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상처 받은 양심에게 보내는 위로 ]
나는 친구로부터 남들에게 너무 높은 도덕을 요구한다는 애정 어린 조언을 듣는다. 나는 남들을 존중하려고 매우 노력한다.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남들 역시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내가 그들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남들에게 응당 그럴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또 실망한다. 양심이 충돌하는 사건에서 양심이 없는 자들 때문에 인간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가끔 배운다.
양심리스( 양심 + less(없음) 합성어 )는 진짜 양심이 없다. 양심이 없는 자들을 상대하려는 양심 있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이들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더라도 양심 있는 자는 양심 없는 자를 내던져 버리기 어렵다.
양심 없음과 양심 있음을 양립할 수 없고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이건 마치 치킨(chicken) 게임처럼 느껴진다. (Chicken 게임은 겁쟁이 게임으로도 번역됩니다.)
무모한 것을 겁내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이것의 명칭은 1950년대 미국 반항아들 사이에서 누가 겁쟁인지(Chicken, 겁쟁이를 뜻하는 비격식체)를 구별하기 위해 서로를 향해 차를 몰며 돌진하는 게임을 해서 유래되었다.
[ 치킨 게임 방법 ]
1) 서로 죽을 각오를 한다. (오래 살고 싶다면 이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2) 차끼리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해도 다른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곳을 찾는다.
3) 서로 정반대 방향에서 시작하여 서로를 향해서 차를 운전한다. >>>] · [<<<
4) 둘 중 하나가 이러다가 진짜 죽겠다 싶어서 먼저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꺾으면 진다.
5) 핸들을 먼저 꺾은 자가 겁쟁이가 된다. 핸들을 끝까지 유지한 자가 승리가 된다.
[ 제기될 수 있는 의문점 ]
5. 둘 만의 게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피해을 입을 수 있는 일을 굳이 하는 이유가....
4. 극적인 상황이다보니 자칫 사고가 날 수 있는데 이처럼 다칠 수도 있는 일을 굳이 하는가?
3. 핸들을 먼저 꺾은 자가 그나마 제정신인 자가 아닐까?
2. 승리자는 무엇으로부터 승리한 것일까? 죽음? 사고?
1.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나?
양심이 게임이 된다면 딱 치킨 게임일 것 같다. 일단 서로 다른 가치관을 전제한다. 그것은 양심 있음과 양심 없음이다. 이 둘은 앞서 말한 것처럼 양립할 수 없다. 둘은 다른 자동차를 타고 있다. 이 둘의 자동차는 부딪힐 수밖에 없다. 양심리스자들이 인생을 대충 살고 양심 있는 자는 그로 인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양심 있는 자들의 피해는 직접적이기도 하고 간접적이기도 하다. 일단 직접적인 경우는 양심리스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굴 때이다. 팀 프로젝트가 아주 좋은 예시이다. 양심리스자들은 아무 것도 하고 싶어하진 않지만 좋은 점수를 받고 싶어서 무임승차를 한다. 이들이 탄 곳은 양심 있는 자의 등이다.
Free rider 을 업은 개인 -> free leader 언제 어디서나 노동하는 리더가 된다.
양심리스자들의 문제점 : 이들은 이들을 대신해서 누가 일하던 상관하지 않는다. 일하지 않는다는 죄책감도 없고,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이전에 몇 번의 프로젝트를 경험했음에도 항상 프로젝트를 참여하는 마음가짐이 무임승차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간접적인 피해는 양심리스자들의 부도덕한 행위로 인해서 양심 있는 자들이 웅크리는 때이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이건 초등학교 교과서만 봐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세상엔 원칙를 지키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도덕한 행위이다. 그런데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아서 비(非)도덕한 행위가 된다. 명백하게 도덕적이지 않는 행위가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된다.
양심리스자들이 당장 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해보자.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부도덕하다. 의사가 임종이 얼마 남지 않는 환자에게 죽음을 알려야 할지와 같은 문제는 제외된다. 이것은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고민이지 양심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아주 일상적인 문제에서 시작하자. 만일 모두가 사용하는 공공의 물건이 있다고 가정해자. 어느날 이것이 사라졌다. 공공 물건을 담당하는 직원은 차례차례 누가 이 물건을 사용했는지를 알아내서 물건을 찾고자 한다. 이때 양심리스자는 자신이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자신이 물건을 가져갔다는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아서 자신은 공공의 물건을 단 한번도 사용한 적 없다고 말했다고 하자. 이들로 인해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행적을 찾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혹은 다수의 양심리스자들로 인해 물건은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쉽게 말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생존 게임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에 이해하라고 한다. 애초에 문제 삼지도 않는다. 사람이 힘들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각자의 상황을 고려한 책임 분배와 자신에게 갇힌 생각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위와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변명은 똑같다. 사회가 너무 살기 힘들다보니 자기 생존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여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한 행동이지만 내 탓이 아니다. 이들은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라고 단정 짓는다.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화한다. 가끔 역으로 이기적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이기심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양심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각자가 각자의 사정으로 힘들지만 그럼에도 한 번 더 숙고하는 것이 양심이다.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곰곰이 고민하는 것이 숙고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포기한 것은 인간이길 포기.... 한 건 아닌지에 대한 진심 어린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이 실수할 수 없고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실수할 수 있다. 실수했을 때 실수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는다면, 책임지도 싶지 않다면 최소한 그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가선 안 된다.
사회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모여서 형성한 집합체이다.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에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규칙과 규범을 만들어서 생활한다. 이것은 모두를 위한 길이다. 예컨대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나 역시 피해 보고 싶지 않아서 이러한 욕구를 문자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것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덜 겪으라는 마음에서 후손을 위해 관습한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그것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기 어렵다. 모두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아무리 인간이 공격성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공격성이 실제 타인을 공격하는 행동을 통해서 강화되고 학습될 때 더 큰 공격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공격적 행동은 자기 조절 능력이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을 뜻하기도 한다. 한 번 더 고민해서 행동했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공격성이 곧바로 나와버릴 수 있다. 이런 후회되는 선택이 반복되면 인간의 삶은 후회로 얼룩지고 만다. 우리의 끝은 후회와 책망으로 가득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심리스자들로 인해 비도덕해지는 간접적인 피해는 더 심각한 문제이다. 사회에서 통용되어야 할 원칙 자체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앞선 예시처럼 한 번의 귀찮음이 공공의 물건을 영원히 찾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더 광범위한 피해를 생성한다. 사회를 무질서의 상태로 전환시킨다.
무질서는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놓은 모든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앞선 공격성 예시처럼 우리가 무엇을 할 때 좋음이 오고 무엇을 할 때 나쁨이 오는지와 같은 분별력을 통채로 망가뜨린다. 무질서는 탈질서와 다르다. 질서를 넘어서 근본으로 향하는 것과 질서를 지키지 않고 악하게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탈질서의 핵심은 그것이 인간다움에 더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별력을 전수한 선조들이 가진 최초의 마음가짐으로 다시금 돌아가 또 다른 질서를 창조하는 힘이 탈질서이다.
악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사람들의 악한 본성은 아무때나 발휘되지 않는다. 악에 대한 무감각한 태도와 악에 대해 제재하지 않는 관습이 악을 발현시킨다. 주변에 있는 악을 악이라고 부를 수 없을 때 우리 사회는 악을 생성하는 시스템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심 간의 대결이 치킨 게임인 이유는 이런 대결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누가 겁쟁인지를 알기 위해서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버티는지는 인간적인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심이 없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타인과 사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일종의 생존 전략이 되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이 사람의 양심은 여기에 있구나... 그렇구나! 기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분노를 분노로 대처하지 않는 노력이다. 양심 없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그 사람에게 한 번 더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이 나의 최선이다. 평생 팀 프로젝트를 할 때 무임승차자 한 명도 없이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공동체 내에서는 언제나 나와 다른 도덕심을 지닌 자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을 양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숙고하는 능력이 조금 느린 편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나도 기대치를 한껏 낮춘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완전히 양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떠한 기대도 할 수 없다면 그 관계에서 사람이 사라진다. 사람이 아닌 존재와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화가 나지만 나는 그 사람과 완전히 단절할 수 없다. 공동체라는 것이 그렇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숙고할 시간을 주는 것, 그리고 진심을 다해서 사람을 대하는 것, 이러한 과정 속에 내 자신을 놓아보는 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하지만 역시 가끔은 포기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고 종종 포기한다. 나는 콩알만한 인내심을 지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