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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을 찾아서
진도 삼별초의 길
'또 하나의 고려' 건국한 삼별초, 용장산성 길에서 다시 태어나다
군청선 역사공원 조성 계획...월 탐방객 수천 명에 달해
'진도, 또 하나의 고려' 라는 다큐 멘터리를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자 이에 굴복하지 않고 따로 국가를 만들어 몽고에 항거해 장렬히 전사하며 우리 민족 최초의 저항운동을 벌인 삼별초의 활약을 조명한 내용이었다. 삼별초라고 하면 강화도에서 40년 가까이 저항한 사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진도에서 웬 또 하나의 고려일까'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굵고 짧게' 활약한 그들의 흔적을 용장산성의 길, 즉 삼별초의 길을 따라 살펴보면서 장렬하게 산화한 삼별초의 삶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산물이다. 고려 조정을 장악한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가 무인정권 세력을 공고히 다지고 반대파들을 색출하기 위해 수도의 치안 유지란 명분으로 창설한 군사조직이자 특수부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처음엔 야별초란 이름으로 야간순찰과 같은 공적인 임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야별초가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 우별초로 나뉘었다. 여기에 몽고군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도망온 자들로 신의군이 구성되면서 이들과 합쳐 삼별초라 불리게됐다. 삼별초의 출신 성분부터 몽고에 저항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무인정권의 각별한 배려 속에 조직은 더욱 커졌고, 무인정권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3대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다. 삼별초를 창설한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 또 그의 아들 최항, 이렇게 3대 동안 무인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했다. 3대째 최항으로 인해 이후 삼별초가 진도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결정적 단초가 마련된다.
고려 원종 11년(1270) 6월1일,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삼별초는 반개경정부, 반몽고 노선을 표방하고 거사에 나섰다.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저항이었는지 모른다. 나라는 몽고에 넘어갔고, 그들을 보호해줄 무인정권도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종결은 결국 그들의 주요 임무가 사라지는 것이고, 강화에서 항몽전쟁을 주도한 그들은 항복 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년부터 용장산성 궁궐 순차적 복원
결국 그들은 삼별초 해산 조치에 맞서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 배중손, 노영희 등이 삼별초 군대와 재물을 10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게 1270년 6월3일의 일이다. 두 달 남짓 걸려 진도에 도착한 시점이 8월19일. 진도는 그들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고려사> '반역 배중손전'에 삼별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중손이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는,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외치기를 '몽고 군사가 크게 이르러 주민을 마구 죽여대니, 무릇 나라에 힘이 되고자 하는 이는 모두 격구장으로 모여라'고 했다. 잠깐 동안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들었는데, 혹은 달아나거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배중손은 고려 정부에서 보자면 반역자였다. 몽고에 항복하기를 거역하고 정부에 저항한 잔당 세력인 셈이다. 그러나 배중손의 입장에서 보자면 삼별초의 살길은 저항뿐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우리 민족 자주와 자존이라는 명분으로 외세에 저항하다 목숨을 버리는 길이 가장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려 조정의 반역 배중손 장군은 그렇게 진도에 새로운 세력을 구축했다.
삼별초가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선택한 몇 가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만큼 제주도와 같이 본토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되었다.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거점을 정해 지속적으로 세력을 과시해야만 했다. 동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지리적 위치에 있어야 했다.
본토와 진도 사이의 명량해협, 즉 울돌목은 조류의 유속이 시속 11km로 동양에서 가장 빠른 곳으로 꼽힌다. 오죽했으면 물 흐르는 소리가 노루가 우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노루목이라고도 불렸을까. 이순신 장군이 배 13척으로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왜군의 배 수십 척을 무찌른 '3대 대첩' 중 하나가 그곳이다. 해전에 약한 몽고군이 이곳을 통해 침입하지 못할 것이란 심리적 전술도 작용했다.
둘째, 진도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옥주로 기록할 정도로 비옥한 농토와 넓은 평야가 있어 섬인데도 농업이 활발했다. 해산물도 풍부했다. 이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서 장시간 항전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성곽 700m 복원하면서 등산로도 조성
셋째, 연안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서 거둔 조곡의 수송선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조곡선을 탈취하면서 삼별초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개경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이중효과를 거둘 수 있는 지역이었다.
마지막으로 진도는 원레 무인정권의 기반이기도 했다. 최씨 무인정권의 3대 집정인 최충헌의 손자이자 초우의 아들인 최항이 승려로 출가해서 주지로 있던 절이 진도에 있었다. 최항은 승려가 되어 만전이란 법명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권세를 누리며 횡포를 자행했다. 주민들의 원성이 너무 자자해서 조정에서 만전이 있는 절을 해체하라고 명할 정도였다. 절 이름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 용장사일 가능성이 높고, 그 용장사의 규모가 방대해서 삼별초군이 진도로 내려갔을 때 그 절을 진지로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서는 삼별초가 진도에 있었던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그렇게 큰 용장산성을 축성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별초는 결과적으로 무인정권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군대였다.
용장산성은 성 안의 면적이 총 89만㎡(258만 평)이고, 둘레는 총 12.85km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곳을 근거로 삼별초는 급속히 세력을 확산해나갔다. 나주, 전주, 장흥, 마산, 김해, 동래, 밀양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11월3일엔 제주를 함락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의 호응을 얻으며 쉽게 지지를 이끌어냈다.
무인정권을 보위하는 무력집단으로 출발했고, 농민봉기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그들이 어떻게 농민과 지방세력들의 지지를 쉽게 이끌어냈는가에 대한 의문점도 남는다. 그들의 성향 자체만으로 볼 때 결코 농민들의 지지를 받을 세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리 나왔다. 추측컨대 몽고에 대한 반감이 삼별초의 기존 활동에 대한 반감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과 자주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학자들의 정확한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삼별초는 왕온을 황제로 옹립하고 몽고, 즉 원에 복속된 고려의 개경 정부보다 더 자주적인 정부임을 표방했다. 이것은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불과 수십 년 전에 일본에서 발견된 <고려첩장불심조조>는 당시 일본 조정에서 작성한 메모에 가까운 외교문서로 '고려에서 보내온 의심나는 몇 가지 사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1268년과 1271년에 고려에서 온 두 개의 외교문서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한다. 1268년 개경 정부에서 보낸 문서는 일본도 원나라에 항복해서 예를 갖추고, 그렇지 않을 땐 정벌에 나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반면 1271년의 경우 고려가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천도했으며, 원나라, 즉 몽고가 일본을 침략하려고 하니 사전에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진도로 지원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게 바로 '진도, 또 하나의 고려' 라고 하는 주요 근거가 되는 대목이다.
웅장한 궁궐 흔적도 없고 궁터만 남아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삼별초의 그 용장산성에 들어섰다. 웅장한 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궁터만 남았고, 저 멀리 산 위로 성곽이 보였다. 바닷바람이 살살 간지럽히며 속삭이는 듯했다.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 육지에서 느끼던 감촉과는 확실히 달랐다. 상쾌하다. 머리 위로는 푸르른 하늘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역시 육지에서 항상 보던 것보다 훨씬 맑고 푸른 세상이다.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진도군에서는 최근 용장산성 홍보관을 건립하고 고려 삼별초의 자주적인 대몽항쟁사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성곽을 복원하고, 성곽 주변엔 등산로를 조성했다. 궁궐도 이르면 내년 행궁부터 건립하고 순차적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궁터와 성곽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마침 용장산성으로 간부수련회를 온 은평구청 팀과 만났다. 신비의 바닷길 축제 기간 중이라 축제도 보고, 유적지도 탐방하는 그런 수련회라고 했다.
용장산성 입구엔 '사적 126호 용장산성' 이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판이 용장산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용장산성에 오는 관광객과 탐방객이 비수기엔 한달 평균 1000명, 성수기엔 3000~4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궁터의 흔적을 따라 올라갔다. 궁터는 계단식으로 층층이 궁궐이 있었던 흔적을 대변하고 있다. 용장산성 홍보관에 근무하는 진도군청 직원 서일윤씨는 "예산히 확정되는 대로 궁을 복원할 계획" 이라고 말했다. 예산만 내려오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홍보관에 있는 서씨와 군청 문화관광과에 있는 김민우씨가 용장산성길 답사에 동행했다.
궁터의 흔적을 썰렁했지만 그 역사성으로 인해 첫걸음부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됐지만 방치해두다가 2000년대 들어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부서진 기와조각과 주춧돌 등이 곳곳에서 나왔다. 전부 12세기 전후 유물로 확인됐다.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한 여몽연합군은 다시는 이런 항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뿌리 뽑고자 일벌백계 차원에서 삼별초의 근거지가 된 용장산성을 아예 흔적도 없이 완전히 초토화해 버렸다. 수백 년 동안 사라졌던 그 흔적이 최근 '삼별초의 역사'로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궁터 끝 지점에서 등산로가 시작됐다. 등산로 주변은 울창한 숲은 아니지만 다양한 수종을 보여줬다. 진도 군목인 후박나무가 궁터 끝 지점에서 방문객을 반갑게 맞았고, 진달래도 활짝 꽃을 피웠다. 군데군데 만개한 야생화도 군락을 이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동백나무와 측백나무도 맵시를 뽐내는 듯했다. 특히 군화인 동백나무는 제법 큰 군락을 보여줬다. 자연적으로 자란 동백에 매년 조금씩 식목해서 면적을 넓히고 있다고 했다. 대나무, 팽나무, 오리나무, 참나무 등도 한창 새순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나무들이 건강한 숲을 이룬 모습이었다.
등산로 끝 지점인 동시에 좌우로 둘러싸인 성곽길에 도착했다. 성 위에서 용장산성 입구 격인 벽파진을 멀리서 둘러보니, 용장산성은 정말 천혜의 요새다. 삼면은 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 트인 한 면은 동양 최대의 유속을 자랑하는 울돌목이다. 이만한 요새도 없을 것 같다. 성곽의 높이도 2m에서 최대 4m까지 된다고 했다. 성벽 밖으로는 급경사다. 도저히 적이 침입하지 못할 정도로 가팔랐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삼별초군은 방심했고, 여몽연합군은 그 방심을 놓치지 않고 허를 찔렀다. 뿐만 아니라 여몽연합군의 많은 병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중과부적이었다. 그 옛날 삼별초군의 비명과 아우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1271년 5월, 삼별초군 중 상당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 여몽연합군이 다수의 전함을 확보하는 등 대규모 군사를 조직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몇 차례 진도 함락에 실패한 여몽연합군은 중, 좌, 우익의 세 부대로 나누어 총공격했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삼별초군은 정면의 벽파진을 향해 오는 연합군은 잘 막았으나 측면과 후방을 뚫고 들어오는 연합군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진도 삼별초를 조직한 지 10개월 만이었다. 용장산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왕과 배중손 장군은 죽임을 당하고 군사들도 지리멸렬했다.
홍보관에서 복원된 성곽 정상까지는 1.5km
당시 <고려사절요>는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3군이 진도를 토벌했다. 김방경은 흔도와 함께 중군을 거느리고 벽파정에서부터 들어가며, 희옹 및 홍다구는 좌군을 거느리고 장항에서부터 들어가고, 대장군 김석과 고을마는 우군을 거느리고 동면에서부터 들어가니 전함이 총 100여 척이었다. 적이 벽파정으로 모여 중군을 항거하려 했으나 좌군과 우군이 뚫어 완전히 괴멸했다."
진도를 잃은 삼별초군은 김통정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제주도로 건너간 뒤 항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미 기세가 꺾인 뒤라 그도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패망하게 된다. 이 땅의 삼별초 역사의 종언이다.
비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성곽 위에 서있다. 주변을 한번 죽 둘러봤다. 도저히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은 뒤 성벽을 타고 삼별초의 허를 찌른 여몽연합군의 전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번의 방심이 결국 운명을 단축한 것이다.
그 성벽을 지금 걷고 있다. 정상까지 복원된 상태다. 성벽 정상으로 가는 길은 조금 가팔랐지만 억새밭이 하늘거리며 맞았다. 이 억새들은 그때의 역사를 알고 있을까?
마침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성곽 정상으로 가는 길의 억새와 맑은 하늘이 잘 어우러진 한 편의 그림 같았다. 그림 속에서 역사와 자연에 취해 있었다.
정상은 GPS상으로 267m를 가리켰다. 용장산성 홍보관에서 출발한지 1시간만에 약 1.5km 거리를 지나왔다. 사방이 확 트여 북쪽으로 연륙교인 진도대교와 울돌목(명량해협)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잡은 조력발전소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가는 성곽은 아직 복원이 안 된 상태다. 다시 갔던 길로 돌아와 서쪽으로 복원된 성곽을 따라 걸었다. 복원된 성곽은 총 700m. 성곽 바로 옆으로 호젓한 등산로가 성곽을 따라 나란히 나 있었다. 등산로 양쪽으로는 키 큰 나무들이 가로수같이 죽죽 뻗어 여름에도 그늘을 만들어줄 것 같다.
삼별초에 대한 평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군사정권 시절엔 '삼별초의 난'으로 불리다 지금은 '삼별초의 항쟁'으로 조금 순화된 상태다. 무인정권의 하수인으로 복잡한 배경을 간직한 채 출발했지만 우리 민족 최초의 자주적 항거였다는 사실 그 자체는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삼별초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다. '반역의 역사'와 '자주의 역사'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일까? 용장산성의 길, 아니 진도 삼별초의 길을 걸으며 문득 생각나는 대목이다.
*진도문화원 박주언 이사
진도 삼별초 기획의 주역...진도문화 연구에 앞장
진도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진도의 삼별초를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다큐멘터리 '진도, 또 하나의 고려'와 일본의 외교문서 <고려첩장불심조조>다. 이 두 부분에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람이 박주언(65세)씨다.
박주언씨가 진도의 무형문화를 연구하면서 파악한 삼별초의 역사를 방송사 PD에게 한번 보라고 건네주어 3부작으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게 됐다. 그가 없었다면 진도의 삼별초는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동경대 사료편찬실에서 <고려첩장불심조조>가 발견되자 동경대 교수는 그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나 일본 상황에 대한 논문이었다. 알려진 주요 내용은 당시 일본은 삼별초가 아니었다면 몽고에 점령당했을 수도 있었다며 삼별초를 굉장히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도 박주언씨가 일본에 왔다 갔다 하면서 적극 나서 알렸다. 진도를 알리는 일이 그이 주요한 일이었다.
박씨는 원래 진도 토박이로 일찍부터 진도 문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미 1973년부터 월간<진도> 편집장을 맡아 진도 연구를 시작했고, 이후 <진도사람들>을 창간하고 <예향진도> 편집인으로 일하며 '진도문화제'와 '진도학회'를 창설하는 등 진도와 관련된 일은 빠지지 않고 맡았다. 현재 진도문화원에 등재된 원장을 포함한 모든 이사 중 가장 오래된 이사이기도 하다.
지금도 향토사학자로 활동하며 자유기고를 하고 있고, 명량대첩제 이사, 진도문협회원, 예술공동체 소리가마 대표를 맡고 있다. 진도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공로를 인정받아 전남향토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답사가이드
진도홍보관에서 성곽까지 올라가는 길 조성 잘돼...원점회귀도 가능
진도홍보관에서 성곽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잘 조성돼 있다. 궁터로 가로질러 갈 수도 있고, 궁터 옆으로도 정돈된 길도 있다. 궁터도 사람들이 워낙 많이 다녀 길이 반질반질하게 다져져 있다. 궁터로 걸어 올라가면 삼별초의 역사가 떠올라 만감이 교차한다.
등산로는 외길이다. 가파른 길은 나무계단으로 올라가기 쉽게 해놓았다. 그 길을 따라 성곽까지는 1km 남짓 된다. 용장산 정상의 복원된 동쪽 성곽까지 갔다 오면 총 1.6km 정도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고, 북서쪽으로 700m 복원된 성곽을 따라가도 된다.
조금 더 걷고 싶다면 북서쪽 성곽을 따라 2km 정도 가면 홍보관으로 빠지는 하산길이 있다. 리본이 하산길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길은 잠시 산길과 연결되는데 불과 100m 가까이 내려가면 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로 연결된다. 그 임도를 따라 계속 가면 홍보관이 바로 나온다. 이 거리는 총 5.9km 정도로 3시간 내외가 걸려 한나절 등산과 유적탐방코스로 적격이다. 오전 9시에 출발하면 12시 전후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주변 볼거리
명승 신비의 바닷길 등 문화재 수두룩
진도는 삼별초 유적 외에 단일 지자체로 가장 많은 중요무형, 유형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을 갖고 있다.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는 강강술래(제8호, 보름날 달에 풍요를 기원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집단가무), 남도들노래(제51호, 벼농사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진도씻김굿(제72호, 죽은 이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벌이는 굿), 다시래기(제81호, 상가에서 출상 전날 상주와 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와 재담과 춤으로 노는 가무극적 연희) 등을 진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국가지정 유형문화재로는 보물 제529호 금골산 오층석탑, 사적 제126호 용장산성, 사적 제127호 남도석성, 명승 제9호 진도 신비의 바닷길이 있고, 천연기념물 제53호 진돗개, 천연기념물 제101호 백조 도래지, 천연기념물 제107호 의신면 첨찰산 상록수림, 천연기념물 제111호인 상만리 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212호 관매리 후박나무, 천연기념물 제215호 의신면 초하리 무환자나무(집 근처에 이 나무가 있으면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속설로 명명), 천연기념물 제217호 석교리 백목련 등이 있다. 이외에 지방문화재도 수두룩하다.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는 "우리나라의 양반문화를 보려면 안동으로 가고, 서민문화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진도로 가라"고 말했다. 그만큼 서민문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얘기다. 그 많은 문화유적을 제대로 다 보려면 일주일 이상 진도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교통
서울에서 승용차로 서해안고속도로로 가려면 목포나들목까지 그대로 달리면 된다. 목포나들목에서 나와 영산호 하구둑~영암방조제~금호방조제로 가다 진도대교를 건너 벽파진로로 가다 용장산성길로 우회전해서 가면 된다.
고속버스는 센트럴터미널(호남선)에서 하루 4차례 운행한다. 오전 7시35분에 첫 차가 출발하며, 마지막 버스는 오후 4시35분에 있다. 요금은 우등 32,000원, 일반 21,500원. 소요시간 5시간20분.
진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용장산성 홍보관까지 가는 시외버스는 오전 7시에 첫차가 출발하며 08:40, 11:10, 13:20, 16:20, 18:10 등 하루 여섯 차례 운행한다. 홍보관에서 오전 7시30분에 첫차가 나가며 09:10, 14:00, 16:50, 18:40 등 하루 다섯 차례 운행한다. 택시는 12,000~13,000원. 개인택시 백용국씨 011-636-8797.
*맛집
용장산성 주변에는 산성 외에 아무것도 없고 숙식을 하려면 읍내까지 나가야 한다. 진도읍 남동리에 있는 낙지전문점 신원지(061-544-7088, 011-9615-6000)에서는 깔끔한 반찬에 정갈한 남도 음식맛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글쓴이:박정원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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