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영의 전설 |
병사조카와 숙부인현감
어떤사람이 강진현에서 현감으로 근무하던중 친조카가 우연하게도 병마졸도사로 임명되어 병영에 부임해 왔다. 은행나무 목침 병영면 성동리에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황금빛 잎을 날려 만추의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던 옛날 어느 여름철에 폭풍이 휘몰아쳐 큰 은행나무의 크고 작은 가지들이 많이 부러졌다.이를 보고받은 병사가 부러진 큰가지를 성안으로 가져오게 하여 이로써 많은 가구를 만들게 했다. 이때 목침도 만들었는데 이것을 병사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목침을 베고 잠을 자던 병사는 그날로 병이 나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의원도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백약이 무효인지라 끝내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점도 쳐보니 은행나무 목침을 병사가 사용한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무당은 가지가 부러진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목침을 다시 붙여 주어야 병이 완쾌될 수 있다고 하였다. 병사는 할 수 없이 무당의 말을 따라 그대로 하였더니 병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으며, 그 때의 사실을 마치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지금도 은행나무를 살펴보면 목침덩이가 들어있는 듯이 불룩해진 곳을 볼 수 있다. 애기바위 병영소재지에서 장흥으로 가는 길목인 삼인리 신지마을 동쪽 산에 있는 바위로 높이 5미터정도의 이중으로 된 바위이다. 이 바위를 먼곳에서 보면 마치 수건을 쓴 부인이 아기를 업고 서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옛날부터 애기바위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가 생기게 된 과정에 대하여는 병영성과 관련된 안타까운 사연이 일화로 전해져 오고 있다.옛날 병영에 살던 가난한 한 부인이 밤에 꿈을 꾸니 비몽사몽간에 신선같은 백발노인이 말하기를 '그대는 내일 무엇을 보더라도 못본척 해야 한다. 만약에 내말을 어기면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며, 너의 귀한 자식도 천벌을 받을 것이니 각별히 명심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놀라 깨어난 부인은 그저 괴이한 일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음날 그 부인은 애기를 업고 산으로 산나물을 캐러 갔는데 때마침 봄철인지라 춘색을 즐기면서 잠깐 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이상스럽게도 산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병영땅에 도읍지를 만들기 위하여 산들이 자리를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여인은 너무나도 큰 이변이 신기하게 일어남에 놀란 나머지 간밤 백발 노인이 현몽하여 했던 말들을 다 잊어 버리고 '이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 산들이 움직이고 있다'하고 말을 하여 버렸다.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들이 움직이는 일을 멈추었고 동시에 그 부인은 아기를 업은 그대로 굳어 버려서 그 자리에서 큰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의 애기바위는 바로 그 여인이 변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이곳의 노인들은 아마도 그때 부인이 산이 움직인다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병영성은 지금의 성터보다 몇십배 더 큰 도읍지가 되었을 것이라고들 말하면서 못내 아쉬워 한다. 거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녀자란 역시 큰일에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이와는 전혀 다른 전설이 이 바위와 관련하여 또하나 전해져 온다. 이 이야기는 위의 전설과는 달리 애기바위와 마천목 병사에 관계된 이야기이다. 병영성이 새롭게 창설되고 처음으로 군사가 주둔하게 되었을 때 병영성의 수비병으로 소집된 군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이를 밴 부인이 있었다. 남편이 입대한 후 얼마가 지나 병사의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부인은 남편이 그립기도 하고 귀여운 아들을 보여 주고도 싶어 병영성으로 찾아와 면회를 신청했다. 그러나 당시 병영성의 기장이 얼마나 세었던지 쉽게 남편의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여인은 아기를 업고 먼 발치에서라도 남편을 보려고 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에 올랐다. 마침 이때 성밖을 순시하던 마병사가 이 여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미인이 아이를 업고 성이 바라보이는 산에 오르는 것을 보고 화가나서 '저 요망스런 계집을 잡아다 어느 병사의 계집인지를 확인하여 본보기를 보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받은 군사들이 산으로 몰려 쫓아가니 여인은 그만 산을 오르던 자세로 우뚝서 하나의 바위가 되고 말았다. 병사와 도둑 옛날 병영성의 어느 병사가 재임할 때 낙산마을에 가난하게 살면서 도둑질을 잘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도둑질을 해서 항상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병사도의 엄명에 의해 어렵게 도둑을 잡을 수 있었다. 병사또가 도둑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렇게 도둑질을 잘하느냐' 하면서 '그동안 물건을 도둑질해서 어디다 다 감춰 놨느냐'고 묻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병사는 병졸을 시켜서 그 집을 확인해 보니 도둑질한 물건은 찾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밥을 지을 끼니조차 제대로 없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끝에 이씨는 자리가 도둑이었음을 자백하게 되었다. 자백을 한 이씨는 죽게 되자 마지막으로 기술을 한번 보여 주겠다고 병사또에게 청하였다. 이에 병사가 허락을 하니 그러면 아무것이나 시험을 해보라고 하였다. 이에 병사또는 이에 '내 옥 요강을 훔쳐가 봐라' 그러면 너를 살려 주마' 라고 하였다. 이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병사로부터 며칠의 말미를 얻었다.병사는 그후 며칠간 병졸들을 시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빈틈없이 지켰다. 매일 밤 방안에 촛불을 훤히 켜놓고 지켰으나 정말로 어느날 옥 요강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다. 병사또는 병졸들을 시켜 이씨의 집에 가보게 하였는데 다녀온 병졸은 과연 그집에 옥 요강이 있음을 아뢰었다. 그래 이 도둑을 불러 내막을 묻자 '칠흙같은 밤에 지붕위로 가서 기와를 뚫고 전대에다 모래를 넣어 낚아래어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래서 이 도둑은 약속대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병사와 효부 낙산마을에 옛날농부가 과부가 된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과부인 며느리를 지극히 아끼며, 며느리 또한 시아버지께 극진히 효성을 다하여 모셨다. 그런던 초여름의 어느날 시아버지가 소를 몰고 현 마을 앞의 논에 쟁기질을 하러갔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시장할 것샅아 닭죽을 쑤어가지고 가서 '시장하니 드십시요'라고 권하니 시아버지가 '일이 바쁘니 거기에 두고 가라'하였다. 일을 다 마친 서씨가 시장하던차에 그 죽을 맛있게 먹었는데 이상스럽게도 곧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에 근방에서 몰려온 농군들이 흉칙한 며느리가 개가(다른곳을 결혼하는 일)하고자 시아버지를 독살했다고 하면서 곧 병사또에게 고발했다. 이에 포교들은 그 며느리를 병영성으로 데려가 심문을 하여 죽일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병사또는 새로 부임한 오병사란 사람이었다. 오병사는 그 며느리에게 사형수가 된 내력을 묻자 며느리는 자신은 영문을 모르겠으며 한사코 억울하다고 애원하였다. 이에 오병사는 시아버지가 죽은 현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전과 같이 그 자리에 닭죽을 쑤어 갖다 놓으라고 명령했다.그렇게 하고 군사들을 매복시켜 살피라고 일렀다. 군사들은 영문도 모르는채 병사의 명령인지라 잠시도 헛눈을 팔지 않고 주시하고 있는데 성벽 밑에서 큰 지네가 나와 닭죽을 훔쳐먹고 성벽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를 지켜본 포교가 병사에게 사실을 아뢰니 오병사는 흉칙한 지네의 독때문이지 며느리의 독살음모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오리혀 그 며느리를 효부라고 하여 상까지 내렸다고 한다. 이같은 명판결로 오병사는 이후 '오똑똑' 병사라고 불려졌다 한다. 유정승과 홍교 병영의 홍교는 유한계 정승의 금의환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무지개 다리라고 전해오며 재미있는얘기가 전해오고있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병영면 상림리에는 오래도록 이 지역에 토착하여 세력을 떨치던 김씨일문이 있었다. 양반 가문으로서 세도가 당당할 뿐 아니라 부농인 지주로서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노복만도 수십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총각은 원래 양반집의 후손 이었으나 가세가 몰락하여 비록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는 있을 지언정 이목이 준수하고 재기가 넘쳐 영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실 근면하고 품성과 언행이 단정 하였다. 일상의 행동거지나 위 하래로 사람사귐에도 나무랄데가 없었기에 동네 사람이나 다른 머슴들의 존경과 칭찬을 한몸에 받아왔다. 주인 내외의 신임도 두터웠으므로 안채의 출입이나 특별한 심부름은 유총각이 도맡아서 하곤 했다. 이러한 것을 주인집 따님인 김낭자가 모를리 없었다. 김낭자의 유총각에 대한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그럴 때마다 낭자는 자신의 헛된 마음을 잡아 보려고 애도 쓰고 스스로 꾸짖어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고 마음은 점점 유총각에게 기울어져 갔다. 하지만 주인과 머슴이라는 당시의 엄한 관념과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전통사회에서 주위의 이목이 두려워 어쩔 도리가 없이 세월만 흘러갔다.그러던 어느 따뜻한 봄날 김낭자는 애처움을 달랠겸 바구니를 옆에끼고 산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갔다. 그날따라 유총각도 집안에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올라갔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이상한 일이 생겼다. 지금까지 구름한점 없이 맑고 깨끗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히더니 지축을 흔드는 뇌성과 함께 무서운 번갯불이 번쩍이면서 억수같은 소낙비가 내렸다. 김낭자가 이같은 억수같은 비를 피할곳이라고는 큰 소나무 밑밖에 없었다. 때마침 유총각도 나무를 하다가 억수같은 비를 만나 비를 피한곳이 바로 김낭자가 피한 큰 소나무였다. 비에 흠뻑 젖은 김낭자는 반가운 생각보다는 부끄러운 생각에 피해서 도망치려 했으나, 김낭자를 발견한 유총각은 자기도 모르게 김낭자를 붙들었다. 그러던 순간 짖궃은 날씨는 더욱 변덕을 부리듯이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는 두사람을 더욱 떨어질 수 없게 만들었다. 두 남녀는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서로가 사랑을 고백하며 먼 장래를 굳게 약속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열달이 지나 김낭자는 옥동자를 낳았다. 어린아이는 유총각과 김낭자를 닮아 준수하게 생겼고 비범한 아이로 자라 열살 미만에 사서삼경에 통달하여 신동이라 불렀다. 외가에서도 아이가 비범하고 영특하므로 귀여움을 받고 자라났다. 학문에도 정진하여 과거에 훌륭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위로는 상감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고, 아래로는 부하들의 존경을 받아 점차로 요직에 승진되어 정승이 되었다. 이가 곧 유한계 정승이다. 양반집 머슴이던 유총각과 주인집 규수인 김낭자 사이에서 태어나기는 하였으나 이는 하늘이 낸 훌륭한 인재였기에 정승이 되었으므로 병영에서는 유정승의 금의환양을 기념하기 위해 돌아오는 길목 배진강에 이와같은 홍교를 가설하게 된 것이라 전한다. 높이는 4.5미터, 너비 3.08미터, 길이 6.75미터 이며 직사각형의 화강암 석재 74개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조각의 정교하고 우아 미려함이 다른 어떤 홍교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다리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이 홍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같은 전설과 다르게 실제로 본 조사단이 현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한계정승은 실존인물로 장흥출신의 유명한 학자 청방 유호인(1502-1584)의 후손으로 아버지 신방이 강진 병영의 상림리 영광김씨 김진성의 딸과 홍인하면서 처가인 강진 상림리로 이거 하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아마도 유총각과 김낭자 이야기는 바로 유신방과 영광김씨 김낭자사이의 사랑이야기가 윤색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아들이 바로 유한계(1688-1794)였는데 총명하기도 했겠으나 그는 107세의 장수를 누려 수직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종2품)가 되었고 1790년에 숭록대부(종1품)를 받는 영예를 누렸던 인물이다.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 유정승의 묘소가 현재 한학리 학사마을 옆산에 있다. 기알재 이야기 병영면 한학리 한림에서 옴천면으로 넘어가다 보면 귀활재라 불리우는 고개가 있다. 병영면과 옴천면의 경계가 되는 이 고개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병영성의 총책임자인 병사또가 병영성을 나와 인근지방을 순찰이라도 가게 되면 그 행열은 10리에 달했고 병졸들의 창검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며, 이를 엎드려 바라보는 백성들은 그 위용에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당시 병사또에게는 엄청난 권한과 지금 같으면 즉결 처분권까지 주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죄가 있건 없건 병영성으로 끌려온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온몸이 움츠려들고 마는 것이었고, 죄가 있건 없건 병영성의 근처에만 가더라도 사색이 다될 지경이었다.어떤 죄를 지었든지, 혹은 조사결과 무죄가 되었건 곤장을 맞던간에 방면되어 집으로 살아 돌아 가게만 된다면 그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래서 바로 이 귀활재에 이르서서야 '이젠 살았구나'하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뿜었다는 것이며, 이 고개를 살아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활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고개에는 이와 다른 전설또한 전한다. 즉 영암 등지의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돌아오는 상인들은 '돈받재'를 지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도적을 만나 돈을 털리기 일수 였다고 한다. 그 곳에서 탈을 만난 상인들은 이곳 귀활재에서 도적을 만날 경우 '개가 알날 일이다'고 한탄하면서 아무 것도 없는 주머니를 내어 보였다고 하며 이런 일화로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 개알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도 한다. 귀활재라 부르기도하지만 최근 기알재라부르고있다. 마병사 와 축성 처음 전라도 병영은 광주에 있었으나 1417년(태종 17년)에 이곳 강진군 병영면으로 옮겼는데 이는 왜적들의 침략이 잦아 연안 가까이 군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영성은 일명 설성, 세류성이라고도 불려지는데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태종때의 병영성 이설당시 전라병사는 마천목(1358-1431)이었다. 그는 이웃 장흥출신으로 조부되는 마치원은 장흥 수령성을 축조하기도 하였고, 부친 마영 역시 왜구의 침탈을 막아 싸웠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천목 병사는 병마절도사영(병영)을 옮기는 일을 맡아 현지의 지형을 상세히 살피게 되었다. 아마도 이때 마병사는 옛 도강현의 치소가 있었던 병영면 하고리 일대와 지금 『개성터』라고 불리우는 지점을 저울질하며 축성의 방략을 짜고 있었던 것 같다. 일설에는 마병사가 처음 박동리와 하고리 사이의 개성터를 잡고 성축을 진행하다가 중도에 성터를 쌓기에는 마땅한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중단 하였다고 한다. 이 개성터의 초석들을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그 흔적을 일렬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농지정리로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병영터를 물색하던 마병사가 하루는 일망대에 도착해 이 일대를 둘러 보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백발 노인이 앞에 나타나 활을 내놓으면서 활을 당겨보라 하므로 활을 받아 꿈속에서 활시위를 당겼다고 한다. 시위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잠깐 졸고 있는 틈에 꿈을 꾼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꿈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꿈에 화살이 날아간 자리를 찾아간즉 이상스럽게도 그곳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마병사가 곰곰히 이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화살이 박힌 곳은 족히 동헌이 앉을 만한 곳이었다. 그는 이곳을 병영의 중심으로 작정하고 성축을 할 범위를 요량해 보았으나 또 마땅한 생각이 또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민을 하면서 마병사는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수북히 쌓였는데 이상하게도 화살이 꽂혔던 동헌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금을 그은 것처럼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 있었다. 그는 이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둘러보면서 성곽의 범위로 이곳이 적당함을 바로 알게 되었다.그는 이에 '옳거니! 이것은 신께서 내게 성곽둘레를 알려준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병사들을 시켜 여기에 성을 쌓아 올리니 어떤 다른 성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는 튼튼하고 방어에 합당한 위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병영성은 일명 설성이라고도 불려지는 것이다. 한편 병영성은 세류성이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은 병영성 주변에 버드나무들이 많이 늘어선 곳에 있다하여 불려지는 별명이고, 지금도 부근의 하천이름을 세류천, 다리 이름을 세류교라 부르고 있다. 마병사와 관련된 전설은 이밖에도 다른 한가지가 더 있다. 이는 1895년의 『병영영지』에 기록되기도 한 것으로 창설당시 마병사가 일망대에 올라가서 활을 당기면서 말하기를 '후세에 활쏘는 자들 중에서 내가 쏜 곳까지 미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적의 화살도 이르지 않을 것이니 내 화살이 떨어진 곳에 성을 쌓도록 하라' 하여 그곳에 성을 쌓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또 사또샘 또는 어사샘이라 부르는 샘이 서쪽 성밖에 지금도 있는데 마르지 않기로 유명하며 병마절도사 전용샘으로 알려져 있다. 어사 바위와 병영 어느 암행어사가 전라도를 순시하던 중 병마절도사의 영이 있던 병영에 왔다. 그런데 병사의 치적이 뛰어났으므로 따로 성르 방문하지 않고 산중의 큰 바위의 걸터 앉아 한잔술에 목을 취기면서 풍월을 읊으고 한가한 한때를 보내다가 표연히 타지방으로 떠나버렸다. 그후 이 사실을 알게된 지방민들이 암행어사의 높은 인격을 흠모하여 어사가 쉬어 갔던 바위를 '어사바위'라 부르게 된 것이다.zss 현재 이바위가 어느 산중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이야기만이 전해온다. 병사와 조산 병영면 성남리에 위치한 조산은 병영중학교로부터 북쪽 방향으로 100여m쯤 떨어진곳에 있다, 이 산이 만들어진 것은 언제의 일인지 정확히 없으나, 어느 병마절도사가 부임해서 사무 인계를 끝내고 지방 이속들로부터 소관사무에 대한 자세한 보고와 지리, 풍속, 민속,특산물,관내현황을 전부 청취한 다음 곰곰히 생각하더니 병마절도사는 깜짝 놀라며 매우 흥분하였다. '병영 남쪽 도암부근에 만덕산이 있고 군동에는 천불산이 있으며, 장흥땅에는 억불산이 있는데 어찌 이 병영 소재지에는 이들을 능가할만한 산이 없느냐'하며,'이는 곧 전라도 병마절도사 병영이 있는 이곳의 위신과 체면에 관한 일로써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바로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토산을 만들고 이 산을 천,만,억을 누를 수 있는 조산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이조산은 인위적으로 만든 산이라 하여 '조산'이라고도 쓰는데 병영의 군사훈련시 지휘대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나타난 규모는 직경이 30m로 산기슭이 다소 논과 집터로 변형되었으나 산 정상 부위는 대체로 원형에 가깝다. 여기에는 세 그루의 팽나무가 있는데 약 3백여년된 나무로서 귀목이라 부르며,매년 음력 6월 유두날에 성남리 주민들이 이곳에 유두체를 올리고 마을의 화평을 기원한다. 부암과 망부암 옛날 장흥군 용산면 억불산 골짜기에 금술좋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으나 남편은 늘 농부로서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부인과 상의한 끝에 산에 올라가 10년동안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억불산의 서북쪽에 있는 수인산 중턱에 올랐다. 공부에 열중하던 남편은 옥녀봉에서 내려오는 선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선녀를 꾀여 수리봉 밑에 살림을 차리고 부인몰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중 선녀가 임신을 하여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공부를 까맣게 잊은채 수리봉 아래 마을에 내려가서 닭을 훔쳤다. 닭을 들고 산에 오르던 젊은이는 신의 노여움을 받아 벼락을 맞고 돌이 되어 버렸다. 이 돌은 이후 '부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훔쳤던 닭은 '게구암',젊은 남편과 선녀가 밀워을즐기기 위해 둘러쳤던 병풍은 '병풍바위'가 되었다고 전한다.지금도 수인산 중턱에는 부암 .계구암.병풍바위.수리봉.옥녀봉등의 바위가 10리 안팎에 널려있다. 한편 장흥 억불산에서 남펀이 공부를 끝마치고 성공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부인은 10년의 세월이 흘러도 소식을 알 수 없자 남편을 생각하며,산위에 올라 수인산을 바라보다가 지쳐 그 자리에 바위가 되었다. 이후 이 바위를 망부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쌀바위와 욕심많은 중 수인산은 병영면과 장흥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지로리의 동남편에 있다. 이 산에는 수인사라는 절이 있다. 이 수인사 부근 '홈골'이라 부르는 골짜기 밑에 '쌀남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깔바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수인사 승려들은 그 쌀이 충분하지는 못할지언정 식생활은 근근히 이어갈 수 있었으므로 오로지 불전연구와 스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욕심이 많은 중이 더욱 많은 쌀이 탐났던지 쇠꽂쟁이로 쌀바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뚫어 놓았다. 이 일이 있고 난후 이제까지 꼭 중들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오던 것이 한톨도 나오지 않았고 완전히 빨간 피만이 흘러내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쌀바위를 비롯하여 부근의 모든 바위의 돌까지도 빨갛게 물들었으며, 따라서 이 근처는 적벽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벽의 절경은 타지역에 그예를 찾기 어려우며, 수인산에서도 으뜸가는 풍광으로 유명하다. 빨간 돌에 푸른 숲, 시원한 맑은 물,기묘한 바위 등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김정길의 효행과 정려 삼인리 병영-장흥간 지방도로변에 김정길의 정려가 있다. 김정길은 김해인으로 이미 8세에 효경과 소학을 통달했으며 그 두가지 책으로서 모범을 삼아 부모를 공양하는데 듣고 주야로 신에게 기도하여 사슴 한 마리를 얻었고,또 그의 효에 감동하여 후원에 있는 대나무 밭에서는 한 겨울 죽순이 돋았으며, 꽁꽁언 금강천에서는 잉어가 얼음을 깨고 튀어 나와 그것들로 봉양하니 그의 부친은 병이 완쾌되어 10년이나 더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이 효행이 열읍에 알려지자 죽은지 15년이 되는 1828(순조 28)에 현재의 정여가 내렸다. 시철화상과 으슴퇴치 굴바위는 병영면 동남쪽 삭양리 백양마을 장흥군과 경계지점에 있는 동굴이다. 이 굴 앞에서 불을 피우면 장흥의 벽재뒷등에서 연기가 솟아 올랐다고 하니 이 굴이 얼마나 긴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굴은 병영성 축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그 역사는 알 길이 없으나 꽤 오래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기가 지금도 그렇게 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아무든 그런 전설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 굴 안에는 흉악하고 무서운 으슴이 살고 있었으니 공포의 존재였다고 한다. 그 동굴속에서 살았다는[으슴]이라고 불리우는 큰[구렁이]가 용이 되려고 노력중이던 바 '여의주'를 얻지못하여 용이 되지 모하내 산다고 전해지고 있었다.이 으슴이 동굴에서 나와 산밑을 흐르고 있는 강물에서 놀기를 좋아하며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장흥과 유일한 통로가 이로 인하여 교통이 두절되는 형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인명피해도 컸으려니와 물자의 집산지요, 물물교역의 중심지이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지경에이르게 되어 병영은 모든 면에서 마비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에 주민들은 으슴 퇴치를 관가에 호소하였으나 관가에서는 속구무책으로 주민들의 탄원에 대해서도 귀를 막고 타개책을 강구치 않으므로 백성들의 희생은 날로 증가되고 경제상태는 악화되어 일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굴바위 근처 백양리 뒷산에 백양사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사찰이 있었는데, 그 절에는 명승시철화상이 도를 닦아 활인불이라고 칭하여 왔다. 시철화상은 이 비참한 소식을 듣고 중생 구원을 위하여 월출산에 올라 목욕제계 한 후 백일산제를 정성껏 올리고 지성을 다하여 백일만에 큰 힘을 얻었다. 시철화상은 뛸 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와 고향에 돌아온 즉시 으슴 퇴치의 방안을 궁리한 끝에 으슴이 자주 나타나는 강변에 흰옷을 입은 허수아비를 세워서 마치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산곳에 숨어서 으슴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차 강물이 꿇어오르고 물이 뒤집히며 큰 물결이 일어나더니 마침내 으슴이 나타나서 허수아비를 발견하자 사람으로 오인하고 맹렬한 기세로 덤벼 들었다. 크고 긴 구렁이를 먼 발치로 바라보던 주민들은 너나 없이 크게 놀라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얼어 붙은 말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으슴은 허수아비를 한입에 삼키려고 벼르던 끝에 사람이 아닌지라 크게 확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물속으로 되돌아 가려는 찰나 산속에 숨어 있던 시철화상은 자기의 생명을 던져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한순에는 쪽물드린 마포를 들고 아른 혼에는 비후를 꼬나쥐어 소나무에 버티어 섰다. 다시 물속으로 되돌아 가려던 으슴이 인기철을 듣고 한층 조한 모습으로 시철화상에게 흉악하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으슴은 월출산신과 불타의 가호로 힘을 얻은 시철화상을 당해낼 수 있을손가! 지옥을 방불케한 처처참한 사투 끝에 드디어 징그러운 몸둥이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이소식을 전해들은 각 지방의 주민들은 매일 구름같이 모여들어 죽은 으슴을 구경하고 감탄함은 물론 신과 같은 시철화상에 대한 예찬의 소리가 날로 높아만 갔다. 수많은 장졸과 우수한 장비를 갖춘 관가에서도 속수무책이던 이 으슴을 시철화상 한사람의 힘으로 완전히 퇴치하여 주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니 말이다.화상의 신념과 덕행 용기와 지략으로 으슴이 퇴치된 후 썩은 냄새가 어떻게 심했던지 백일을 두고 이 길을 다닐 수 없었다고 하다. 화상이 백양사를 떠난 뒤 그 절은 점차 쇠락하였고 드디어는 폐사되기에 이으렀으니 주민들은 죽은 으슴의 원한으로 절이 망하게 된것이라고 믿고 있다.지금도 백양사의 주춧돌이 남아 있어 영고성쇠의 지난 역사를 말해 주는듯 하다. |
첫댓글 너무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새삼스럽게 내고향이 넘 그립네요
군사 도읍지로만 알았었는데 너무 좋은 사료 마음속에 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