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비난을 받습니다. “왜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었습니까?”(행11:2~3;공동번역) 이방인들과 밥을 먹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행10:28) 그럼에도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밥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법’보다 ‘뜻’입니다. ‘법’보다 ‘뜻’이 위입니다.
베드로가 위법을 감수하고, 뜻을 따른 것은 성령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베드로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다른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성령의 충만함’은, 불편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예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도 선뜻 율법 너머에 있는 뜻을 따르기 어려웠습니다.(행10:13~14;레11장) 법을 어기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이라는 성령의 음성 또한 명백한 현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위법을 감수하고 뜻에 순종했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심을 목격합니다.(행11:18) 지금까지 부정하다 여겼던 사람들과 한 지붕 아래 머물며 동거합니다.(행10:48;시133:1)
사실,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낯선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처럼 이질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전적 타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사람은 사람’입니다.(칼 바르트)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 이질적인 성령님으로 충만한 것,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편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막무가내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낯설고 이질적이요,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우리가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이 기름을 흡수하지 못하듯,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침투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침투하시는 사건,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제 안에 ‘사건’이 일어났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난 ‘사건’을 보았고, 이미 성경에 일어난 ‘사건’을 읽었기 때문에, 저는 사건의 체험자로서, 목격자로서, 해석자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오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넘을 수 없던 담이 제거되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넘을만한 담은 문제될 리 없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이 나에게 오심으로 내가 하나님을 받아들일 만큼 개방적인 사람이 된다면, 나는 절대 만날 리 없는 ‘땅 끝’의 사람들과도 소통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땅에 닿았다면, 땅에서 땅으로 가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니까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 주의 성령이 임하여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가난한 자, 포로, 눈 먼 자, 눌린 자와 함께 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이질성이 극복된다면, 사람과의 이질성은 오히려 재밌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구별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다면, 조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끊어지기 힘든 인연이 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과의 이질성이 극복된다면, 세대간, 지역간, 성별간, 집안간 이질성은 문제꺼리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있을 뿐, 문제는 해결됩니다.(전3:1) 성령의 도움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아파트 평수로 인한 이질감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북간, 국가 간의 긴장 또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뜻과 너무 다른 하나님과의 식사약속 잡을 수 있는 핫라인을 폐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과 대화 채널을 열어놓을 수 있다면, 조금 다른 사람들과 밥 먹는 것은 실현 가능한 도전입니다.
저는, 매달 2만원. 재판을 받기 위해 구금된 소위 비행청소년들과 한 끼 밥을 나누겠습니다.
첫댓글 개인적으로 교회에서의 비난의 목소리는 안타깝지만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당연하다 여겨지는 현실속에서 주님 만을 바라보아야 가능한 일들이 생각보다 많은것을 느끼게 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안양에서 보호받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