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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왕하 1: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 아합은 분명히 아람 왕에게 죽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모압이 독립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나라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라고 외치는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 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 모압이 이렇게 배반을 하고 독립을 하는 것은, 모두 다 여호와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결코 모압이 잘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만 제대로 잘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처리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만 완전히 개판이라는 것이다.
* 열왕기하 1장의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아합의 뒤를 이은 아하시야가 왕이 되는데, 그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는데, 그런데 이것을 고치려고 이방나라 에글론의 신인 바알세불에게 간다는 것이다. 이를 알고 엘리야가 책망을 하는데, 왕은 반드시 그대로 죽는다는 것이다.
(왕하 1: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 이에 왕이 격분해서 오십부장과 오십인의 군대를 보내는데, 그런데 이들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죽는다는 것이다. 다시 보낸 오십부장과 오십인의 군대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갈멜산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을 왜 자꾸 잊어버리느냐는 것이다. 드디에 세 번째는 살지만 말이다.
(왕하 1:13) 왕이 세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낸지라 세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 이제 2장으로 넘어가서, 엘리사가 등장하는데, 그런데 이 열왕기하 2장을 부흥사들이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갑절의 능력을 받는 장면 때문이라는 것이다.
(왕하 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 그러나 능력을 갑절로 받으려고 하면, 순교를 그 만큼 앞당겨서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능력만 받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슨 빼먹는 곶감인가? 제대로 하려면, 빨리 외치고 빨리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무엇이 능력인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려지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이것이 바로 능력이 아닌가?
* 엘리야가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그런 고난을 받아가면서 할 일을 한 것처럼, 엘리사도 갑절로 능력을 받아서 그 보다 더욱 험악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이렇게 능력을 갑절로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나의 후계자이다' 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엘리사가 엘리야가 갔던 그 길로 가겠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그런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것이다. 엘리야는 어디서 받았는가? 갈멜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갈멜산이라는 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방나라에는 그 지역마다 특정한 신이 있는데, 길르앗도 아니고, 벧엘도, 여리고도, 그리고 요단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받았던 그 능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그것은 엘리야가 죽을 때에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그 원천이 바로 '하늘나라' 라는 것이다. 그 하늘에서 갈멜산으로 불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들과 그 사명은 모두가 원래에는 하나님에게 있었는데, 그것이 엘리야에게 이 땅에서 고난받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 만약에 말 그대로 능력을 두 배로 받았다면, 아마도 엘리사는 죽을 때 쌍두마차가 끄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망하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뒤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 마지막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고 말이다.
* 다시 요약하면, '엘리야' 라는 선지자는, 국가가 둘로 나누어져서 망하게 된 상태에서 나타난 최초의 선지자이며, 동시에 모든 선지자를 포괄하는, 전(全) 선지자라는 것이다.
* 그래서 이 나누어진 두 나라가 망할 때가지 계속해서 나타나는 모든 선지자들이 다 이 엘리야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래서 말라기에 보아도 앞에 있었던 엘리야가 온다고 예언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이 엘리야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 엘리야의 본적은 하늘이고, 지상에서의 모습은 고난이다 !!
*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이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엘리야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죽는 모습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엘리야는 죽을 때까지 자기의 행동이 하나의 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에녹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불수레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심판을 말하는 것인데, 이 나라는 이렇게 불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50명씩 두 번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죽듯이 말이다. 이 심판의 모습이 바로 지상에서는 고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불로서 강림한다는 것은, 이미 사무엘하 22장에서 다윗이 예언한 것인데, 그 뜻은, 다윗의 명령대로 살지 아니하면 이 나라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삼하 22:8)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삼하 22:9)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삼하 22:10)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 그러한 불로서 심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엘리야가 먼저 왔는데, 그래서 엘리야는 이 땅에서는 고난을 받았고, 죽을 때에는 불 수레를 타고서 다윗이 말한 그 원천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뒤에 등장하는 엘리사를 비롯한 다른 모든 선지자들은 전부가 엘리야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제1, 제2, 제3, 제4, 제5의 엘리야로서 계속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 엘리야의 임무는, 그 당시에 제대로 된 왕이 없으니까, 제대로 된 왕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후손으로 말이다.
*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아들이라는 것은 바로 다윗언약에 있어서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아들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우리들의 진정한 왕이라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분이 오시는 길을 닦는 자에 불과한데, 이것은 바로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자이다 !!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아니하면 자기의 말도 믿지 않는다' 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엘리야가 말씀을 나누는데, 그 내용이 바로 '별세' 라는 것이다. 즉, 죽음이라는 것이다. 물론 죽음이 전부가 아니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을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구약의 말씀이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서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 성경이 그냥 좋은 말만 기록된 종교서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성취와 그 과정이 차곡차곡 담겨져 있는 참으로 희한한(?) 책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말이다. 만약에 사람이 기록했다면, 좋지 않고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다 제외시키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소설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적어놓은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매끈하게 다시 새롭게 적어놓았는지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 열왕기하에서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엘리야는 여러 땅의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다른 선지자들을 고발하기 위해 온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가 말하기를, 엘리야가 지금은 없다고 하니까, 다른 선지자들이 믿지를 않고 오십인을 보내서 사흘을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 이 말의 의미는, 엘리야는 자기의 출신이 길갈도 아니고, 벧엘도 아니고, 여리고도 아니고, 그리고 요단강도 아니라는 것이다. 엘리야가 [길갈→벧엘→여리고→요단강]을 가는데, 계속해서 따라다니는데, 그런데 엘리야가 요단강을 찾아갔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가나안 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 이것은 바로 기존의 이스라엘이 아닌, 전혀 새로운 상태의 이스라엘을 건설하기 위해서 엘리야가 왔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이전에는 이방나라의 시절이기에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는데, 일단 요단강을 건넌 다음에는 [길갈→벧엘→여리고] 라는 것은, 그 이전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그 순서를 그대로 반복했다는 것이다. 이 반복한 것을 역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 처음에 길갈에서 할례를 행해서 수치가 드러나고, 그리고 나서 유월절을 행하고, 그 다음에 여리고 성을 점령했는데, 사실은 여리고 성을 정복했으면 가나안 땅은 다 정복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법궤가 돌아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는데, 다른 성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엘리야 - 이 땅을 포기한 선지자 !!
* 엘리야가 이렇게 [길갈→벧엘→여리고]로 역순으로 해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엘리야는 심판하러 온 선지자이지 다른 어떤 출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다른 선지자들은 엘리야가 아직도 이 땅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포기하셨음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 나아만 장군을 치료함이 보여주는 것 - 하나님의 긍휼하심 !!
* 그렇다면 엘리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데, 자기도 당연히 엘리야처럼 이 땅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아만 장군을 긍휼로서 치료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나아만 장군에게 베풀어진 긍휼함에 도전한 자가 바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인데, 그래서 이방인들이 걸려야 될 문둥병이 게하시에게 걸렸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2장에서 엘리사가 엘리야가 떠나지 않겠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답변 - 그것은 원천을 계속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본질과 모든 것이 도출된 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엘리야는 어느 거룩한 땅 출신인가?' 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엘리야는 어느 거룩한 지역이 아니라, 그 원천이 '하늘나라' 라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그 원천을 밝혀 들어간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범죄한 자기 백성에게 불로서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기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불수레' 와 '불말'이고 말이다. 그래서 12절에서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엘리야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왕하 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 그러한 엘리야의 원천과 본질을 가지고서, 이제 엘리사가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가서 다시 고난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다. 엘리야처럼 말이다.
(왕하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왕하 2: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명을 찢었더라
* 그런데 아이들이 '대머리' 라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어린이 주일에 이것을 설명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대머리 사건'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엘리야처럼, 엘리사에게 있어서도 처음부터 곧바로 '심판' 이라는 것이다. 시작부터 박살을 내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 엘리사의 대머리 사건 - 처음부터 심판이다 !!
*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밖으로는 모압이 배반함으로 얻어터지고, 안에서는 엘리사가 찔러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 엘리사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경우들이 나오는데, 열왕기하 2장에서 소금을 뿌려서 물의 근원을 고쳐준 사건이 있었고, 4장에서는 그 유명한 선지생도의 어려움을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는 기적으로 해결해 주었다는 것이다.
(왕하 2:19)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왕하 2: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왕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왕하 4:1)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 여기서 열왕기하 4장을 보도록 하자.
(왕하 4:25) 드디어 갈멜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저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 지금 엘리사가 갈멜산으로 나아가는 것은, 엘리야가 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속해져 있다는 것이다.
(왕하 4: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왕하 4: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왕하 4: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 이렇게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리는 것은, 이것은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일을, 엘리야가 했던 것을 역시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왕하 4: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왕하 4:39)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 외를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서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저희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왕하 4:40)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 또 이렇게 독이 들어 있는 국을 끓이다가 큰 봉변을 당할뻔 했는데, 엘리사가 어떤 가루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그 가루를 국에 넣자 아무런 문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 엘리사가 기적 -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공격한다 !!
* 엘리사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기적을 베푸는데, 5장에서는 아람나라의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치고 말이다. 이렇게 엘리사가 기적을 베푸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적을 베풀면서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공격한다는 것이다.
◈ 나아만 장군을 치료함이 보여주는 것 - 어떻게 하면 이방나라를 이길 수가 있는가?
* 열왕기하 5장에서, 엘리사가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을 고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방나라인 아람나라를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이 아닌 이방나라의 군대장관, 즉, 직업이 군인인 사람을 고쳐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두머리를 말이다. - 군인을 고친다 !!
* 지금 이스라엘이 아람나라와 싸워서 박살이 나고 있는데, 그런데 엘리사는 혼자서 이긴다는 것이다. 칼로 이기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으로 이긴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이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을 이긴 다음에는 아람나라가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것이 열왕기하 6장으로 이어지는데, 아람나라가 전쟁을 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전술 전략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아보니 엘리사가 안방에 앉아서도 잘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냈는데, 그들이 그만 눈이 어두워져서 사마리아 성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잘 돌려보내라고 하는 것이다. 죽이지 말고 말이다.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에는 아람나라가 다시는 침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하 6:23) 왕이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고 저희가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 사실은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긍휼과 사랑으로 말이다. 이스라엘은 진작 이렇게 전쟁을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들이 이렇게 하지 못하니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전쟁 방법 - 긍휼과 사랑으로 !!
(왕하 7:19)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왕하 7:20)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 이제 열왕기하 7장을 보면, 이 7장에서 아람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네 명의 문둥이들이 등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버림받은 이 네 명의 문둥이들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이 살아나고, 이런 문둥이들을 무시했던, 그렇게 잘난 척을 했던 이스라엘의 한 장관이 죽는다는 것이다.
* 이렇게 엘리사는 선지 생도의 마누라, 그리고 문둥병자와 같은 불쌍한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자꾸만 다른 신을 섬기고 엉뚱한 짓을 하기에 이런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바라보니 무엇이 답답한고 하니까, 그냥 믿음으로 일을 진행하면 될텐데, 꼭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나중에 일이 되어도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경우를 종종 본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으면 그러한 믿음의 수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안 되면 말지' 라는, 다른 누구를 믿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꼭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을 그르치고, 나중에는 또 이것을 잊어버리고 말이다.
(왕하 8:20)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왕하 8:21)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 장막으로 돌아갔더라
* 이렇게 열왕기하 8장을 보면, 에돔 등, 이방 나라들이 다 이스라엘을 배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 이스라엘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총회나 노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위해서 행정적으로 서비스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면 다방에 앉아서 엉뚱한 짓이나 하지 말고, 자기는 못해도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잘 전하도록 도와주면 되는데 말이다. 총회나 노회의 임원이나 회원이 하나의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하 9: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왕하 9:2)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왕하 9:3)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지니라
* 열왕기하 9장의 이런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엘리사가 선지생도의 하나를 보내서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왕으로 세워서, 이 예후가 드디어 아합과 이세벨을 친다는 것이다. 즉,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예후가 착한 사람인가? 바알의 목상을 불사른다고 해서, 그것으로 화장실을 만든다고 해서 과연 우상이 없어지는가? 바로 그렇게 해서 우상을 없애겠다는 그 마음가짐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상은 그렇게 무엇을 부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단군 신상은?
* 이것은 바로 요즘 젊은 목회자들이 일어나서, 소위 바른 목회를 하자고 말하면서, 교단을 개혁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예후의 경우와도 어느 정도 그 맥이 서로 통하는데,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해서 바꾸어지겠는가?
(왕하 10:26) 바알의 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왕하 10:27)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당을 훼파하여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왕하 10: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왕하 10:29)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 이제 31절을 한번 보도록 하자.
(왕하 10:31)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 예후는 이렇게 엉터리인데, 그러면 왜 그렇게 바알의 목상을 헐면서 쇼(?)를 했는가? 그것은 바로 예후 개인의 사(私)적인 복수심에 의해서 라는 것이다.
* 이제 11장에 넘어가면, 점점 남쪽인 유다의 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북쪽 나라가 망하고, 이제 열왕기하 마지막에는 남쪽 나라가 망하는 모습이 나온다는 것이다.
* 북쪽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렇다면 남쪽은 괜찮은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아하시야의 모친인 '아달랴' 라는 여편네를 보면, 자기 아들이 죽었다고, 또 사적인 복수심으로 일을 그르친다는 것이다. 복수는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데 말이다.
(왕하 11:1)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왕하 11:2)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 이것을 신약학자 헨드릭슨은 말하기를, '악마가 다윗의 씨를 죽이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피해서 가져갔다' 라고 풍유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의 요한 계시록 주석에서 말이다.
* 12장을 보면, 이러한 아달랴를 죽이고 나서 등장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요아스 왕이 등장하는데, 그러면 요아스는 괜찮은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왕하 11:20)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왕하 11:21) 요아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칠세였더라
(왕하 12:1) 예후의 칠년에 요아스가 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사십년을 치리 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 우리는 이러한 열왕기상과 열왕기하의 말씀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우리들의 마음이 너무나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냥 말씀에 순종하면 되지, 왜 그렇게도 지지리도 못나게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내가 속해있는 교회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말씀대로 순종을 하는가? 과연 제대로 잘 하는가?
◈ 일단 권력을 맛본 사람은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
* 사람이 어떤 권력을 잡게 되면, 권력을 소유하기 전에는 별로 거기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데, 그런데 일단 소유를 하고 나면, 그것을 포기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을 하나 이루어놓으면 그것이 자기에게 유혹거리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 한 교회에 목사를 세 사람 정도로 두어서 돌아가면서 목회를 하자는 것이다. 당회장도 똑같이 기간을 나누어서 담당하고 말이다. '당회장, 부교역자, 사찰'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교인들에게 말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야, 시어머니가 세 사람이나 되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열왕기하의 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답답해하면서도, 그런데 막상 자기가 당회장이 되고 나면, '내가 아니면 이 교회는 안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부교역자일 때는 당회장 목사의 설교를 모두 일일이 다 비판을 하지만, 그런데 막상 자기가 그런 자리에 가면,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하고, 봐도 못 본 것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다.
* 왜 이러한 생각을 하는고 하니까, '이 교회는 바로 내 교회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가장 큰 문제점인데,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소유인데, 그런데 각 왕들이 그 자리에 오르고 나니까, 그만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아스를 비롯한 각 왕들이 처음에는 잘 하다가 자꾸만 옆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기 소유임을 착각하면서 말이다.
◈ 열왕기상, 열왕기하는, 12선지서와 함께 나란히 가고 있다 !!
* 이러한 왕들에게 누가 나타나는고 하니,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인간은 지적을 해주어도 안 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열왕기상, 열왕기하는 12선지서와 함께 나란히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쪽은 개판이고, 다른 한쪽은 이것을 고발하고, 이렇게 서로서로 견제하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왕하 13:10) 유다 왕 요아스의 삼십칠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년을 치리하며
(왕하 13:1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였더라
* 나름대로 잘 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요아스도 별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의 공격에 대해서 구해주어도 돌아서면 원위치라는 것이다.
(왕하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왕하 13:15)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 여기에서 요아스 왕이 엘리사에게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라고 말하는 것은, 엘리사가 참 이스라엘의 군대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열왕기하 2장 12절에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한 말과 똑같다는 것이다. 즉, 지금 엘리사는 엘리야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왕하 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 엘리사가 왕에게 적들을 치라고 하니까, 왕이 세 번을 치고 그쳤는데, 이것은 왕이 적을 쳐부수어야 하는 이스라엘의 사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냥 시키는 데로 마지못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스라엘이 적들을 적극적으로 쳐야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 번만 친데 대해서 책망하는 것이다. 5, 6회를 쳤으면 이겼다는 것이다.
(왕하 13:18)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번 치고 그친지라
(왕하 13: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리 처음부터 5, 6회를 치라고 가르쳐주면 안 되는가? 왜 3번을 치고 난 뒤에 이런 말을 하는가?
◈ 여호와 전쟁 -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
*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고 하니, 사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적을 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방의 적들은 3번을 치든지, 30번을 치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치고자 하는 그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과연 적을 치고자 하는, 그런 여호와 전쟁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런 이방 적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제대로 된 자기 백성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왕하 14:1)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왕하 14:2)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왕하 14: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왕하 14:4)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 열왕기하 14장에서, 아마사 왕이 왜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가? 그것은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일단 자기가 왕이 되고 나면 백성들의 눈치를 보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사울 왕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방나라라면 몰라도,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런데 그것을 왕들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자꾸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자기 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을 실망시키는 일을 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 왕들의 문제점 - 백성들의 눈치를 본다 !!
* 마치 이것은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사적인 자기 감정으로 교인들을 치는 설교를 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예후의 경우와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제 아무리 원수를 쳐부수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잘했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마음에 긍휼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쳐서도 안 되고 사랑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혹시 그러한 마음이 본문과 겹쳐서 생겨난다면, 그 본문은 그냥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해도 교인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미워해서 말하는지, 아니면 사랑해서 하는지 말이다. 사적인 감정이 없이 주님의 사랑으로 말하는지 말이다. 특히 장로들은 말이다.
* 질문 - 사랑으로 설교를 하는데, 사적인 감정으로 받아드리면 어떻게 합니까?
* 답변 - 그것은 그것이 아님을 설명할 길이 많은데, 다른 교인들이 증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도 그런 설교는 그 장로를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기 설교를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왕하 14: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권력과 또 유다 왕 아마샤와 서로 싸운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 이스라엘과 유다는 어떤 사이였는가? 처음에는 적들도 서로 사이좋게 같이 공격하는 협력하는 관계였고, 두 번째는 서로 독립하는 관계이고, 세 번째는 관계는 서로 싸우게 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열왕기하를 보면서, 새로운 왕이 아무리 등장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선지자가 나타나서 선배 왕들이 잘못했던 것을 아무리 지적을 해도, 인간은 태어나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부모들이 6.25때 자기들이 고생한 것을 아무리 말해도, 지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젊은 아이들에게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중요한 것이지, 6.25와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서 열왕기하 14:6 에 다음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
(왕하 14:6)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 이것은 바로 백날 새로운 왕들이 등장해도, 그놈이 그놈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이미 말한 것처럼, 인간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이다.
(왕하 14: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 14: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왕하 14: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 요나 선지자가 등장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여기에 나오는 여로보암을 제 2의 여로보암이라고 하는데, 이름을 모른다고 말이다. 이때 이스라엘이 매우 덩치가 컸지만, 그러나 영토가 크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서울에서 잘 사는 동네에 교회가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부산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성경에 다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 열왕기하 15장에서, 웃시야 왕이 등장하고, 그리고 16장에서는 아하스 왕이 등장하는데, 이 아하스 왕 때에 이사야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왕하 15:13) 유다 왕 웃시야 삼십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 달을 치리하니라
(왕하 16:1) 르말랴의 아들 베가 십칠년에 유다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 아하스 왕이 제단을 만드는데, 다메섹에 갔다가 있는 단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너무나 강하니까, 우리들도 그대로 하면 나라가 강해지겠다는 것이다. 이방나라의 흉내를 그대로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말이다.
(왕하 16:10)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 열왕기하 17장에 보면, 호세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이때 앗수르가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호세아도 다른 왕들보다는 조금 낫다고 했지만, 그러나 결국 우상을 섬기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를 위해서 섬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것은 바로 '자기를 위해서' 라는 것이다.
(왕하 17:1) 유다 왕 아하스 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년을 치리하며
(왕하 17: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왕하 17:16)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 드디어 17장 33절에 보면, 우상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여호와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포기하고 우상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항상 문제는 이렇게 양쪽 다를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왕하 17:33)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 바로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아닌가? 하나님을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믿지만 이 세상도 한번 믿어보겠다는 것이다. 한번 편하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의 취미고 오락이고, 생명보험 정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더 좋은 보험상품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꾸겠다는 것이다. 갔다가 재미가 없으면 오고, 왔다가도 재미가 없으면 간다는 것이다.
◈ 교회에 안 온다고 실망하지 말고, 교회에 온다고 좋아하지 말자 !!
* 그러므로 열왕기하에 나오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자기를 위해서 여호와를 섬기는 우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듯이, '그 아기는 나의 아기가 안 되어도 좋으니 살려만 주십시오' 라는, 오직 긍휼을 바라보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긍휼과 자비, 그런 정신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18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왕이 되는데, 그래서 제법 나라를 잘 다스렸는데, 그러나 이미 유다나라는 물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와 같은 왕을 세워서 신앙적으로 회복해주시는가?
(왕하 18:1)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왕하 18:2)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라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왕하 18:3)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 그러나 이스라엘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바벨론이라는 곳으로 장소를 이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 동안 약속의 땅에서 살다가, 이제는 바벨론 땅으로 가서 고난과 심판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그러한 조치를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신앙적인 붕괴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제는 유다가 망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유다나라만이 남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유다지파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다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19장에 보면, 앗수르가 포위를 했을 때에 전에는 왕창 망했는데, 그러나 히스기야의 경우에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없애주신다는 것이다. 한 영을 보내니 끝나는 것이다.
(왕하 18:13) 히스기야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
(왕하 19:1) 히스기야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왕하 19:6)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왕하 19:7)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앗수르이든지, 암몬이든지, 모압이든지, 바벨론이든지, 그 어떤 나라라고 해도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마음대로 요리할 수가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무서워하든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엄연히 계시는데 말이다.
*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이방나라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단 항명이고 뭐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에게 항명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지 말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왕하 19:30) 유다 족속의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가 서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왕하 19: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왕하 19: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저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왕하 19: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 여기에 남은 자가 나오는데, 이것이 이사야 6장에도 나오는데, '여호와의 열심'이 모든 것을 알아서 다 이룰 테니까, 앗수르라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앗수르의 군사 숫자가 185,000명으로 정확히 나오는데, 비록 이들이 아무리 많아도 모두다 송장과 같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제 아무리 숫자가 많고 그 겉모습이 멀쩡해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헛깨비이고 송장에 불과한 그들을 무서워하는가? 비록 그들이 목사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껍데기가 도대체 무엇이 두려우냐는 것이다.
* 사람을 무서워한다든지,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믿음이 없다는 소리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전쟁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으니,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로 그 역할만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 20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히스기야 살려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믿음인가? 때가 되면 죽으면 되지 말이다. 기도해서 살아난 히스기야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가?
(왕하 20: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왕하 20: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왕하 20: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 자기 나라의 모든 창고를 이방나라의 사자에게 다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짓을 할 바에야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살아있는 값을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왕하 20:12)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
(왕하 20:13)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해시계가 뒤로 물러나는 것을 증표로 해서 기적적으로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셨지만, 그러나 이러한 기적이 히스기야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결국 그도 죽었다는 것이다. - 열조와 함께 자니라 !!
(왕하 20: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왕하 20:21) 히스기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고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어떤 사람은 히스기야 이렇게 다시 살았기에 므낫세가 태어났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연대가 그렇게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히스기야의 생명연장은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 므낫세 - 역대 이스라엘의 왕 중에서 가장 악행을 많이 저지른 왕 !!
* 이제 열왕기하 21장에서 므낫세라는 왕이 등장하는데, 이 왕은 결정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악행을 저지른 왕이라는 것이다.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악행을 많이 한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유다를 포기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왕하 21:1)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왕하 21:2)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왕하 21:16)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 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왕하 21:17) 므낫세의 남은 사적과 무릇 그 행한 바와 범한 죄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 이 므낫세 뒤에 아몬이 왕이 되는데, 이 아몬은 악행으로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죽고, 요시아라는 괜찮은 왕이 나오는데, 이 왕은 성전을 수리하게 하고, 그런 과정에서 율법책을 발견해서 그 말씀을 듣고 옷을 찢고 회개를 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선 왕인 므낫세의 악행으로 말미암아서 회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므낫세가 또 제일 오래 동안 왕의 자리에 앉아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철저히 유다를 박살내고 있다는 것이다.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왕하 23: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 요시아 왕 - 남은 자를 만들기 위해서 !!
*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 것은, 이 므낫세 왕으로 말미암아서 유다는 멸망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왕 망하는 것이지만, 신앙적으로 축출물(엑기스?) 만들어서, 그곳에서 새로운 '남은 자' 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시아와 같은 말씀에 순종하는 왕을 두셨다는 것이다.
* 이 요시아라는 왕은 누가 예언한 적이 있는데, 유다에서 올라온 무명의 한 선지자가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요사야 왕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남은 자를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나라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끝이 나지만, 그러나 남은 자는 돌아온다는 것이다.
◈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 !!
* 이제 마지막 장인 열왕기하 25장을 보도록 하자.
(왕하 25:27)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이월 이십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왕하 25:28)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왕하 25:29)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왕하 25:30)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 여기서 바벨론 왕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메시야로 취급하는데, 그래서 이 바벨론 왕이 이스라엘을 살리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유다가 비록 범죄하고 타락을 해도 말이다.
* 우리가 이렇게 열왕기상, 열왕기하를 계속해서 살펴보았는데, 이제 결론적으로 몇 가지로 정리하고 마치고자 하는 것이다.
*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살펴보면, 그야말로 꼴아 박는(?) 족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계속 연속해서 낭떠러지라는 것이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마구 내리막길로 내리달려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늘에 구름처럼 다윗언약이 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꼴아 박는다고 할지라도 다윗언약은 떠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솔로몬부터 해서 다윗과 결별이 되는데, 나라가 쪼개지면서, 곤두박질하면서 말이다. 그나마 이 나라가 유지가 되는 것은, 즉,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은, 그 근거가 인간 왕에게서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요시아 왕이라고 해도 말이다.
* 뭔가 전혀 새로운 왕이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윗언약과 매치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처럼 썩어빠진 이스라엘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인간의 후손은 그 누구도 이러한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메시야가 와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열왕기상과 열왕기하 라는 것이다. - 말씀대로, 말씀대로 !!
◈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루신다 !!
* 이러한 가운데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등의 선지자들을 보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은 기존의 나라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같은 죄를 지적함으로 말미암아서, 이런 일을 선지자들이 감당하고, 또한 그들의 순교를 통해서,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한다는 것이다.
◈ 열왕기상과 열왕기하의 핵심은? - 죄란 다윗언약을 공격하는 것이다 !!
* 옛언약의 시대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인 다윗언약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데, 그렇다면 지금 종말에 있어서 죄란 무엇인가? 새언약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새언약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효도를 하고, 청소를 하고, 봉사를 해도 말이다.
* 그리고 고난이라는 것도, 양심대로 살고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을 하다가 받는 것이 고난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을 주장하다가 항명죄(?)로 걸린 사람만이 참된 주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이라는 것이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하늘의 계약과 지상의 죄악 사이에는 반드시 종들의 고난이 들어있다 !!
* 하늘의 계약과 지상의 죄악 사이에는 반드시 종들의 고난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하는 종말현상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세례요한도 죽고, 결국 예수님도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이러한 고난을 받은 자들이 24장로를 차지하는 것이다.
◈ 약속대로, 약속대로 !!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의 약속대로 원수를 쳐부수고, 자기가 택한 자들은 모두 다 구원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왕기상과 열왕기하의 메시지이고,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