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족산 산행후기>
2004.11.20.(일) 상평국민학교 동창들과 기 예정된 장호원 백족산 산행을 위하여 새벽부터 부산을 떤다. 아침 식사도 거른채 06:30 집을 나섰다.
전철에서 계순이 친구 전화를 받았다. 7호선 건대역으로 해서 가겠다고 한다.
07:50 잠실롯데백화점 너구리상 아래 도착. 친구들을 기다린다. 08:10이 되어도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그 때 병국이 친구 차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뒷좌석엔 인수 친구가 함께 타고 있었다.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히려 어디있었냐고 큰소리를 뻥뻥친다. 내참 기가 막혀서. . . . . 조금있으니 계순이 친구도 도착했다.
우린 고속도로보단 예전에 다니던 3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친구들은 떡이며 과일 그리고 김밥을 꺼내 요기를 하란다. 병국이네가 쑥을 넣어 만든 인절미가 일품이다. 그동안 참가하지 않던 친구들의 안부까지 이야기하며 성남-광주-곤지암-이천-장호원으로 해서 기혁이 친구와 만나기로약속한 감곡면사무소에 도착했다.
기혁이 친구는 오늘 새벽 미리 월정리 다리골 집에 도착을 했는데 집안 형편상 이번 산행이 곤란하단다. 공산정, 성뜰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했으나 오늘 따라 혼례식에 참석해야 할 곳이 많아 모두가 난색을 표한다.
수퍼에 들러 감곡막걸리와 안주, 과자를 구입한 뒤 주인에게 백족산 산행 시발점 무량사가 어딘지를 물었다. 문제는 무량사가 자재미보 가는 길로 가다가 우측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잘 못 알아들어 마을 분에게 다시 물어보니 무량사는 이 쪽이 아니고 진암4거리 현대아파트 뒤란다. 실제 가보니 무량사 가는 길 이정표가 돌에 새겨져 있고, 장호원-충주 우회도로에서도 바로 무량사로 빠지는 나들목도 있었다.
<백족산 무량사 일주문>
백족산은 산행 시작 길이 다소 가파르고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쯤해서 혁숙이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바같양반, 아이들 하고 도봉산 산행을 출발하고 있다고. . . . .
<백족산 정상 표지석>
백족산은 경충국도에서 바라다 볼 땐 상당히 높은 산으로 보이는데 막상 산행을 하고 보니 예상외로 수월한 산행길이다. 한 숨 돌릴새도 없이 정상에 올랐다. 백족산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태극기 아래에는 애국가를 새긴 비석이 있다. 웬 애국가.
잔자골 남이장군과 지네와의 전설이 얽혀있는 절터는 있을까? 있다면 어딜까? 그리고 풍수지리상 금란포란형의 명당이라고 하는 자점 선조님 부친(탁)의 묘터는 어디쯤일까? 궁금증에 몸살이 날 지경인데 한 번 산행에 어찌 다 답사할 수 있겠는가. 혼자 위안을 하며 백족산을 잘 아는 지인에게 문의한 후 한 번 더 오를 것을 다짐한다.
안개가 끼어있는 청미천을 가운데 둔 장호원, 감곡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병국 친구 부인이 보내준 복분자 술이며, 매실즙을 맛있게 잘 먹었다. 감사드린다.
하산길은 임도를 택하였는데 길 가운데며 가에는 명주실같이 곱고 부드러운 풀섭이 한창이다. 사진도 한 컷 찍을 겸 누워보니 따듯한 햇살에 폭신. 폭신한 느낌까지 고향 땅임을 실감한다.
<무량사 다보탑>
<무량사 경내> 경내에 있는 약수물로 목이 축였다 .
다음은 자점보를 답사할 차례다. 그리고 속세가 좋아 일주문을 통해 속세로 돌아왔다.
자재미보로 가는 길엔 갈대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자점보(自點洑)>
보(洑)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흐르는 냇물을 막아 둑을 쌓은 것을 말하는데, 자점보(自點洑)는 경기도와 충청북도 음성군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淸渼川) 상류에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장호원읍 오남리 지역으로 백족산(白足山) 동남단 끝이 된다.
인조반정 때의 공신으로 왕실의 외척이 되어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권세를 마음껏 휘두르다가 효종 2년(1651) 역모사건이 탄로되어 주살된 김자점이 쌓았다고 하여 ‘자점보’라고 불리우며 인근에서는 ‘자재미보’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백족산 중에는 금반형이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명당이 있는데 김자점이 일찍부터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득세하게 되자 그 부친의 묘를 그 곳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금반형에는 그 앞에 반드시 큰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곳에는 단 한가지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김자점은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묘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청미천을 막아 보를 쌓으므로서 부족한 수세를 보강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자점보가 생기게 된 유래이다.
자점보는 결과적으로 장호원 일대의 중요한 농용수 공급원이 되어 그 이후부터 이 지역은 가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오남리 일대에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수원지의 구실을 하고 있다.
수백년을 내려오는 동안 하상의 변동과 개축으로 원래의 형태는 밝히기 어려우나 현재 남아있는 보의 길이는 역 500m 가량이며, 폭은 넓은 곳이 6m, 좁은 곳은 2m가량 된다.
《출전 : 이천군지pp798/1984》
☞ 왕실의 외척 : 인조와 조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 효명옹주가 김자점의 아들 세룡과 혼인을 함.
☞ 역모사건 : 효종 때 같은 서인세력 중 공신세력(김자점)과 산림세력(김상헌, 송시열, 송준길) 간의 세력싸움에서 효종이 이해득실에 따라 산림세력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이에 권좌에서 밀려나 광양으로 유배를 당한 김자점이 청(淸)의 힘을 빌려 권력을 만회하려 하였는데 이 때 산림세력은 이를 역모사건으로 다스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역모사건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권력다툼이라 할 수 있다.
☞ 자점보 : 김자점은 장호원 자점보 외에도 전국 여러 곳에 수리사업을 하였다. 즉 황해도 재령평야에 어지둔보와 경우궁보를 쌓았고 송파구 잠실 새내에도 보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호남지방에도 보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김자점 부친 묘와 관련된 자점보 유래는 김자점을 역적으로 몰려는 당시 산림세력의 유언비어일 뿐이다. 오히려 김자점은 농업 생산량을 장려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보를 쌓은 수리사업의 대가인 것이다.
장호원-충주간 백족산 우회도로 청미천 다리 아래가 자재미보다.
<백족산> 백족산은 산허리가 온통 복숭아 밭으로 봄이되면 복사꽃으로 장관을 이룰 것이다.
귀경 길에 저녁은 곤지암에서 소머리국밥으로 해결했다. 백족산은 비록 낮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고향산을 산행한다는 즐거움이 너무도 컸다. 우리는 12월 산행지로 많은 친구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용마산-아차산 코스로 잡았다. 함박눈이 내리면 더욱 좋겠지. 친구들아 함께한 하루 즐거웠다. 내 달에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