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Dream
형체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다크에어 ..
내가 공기를 빨아들여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공기가 나의 영혼을 빨아들여
알맹이는 다 삼키고 빈껍데기만이 남겨진 듯하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짧았던 은수와의 만남 ..
그 날 이후 유희는 오피스텔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악몽 속에 보았던 유리벽은 거대하게 커져 자신의 오피스텔 안을 뒤덮고
세상과는 단절된 채 어둠속에서만 웅크리고 있었다.
유희는 오랫동안 은수를 미워하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그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유희를 본 은수는 이상하리만큼 유희를 반가워했다.
마치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려는 듯 ..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유희는 복수를 결심했다.
.. 은수를 마취시키고 유희는 차를 몰아 달리고 있었다.
은수는 뻣뻣하게 굳어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유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붙잡고는 있었지만 자신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입 밖으로 토해낼 수는 없었다.
한참을 달려 산속 어딘가에 차를 멈춘 유희는 은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두렵니? 그래도 넌 고통은 없을 거야 난 .. 오년동안이나 고통 속에 살았어. 조금 후면
차안에 가스가 새어 나올 거고, 넌 서서히 죽어가게 될 거야"
은수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눈 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발견될 때 넌 운전석에 앉아 있을 거고, 모두들 네가 자살했다고 생각할거야
의문으로 남겠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은 행복해야할 여자가 자신의 차안에서
자살을 했으니 말이지" ..
유희는 자신의 날카로운 웃음소리의 울림을 들으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반복되는 악몽 속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은수를 죽이는 꿈은 너무나도 현실 같은
꿈이라 자신이 무서워졌다.
잠에서 깬 유희는 바로 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 어떻게 유진이랑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니?”
“말투가 왜 그런데? 내가 유진이랑 결혼한 게 잘못 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여전히 당당하구나, 너의 당당함이 얼마나 오만하고 뻔뻔해 보이는지 알아?
나나 정이에게 미안한 마음은 전혀 없니?”
“내가 왜 너나 정이한테 미안해해야 한다는 거야?”
“너 때문에 정이가 죽고, 내 인생은 망가져버렸어. 물론 그 날 일은 사고였지만 그 일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으며 살았는지 알아?”
“나 때문에 정이가 죽고, 나 때문에 네 인생이 망가지다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네 말대로 그날 일이 사고였지만 운전한 거는 너였잖아. 너 사고 때문에 머리까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래도 난 그동안 네 걱정 많이 했어. 정이 죽고, 유진이가 널 얼마나 원망했
는지 알아? 그래도 난 유희 잘못이 아니라고, 그냥 사고일 뿐이라고 얘기했어. 오늘도 네
전화 받고 반가웠는데 .. 마치 넌 모든 게 내 탓인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유희는 머리가 아파왔다.
.. 운전한 게 나였다고 .. 정이를 죽인 게 나라니 .. 은수는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
유희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유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고 나던 날 유진이랑 너는 끝까지 연락하지 않았어. 그곳에서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기다리는 정이나 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
우리가 얼마나 초조하고 답답했는데 ..
너희를 찾으러 강원도까지 가다가 사고까지 난 거잖아.”
수화기를 통해오는 유희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은수의 큰 눈은 더욱 커지고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미쳤구나, 유진이랑 난 사귄 지 일주년 기념으로 둘만의 여행을 간 거였어,
네가 유진일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너희가 왜 우릴 찾으러와? 너 스토커였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왜 거기서 너와 정이가 사고가 났을까?
우릴 찾으러 온 거였다고?”
.. 뭐라고? 은수가 유진이와 사귀는 사이였다고? 둘만의 여행을 간 거였다고? ..
순간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스쳐갔다.
' 정이야 은수한테 전화가 왔는데 너하고 같이 강원도로 오라는데 .. '
머릿속이 깜깜해지더니 다시 준영선배에게 차키를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유희는 온 몸이 떨리고 정신이 멍해졌다.
왠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은수야, .. 너 내가 운전을 한거라고 했지? 정이가 아니라 내가 운전을 했다는 거야?”
“정이는 면허증도 없었어. 네가 준영선배한테 차를 빌렸다면서 .. 기억이 안나니?
네가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해서 트럭하고 부딪힌 거라며, 너희 아버지가 뒷수습하시느라
고 애 많이 쓰셨다 던데”
유희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었지만 힘없이 떨리던
손가락이 풀리며 핸드폰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유희는 혼란스러웠다.
은수가 왜 자신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유진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다이어리가 생각이 났다.
' 그래, 유진이가 날 생각하며 썼던 일기장이 있었잖아 '
유희는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달려 나가 택시를 타고 본가로 향했다.
본가에 도착한 유희는 놀라 바라보는 정후를 무시한 채 예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쌓여있는 짐들을 파헤치며 미친 듯이 일기장을 찾고 있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오래된 짐 속에서 발견된 일기장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유희는 일기장을 보자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고여 왔다.
소중한 보물을 손에 넣은 듯 일기장을 가슴에 품고 유희는 본가를 나와 오피스텔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유희는 오랫동안 일기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었다.
엉켜버린 자신의 머릿속을 풀어 줄 열쇠인 일기장이 남아 있음에 유희는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일기장 위로 떨어지고, 유희는 떨리는 손끝으로 일기장을 쓰다듬다가
첫 장을 넘긴다.
유희의 두 눈 안으로 들어오는 낯익은 글씨들 ...
가슴이 저며 오는 듯 유희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낯익은 글씨들이 유희의 두 눈에 하나씩 박히며 유희는 일기장을 읽어 내려간다.
To : 유진 …….
카페 에콰도르 …….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나는 사랑에 빠지는데 삼초가 걸렸다.
어쩜 더 빨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님 영원 같은 시간일수도 …….
나의 눈이 멈춰선 순간, 그 순간 ..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멈춰 버렸으니까.
그리고 난 그에게만 빠진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까지 함께 사랑하게 되었다.
그를 만난 이 여름을 사랑하고, 그가 머무는 카페 에콰도르를 사랑하고,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를 사랑하고, 그가 걷는 길을 사랑하고, 그때 불어오는 바람을
사랑하고, 그 바람에 날리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그의 향기까지도 …….
그가 함께하는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금요일에 카페 에콰도르에서 연주를 한다.
어느새 그의 연주를 듣는 일은 나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앉는 그 자리에서 그의 연주를 듣는다. 그러나 오늘은 지독히도 우울한 날이다.
그의 슬픈 눈을 보았기 때문에 …….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려고 한다.
얼마 전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세상이 온통 땅속으로 꺼져 가는 것 같은 이렇게 무거운 슬픔은 처음이다.
그의 이름은 한유진 …….
그와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다.
그의 이름을 카페 앞 포스터에서 알게 되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나이는 ……. 사는 곳은 ……. 성격은 어떨지 …….
너무도 알고 싶은 것이 많다.
하지만 그에게 나를 알리는 것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직은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더 많이 알아갈 때쯤은 욕심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쓴다.
유진에게
당신이 내게 처음으로 느끼게 해주신 이 신기하고 소중한 감정들에 대해서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싶어요.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서도 …….
당신의 기억 속엔 영원히 내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이 당신에겐
불쾌하실 수도 있겠지만 - 아직도 전 당신을 통해 저에게 온 이 놀라운 감정들이 소중해요.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아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지금과 같을까요?
어쩜 다신 안 올지도 모를 감정이겠지요.
그렇다 해도 너무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는 않네요.
사랑이 깊어지면 이별도 깊을 테니까요.
이별의 아픔이 사랑의 기쁨보다 커져 버리면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이 아름다운
추억들이 아픈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요.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
당신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할게요.
그러니까 불쾌하시더라도 용서해 주세요.
그것은 유진이 아닌 유희 자신이 쓴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을 읽던 유희의 눈동자에 힘이 풀리며 눈꺼풀이 내려와 유희를 어둠속에 가둔다.
.. 이건, 말도 안 돼! 모든 건 거짓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
.. 누군가가 내게 장난치고 있는 거야 ..
.. 유진일 만나야해 그를 만나야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