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곶이벌 동남쪽 자양반도에 딸린 잠실 땅이었다.중종 15년 큰홍수로 살곶이벌 동남쪽에 샛강이 났다.
그때 자양반도는 둘로 갈라져 두 개의 섬으로 변한다.바로 잠실도와 부리도다.샛강 남쪽의 두 개 섬은 물에 한없이 약했다.
"매미가 하품을 해도,개미가 침을 뱉어도 물에 잠긴다."
물에 약한 잠실을 상징하는 말이다.이 샛강을 메워 물에 약한 잠실을 안정시키는 일이 조정으로서는 큰과제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샛강을 메워 강북의 살곶이벌과 연결하려고 했던 일이 등장한다.
중종 23년(1520) 7월 8일자 중종실록에 살곶이 샛강을 메워 수해를 막아 보자고 제청한 기사가 실린다.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정광필(鄭光弼)·조원기(趙元紀)가 아뢰기를,
"삼전도(三田渡) 상류의 물이 살곶이(箭串)을 가르고 횡류(橫流)하고 있는 곳입니다.이곳은 본디 이전부터 물이 지는 곳으로서,
큰 비가 오면 반드시 물이 불어 넘치게 됩니다. 경진년367)에 홍수가 난 뒤부터 점차로 패며 물이 막 커져 삼전도와 같게 되었으며,
마장(馬場)의 중간을 갈라 나누어 놓았는데, 일찍이 수축(修築)하기를 청하고 싶으면서도 역사가 크고 연사가 흉년이기 때문에
아뢰지 못했었습니다. 듣건대 하삼도(下三道) 및 광주(廣州) 등지의 행인(行人) 중에 삼전도를 지나오는 사람들이 반드시
여기를 거치게 되기 때문에,삼전도에 이르러 사공에게 삯을 주고 건너게 되는데, 여기에 오면 물이 또한 이러하므로 사람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깁니다.이는 말할 것도 없고, 무지한 백성들이 비록 물이 빠진 때이기는 할망정 그냥 건널 수 있다고 여기고서
건너다가 빠져죽는 사람이 한 해 동안에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지난해에는 사족(士族)인 사람이 처자를 데리고 건너가다가
모두 빠져죽었다고 합니다. 나루가 갈라져 둘이 되어 사람들에게 해가 됨이 이러하고, 또한 마장(馬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들의 소임으로 여기고 친히 나가서 보며 줄로 재보도록 하니 포백척(布帛尺)으로 7백 80자나 되었습니다.
또한 보건대, 조종조에도 석축(石築)을 하여 막았었는데 그 돌들이 흐르는 물에 빠져나갔고, 그 근방 삼전도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빼다 쓰기도 하기 때문에 물에 더욱 허물어져 특히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일 경기 감사로 하여금 추문(推問)하도록
한다면 될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이는 곧 오래된 일이어서 추문할 수 없을 듯합니다. 비록 실정이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이는 위에서
처리하셔야 할 일입니다.
대저 이미 마장을 무너뜨리고 또한 민간의 전답을 헐어버렸으며 사람들도 많이 빠져죽게 되는데 올해는 그다지 흉년이 아니니,
바라건대 널리 의논하여 당령 수군(當領水軍)을 책정하여 공조의 당상 및 사복시 관원으로 하여금 감독해서 돌로 넓게 쌓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민간의 전답이 무너지는 것 및 행인이 빠져죽게 되는 것과 마장이 허물어져 나가는 염려가 거의
적어지게 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민간의 전답이 떨어져 나가는데다 오가며 건너게 될 때의 폐단이 또한 크니, 의정부가 해조(該曹)의 당상과 의논해서 아뢰게 하라.
만일 쌓게 된다면 당상과 낭관(郞官)을 결정하여 감독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살곶이 샛강을 막는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였다.중종23년에 승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샛강을 막았다.
그러나 그 후에 장마가 질 때마다 잠실을 범람해서 다시 샛강이 뚫려 그 샛강을 막는 일은 난제 중 난제였다.
인조반정 때 일등공신으로 낙흥부원군(洛興府阮君)이 된 김자점(金自點)이 잠실도의 한강 물줄기를 막으려 했다.
김자점이 막으려던 한강 물줄기는 송파 쪽이 아니라 자양동 쪽으로 돌출돼 있던 잠실도의 부분이라고 한다.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자 김자점은 정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의 사랑으로 심복인 역관 이형장(李馨長)이 찾아왔다.
"대감마님, 담별궁에서 청나라 사신 파눌내와 보대평고가 영의정 이경석과 예조 조형을 문초하는 자리에서
역관 정명수(鄭明秀)란 놈이 영상에게 마구 큰 소리를 했다 하옵니다. 아, 그랬더니 다음날 조정에서는 정명수에게
은 천 냥을 내리고 잘 봐달라고 했더랍니다."
"헛헛...... 그래. 너도 정명수에게 손은 잘 대놨을 테지?"
"이르다 뿐이옵니까, 대감마님! 소인이 분명히 얘기했사옵니다.
대감마님께서는 소현세자께서 승하하셨을 때 봉림대군을 옹립하셔서 금상께서 즉위하셨는데, 금상께선 옛 정의를 잊으시고
대감마님을 멀리 하시며 청나라를 배척하는 붕당과 더불어 정치를 하고 계시니 대국의 사신께서는 이 기회에 붕당을
뿌리 뽑아야 하옵니다!
이렇게 얘기했사옵니다."
"미흡해! 청나라에서 내게 무슨 귀띔이라도 해 준다면 좋으련만......"
"대감마님! 소인, 비기를 하나 알고 있사옵니다."
"비기를?"
"네! 한강의 물길을 막는 일이옵니다."
"뭐야? 한강의 물길을 막아?"
"한강의 물길을 막으면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물론 대감마님이지요. 그야 대감마님께선 승선군을 옹립하시고 일어서시면
왕이 되시는 거나 다름이 없지 뭡니까요."
"허지만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물을 어찌 막는단 말이냐?"
"막을 수가 있습니다! 경진년 홍수 이후로 한강의 물줄기가 구의리 쪽에서 송파 쪽으로 샛강이 생겼사온데
구의리 쪽 강폭이 좁아져서 한강의 물길을 송파 쪽으로 돌린다면 구의리 쪽의 강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옵니다!"
김자점이 한강의 물길을 막는 일은 보기 좋게 실패했고 그는 그 다음해 역모가 탄로나서 처형됐다.
1971년 4월 송파강을 막을 때 인조 때 김자점이 한강을 막으려고 쌓아둔 것으로 믿어지는 5천 세제곱미터나 되는 돌을
모래 속에서 발굴, 이 돌을 물막이 공사에 사용했다고 한다.한강의 물줄기는 바뀌어 서울의 지도는 크게 변했다.
이것이 우리가 88 서울 올림픽을 치를 수 있었던 잠실벌의 탄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