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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의 행복심리학]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33>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도파민이 작용하는 욕망시스템, 기대하는 것에 행복감
영원한 행복 누리는 행복기계보다 위험 감수하며 행복 느껴
1954년, 심리학자 제임스 올즈와 피터 밀너는 현대 뇌과학의 출현을 알리는 전설적인 실험을 선보였다. 그들은 쥐의 간뇌에 있는 특정 부위에 전기자극기를 삽입하고 스위치를 연결했다. 얼마 후 쥐들은 먹고 마시는 것, 심지어 교미조차도 잊은 채 미친 듯이 스위치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쾌락을 얻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한 것이다. 훗날 전기자극이 가해진 뇌 부위는 ‘쾌락중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와 직결되어 있다.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뇌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의해 마음이 만들어진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생물학적 구조와 관련이 없으며 외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견해다. 현대과학은 첫 번째 견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본다. 사과의 빨간 색은 사과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 사람의 머릿속에서 생겨나는 경험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은 뇌가 합성해낸 감정적 경험의 일부다.
뇌를 적시는 행복호르몬
감정은 뇌의 변연계(limbic system)에 있는 여러 영역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다. 감각정보들은 뇌의 감정공장에서 조미료로 간을 맞춘 후 두려움, 즐거움, 분노 같은 감정들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조미료 역할을 하는 것이 호르몬이다. 뇌는 수십 가지 호르몬으로 우리의 감정을 조절한다.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호르몬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엔도르핀, 옥시토신, 세로토닌, 도파민 등을 들 수 있다.
엔도르핀은 뇌가 만들어내는 천연진통제로, 화학적 구조가 아편과 비슷하다. 우리 몸이 위기에 처하거나 체력이 고갈되면 뇌는 천연진통제를 분비한다. 마라토너들이 고통의 막바지에 황홀경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옥시토신은 ‘사랑의 호르몬’ 또는 ‘신뢰 호르몬’이라 불린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친밀감이나 유대감은 이 호르몬이 만들어낸 것이다.
또 세로토닌은 우리의 기분, 음식, 수면, 통증 등 여러 요소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뇌의 핵심적인 기능들을 조절하고 균형을 맞춘다.
주목해야 할 것은 도파민이다. 도파민은 22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분자로 소위 ‘욕망 호르몬’으로 불린다. 뇌가 도파민에 젖게 되면 성취에 대한 갈망, 권력에의 도취, 성에 대한 탐닉, 약물 및 도박 중독에 이를 수 있다. 도파민이 작용하는 경로를 보상체계(reward system)라 부른다. 우리를 쾌락으로 물들이는 것은 보상 자체가 아니라 보상에 대한 기대다. 그래서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하지만 막상 여행을 해보면 별로인 경우가 많다. 뇌의 보상체계는 기대를 먹고 자란다. 똑같은 보상은 효과가 없으며, 더 큰 기대를 주는 보상만이 욕망을 자극한다. 반복되는 보상의 지루함은 더 강렬한 욕망을 생성하고, 그 결과물이 바로 중독이다. 도파민은 욕망의 화학적 개폐기인 셈이다.
통증이나 쾌감을 느끼는 것은 뇌다. 뇌는 위기에 처했을 때 통각마저 호르몬으로 마취시킨다. 그래서 적과 교전 중인 병사는 다리가 부러진 줄도 모른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방아쇠를 당긴다. 유전자는 새로운 모험을 할 때 뇌를 흥분시키는 방식으로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도록 만들었다. 모험은 보상체계를 작동시켜 도파민을 생성하고, 도파민은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든다. 모든 향락은 도취다. 우리를 도취시키는 호르몬은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비자율신경계의 영향을 받는다. 마음먹는다고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뇌가 호르몬을 통해 행복감을 주는 이유는 행복한 개체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뇌에 보상시스템을 심어놓았다.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원하는 보상체계를 갖게 되면서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욕망을 탐닉하는 데만 머물렀다면 조상들은 오래 전에 탈진하여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뇌는 욕망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시스템도 함께 갖추고 있다. 뇌에는 욕망시스템(wanting system)과 만족시스템(liking system)이 공존한다.
욕망시스템은 도파민이 작용하는 신경회로이고, 만족시스템은 모르핀 같은 오피오이드가 작용하는 신경회로다. 욕망시스템은 ‘기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당장 쾌감을 수반하지는 아니다. 즉 욕망시스템은 원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부추기지만 성취를 위한 힘든 노력이 즉각적인 쾌감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미래를 위해 묵묵히 참고 노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물의 도파민 경로를 차단하면 아무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음식에 둘러싸여 있어도 굶어 죽게 된다. 반면 만족시스템은 원하는 것이 충족되는 순간 쾌감이 밀려왔다가 이내 사라진다. 욕망시스템이 ‘기대하는 것’에 대한 행복감을 준다면, 만족시스템은 ‘경험한 것’에 대한 행복감을 준다. 두 시스템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대개 좋아하는 것이다. 두 시스템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것은 짝짓기다.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나 쾌감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평온함이나 만족감에 가깝다. 이러한 행복감은 도파민보다는 세로토닌과 관련이 있다. 세로토닌은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 세로토닌은 걱정, 두려움, 공포, 불면증 등을 완화시키고 사교성, 협동심, 긍정적인 감정을 높여준다.
‘행복기계’가 있다면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 ‘경험기계’를 통한 사고실험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기계 안에 들어가 원하는 것을 상상하면, 상상했던 그대로를 경험할 수 있다. 더구나 기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기계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기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영원히 이 기계 속에 머물 생각이 있는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삶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계 안에는 어떤 성취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모험을 원하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행복을 얻기 위한 여정 자체가 행복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불행할 가능성이 없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기계 속의 행복을 구현한 세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주문을 암송하며 약물을 복용한다. 주인공 존은 디스토피아의 지배자 무스타파 몬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시를 원하고, 현실적인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악을 원합니다. …네, 그래요. 나는 불행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늙고 추하고 무기력해질 권리뿐만 아니라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굶주릴 권리, 비참하게 살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끊임없이 걱정할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모든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신음할 권리…. 난 이 모든 권리를 원합니다.”
우리는 뇌와 호르몬의 노예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좀 더 정확이 말하면 인간은 자연의 노예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니다. 그런데도 행복전도사들은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연은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지만, 인간에게만큼은 현실의 고통을 견디게 할 만한 인지적 착각을 선물했다. 그것은 인생이 대단한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착각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불행할 자유와 행복의 추구는 동일한 지점을 향한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불행과 행복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