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경남 양산시에 사는 친구가 창녕 어느 늪지- 아마 우포늪이리라-에 가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차디찬 물 위를 헤엄쳐 다니는 원앙들이 한결같이 짝을 지어 다니매, 옛사람들은 부부간의 금슬이 좋은 모습을 일컬어 원앙부부라 하였을 것이다.
약 2,000년 전부터 중국에서 사육되기 시작한 원앙새는 옛날 왕실이나 귀족들의 저택 정원 가운데 있는 연못 위에 으레 자리잡았을 만큼 우리들에게 친숙한 조류라 하겠으나, 실제에 있어선 그 새들을 직접 본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희귀한 새라고 한다. 이들은 평소에는 수십 마리 또는 수백 마리로 무리를 지어서 생활하지만, 성조(成鳥)가 되면 무리들 속에서 정해진 암수만이 짝을 이루어 보금자리를 꾸미고 새끼를 치는 습성이 있으매, 옛날부터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를 상징하는 징표로 여겨졌을 것이다.
인간세(人間世)에서 부부(夫婦)란 밤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들 중 하느님이 정해 주신 어떤 특별한 인연의 길을 따라 두 별이 만나서 이루는 관계이자, 이윽고는 한몸,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김광섭 선생의 '저녁에'란 시는 바로 그러한 인연을 노래한 것이리라...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렇게 소중한 만남으로 이뤄진 부부란 관계도,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허황된 욕심을 벌하고자 하느님이 일순간에 바벨탑을 무너뜨렸듯, 손바닥 안의 모래알처럼 흔적 없이 허물어진다. 그리곤 다시는 못 볼 원수가 되니, 우리가 언제 한 이불 속에서 같은 꿈을 꾸기나 했었던가 한 것처럼 말이다. 하니 인간들이 원앙을 꿈 꾸는 건 그냥 꿈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하듯 우린 영원히 서로 사랑하는 원앙이 되길 바랄 수밖에...가수 전영록씨의 '애심(愛心)'이란 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이렇게 맺고 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원앙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