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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면 말하는 도중 주제를 놓치고 “내가 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상대에게 묻는 경우조차 왕왕 생겨난다. 마치 계단에 서서 ‘내가 지금 내려가고 있었던가 올라가고 있었던가’ 방향을 잃어버리는 식이다. 친구들도 오십보백보여서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여기며 “여기까지 말했어.” 하고 방향을 잡아준다. 더러는 “글쎄, 어디까지 말했었니?” 하며 함께 헤매기도 한다. 그렇다고 말이 중단되는 건 아니다. “말하다 보면 생각나겠지.” 하면서 다른 이야기부터 펼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20~30대와 대화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20대인 아들만 해도 내 말이 조금만 길어질라치면 “그런데요, 결론이 뭔데요?” 대놓고 재촉을 한다. ‘아니, 충분히 알아듣게 말하려는 건데….’, 속으론 서운하면서도 내가 장황했었구나! 눈치를 채고 “그러니까 이렇단 거지” 하며 얼른 말을 맺는다. 모바일 SNS 세대인 요즘 젊은이들은 입이나 귀보다는 눈을 통한 텍스트와 이미지로 빠르고도 짧게 커뮤니케이션한다. “알았다” “좋다”는 문자며 카톡을 “ㅇㅇ” “ㅇㅋ”처럼 부호로 보내는 판이다. 남자의 경우는 길게 늘어지는 말에 대한 인내심이 더욱 약하다는 사실을 아들에게서 종종 발견하곤 한다.
이런 훈련(?) 때문인지, 특히 여러 세대가 함께한 강좌나 석상에서 누군가의 말이 길어질라치면 당사자 이전에 내가 먼저 다른 참석자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나의 차례가 왔을 때는 사적인 자리에서와는 달리 간단명료하니 길어지지 않게 마치려고 바짝 신경을 쓴다. 그러나 앞서 어르신들을 보면 나 역시 모르는 새 그런 눈치코치마저 점점 무디어져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모임이나 관광버스 안에서 한번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놓지 않는 게 노인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마당이니 말이다.
연초 문화예술인들의 신년회에서 이어령 선생도 다음과 같은 말로 좌중의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는 한 신문기사를 읽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할 말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이 든 사람에게는 절대 마이크를 주지 말라는 겁니다. 나이 든 사람은 당장 ‘내가 다음에도 또 마이크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 얘기 저 얘기 오래 하게 되거든. 두 번째는 나이 들면 시간 개념이 없어져. 얼마나 오래 말하고 있는지 자기가 잘 몰라.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렇게 마이크 주면 안 돼요.”
나 아직 팔팔하게 살아있어
웃자고 한 말씀이었겠지만 ‘늙어가면서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소위 노인이 지켜야 할 ‘명심보감’의 한 대목이 그냥 나온 건 아닌가 보다. 그래야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팬’과 내 ‘편’이 되어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손뼉 쳐주는 게 대접 같이 여겨지기에 십상이다. 소외되거나 무시당하는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나 아직 팔팔하게 살아있어”를 내보이고 싶을수록 더 그러기 쉽다. 그러나 경청이나 박수가 진심에서가 아닌, 그저 ‘경로사상’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음에랴.
그럼에도 노인에게는 살아온 연륜만큼 입을 열어 말해야 할 가치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한 명의 노인은 하나의 도서관’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 도서관이 사라지기 전에 다 들어야 한다. 역사책보다는 경험자로부터 직접 듣는 이야기가 더 힘이 있는 까닭이다. 최근 개봉된 영화 ‘더 기버: 기억 전달자(The Giver)’에서는 할아버지가 손자뻘 되는 17세의 고교생에게 자신이 경험하고 배운 것을 전해 준다. 말로서가 아닌, 서로 양팔을 겹쳐 잡음으로써 전달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그럴 수 있다면야 마이크를 잡는 문제는 사라지련만!
지금은 노래의 ‘1절’만 부르겠다는 각오를 마이크 잡을 때마다 새로이 하는 수밖엔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메시지 전달 시 목소리와 표정, 태도가 거의 모든 비중을 차지하고, 정작 내용은 겨우 7%라는데 길게 말해봤자 별 영양가도 없을 성 싶다. 게다가 화술의 기본은 3분 스피치여서 아무리 길어져도 그 반복에 불과하므로 기본을 넘지 말라고 한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2, 3절은 약간 달리 표현된 1절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니 입을 열 때마다 1절만으로 끝내자고 새삼 다짐해 본다. 1절은커녕 어쩌면 제목만으로도 족하다 할 스마트시대 아닌가.
첫댓글 ..
말이 길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하지요.
간단하게 끝내주는 사람이 좋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