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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 알싸 동영상 스크랩 ♬나가거든 - 조수미 [명성황후 ost]
제닉넴보면원빈이다!라고말해주세요 추천 3 조회 2,894 11.07.25 02:39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나는 조선의 국모다. 비록 타오르고 타올라 그저 한줌의 재로 흩어져

바람을 타고 빗물에 쓸려 외롭게 떠돌지라도 이것이 어찌 내 마지막이라 하겠느냐..." 

 

 

[일본신사에 보관된 명성황후 시해칼] 

 

조선후기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으니 이른바 을미사변의 시작이었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1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전체 길이 120cm 칼날 90cm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적혀 있는 문구는 가슴에서 피가 끓어 오르게  한다.

칼주인의 자객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 한다.

 

시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리며 16세기 에도 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이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시해용으로 만들어진

칼은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란 사람이 신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기증 관련 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란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도 보인다.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조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정종미. ‘명성황후’(210×210㎝, 한지·모시·안료·염료·콩즙·금분, 2006)

 

 

☆ 나 가거든 - 조수미 ☆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 쉬듯 물어볼까요 난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 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흩어진 노을처럼 내 아픈 기억도 바래지면
그땐 웃어질까요 이 마음  그리운 옛일로

 

저기 홀로선 별 하나 나의 외로움을 아는건지
차마 날 두고는 떠나지 못해 밤새 그 자리에만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 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 까지도 사랑하길

부디 먼훗날 나가고 슬퍼하는 이
나 슬픔속에도 행복했다  믿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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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7.25 03:23

    첫댓글 정준호 죽을떄간지

  • 11.07.25 03:37

    우리는 후손된 입장에서 조상님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광복된 이 나라를 단단한 반석 위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올바른 역사평가를 가하여 과거의 잘못을 다신 되풀이 해선 안 될 것입니다.

  • 11.07.25 09:07

    명성황후 시해당한게 고귀한희생은아닌거같은데... 뭐 명성황후를 염두해두고한 말씀은아닌가요?

  • 11.07.25 12:12

    명성황후가 참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그런걸 다 제껴놓고..지금으로 치면 일본 야쿠자 나부랭이가 청와대들어와서 영부인을 죽인셈인데... 한나라의 국모를 그렇게 잃고도 아무런 말도 할수없는 힘없던 역사의 슬픔을 잊으면안되겠죠..그리고 명성황후가 죽음으로서 일본에 대해 더 격렬하게 운동할수 있었다고치면 ~_~... 여튼 명성황후의 인간됨됨이는 일단 제껴놓고 시해 됬다는 것에 중점을 두는게 좋지않나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찌됫던 한 나라의 국모아니었습니까...

  • 저도 인생님이랑 같은생각 명성황후가 잘못한건 수도없이 많지만 그렇다고 원숭이들 손에 죽은건 진짜 통탄할 일입니다 차라리 임오군란때 구식군대손에 죽거나 동학군에 죽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 11.07.25 14:20

    뭐 전 이것 보면서 암울했던 우리 근현대사 생각하면서 썼던 댓글이긴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를 놓고 잘 죽었다는 식의 뉘앙스 풍기는 댓글 보니 왠지 씁쓸하네요 전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설령 특정 어떤 사람이 너무 큰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 형벌권이 우리에 의해 그리고 법과 재판에 의해 형벌을 줘야지 타국 남의 나라 낭인들에 있을 일은 세상 어느 나라 법에도 없습니다.

  • 11.07.26 08:49

    이러쿵 저러쿵해도 한나라의 국모가 그것도 황실에 다른나라 깡패가 들어와서 시해된 사건입니다. 일본은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시해한 칼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이후 나중에 고종황제까지 죽입니다. 명성황후가 잘했던 잘못했던간에 우리 민족 역사에서 참담한역사가 아닌가여? 지금 젊은 세대에 명성황후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이미연아니야?,노래 죽이더라 하면서 낄낄되는 친구들도 있던데.한심하다고 생각되기보다는 제대로 몰라서 그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 좋은점은 없지만, 이부분도 저는 조심스럽게 의아해 봅니다. 분명 일제가 날조를 했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11.07.26 14:13

    맞습니다. 명성황후 죽고 난 뒤 시해의 장본인인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가 본국에 보고하길 "왕비의 소재는 아직 미상임, 대원군에 의한 쿠데타"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한상신보에서 명성황후의 피살소식을 다루면서 대원군이 입궐했다는 소식만을 첨부하면서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이 대원군임을 흘려서 내분으로 몰아갔습니다. 일본은 이렇듯 날조의 대마왕입니다. 국모가 시해됐는데 그것을 죽인 일본인은 간데 없고 명성황후가 죽어야 했던 이유만 날조하여 기록하니 백성들은 잘 죽었다고만 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거죠.. 어차피 죽어야 할 인물이 누가 죽인 것은 문제 안 되고 아무튼 잘 죽었다고요?

  • 11.07.26 14:14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럴 거면 세상에 법이 뭐가 필요 있습니까? 법원은 왜 필요하고

  • 11.07.25 03:56

    ......

  • 11.07.25 07:49

    영화네...

  • 11.07.25 08:07

    불후의 명곡임

  • 11.07.25 10:01

    아....................... 에효......................

  • 명성황후 진짜 이미연이 계속했다면 쭉 대박 쳤을텐데........

  • 11.07.25 18:00

    와 이미연 진짜 이쁘다

  • 11.07.25 18:08

    중학교때 뮤비보고 울컥함 ㅠㅠ

  • 11.07.26 23:57

    아...진짜 박정현도 무지 좋은데 다음댓글에 조수미보고 아무가수라산께 미치것다...

  • 11.07.28 18:41

    와 허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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