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3 9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
본문: 시91, 1~2, 9~16
1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면서 사는 너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를 것이다.
2 너는 주님께 고백하기를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3 정녕, 주님은 너를,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죽을 질병에서 너를 건져 주실 것이다.
4 주님이 그의 깃으로 너를 덮어 주시고 너도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할 것이니, 주의 진실하심이 너를 지켜 주는 방패와 성벽이 될 것이다.
5 그러므로 너는 밤에 찾아드는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6 흑암을 틈타서 퍼지는 염병과 백주에 덮치는 재앙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7 네 왼쪽에서 천 명이 넘어지고, 네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 네게는 재앙이 다가가지 못할 것이다.
8 오직 너는 눈으로 자세히 볼 것이니, 악인들이 보응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9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가장 높으신 분을 너의 거처로 삼았으니,
10 네게는 어떤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네 장막에는, 어떤 재앙도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다.
11 그가 천사들에게 명하셔서 네가 가는 길마다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니,
12 너의 발이 돌부리에 부딪히지 않게 천사들이 두 손으로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짓밟고 다니며, 사자 새끼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다닐 것이다.
14 그가 나를 간절히 열망하니, 내가 그를 건져 주겠다. 그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를 높여 주겠다.
15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그를 건져 주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
16 나는 그가 마음껏 오래 살게 하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겠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은 절대적인 존재에게 의지하여 삶의 안정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이나, 무신론자나 유신론자를 불문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에는 신앙생활은 삶의 안정과 마음의 평화와 같은 이득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공리주의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삶의 안정이나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헛된 짓,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가 없기 때문에 손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를 그 근저에서 지탱하는 이런 방식의 사고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터무니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 우리는 어떤 기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어떤 팟캐스트 프로그램에 나와 피습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것을 보았다. 칼에 목을 찔려 상처에 손을 대는 순간 피가 솟아 나오는 것 같아 ‘아 나는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지 않고 살게 돼서 이제는 마음이 좀 편하고 너그러워졌다는 느낌을 스스로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을 고비를 넘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을 했다. 이제 내 삶이 덤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아나서 삶이 덤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존재하게 됐으니 삶은 그 자체로 덤인 것이다. 덤은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것이다. 존재 그 자체를 혐오하는 극단적인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것”이고 “죽은 정승보다 산 개 팔자가 나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삶이 지금 여기에 있게 하는 데 나는 어떤 행위도 한 바가 없다. 우리는 그 귀한 삶의 근거인 생명을 거저 얻은 것이다. 삶의 기원이 이러한데, 그렇게 가능하게 된 삶에서 나의 행위에는 반드시 어떤 대가가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은 행위는 헛짓이라는 생각은 좀 얌체 같지 않은가? 그리고 공리주의는 그 대가가 행복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의 유명한 경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비록 “최대 다수”, 즉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보편성을 나의 행복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비해 상대화한다. 내가 행복하면 남들도 행복해질 것이라는 이 가정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지에 기초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있어서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따라서 내가 가진 것을 남들은 가지지 못하고 단지 원하는 상태에만 있다면, 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진 것이고 따라서 나는 행복하다. 지젝이 종종 드는 끔찍한 예가 있다. 천사가 가난한 농부에게 나타나서 지금껏 어렵게 살았으니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단 네가 원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는 두 배로 해주겠다고 했다. 가난한 농부는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내 눈알을 하나 빼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있는 기계 부품 같은 대상으로 여기면서 생존경쟁을 벌인다. 결국 공리주의의 귀결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인류의 역사를 냉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어제도 오늘도 인간의 삶은 이런 식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은혜받은 기억보다 굴욕의 기억을 더 크게 더 오래 간직하는 존재다. 인간에게 “복수는 나의 것”이다. 나의 욕망을 욕망하는 너는 내 존재를 찌부러뜨리고 굴욕에 빠뜨리고 내 안의 나보다 더 소중한 것, 즉 타자의 욕망을 탈취할 수 있는 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삶과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신앙은 삶의 안전과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것이다. 피해를 과장하고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세계 말이다. 나의 정체성, 즉 신앙, 특별히 기독교 신앙은 타자와의 차이가 오로지 적대감으로 나타나는 세계에서 해방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에게서 그 가능성을 보는 사람들이다. 시편 91편도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1절은 시의 서론이다. 시인은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면서 사는” 삶,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르는 삶”을 노래한다. 우리는 “가장 높으신 분” “전능하신 분”의 보호 아래, 그의 그늘 아래 머무는 삶이야 말로 안정과 평화는 물론 행복, 그것도 최대 행복까지 보장된 삶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잔뜩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가장 높으신 분, 전능하신 분은 우리가 이 공리주의 시대에 꿈꾸는 삶, 평화롭고 풍요롭고 고상한 삶을 완벽하게 보장해 주시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말 우리는 가장 높으신 분에게 이런 공리주의적인 이득을 바라는 것일까?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고상한 삶은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자본이 보장해 주는 것 아닐까? 오늘날 내란 국면에서 하루가 멀다고 거리에 나와서 사회적인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중에서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고상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자기가 생각해도 또 남들이 볼 때도 그런 삶을 지금 여기의 현실로 살아가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 추운 겨울날 거리에 나와서 몇 시간이 넘도록 목이 쉬어 터지게 외칠까? 풍요롭고 안전한 삶을 자본이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은 자본이 아니라면, 가장 높으신 그분이 우리 삶에 관해서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시를 읽어 보면 이 시가 반전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시인은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전능한 분의 보호를 받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에 왜 피난처가 필요하며 요새가 필요한 것일까? 좀 더 읽어 보면 점입가경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는 자는 사냥꾼의 덫에 걸릴 위험에 빠져 있고, 대낮에도 그를 죽이려는 화살이 날라들 것에 대비해야 한다. 게다가 그의 왼쪽에서는 천명이 죽어 나가고 오른쪽에서는 만 명이 쓰러질 수도 있다. 그가 디디는 땅은 돌밭이며, 맹수와 독사들이 기어다닌다. 흑암을 틈타서 염병이 닥칠 수도 있고 백주 대낮에는 예기치 않은 재앙이 덮칠 수도 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그의 삶은 안전하기는커녕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인다. 그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물론 주님께서 그를 보호하고 지켜주실 것이다. 하지만 지켜주실 것이라면 주님은 왜 그토록 위험천만한 상황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것일까? 주님은 대체 무엇을 보호해 주신다는 걸까?
시인은 주님, 즉 가장 높으신 분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이다. 14절은 그가 주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를 높여 주겠다.” 고대의 사람들에게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진실이야말로 그가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4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의 진실하심이 너를 지켜 주는 방패와 성벽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 그의 진실하심 안에 있다는 것, 그로 인해서 궁극적인 의미의 보호를 받는 삶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주님은 궁극적으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분이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들려주시지만, 그분의 이름은 어떤 개념이 아니다. 표준새번역은 “나는 스스로 있는 나”, 공동번역은 “나는 곧 나”, 가톨릭성경은 “나는 있는 나”, 보수적인 교회들이 좋아하는 개역개정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지만, 사실 이름은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이름의 객관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자기 자신에 대한 주관적인 기대 또는 예단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지만, 우리의 통찰은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백척간두의 삶을 살고 있는 시인이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믿으며, 나를 오로지 진실을 향한 개방성 속에서, 지금의 나는 비록 진실하지 못하지만, 이 진실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통렬한 자각 속에서, 나와 세계의 진실에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서, 나를 사전에 결정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자신과 세계를 돌파하는 사람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투쟁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세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그는 오로지 이 싸움 속에서만 9절이 말하는 것처럼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가장 높은 신 분을 거처로 삼을” 수 있다. 그는 오로지 이 고통, 이 공포, 이 환희, 이 열정 속에서만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며, 14절의 “내가 너를 높여 주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삶은 전능하신 분의 보호 속에서 안전하다. 그는 자본이 제공하는 안정과 평화 그리고 고상한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위험하고 고되고 굴욕스러울 수 있다. 그의 길은 자갈 밭이며, 사냥꾼의 덫이 깔린 질병과 재앙의 장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진정한 삶과 생명이 불가능한 세계의 사태들일 뿐이다.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비주체의 세계, 우리를 모두 교환가능한 기계의 부품으로 삼는 자본의 세계 속에서의 문제들일 뿐이다. 여기서는 고통도 환희도 공포도 열정도 모두 그 진정성을 상실한다. 이 세계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헛된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 김건희가 2박3일 굿판을 벌이며 세게 치성을 드리고 왔더니 똥파리들의 대왕 윤석열이 석방되는 세계의 잡신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에는 시인은 진실한 하나님의 이름의 진정한 위대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잡신들의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높으신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다. 잡신들은 이런 삶을 알지 못하며 감히 범접할 수도 없다. 자본이 진실을 외면한 삶에 어떤 복락을 가져다주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다고 말하지 말자. 우리는 이 잡신들의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충분한 환멸 속에서 그것들을 겪었다. 호화로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이다. 8절에서 시인은 “오직 너는 눈으로 자세히 볼 것이니, 악인들이 보응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미래시제로 노래하지만, 우리는 이미 보았다. 지겹게 보았다. 우리가 끔찍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지치고 좌절하고 포기한 나머지 잡신들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진정 영화로운 삶을 포기하고 조잡한 화려함과 사치를 선택하는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인과 더불어 노래하자.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 그리고 가장 높으신 분의 응답을 듣자.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가장 높으신 분을 너의 거처로 삼았으니, 네게는 어떤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네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너를 건져 주고, 너를 영화롭게 하겠다.” 아멘.
첫댓글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윤석열 석방에 어이없고 실망스러웠는데, 우리가 딪고 있는 이곳이 시편91편 말씀처럼 사자와 독사가 우글거리는 전장이라는 생각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다는 말씀에 위로 받습니다. 말씀 올려주셔서 다시 묵상하며 힘을 얻어 갑니다. 감사합니다.
글로 읽어보니 또 다른 느낌으로 새롭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