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중간태를 어떻게 알아 차려야 되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능동태와 수동태로 살아 왔는데 헬라어는 중동태(중간태)를 가지고 있고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고 구약 성경도 헬라어로 번역이 되어졌다. 이에 우리는 이 중간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고민하며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언어적 이해:
중간태를 중동태라고도 한다. 단어적으로 보면 이는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에 있는 또다른 하나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고체 그리고 기체 가 있는데 그 중간에 액체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 될까? 상태의 변화를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액체는 고체로 전이 될 수도 있고 기체로 전이 될 수도 있다. 이 처럼 중간태도 능동과 수동의 사이에서 긴밀한 상호관계를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는 중간태는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변형된 또 다른 상태를 말하고 한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부모 밑에서 자랄 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먼저 수동태로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경험하게 됩니다. 부모를 믿고 그들이 인도하는데로 인생을 배우게 됩니다. 나의 지식이 부족하고 생각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하여 세상을 살아갈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를 의지하고 형제를 의지하며 자라에 됩니다. 이 수동태적 삶은 어떻게 무력해 보이고 나약해 보여집니다. 이 모든 내 삶에 부모가 간섭을 하고 대부분 책임을 감당합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피아노 교습을 받지만 내가 스스로의 결단의 의지가 아니라 그 뒤에는 부모의 의지에 의해 행해지는 삶이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 자립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부터는 내가 능동태적 삶으로 목적을 세우고 이를 향해 삶을 책임지게 됩니다. 또한 내가 주체가 되고 내 이름이 중심적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그러나 각자 이 모든 능동적 삶 속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사람마다 있을 것입니다. 이는 능력있는 부모나 종교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능동태적 삶을 산다고 하지만 연약한 인간은 어떤 제3의 능력자를 의지하며 믿고 살게 됩니다. 외적으로는 능동적 삶이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수동태적 삶이 지속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분명하게 선을 그어서 태를 구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중간태적 삶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의미적으로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그를 위하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가족 구성원을 위해 직정으로 다니지만 내가 가족의 구성원에 의해서 직장을 다니는 형태가 되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능동태적 삶은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나를 위하여 목적을 실행하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경쟁적 삶에 뛰어 들어 갑니다. 그래서 모든 삶에는 내가 책임을 지고 감당해야 합니다. 결국 이 능동태적인 삶에 책임감,의무감, 등의 압박에 눌려서 자살하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사랑해” 라고 할 때 이는 능동적으로 사랑을 알고 그 희생을 감당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방적 표현에 불과 함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처럼 어른이 되어서도 능동적 삶으로 다 살아간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에 의하여 수동적 삶을 지속적으로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중간태의 예시) 중간태는 다른 누군가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도 주지도 않고 주체가 스스로 자신의 일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며 것을 말합니다. “내가 스스로 내몸을 닦다” 영어 재귀대명사를 문장에 둘 수있는 말들 입니다.(By oneself 처럼)
2. 성경적 이해:
(중간태로 쓰여진 동사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
이제 헬라어로 쓰여진 성경으로 돌아가 어떻게 중간태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보겠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능동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제가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동산에서 좇겨 나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인간, 즉 수동태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께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드셨지요. 구약을 보면 너무나 처절하게 인간이 주인된 삶을 살며 하나님을 떠나 세상 우상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그들은 더 이상 능동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인간 더 이상 능동태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치명적 손상을 입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17:9)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24)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에게 항상 구약의 사건을 통하여 수동태적 사랑을 강요하셨지만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우상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 속에, 그 마음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세겨 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친히 성령말씀으로 인간의 내면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이 독생하신 하나님이 있을 때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동적인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수동태적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독생하신 하나님, 성령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으로 능동적 사랑을 하며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지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음 같이 서로 한 집에 사는 관계로 연합 되었습니다. 이에 성령으로 새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와 연합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을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중간태적 스스로의 사랑”(중간태의 사랑)이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성령의 내제로 일어나는 스스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나의 능동적 사랑이 아니라 성령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중간태적 사랑” 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내가 스스로 한 것 같이 보이나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그가 있기 때문에, 그가 나를 인도하시는 데로 내버려 두는 “중간태적” 삶으로 스스로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거듭난자는 이제 성령의 바람을 따라 그의 사랑을 강물처럼 흘려 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내 삶이 능동적으로 살 수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한 조정으로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가? 엄밀히 보면 참으로 능동적인 삶은 없는 것 같다. 오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그로 말미암아 내 삶이 능동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도바울의 삶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씀이 바로 중간태적인 능동태적 삶으로 이끌고 있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가 일하시는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