바다’라는 옛 동요가 생각납니다. 지혜로운 하루의, 평생 삶을 요약한 듯한 희망을 북돋우며 마음 행복하게 하는 동요입니다. 요즘은 거의 한달 내내 아침 산책때 마다 부르는 가사도 곡도 흥겨운 노래입니다. 2절까지 인용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저녁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넓고넓은 바다를 노저어 와요.”
‘노저어 가요’에서 ‘노저어 와요’라는 희망찬 출항出港에서 행복한 귀항歸港을 노래한 내용입니다. 성서는 ‘착하라’ 하지 않고 ‘지혜로워라’ 말합니다. 착하고 지혜롭고 유능하면 금상첨화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심성은 착하나 어리석고 무능하여 무서워하기는커녕 무시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참 딱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착하고 무능하여 혼란을 자초하기 보다는 좀 악해도 유능하여 질서가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어떤 부자의 재산에 큰 손실을 끼쳐 책임 추궁 당할 것을 예상한 약은 집사의 미래를 위한 유비무환의 대책이 참 기민하고 신속하고 지혜롭습니다. 약은 집사의 독백입니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생각이 들자 즉시 결행決行하여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과감히 탕감해 줍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주인의 반응이 뜻밖이라 놀랍습니다. 책임을 추궁하여 벌을 준 것이 아니라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으니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결론같은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이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겠는지요? 주인은 분명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불의한 집사가 손실을 끼쳤어도 부자가 상징하는 바, 하느님께는 거의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불의하기는 해도 미래 대책을 세운 약은 집사의 처신을 이해하며 내심 묵인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곤 말을 못해도 알아서 스스로 했으니 속으로는 고마운 생각도 들며 못이기는 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 추측입니다만 주인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은 그러하고도 남으리라 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바는 약은 집사의 부당하고 불의한 처신을 인정하거나 칭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빛의 자녀들이 이렇게 세상의 자녀들처럼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상징되는 바 주님이 칭찬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신속하고 기민한 대책입니다.
착하기만 하고 무능하여 불행한 미래라면 주인도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입니다만 이렇게 좀 나쁘고 부패해도 유능하고 지혜로워 미래 대책을 세웠다면 자비하신 주인도 내심 묵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 결혼을 앞둔 젊은이의 카톡 글귀가 생각납니다. 젊은이의 좌우명인 듯 했습니다.
“대장부는 소인배와 논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흡사 주인은 대장부를, 약은 집사는 소인배를 상징한다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빛의 자녀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어떻게 미래 대책을 세워야 할까요? 유비무환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변과 평화롭게 공존공생하면서 진리와 진실, 사랑과 연민, 공정과 정의에 바탕하여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미래입니다. 착하기만 하고 책임감이 결여한 무능하고 태만한 삶이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유비무환의 삶을 살면 미래는 저절로 잘 될 것이니 전혀 걱정할 바 없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 소관이니,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고 지혜롭고 유능한 처신입니다.
바로 오늘이 어제의 과거를 치유하고 내일의 미래를 준비합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사도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끝까지 시종여일, 복음 선포의 책임을 완수한 선하고 유능하고 지혜로운 바오로 사도가 자랑스럽습니다. 바로 약은 집사같이 불의하게 살 것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집사가 되어 정의롭고 지혜롭고 민활敏活하게 책임을 다하며 유비무환의 유능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그 좋은 처방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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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지향을 다루시는 하느님의 콜라보를 보여 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루카 16,1)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이 비유는 사실 우리를 좀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결과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등장 인물인 집사의 불의하고 얄팍한 꼼수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주인에게 칭찬까지 듣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속의 아버지나 주인은 대개 하느님을 상징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결과만 좋으면 하느님께도 다 좋은 것인가 반문하게 됩니다.
"집사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루카 16,1)
주인과 집사의 관계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관상해 봅니다. 사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그분의 재산(모든 피조물과 재화, 탈렌트와 권력, 명예와 관계 등)을 관리하는 집사일 뿐이지요. 이 재산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횡령, 남용은 주인 입장에서는 낭비이고, 주인과 주인의 뜻을 위해 쓰는 것이 선용이지요. 우리는 그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릅니다만, 주인의 태도로 보아 그분의 뜻대로 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당장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집사는 꼼수를 씁니다. 주인의 재산으로 사람들의 환심이라도 사서 앞날을 보전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이들, 즉 가난한 이들을 불러 그들의 빚 수량을 제멋대로 줄여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그럴듯해도 동기와 과정이 모두 선해야 진정한 선이라고요. 그러니 그릇된 동기에서 시작된 집사의 선행(처럼 보이는 행위)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그런데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선해야 한다는 논리에 붙잡혀 있다면 이 구절에서 좌절 비슷한 심정이 됩니다. 주인은 바보인가? 자기에게 손해를 입한 사람을 칭찬하다니? 게다가 오히려 그의 처신이 영리하다고?
다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돌아가 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의 지향이 천사처럼 그저 마냥 순수하기만 했던가 되짚어 보면 답이 보일 겁니다.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지만, 신앙의 태동, 봉사의 시작, 성소의 출발, 직분의 수락은 때때로 아주 허술하고 인간적인 지점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하느님은 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맞춤형 그물을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약하고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를 당신 사업에 합류시키시면서 지향을 따져 묻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릇된 지향이라도 당신의 섭리 안을 걷다 보면 정화되고 성화될 수 있고, 그렇게 이끄실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집사의 꼼수를 모르지 않으면서 인내하고 견디며 기다려 주는 주인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집사는 자기가 살려고 거짓을 꾸몄지만 결과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가 평소 정의와 자선에 대한 지향이 있어서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집사와 결탁해 짐을 덜어낸 채무자들의 부정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느라 주인의 큰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은 누가 그릇된 지향에서 출발했더라고 그 굽은 자를 가지고 직선을 그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집사의 죄조차도 선익으로 돌려놓는 분이시지요.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맞습니다. 세상 물정에 영악한 이들은 서로 결탁해 정보를 독점하고 사회적 경제적 이권을 끼리끼리 주고받습니다. 거짓도 죄악도 불사하면서요. 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그 열매를 쓰시는 분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하시는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끝내 선으로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릇된 지향조차도 언젠가 좋은 열매로 바꾸시는 분이시니까요.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인의 칭찬"은 구원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의한 집사처럼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악도 선으로 쓰시는 하느님께 승복해 지향과 방향을 바꾸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주인의 그림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받은 이방인 선교의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15,17)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뽑혀 그분과 삶을 나누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분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인 중 누구도, 바오로 자신조자도 자기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올 줄 꿈에도 몰랐겠지요. 너무 다른 출발점이었지만,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 유다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바오로를 쓰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인이신 분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집사로 불러 당신의 사람과 재산과 세상을 맡기십니다. 이기심과 탐욕, 자기 영광에 한눈 팔면 주인의 재산은 쉬이 낭비되고 말지요. 부족하나마 주인의 뜻을 헤아려 허락하신 영적 물적 재산을 지혜롭고 선하게 사용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 잘 써 주시도록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놓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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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s9xATSwF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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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 8)
사람의 삶이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관계의 삶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관계가
다양한 관계로
확대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만난다.
때론 자신의
약점과 아픈
상처까지도
드러내고
나누는 것이
관계맺음이 주는
관계의 선물이다.
복음의
영리한 집사는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있다.
움츠러들거나
도망치지 않고
이웃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잘 적응한다.
갈등을 적극적인
관계맺음으로
풀어나간다.
이렇듯
자신의 문제는
감추어 둘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
나누고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자기 문제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으신다.
건강한 관계가
건강한 신앙이다.
신앙은 기쁨의
충족이다.
사람과의
관계맺음이
이렇듯
중요하듯
하느님과의
관계맺음은
두 말 할
나위조차 없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관계맺음은
계속되어야 한다.
현실과
적응 사이에
관계가 있고
신앙이 있다.
관계가
신앙이며
삶의 진정한
의미이다.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를
적극적으로
관계함으로써
이루어내는
관계의 여정을
오늘도 걸어간다.
++++++++++++++++++
(2)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 8)
모든 건 바뀌고
변화합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소통이
중요합니다.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소통과
관계맺음은
참으로 어려운
숙제입니다.
생각과 마음만
바꾸면 언제나
소통의 길은 보입니다.
약은 집사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한 현실을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시도를
모색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우리의 삶을
반성해 봅니다.
모든 길은
주님께로
이어져 있습니다.
편견에 갇혀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언제나 기회를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그 어떤 처지에서도
소통하고 관계맺는
새로운 변화의 길임을
잊지마십시오.
아버지 안에
빛의 자녀도
세상의 자녀도
길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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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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