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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전시기간 : 2025-08-14~2025-10-12
o 전시장소 : 2층 기획전시실Ⅰ·Ⅱ
동궐도안(東闕圖案) 국보, 고려대학교 소장.
동궐도안(東闕圖案) 대조전(大造殿) 권역. 국보, 고려대학교 소장.
창덕궁 조감도
창덕궁 희정당・대조전・경훈각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 경훈각
국립고궁박물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이하여 궁궐을 장식한 마지막 궁중회화(宮中繪畫)인 창덕궁(昌德宮) 내전(內殿)의 희정당(熙政堂), 대조전(大造殿), 경훈각(景薰閣) 벽화를 한데 모아 소개한다.
순종 황제가 집무실 겸 접견실로 사용했던 창덕궁 희정당.
대청마루의 동쪽 벽은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로,
서쪽 벽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로 장식돼 있다.
사진 속 그림은 모사도, 원본을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에서.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 1874∼1926)이 정무를 보던 창덕궁 희정당. 그 동서쪽 벽은 원래 장대하게 펼쳐진 금강산 그림으로 장식됐다. 깎아지른 돌기둥이 무수히 모인 아래로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이 그림의 화폭 모서리엔 ‘김규진(金奎鎭) 근사(謹寫·삼가 그려 올린다)’라는 한문이 ‘총석정절경(叢石亭絶景)’이라는 제목과 나란히 적혔다. 서화가 김규진이 1920년 완성한 이 그림은 조선 말 궁중 회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작품들엔 근대화의 영향이 고스란히 담겼다. 원래 조선의 궁중 화가는 그림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이홍주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근대적 미술교육을 받은 젊은 화가들은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자아를 드러냈다”며 “궁중 회화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전에 없던 대형 화면으로 구성한 것도 특별한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 벽화들은 각각 너비가 525cm에서 882cm에 이르는 대작이다. 높이 역시 2m 안팎으로 장엄한 멋이 느껴진다. 1917년 화재로 창덕궁이 모두 불탄 뒤 1920년 건물을 재건하면서 제작됐다. 비단에 그린 뒤 종이로 배접하고 이를 벽에 부착한 ‘부벽화(付壁畵)’다.
순종(純宗)과 황비 순정효황후(皇妃 純貞孝皇后, 1894∼1966)가 서재 겸 휴식 공간으로 썼던 경훈각의 벽화 2점은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른 아침의 청록빛이 아름다운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와 저녁 무렵의 붉은빛을 담은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로, 모두 속세 밖의 선경(仙境)을 묘사했다.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와 거북을 든 동자 등이 등장한다.
전시는 벽화마다의 상징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황제 부부의 침전인 대조전을 장식했던 ‘봉황도(鳳凰圖)’와 ‘백학도(白鶴圖)’도 전시됐다. ‘봉황도’에 그려진 봉황 10마리는 부부의 화합을 상징한다. 정용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백학도를 두고 “학은 십장생 중 하나로 궁중 회화의 단골 소재”라고 했다. 백학도는 밑그림도 볼 수 있다.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 창덕궁 희정당의 동쪽 벽에 부착되어 있던 벽화,
비단에 채색, 195.5×882.5cm, 창덕28009, 국가등록문화유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庚申初夏 因昌德宮熙政堂壁畵事 奉命入金剛之路 經到通川庫底 登叢石亭 觀水石之天下絶勝 駕小舟寫其全景起草 轉向金剛 周覽名勝各處數幅 而歸家乃引伸模寫 此畵及萬物肖全景 進獻掛御壁 留此草本 以供後人之記念 海岡
경신년 초여름에 창덕궁 희정당 벽화일로 인하여 명을 받들고 금강산에 들어가는 길에 통천군 고저면에 이르러 총석정에 올라가 수석이 천하에 절승함을 보고 작은 배를 타고 그 전경을 그리어 초본을 만들고 금강산으로 향하여 그 명승의 각처를 돌아보고 몇 폭을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이를 확대하여 그리어 이 작품과 만물상 전경을 나라에 바치어 궁 안벽에 걸고 이 초본은 남기어 후세의 기념으로 하다. 해강.
김규진(1868-1933), ‘해금강총석도(海金剛叢石圖)’, 1920년,
종이에 채색, 37.0×335.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참고작품]
<해금강총석도(海金剛叢石圖)>는 1920년 6월 경 김규진이 희정당 벽화 제작을 의뢰받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금강산을 돌아보고 사생한 것을 모아 제작한 것이다. 제발문에서 알 수 있듯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바다 쪽에서 보이는 총석의 전경을 수평으로 긴 화면에 펼쳐 그렸다. 간결한 필선을 활용한 묘사와 드넓은 바다를 여백으로 처리한 점 등에서 초본으로서의 성격을 보이나, 경물들의 배치와 각 총석들의 형태가 실제 경관에 가까워 벽화의 근간으로 삼기 위해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1913년에 간행된 『조선 금강산사진첩』에 수록된 총석정 사진과 비교해 보면 총석정의 절경을 시선에 충실하게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배경의 언덕에 비해 돌기둥의 높이를 조금 높여 총석의 특징을 강조하였다.
김규진, ‘총석정도(叢石亭圖)‘, 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78.0×25.5cm, 개인 소장.
총석정 전체 풍경 중 수직으로 높게 솟은 바위 부분만을 클로즈업하였다. 세로로 긴 화면과 수면 가까이 낮게 설정된 시점이 주상절리로 생겨난 돌기둥의 수직적 괴량감을 강조한다. 희정당 벽화 <총석정절경도>와 바위 및 물결, 바위 기둥 사이로 보이는 산의 윤곽선 등을 표현한 필치와 채색 기법이 거의 유사하나 조금 더 자유롭고 능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벽화와 유사한 시기 또는 조금 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7언시를 적고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이라고 자호하였다.
✺ 총석정도[叢石亭圖]
奇石怪岩千萬叢(기석괴암천만총)
기이한돌과 바위 천만 겹이니
自然雕啄出天工(자연조탁출천공)
자연스러운 조탁은 하늘이 빚어낸 것이로다.
應是龍宮建築後(응시용궁건축후)
응당 용궁을 지은 후에
更將餘者積波中(경장여자적파중)
남은 것을 저 파도 속에 쌓은 것이라네.
―萬二千峰主人(만이천봉주인) 海岡 金圭鎭(해강 김규진) 그림(畵) 시(詩)
*彫(雕)啄 : 보석과 같이 단단한 것을 새기거나 쫌.(雕=彫 : 새길 조 啄 : 쫄 탁) 문장이나 글 따위를 매끄럽게 다듬음.
•희정당 대청의 동쪽 벽을 장식했던 벽화이다. 그림의 주제인 총석정叢石亭은 금강산 북쪽 강원도 통천군 동해안에 위치한 정자이며, 해변을 따라 빽빽하게 솟은 주상절리 지형의 돌기둥들이 이루는 빼어난 경치를 의미하기도 하다. 이 벽화는 바다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졌다.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높고 낮은 총석과 그 뒤로 보이는 언덕 위 총석정의 경치가 수평의 화면에 펼쳐져 있다. 이 그림의 왼쪽 위에는 ‘叢石亭絶景(총석정절경)’이라는 제목과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삼가 그렸다는 묵서와 낙관이 남아 있다. 이는 근대기에 작가 개인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시작한 흐름을 반영한다. 황실의 명을 받았던 김규진은 직접 금강산에 들어가 총석정 전경을 스케치하였으며, 돌아온 직후 이 벽화를 그렸다.
해강 김규진 ‹해금강총석›은 서화가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반전의 면모가 돋보이는 인물이다. 요즘 말로 ‘얼리 어답터’라고 할까? 그는 1885년 18살의 나이에 청나라로 건너가 8년간 중국의 서화를 공부하였고 1907년에는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와 종로에 ‘천연당사진관’을 열었다. 이 밖에도 당시 교재로 사용되던 중국 화보 대신 『서법진결(書法眞訣)』, 『해강난죽본』 등 교본을 제작해서 남겼고,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이라는 일종의 화랑을 열어 운영하였다.
1920년 황제의 집무실인 창덕궁 희정당에 벽화를 제작하는 계획에 따라, 김규진은 서화연구회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순종은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희정당에 ‘순 조선식 벽화’를 요청했다고 한다. ‹해금강총석›은 창덕궁 희정당 벽화인 ‹총석정절경도›의 초본이다. 김규진은 동쪽 벽에는 해금강의 총석정을 그린 ‹총석정절경도›를, 서쪽 벽에는 외금강의 바위를 묘사한 ‹금강산만물초승경도›를 남겼다. 왼쪽 상단의 글을 보면 직접 금강산에 답사를 나가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는 금강산에 가 볼 수 없지만, 창덕궁에 갈 기회가 있다면, 희정당에 들러서 이 그림의 원화를 찾아볼 수 있다.
「동서양의 넓은 세계 이런 선경仙境 또 있을까
송풍낙엽松風落葉 깔고 앉아 차가운 술 기울여서
한잔 두잔 먹고 나니 인간세상 끊어지고 봉래선인蓬萊仙人 되었구나」
―김규진(金圭鎭, 1868-1933), 『금강유람가(金剛遊覽歌)』 중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국가등록문화유산),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920년대, 비단에 채색, 883×205.1cm. (창덕궁 희정당의 서쪽 벽에 부착되어 있던 벽화)
•희정당 내부 서벽 상단에 장식된 <금강산만물초승경도>로, 기둥머리의 공포 윤곽을 따라 화폭의 좌우상단 모서리가 재단되어 있다. 화면 전체에 붉은 색 단풍으로 물들고 구름으로 둘러 싸인 금강산의 가을 전경이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졌다. 정면관과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한 화면구성이나 바위의 표현법은 조선시대 금강산 실경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좌측 두번째 화폭 상단에는 '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묵서로 적혀 있다.
천연당사진관, 한국 최초의 상업 사진관,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8년~1933년) 선생에 의해 1907년 설립
한국 최초의 상업 사진관은 1907년 해강 김규진 선생에 의해 설립된 천연당사진관이다. 영친왕의 서필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신문물과 커피를 사랑했던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으로 사진유학을 떠나게 된다. 고종은 특히 사진과 커피를 좋아했고 근대의 발명품인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사진관은 1900년도 초반부터 성황을 이루어 1990년 때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점차 사라져 간다. 황실 사진가였던 이 세트장은 문화역서울284(舊 서울역사 귀빈실) 2018년 12월부터 2019년 02월까지 커피사회 전시[Winter Coffte Club] 장에 재현한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이다.
창경궁 '백학도 초본(白鶴圖 抄本)', 김은호, 1920, 종이에 먹과 유탄, 259.6×489.6cm, 국립고궁박물관.
백학도 초본(白鶴圖草本, Draft Sketch of White Cranes)은 후손들이 수년 전 김은호의 유품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초본草本은 화가가 최종 완성본인 정본正本을 구상하기 위해 먼저 그리는 그림을 의미한다. 김은호는 〈백학도〉를 제작하기에 앞서 화면을 구획하고 도상을 선택 하고자 초본을 제작했다. 그림 사이에 남겨진 메모와 붉은 기준선은 이 작품이 연습용 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김은호는 그림을 그릴 때 수많은 초본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초본 200여 점이 현재 까지도 남아 있다. 화면 가장 좌측에 희미하게 그려진 5마리의 학은 화가가 다양한 자세를 실험 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김은호는 초본의 구성을 정본에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이후 작업에서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거나 구도를 유연하게 변형했다. 그는 초본에 그리지 않았던 달, 구름, 불로초(영지) 등을 〈백학도〉에 새롭게 그려 넣었다. 이처럼 〈백학도 초본〉은 김은호의 작품 구상 과정과 화학적 실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김은호가 소장했음을 보여 주는 낙관이 남아 있다.
창덕궁 대조전 벽화 <백학도> (金殷鎬 昌德宮大造殿壁畵 <白鶴圖>), 비단에 채색, 1920년,
김은호, 각 폭 577×198cm, 창덕궁 대조전 서벽, 국가등록문화유산,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대조전 벽화 <봉황도> (金殷鎬 昌德宮大造殿壁畵 <鳳凰圖>, 비단에 채색, 1920년,
오일영(吳一英)․이용우(李用雨), 214×578cm, 창덕궁 대조전 동벽, 국가등록문화유산,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의 동쪽벽의 <봉황도(鳳凰圖)>(위)와 서쪽 벽의 <백학도(白鶴圖)>(아래) . 이 두 그림은 쌍으로 기획된 것이다. 대조전 동쪽에는 ‘봉황도’, 서쪽에는 ‘백학도’를 배치했다. 각각은 독립적인 그림이지만 해와 달을 분리해서 장생도(長生圖)를 둘로 쪼갠 효과를 냈다.
창덕궁 대조전 내부 벽면을 장식한 그림이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영역에 있으며, 순종황제 부부의 침전 공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1917년 창덕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외형은 전통식으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절충해 재건하는 과정에서 1920년 대조전의 동서벽에 화조화인 봉황도와 백학도를 벽화로 장식하였다.
동쪽 벽 <봉황도>는 10마리의 봉황과 바위, 폭포, 모란, 오동나무 등을 화려히 표현해 왕실 생활공간에 어울리게 했다. 서쪽 벽의 <백학도>는 16마리의 백학과 소나무, 달, 구름, 돌, 물, 영지(靈芝), 모란[牧丹] 등의 십장생(十長生)을 표현했다.
봉황은 예로부터 군왕의 덕치(德治)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서 그림의 소재와 각종 의례 용품 등의 문양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대조전 대청 동쪽 상단 벽에 그려진 이 그림은 태양을 마주하는 골짜기에서 태어나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산해경(山海經)》속 봉황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 외에도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나리꽃, 청록화풍(靑綠畵風)으로 표현된 바위 등이 극채색(極彩色)으로 함께 그려져 벽화 전체에 화려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대조전 대청의 서쪽 벽을 장식했던 벽화이다. 왕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중 하나인 학 16마리가 흰 보름달이 떠오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정수리가 붉은 학[丹頂鶴]은 일반적으로 장수를 뜻하며 소나무, 모란, 바위, 불로초 등 십장생 그림의 소재 역시 국왕 부부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한다. 이런 이유로 소나무와 학은 궁중 장식화의 소재로 즐겨 그려졌다. 이 밖에도 곧게 뻗은 소나무의 이파리, 상류에서 흐르는 물줄기[溪流], 정교하게 묘사된 모란의 꽃잎 등은 화가가 자연물을 묘사하는 데 능숙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또한 회색빛을 띠는 재두루미는 작품에서 다양한 색감을 느끼게 합니다. 화면의 왼쪽 끝에는 김은호金殷鎬(1892~1979)가 삼가 그렸다는 묵서와 낙관이 남아 있다. 김은호는 1912년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 편입학하여 안중식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 문하에서 전통 화법을 배웠다. 입학한 직후 어린 나이에 순종의 어진御眞을 그렸던 김은호는 이후에도 세조·원종의 어진을 모사하여 ‘어진을 그린 최후의 화원’으로 불렸다.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 국가등록문화유산), 이상범(李象範), 1920년,
비단에 채색, 184×526㎝. 창덕궁 경훈각 내의 서벽 상단에 장식(상인방에 해당함)
•대조전과 희정당 벽화보다는 작았지만 큰 스케일의 산수도를 파노라마처럼 그린 것이다.「삼선관파도」와「조일선관도」는 모두 중국의 전설을 청록산수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화면 왼쪽에 세 신선들이 바다의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로의 나이를 자랑한다는 ‘삼인문년(三人問年)’과 비슷한 내용을 그린 것이다. ‘삼인문년(三人問年)’은 북송의 문인인 소식(蘇軾)의『동파지림(東坡志林)』에 근거한 내용을 회화화한 것이다. '한 신선은 자신이 천지를 개벽한 창조자인 반고(盤古)의 친구라 하고, 두 번째 신선은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해 생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될 때마다 가지 하나씩을 올려 놓았던 집 한 채와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를 가리키며 나이를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 세 번째 신선의 나이를 상징하는 천도(天桃) 나무가 보이는데, 세 번째 신선은 3000년 만에 한 번 열매 맺는 천도를 먹고 뱉은 씨앗이 곤륜산(崑崙山) 만큼 높아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인 안중식, 조석진의 전형적인 산수화법을 보여주며 멀리 산이 부분 부분 붉게 물들어「조일선관도」와 대비되는 저녁 무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나이 자랑하는 세 신선의 허세 (三老語)
https://cafe.daum.net/201s/AYJ5/8590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 국가등록문화유산), 노수현(盧壽鉉), 1920년,
비단에 채색, 184×516㎝. 창덕궁 경훈각 내의 동벽 상단(상인방에 해당함), 국립고궁박물관.
•「조일선관도」에는「삼선관파도」에 비해 산이 더 진한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는 아침 해에 그늘져 더욱 짙어진 초록빛을 보여주는 듯하다. 바위산은 날카롭고, 그림 속의 한 동자는 천도 가지를 메고 있고, 다른 동자는 연잎에 거북을 싸서 들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의 고사인물도인 이 그림은 집, 나무, 산, 바위, 인물 등의 묘사가 모두 전형적인 공필 화원 화풍으로 흰색과 검은 태점이 청록색의 암석을 강조하며, 대담하고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모두 장수를 상징하는 모티브들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자연과 함께 묘사되었다.
경훈각 대청의 동쪽 벽을 장식했던 벽화이다. 이 작품에는 아침 해가 떠오른 신선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그림 곳곳에는 복숭아, 연잎 위의 거북, 두 명의 동자, 신선의 전각 등 길상적인 상징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무병장수를 바라며 제작되었던 축수화祝壽畵에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동자들이 걷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따라가면 신선이 머물고 있는 전각이 등장한다. 속세를 벗어난 공간은 선명한 청록색으로 칠해졌다. 멀리 학이 날아가는 하늘 위로 붉은 아침 해가 떠오르며, 환상적인 신선 세계의 풍경이 화면에 펼쳐진다. 넓은 화면에 청명한 새벽의 산수풍경은 세밀한 붓질과 화려한 색채로 장식되어 있다. 화면의 왼쪽 끝에는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이 삼가 그렸다는 묵서와 낙관이 남아 있다. 심산心汕 노수현은 1918년 서화미술회를 졸업하고 안중식의 화실 경묵당耕墨堂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안중식의 아호 ‘심전心田’의 ‘심心’자를 물려받아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안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장식적인 전통 청록산수화이다.
김하종(金夏鐘, 1793-미상), 〈환선구지망총석도(喚仙舊址望叢石)〉, 《해산도첩(海山圖帖)》,
19세기, 비단에 채색, 29.7×43.3cm,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적품]
정선(鄭敾, 1676-1759), 〈정양사(正陽寺)〉, 17-18세기, 종이에 채색, 61.5×22.7cm,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작품]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문화유산청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정보,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yil207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