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도 모른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거의 매일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참 남 생각을 해주지 않는 고약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란 깨달음입니다.
말 그대로 짧지 않은 날들을 살아오면서 참 내 생각, 내 감정밖에는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그다지 모질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사람이고 다정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 왔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봐요.
근래들어, 내 생각 좀 해보라고,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어쩌면 그렇게도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자기 말만 하냐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나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인데,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이렇게도 다른 모양입니다.
반쯤 죽어갈 정도로 힘들어하면서, 반쯤 죽어가면서 나도 언젠가, 아니 계속 그렇게 울부짖었던 것 같기도 해요.
들어봐, 들어보라구, 내 생각 좀 해보라고, 그렇게 소리치면서요.
물끄러미, 바라보고 삽니다.
내 마음을 치고 가는 풍경, 내 마음을 지나가는 생각,
나를 치고 가는 사람을, 그 눈을, 그 마음을.
지금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 손을 쓸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냥 살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걷고, 그렇게 날들이 갑니다.
오늘이 벌써, 3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4월을 맞으면서, 아주 잠깐, 받기만 해온 날들 속에서, 무언가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랑한 풍경, 말고,
너, 네가 사랑한 풍경이라도 주고 싶다고, 그래서, 편지를 쓰는 대신, 이 풍경들을 보냅니다.
알 수 있겠지요?
너가, 네가 바로 당신인 것을.
가장 낮은 땅, 가장 낮은 섬 가파도의 청보리 밭입니다.
가파도는 지금, 청보리가 제 키를 늘이고 있는 중입니다.
4월이 오면, 청보리 축제가 가파도에서 열린답니다.
연두빛 보리밭 사이로 검은 돌들이, 짙은 쪽빛의 바다가 절묘하고 신비한 배합으로 온 섬이 출렁입니다.
바람이 부는 사이로 작게 몸을 숙이는 보리를 몇 개 꺾어왔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너와 함께 보리된장국을 끓여먹었었지요.
놀라운 것은, 저 연한 보리싹이 생각보다, 억센 거였습니다.
보드랍고, 부드럽고, 연하게 보이던 청보리는,
파도에 파도를 더한다는 가파도에서, 엎드려 얼마나 바람을 맞으며 살아야했기에
저렇게 억세어졌을까요.
씹어도 잘 씹혀 넘어가지 않던 청보리 된장국이, 그 잎싹의 질김이 기억나나요?
노랑과 연두, 검정과 쪽빛의 어우러짐과 넘나듦 속에서
그대가, 네가, 당신이 탄성을 연방 터뜨리던 유채꽃밭과 멀리 산들과 바다의 풍경입니다.
어쩜, 저렇게 예쁘니? 정말 환하다!
그대는 그렇게 말했지요.
천천히 걸으며, 아직은 세찬 바다 바람을 맞으며,
그래도 웃으며 자꾸 말했지요.
그 동안 살면서 남의 이야기를, 남의 아픔을 잘 들어주고, 남의 마음에 공감해주던 당신을 보면서,
그 동안 저는 참, 항상 내 위주로, 내 본위로만 살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었습니다.
미안해요.
항상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보챘던 것.
이제라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 말을 줄이고, 당신들의 말을 들어볼까, 해요.
'듣는 귀'가 한번 되보려고 해요.
이런 웃기지만, 다짐도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 것은, 거의 모두, 당신 덕입니다.
가파도와 한라산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다닌 며칠 동안의 당신과의 여행 덕입니다.
어승생악과 법화사와 비오토피아 물과 바람과 바람 갤러리의 풍경은
내일이나 모레쯤, 보내드릴게요.
안녕.
꽃들이, 피었다가, 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어서, 우리가 감탄했던 그곳에 길을 내서 마음과친구 여러분들을 초대해 주세요~
사진들만 보아도 그곳에 갔다온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귀한 마음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스더님. 기억나네요. 대방동 여성프라자에서 뵈었던 그 분 맞으시죠? 나눠준 마음이라고 하시니, 제마음이 더 좋습니다.
앗! 기억해주시는군요~~~
좋은 기억과 사진과 마음을 내어서 올려주시는건데 고맙지 않을수가 있나요~~ 덕분에 공짜로 가본 기분인걸요. 잘 읽고 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