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자태실에 함께 가자는 며느리의 초대를 받았다. 그동안 이 일 저 일로 동분서주하다가 쉴 겸해서 대구에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제 몸 건강이나 잘 돌보지 않고서 무슨 어버이날을 찾고 있나. 어린이날 어버이날은 내년에도 다시 오지만 건강은 한 번 잃게 되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게 아닌가. 나는 걱정 반 기쁨 반으로 행장을 꾸려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진달래 개나리가 차례로 피어나는 이른 봄부터 한 번 다녀가시라는 며느리의 전화, 메일, 문자를 받고서야 겨우 대구행을 단행한 것이다. 어린이날을 비롯하여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부부의 날 등 여러 가지 이름의 행사가 펼쳐지는 5월도 어느덧 중순이었다.
대구에 가는 것을 얼른 실행에 옮기지 못한 내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며느리는 암수술을 받고 다니던 직장도 휴직한 채 2년 째 투병 중이었으므로 시어미로서 봄꽃이 활짝 피었다고, 어버이날이라고 무작정 대구로 내려가기는 내심 조심스러웠다.
동대구역에 내리니 며느리가 두 손자를 데리고 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몸이 말라 가냘프게 보이는 며느리와는 다르게 키와 몸집이 훌쩍 커버린 손자 두 명은 갑자기 출현한 할머니를 제 엄마의 치마폭에 숨어 숨바꼭질 하듯 훔쳐본다. “얘들아 서울 할머니께 인사드려라!” 며느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손자 녀석들은 슬금슬금 앞으로 나와 소위 배꼽인사라는 것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씨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자태실을 향하여 가는 길은 대구를 벗어나 칠곡 방향으로 1시간 정도 달려가야 했다. 며느리가 굳이 세종대왕자태실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어쩌면 왕족의 좋은 기운이 이곳에 응축되어 있어 암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데 유효하지 않을까. 아직은 초등학교 수준이지만 손자 녀석들에게도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상상을 펴보기도 하면서 묵묵히 아들네 가족을 따라갔다. 차에서 내리니 산 아래 평지에 천막을 쳐놓고 연꽃을 그리거나 만들고 있는 체험교실을 볼 수 있었고, 자태실과는 반대 방향으로 선석사로 가는 표지판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자태실 가는 길은 양 옆으로 소나무 숲이 멀리 산까지 연결되어 있었으며, 돌계단을 하나하나 세며 손자들 손을 잡고 올라가니 산 정상에 경북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된 세종대왕자태실이 나타났다. 태실은 생명존중 사상, 태어난 아기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는 곳이다.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그 속에 태항과 태주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誌石)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여 어느 왕자의 태실이라는 표식을 세웠다. 그러므로 자태실로 오르는 소나무 길은 인간생명과 자연환경이 함께 어우러진 생명의 길 역사의 길이라 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의 18왕자와 세손 단종을 모신 19기 중에 어떤 태실은 움푹 파여 있었다. 그것은 단종과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왕자들의 태실로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해설사가 말했다. 왕위찬탈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뒤안길을 바라보듯 씁쓸한 감회를 누를 길 없었다. 태실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물 산 바람 구름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않음이 없는데 이곳에 관광차 온 많은 사람들은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조금은 숙연한 표정이다.
크고 작은 돌무더기를 쌓아 올린 소원 탑을 지나 올 때와 마찬가지로 손자들 손을 잡고 돌계단을 내려왔다. 아들과 손자 2명은 연꽃 그리기에 열중하고 며느리와 나는 선석사로 향한다. 풀숲을 헤치며 천천히 올라가다가 아카시 꽃의 진한 향기에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근래에는 만나보기 힘든 옛 그대로의 아카시 꽃 향기였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온 몸에 꽃향기가 배어들기를 기대했다.
선석사는 태실 수호 도량으로 신라 말 의상대사가 선석산(禪石山) 서쪽에 창건, 신광사라 했다. 고려 말에 나옹 스님이 신광사를 옮기려 했으나 땅속의 큰 바위 때문에 절을 옮길 수 없자 나옹 스님이 선정에 든 지 사흘 후에 바위가 저절로 사라져 선석사로 개명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일반 아기들의 태도 봉안하는 태장실이 있다고 하는데 며느리는 그런 줄 알았으면 두 손자의 태도 선석사에 봉안하여 기도드려 줄 것을 하면서 몹시 아쉬워했다.
법당에 들어가 향을 피워 올리고 부처님께 며느리의 쾌유를 빌었다. 가슴이 뿌듯하면서 안도감이 감돌았다. 비록 선석사에 손자들의 태를 안치하지 못했을지라도 세종대왕자태실과 선석사 방문으로 며느리의 초대는 성공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빛 고을 성주(星州)라는 지명도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밤이면 선석산에 영롱하고 신비스런 아기별들의 잔치가 은밀하게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