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표(31)가 독일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했다. 도르트문트는 1996-97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정상에 올랐지만 그해를 마지막으로 내리막 길을 걸었다.
2005년에는 도르트문트라는 팀이 사라질 뻔하기도 했다. 이영표에 대해서는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과연 이영표의 도르트문트행은 전성기가 지난 선수의 그저 그런 이적이었을 뿐일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유벤투스의 1996-97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린 1997년 5월 28일(이하 현지시간) 뮌헨의 올림피아 슈타디온.
경기 시작 두세 시간 전부터 그라운드 한편에 자리를 잡은 유벤투스 원정 팬들은 흰색과 검은색의 줄무늬 깃발을 흔들며 요란스럽게 응원을 했다. 이들은 유벤투스의 우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럴 만 했다. 유벤투스는 지네딘 지단(36), 크리스티안 비에리(35,아탈란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34,유벤투스)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었고 대회 준결승에서 아약스를 1, 2차전 합계 6-2로 크게 누르며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주심의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자 예상대로 유벤투스가 초반 주도권을 잡았다. 지단은 화려한 드리블과 절묘한 침투 패스로 도르트문트의 수비 뒷공간을 노렸다.
힘 있는 플레이가 강점인 비에리는 몸싸움을 벌이며 도르트문트 수비진을 괴롭혔다. 도르트문트의 오트마 히츠펠트(59) 감독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유벤투스가 아닌 도르트문트의 편이었다. 수세에 몰리던 도르트문트는 전반 29분 칼-하인츠 리들레(43)가 가슴으로 볼을 잡은 뒤 왼발 슈팅으로 유벤투스의 골망을 흔들었다.
리들레는 5분 뒤 왼쪽 측면에서 올라온 코너킥을 헤딩 슈팅으로 연결해 두 번째 골도 뽑았다.
도르트문트는 후반 21분 델 피에로에게 한 골을 내줬지만 4분 뒤 교체 선수 라스 리켄(32)이 세 번째 골을 터뜨리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최근 은퇴한 리켄은 지난 시즌까지 15년 동안 도르트문트 유니폼만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유벤투스 응원단은 침묵에 휩싸였다. 히츠펠트 감독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치켜 올려 도르트문트 팬들의 성원에 화답했다. 100년이 넘는 도르트문트 구단 역사에 가장 빛난 날이었다.
도르트문트는 1992-93시즌부터 확대 개편된 챔피언스리그에서 독일 팀으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만 해도 도르트문트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비상
인구 60만 명이 넘는 도르트문트는 독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도시다. 19세기 말 루르 탄전의 개발과 운하의 완공으로 독일의 대표적인 광공업 도시가 됐다.
도르트문트의 축구 열기는 독일에서도 으뜸이다. 도르트문트는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 18개 팀 가운데 최다 관중을 끌어 모았다.
경기당 평균 7만2510명의 팬이 도르트문트 경기를 지켜봤다. 홈구장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은 수용 규모 8만708명으로 도르트문트의 경기당 관중 점유율은 90%에 이르렀다.
지역 라이벌 샬케 04는 지난 시즌 경기당 평균 6만1274명이 홈구장을 찾았다. 샬케 04의 홈구장 벨틴스 아레나의 수용 규모는 6만1673명이다.
점유율 99.4%로 분데스리가 팀들 가운데 가장 높았다. 도르트문트와 샬케 04의 라이벌전은 독일 프로축구 최고의 더비 경기로 꼽힌다.
1996-97시즌 유럽 정상에 선 도르트문트 선수들은 홈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도르트문트 시내 광장에 수많은 환영 인파가 몰렸고 축제가 며칠이나 이어졌다.
시민들은 축구 얘기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축구 얘기로 하루를 마감했다. 축구단 경영의 긍정적인 효과를 경험한 도르트문트는 본격적인 세 불리기에 나섰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이어진 리그에서의 부진은 투자를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분데스리가 최초로 구단을 주식시장에 상장한 것도 공격적인 투자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도르트문트는 2000년 여름 바이에른 뮌헨과 경쟁 끝에 체코 출신 공격형 미드필더 토마시 로시츠키(28,아스날)를 영입했다. 로시츠키는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 이적료인 1500만 유로(약 260억 원)에 도르트문트 유니폼을 입었다.
도르트문트는 이듬해 체코의 장신 공격수 얀 콜레르(35,사마라 FC)와 브라질 출신의 아모로조(아리스 FC)를 영입하며 공격력을 더욱 강화했다. 분데스리가의 여름 이적시장 이적료 기록은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도르트문트에 의해 경신됐다.
이런 투자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도르트문트는 2001-02시즌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랐고 UEFA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즌 아모로조는 18골을 넣었고 콜레르는 11골을 터뜨려 분데스리가 최고의 투톱으로 위력을 떨쳤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유럽에 진출한 이영표도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강세를 이어간 도르트문트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도르트문트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다른 도시보다 많은 축구 클럽 팬샵을 발견할 수 있다.(사진 김덕중)
이영표의 에이전트 ㈜지쎈의 류택형 이사는 “(이)영표는 유럽에 진출하기 이전에도 유럽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화려했던 도르트문트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최근 침체의 늪에 빠져 있지만 분데스리가 팀 가운데 바이에른 뮌헨 다음 가는 명문 클럽이라는 생각이 도르트문트행을 결정하는 데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추락
도르트문트는 정상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한때 파산 위기에 몰리며 급격히 추락했다. 2003년 8월 27일 브뤼헤에서 열린 2003-04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예선 3라운드 브뤼헤전 결과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홈경기 1차전에서 2-1로 이긴 도르트문트는 챔피언스리그 32강 본선 진출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이날 경기에서 1-2로 져 3-3 동점을 이뤘고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져 벼랑 끝으로 떨어졌다.
도르트문트의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 실패는 구단 경영진에게는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을 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앞서 도르트문트는 2002-03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다 잡았던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을 놓치며 팬들의 비난을 샀다.
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2위에 올라 있던 도르트문트는 이미 강등이 확정된 꼴찌 에네르기 코트부스를 홈으로 불러들여 1-1로 비기고 말았다.
도르트문트는 15승13무6패(승점 58)로 리그 3위로 떨어졌고 같은 날 볼프스부르크를 2-0으로 꺾은 슈투트가르트가 17승8무9패(승점 59)로 2위로 올라섰다.
분데스리가는 리그 1, 2위 팀이 챔피언스리그 본선 직행 티켓을 얻고 3위 팀은 예선 라운드를 거친다. 도르트문트가 코트부스를 잡았으면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브뤼헤와 만날 일은 없었다.
도르트문트는 ‘돈잔치’로 불리는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나가지 못하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됐다. 챔피언스리그 본선 출전팀에게 주어지는 경기 수당 및 상금 그리고 TV 중계권료를 모두 날려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무리한 투자가 도르트문트의 발목을 잡았다. 내로라하는 수퍼스타를 끌어 모았지만 도르트문트는 이들의 연봉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도르트문트는 2004년 11월 주주들에게 재무 현황을 공개했다.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2002-03시즌 7350만 유로의 적자를 봤고 1년 만에 적자액은 1억1880만 유로로 늘었다.
2003-04시즌 도르트문트의 부채는 분데스리가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2004-05시즌이 끝났을 때 1억3470만 유로의 적자를 낼 것이라는 예상이 뒤따랐다.
독일 언론들은 “도르트문트가 파산 위기에 몰렸다”고 보도했다. 몇몇 선수는 급여를 제때 받지 못하자 훈련에 불참하고 공개적으로 이적을 요구하는 등 구단 측과 갈등을 빚었다. 1996-97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유럽 축구를 호령했던 도르트문트는 더 이상 없었다.
지난여름 이적시장에서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이영표의 지인은 “도르트문트가 최근까지 침체기를 겪은 것은 사실이다. 파산 위기에 몰렸던 앞뒤 사정은 국내에도 전해져 많은 팬이 알고 있다.
(이)영표가 토트넘에서 마지막 순간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해 그렇고 그런 팀으로 이적하는 걸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회생
도르트문트에 다시 봄날이 찾아오고 있다. 도르트문트는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파산 위기를 넘겼다. 채권단과의 지불 유예 협상을 통해 급한 불을 껐고 뒤셀도르프 채권은행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베스트팔렌 슈타디온 기금 소유자들은 고액의 부채를 떠안은 명문 클럽의 재건 계획을 승인했다. 선수단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한때 60%까지 치솟았던 인건비 비율을 조금씩 줄여 나가고 있다.
몸값이 높은 선수들은 하나둘 팀을 떠났다. 2006-07시즌 아스날로 이적한 로시츠키는 다른 선수들보다 오래 도르트문트에 남아 있었다. 이들이 떠난 빈자리를 연봉은 낮아도 재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선수들이 메웠다.
FSV 마인츠에서 차두리(28,TuS 코블렌츠)와 인연을 맺었던 위르겐 클롭(41) 감독이 올 시즌 도르트문트의 지휘봉을 잡았다.
클롭 감독은 한때 방만한 운영으로 위기를 겪은 도르트문트가 지난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경영 방침에 잘 따르고 있다.
클롭 감독은 지난 8월 문을 닫은 여름 이적시장에서 공격수 믈라덴 페트리치(27)와 함부르크 SV에서 뛰던 모하메드 지단(27)을 맞트레이드했다.
크로아티아 대표선수로 ‘유로 2008’에서도 활약한 페트리치는 지난 시즌 도르트문트에서 리그 28경기에 나서 13골 2도움을 올렸다. 반면 함부르크 SV의 지단은 리그 8경기에 출전해 2골2도움을 올리는 데 그쳤다.
함부르크 SV가 남는 장사를 했다는 게 현지 반응이지만 도르트문트는 지단과 함께 상당액의 현금을 챙기는 실속을 차렸다.
클롭 감독은 “지단은 날개뿐만 아니라 공격수로도 뛸 수 있다. 마인츠 시절 데리고 있던 선수여서 플레이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 페트리치의 공백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도르트문트행을 결정한 이영표도 클롭 감독의 지도력에 마음이 끌렸다. ㈜지쎈의 류이사는 “(이)영표가 도르트문트 이적을 결심한 데에는 클롭 감독과 한솥밥을 먹었던 차두리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두리가 얘기하기를 클롭 감독은 데이터를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이라고 했다. 그 말은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소신 있게 선수단을 운영한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도르트문트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러 군데의 도르트문트 팬샵을 발견할 수 있다. 홈구장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이나 도르트문트에서 멀리 떨어진 브라켈 훈련장 근처뿐만 아니라 도심 곳곳에 도르트문트 팬샵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공통점이 많은 도르트문트(위)와 겔젠키르헨(아래)은 그래서 경쟁의식이 더욱 고취됐다.(사진 김덕중 기자)
팬샵을 찾는 도르트문트 홈팬이 꽤 많다는 증거다. 자신을 “뿌리부터 도르트문트 팬”이라고 소개한 플로리안 지글러(32) 씨는 “지난 시즌 도르트문트는 리그 13위에 머물렀지만 올 시즌은 2승2무(9월 25일 현재 2승2무1패, 리그 10위)로 출발이 좋은 편이다. 아직도 빚이 남아 있지만 계속 갚아 나가고 있고 지금은 자금 사정이 꽤 좋아졌다. 도르트문트 팬들도 얼마 전까지는 클럽의 자금난 등 무거운 주제의 얘기를 나눴지만 힘들었던 시간은 지나갔다. 이제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선수나 경기 내용 등에 대한 얘기를 주고 받는다”고 말했다.
독일 최대의 축구 전쟁 '루르 더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샬케 04의 경기는 분데스리가 최고의 더비전으로 꼽힌다. 보통 ‘루르 더비’ ‘레비어 더비’라고 부른다.
두 구단의 연고지인 도르트문트와 겔젠키르헨의 거리가 짧은 만큼 여러 공통점을 안고 있다. 이런 점이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을 더욱 고취했다.
두 도시는 독일에서도 가장 열정적인 축구 팬을 안고 있다. 도르트문트는 지난 시즌 홈경기 관중 수 1위를 기록했고 샬케 04는 관중 점유율 1위에 올랐다.
두 도시의 많은 거주자가 광산 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개신교 신자가 많다는 종교적인 공통점도 갖고 있다.
두 팀의 치열한 경쟁의식은 보쿰, 빌레펠트, 쾰른, 레버쿠젠 등 지역적으로 가까운 다른 팀들과 새로운 라이벌 관계를 만들기도 했다.
도르트문트와 샬케 04의 라이벌전은 1920년대에 시작됐다. 초창기에는 샬케 04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920년대의 샬케 04는 독일에서 가장 기술적인 축구를 하는 팀이었고 성적도 좋았다.
1925년 5월 3일(이하 현지시간) 열린 두 팀의 역사적인 첫 경기에서 샬케 04는 도르트문트를 4-2로 꺾었다.
1940~50년대에는 도르트문트가 샬케 04에 앞섰다. 프로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1960년대 이후에는 두 팀의 실력이 엇비슷했다.
샬케 04가 도르트문트 원정길에 올라 5-2로 이긴 1991년 8월 24일 경기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두 팀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샬케 04는 도르트문트와 130번 맞대결을 펼쳐 52승33무45패로 근소하게 앞서 있다.
올 시즌 ‘루르 더비’는 9월 13일 도르트문트 홈구장에서 열렸다. 이날 경기는 이영표(31)의 도르트문트 데뷔전이기도 했다.
이영표가 교체 없이 90분을 뛴 이 경기에서 도르트문트는 후반 초반까지 0-3으로 끌려갔지만 막판 대반격에 나서 3-3으로 비겼다. 이영표는 “경기장을 가득 메운 8만여 명의 홈팬들 앞에서 뛰었는데 월드컵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위르겐 클롭과 차두리
2006-07시즌 FSV 마인츠 소속이던 차두리는 오른쪽 공격수에서 오른쪽 수비수로 자리를 바꿨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당시 마인츠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위르겐 클롭 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감독은 “차두리의 수비력이 뒷받침되면 안 될 게 없지 않느냐. 차두리가 측면 수비수로 뛰면 공격에 가담했을 때 그의 장점을 더욱 살릴 수 있다”며 자신의 판단을 밀어붙였다.
차두리는 유럽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신체 조건과 스피드 그리고 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줄곧 공격수로만 뛰어 수비수로 뛰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약점도 있다.
대인 방어는 그럭저럭 하겠지만 협력 수비와 커버플레이에 필요한 움직임은 하루아침에 익히기 어렵다.
공격수로 움직일 때와 수비수로 움직일 때 다리 근육이 다르다는 설명도 나왔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차두리를 수비수로 기용하겠다는 클롭 감독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1년 만에 중단됐다.
클롭 감독은 2006-07시즌이 끝난 뒤 독일 라인-마인 지역신문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인터뷰에서 “차두리의 수비수 변신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이어 차두리의 공격수 복귀를 예고했지만 새로운 스트라이커를 영입해 아예 새 판을 짰다. 차두리는 그해를 마지막으로 마인츠를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영표의 지인은 “이영표가 도르트문트로 이적하기에 앞서 클롭 감독이 차두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영표는 어떤 선수냐’며 이것저것 물어봤다고 한다. 이영표의 이적에 차두리가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차두리를 수비수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파격적이었다. 클롭 감독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놓곤 한다. 아니다 싶으면 질질 끌지 않는다.
차두리의 수비수 기용을 1년 만에 포기했으니 의사 결정도 빠른 편이다. 클롭 감독은 늘 자신감에 차 있다.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선수들과 격의 없이 지낸다. 선수보다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고 비시즌에는 TV 해설도 한다.
홈경기에서 이기면 관중석으로 뛰어들어 메가폰을 잡고 응원 구호를 외칠 만큼 적극적이다. 변화가 필요했던 도르트문트가 올 시즌 지휘봉을 클롭 감독에게 맡긴 이유다.
첫댓글 도르트문트는 명문 임에도,,, 성적은.....선수진도 ..... 경기장도 크고 관중이 많으면 돈이 좀 들어오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영입이 가능할텐데......이상한팀중 하나.....(전부 제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