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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이야기
정후가 대학원에 바로 가지 않고 한국에 머물기로 한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일 년 전 겨울방학 ..
한국에 나와 있던 정후는 어릴 적 친구인 민석을 명동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였다.
약속 장소인 커피전문점 안으로 들어가자 민석은 한 여자아이와 함께 앉아 있었다.
정후를 발견한 민석은 손을 들어 보이고 정후가 다가와 옆에 앉자 '오랜만이라며 정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인사해, 홍은주라고 우리 과 후배야 이 녀석은 오랜 친구 유정후 .. "
정후와 은주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정후는 푹 눌러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었다. 모자에 눌려있던 머리카락을 보며 민석이 한마디 한다.
"자식, 워낙 얼굴이 받쳐주니 어떻게 하고 있어도 멋있네! 형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너 소개팅
준비한거다."
정후는 예상치 못한 소개팅에 살짝 심기가 불편해졌다.
"나 미국에 동거하는 여자 있는데 .. 쓸데없는 짓 한거 같다."
정후는 앞에 앉은 은주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거침없이 내뱉었다.
정후의 스타일을 잘 알던 민석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은주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 은주를 보며 민석이 변호하듯 말을 이었다.
"이 녀석, 원래 예전부터 싸가지 없기로 유명했었어. 그래서 여자 사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니까
이 몸매에 이 마스크에 여자 친구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주위 의식 안하고 거침없는 게 매력이라면
매력이야"
정후는 그런 민석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와 킥킥 거렸다.
민석은 팔꿈치로 정후를 찌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은주 역시 착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멋진 여자야 .. 왠지 너희 둘이 코드가 맞을 거 같아서 자리 마련한
거니까 알아서들 해라 난 먼저 갈게."
민석이 일어나 서둘러 커피전문점을 빠져나갔다. 정후와 은주 두 사람 모두 민석을 잡지 않았다.
둘만 남은 자리에 은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국에 동거하는 여자 있다는 말, 정말이에요?"
"중요한거 아니잖아."
"초면인데 .. 왜 반말하세요?"
"그럼 너도 해."
"그래 .. 좋아."
은주는 황당했지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정후는 계산서를 집어 들고는 '나가자 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정후를 은주가 뒤늦게 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
정후는 털모자를 다시 눌러쓴 후 자신의 어깨밖에 오지 않는 자그마한 은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
"뭘?"
"집에 갈래?"
은주는 기가 막혔다.
"이대로 그냥 집에 가라고?"
"그냥 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좀 그렇지만 맘에도 없는 사람들끼리 같이 있는 건 더 이상하잖아.
더구나 크리스마스인데 .. "
기분 나쁘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자꾸만 정후에게 끌리는 자신 때문에 화가 나 눈물까지 나려고 했다.
"그래도 소개팅이라고 나왔는데 그냥 가긴 억울하고 ..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사줘."
"뭐??"
"백화점으로 가자."
은주는 자신이 주도하고 싶은 마음에 앞서 걸었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온 은주는 명품샵 안으로 들어갔다.
정후는 거리를 두고 은주의 뒤를 따랐다.
이것저것 구경하던 은주는 이태리제 지갑하나를 골라 정후를 보며 흔들었다.
하지만 정후의 시선은 은주의 손에 들려있는 지갑에 관해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있던 백화점 직원에게
꽂혀있었다.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차분하고 정갈하게 보이는 이미지였다.
키가 좀 크고 깨끗하게 하나로 묶은 헤어스타일이 유난이 잘 어울려 보였다.
계산대에서 정후는 그녀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돌려주던 그녀와 눈을 맞추며 정후가 물었다.
"아줌마, 몇 시에 끝나요?"
그녀는 당황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은주 역시 놀란 눈으로 정후를 바라보았다.
정후의 눈은 그녀만을 응시한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민망한 듯 정후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손님, 근무 중이라 ..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근무 중이 아닐 때가 언제냐고요?"
정후는 계산대에 팔까지 걸치며 그녀에게 더욱 다가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후는 계산대 위에 올려져있던 종이 쇼핑백을 들어 은주에게 내밀었다.
"잘 가라."
정후는 백화점을 나와 카멜담배에 불을 붙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런 묘한 기분을 느낀 게 처음이라 자신도 당황스러웠다.
조금 후 은주가 정후에게로 다가왔다.
"뭐야?"
"뭐가?"
"이게 무슨 매너야?"
"선물 사달라고 해서 사줬잖아."
은주가 정후를 향해 눈을 흘겼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난 사이거든 .. 친한 척 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라”
“진짜 재수 없다.”
“그러니까 가라고”
정후는 새로운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은주가 ‘휙 뒤돌아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정후는 어두워 질 때까지 추운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발밑으로는 담배꽁초가
쌓여있었다.
다음날 ..
정후는 다시 그 백화점을 찾았다.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정후는 그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녀는 자신 앞에 우뚝 서 있는 정후를 발견하고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늦게 까지 백화점 앞에서 기다렸는데 .. 오늘도 데이트 안 해줄 거예요?”
“저와 데이트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시는데요?”
그녀는 방금 전 놀란 표정과는 다르게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어린 남자 싫어해요?”
“이성을 장난으로 만날 나이는 아니라 서요.”
“저도 그럴 생각 없는데요. ..”
그녀는 잠시 정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 내년 크리스마스에 전화하세요.”
정후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만난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동안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녀의 명함을 잠시 바라보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지자 뿌옇던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메리크리스마스.”
“누구세요?”
“아줌마가 오늘 전화하라고 해서 전화한건데 .. 기억 못해요?”
“... ...”
“아직도 백화점에서 일해요? 작년 크리스마스에 명함 줬었잖아요.”
“아 .. 정말 전화했네요?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
“이제 만나 줄 거죠?”
“글쎄요.”
“내년 크리스마스에 다시 전화 할까요?”
그녀가 웃었다. 정후의 입가에도 예쁜 미소가 지어졌다.
백화점 옆에 있는 생맥주집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정후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오길 바랐지만 눈은 오지 않고 바람만 세게 불고 있었다. 그래도 거리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롤에 기분은 들떠 있었다.
인파속에서 생맥주 집을 향해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정후는 쓰고 있던 Calvin Klein 선글라스를 밑으로 내리며 그녀를 확인했다.
그 순간 그녀만이 환하게 정후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후 ..
그녀는 정후를 지나쳐 생맥주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줌마!”
정후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뒤돌아서서 정후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생맥주집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독일산 생맥주와 모듬소시지를 테이블위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첫눈에 반해 일 년 후에도 그 감정 그대로라면 분명히 사랑 맞죠?”
“여전히 곤란한 질문만 하시네요.”
“우리 결혼할래요?”
“너무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신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면 장난치고 있는 거거나 ..”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나에 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내가 어떤 여자인지 .. 나이가 몇 살인지 .. 결혼을
했을 수도 있고, 애가 있을 수도 있는데 .. 좀 진지해 지셔야 될 거 같아요.”
“충분히 진지해요. 일 년 동안이나 생각한 거예요. 지금 사랑하는 남자 있어요? 그 남자로
인해 만족할 만큼 행복한 것만 아니라면 아줌마가 어떤 상황이건 상관없어요.”
그녀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리가 이런 얘기할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름이나 나이 같은 걸 먼저 물어봐
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게 중요해요? 십년을 넘게 연애하고도 깨지는 커플도 있고 사진만 보고 결혼했어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도 있어요. 안정이 보장된 미래는 없는 거잖아요.”
“내가 당신, 만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할래요?”
“그런 걸 물어본다는 건 마음에 있다는 거 아니에요? 정말 싫었음 여기 나오지도 않았겠
죠.”
“일 년 전에 한 얘기를 기억하고 전화해줘서 안 나올 수가 없었어요. 거절을 하더라도 만나
서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알았어요. 아줌마가 궁금해 하는 거 얘기해줄게요. .. 나이는 25살이고, 내년 학기에 대학
원 진학할 예정이에요.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만 같은 누나가 하나 있고,
집안은 뭐 .. 돈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아` 그리고 이름은 유정후에요. ”
“전 .. 강지민이고 34살이에요. 2년 전에 이혼했고 5살짜리 딸이 하나 있어요.”
“휴~ 생각보단 나이가 많지만 나쁘지 않네요.”
“그쪽에서 절 진지하게 생각하신다니까 솔직히 얘기할게요. 당신 .. 젊고 신선해요. 스타
일도 세련되고 멋있네요. 하지만 .. 친구 같은 동생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남자로는 싫어요.
헤어진 남편도 4살 연하였어요.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젠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
“나랑 살면 불편할 거 같아요? 성격이 그지 같긴 하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텐데 ..
그리고 친구 같은 동생은 사양할래요.”
“아무도 우릴 연인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관계 .. 부담스러워
요. 그리고 지금 만나는 남자도 있어요. 나하고 처지도 비슷하고 탄탄한 직업도 있고, 결
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정후씨는 정후씨하고 맞는 여자를 찾으세요.”
정후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스쳤다가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귄 것도 아닌데 .. 마치 실연당한 기분이었다.
“당신을 선택한 결과가 백퍼센트 불행이라고 해도 망설임 없이 당신을 선택하려고 했어요.
내가 선택한 여자의 남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 그래야 후회가 없을 거 같아서요.
당신은 내가 선택한 첫 번째 여자에요. 당신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정후씨를 선택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당신을 만난다는 기대에 일 년 동안은 행복했네요.
그 남자 만난 건 얼마나 됐어요?”
“6개월 정도 ..”
“거봐요 .. 작년에 만나줬으면 좋았잖아요.”
“인연이 아닌가 보네요.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미안해요.”
지민이 일어섰다. 정후는 지민을 보지 못하며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말했다.
“내 전화번호 .. 핸드폰에 찍혔죠? 그 남자하고도 실패하면 그땐 나하고 만나요.
아줌마하고 내가 진짜 인연일지도 모르잖아요.”
“내년 크리스마스엔 내가 전화할게요.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네요.”
그렇게 그녀가 멀어져갔다.
어두운 골목 ..
정후는 집을 향해 쓸쓸하게 걷고 있었다.
우울한 크리스마스도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