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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오름의 고장 아름다운 바다의 도시 동해시를 끼고 돌다
Ⅰ. 山行日 : 2005년 1월 8, 9일(무박 2일)
Ⅱ. 山行地 : 댓재에서 백봉령까지(26.5km, 13시간 20분)
Ⅲ. 參加者 : 김명자, 김찬석, 박기양, 박봉하, 안상경, 유선만, 윤희, 윤희원, 이용준, 이태인, 장현옥, 조규연, 조재방(13명)
Ⅳ. 山行記
1. 冬將軍이 氣力을 回復하다.
백두대간 24구간 산행은 한마디로 세 가지 惡材의 負擔을 안고 시행한 산행이었다. 그 첫째는 거리가 멀고(26.5km) 長時間 山行(최소 13시간 30분)을 해야 하고 두 번째는 高度의 次가 심하고(최하 730m에서 최고 1403.7m) 中間 脫出을 하기가 쉽지 않은 점이며(탈출 최소 2시간 이상 소요) 셋째는 氣溫이 急降下하고(영하 20도) 눈 올 確率이 높다는 것이다.
지난 달 산행 후 이를 대비하여 광교산도 올라보고 이천 伏下川 뚝 길과 만석공원을 시간 있는 데로 걸었는데도 年初 德談을 나누느라 酒席이 잦았던 관계로 체중이 날로 늘어나 산행 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산행 때 冬將軍이 健康이 좋지 않다느니 고뿔이 들었다느니 하여 입방아를 찧은 것이 禍根이 되었는지 連日 봄 같던 날씨가 점점 추워지더니 산행 출발 당일 낮부터 기온이 急降下하고 급기야 눈까지 휘날리기 시작한다.
산행을 준비를 하면서도 內心은 일정을 연기하거나 다음 구간(25구간, 약 7시간 산행)과 바꾸겠다는 連絡을 기다렸으나 누구도 걱정을 풀어주는 사람이 없다. 아무래도 山行苦를 혼자 獨차지할 모양이다.
이번 산행은 遠距離, 長時間이 소요되기 때문에 한 시간 앞당겨(23 : 00시) 출발하게 되었다. 서둘러 밖을 나오니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소매 속으로 파고든다. 23시 04분 출발지 『만석공원』에 도착, 먼저 온 김찬석, 윤희원, 조재방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곧 바로 勸善高로 출발, 23시 25분 勸善高 정문에 도착하니 회원들이 물밀 듯이 차에 오른다. 김명자, 박기양, 안상경, 유선만, 윤희, 이태인, 장현옥, 조규연. 그런데 山岳隊長이 보이질 않는다. 5분여 후 짐엔콜에서 山岳隊長 급히 내려 乘車하고 간단한 인원 점검이 있은 후 댓재로 출발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 자리를 맡고 이내 잠을 청한다. 人心 좋은 運轉技師, 밖의 찬 기운을 감안했음인지 난방을 뜨겁게 하여 언 몸을 녹여 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기가 더해 잠을 이룰 수 없어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넘고 있다. 예정 대로면 댓재에 도착해야할 시간인대도 어둠과 찬 공기를 가르며 차가 달리고 있다. 눈을 붙이고 뜨기를 몇 번, 4시를 10여분 넘겨서야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防寒服을 입고 감기는 눈을 비비며 차에서 내리니 코끝이 찌릿하게 찬 기운이 스쳐간다. 댓재 休憩所.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방안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다. 김치국, 고등어 자반 두 쪽, 콩나물, 김, 시금치, 북어 졸임, 김치, 젓갈 등 10여 가지 饌에 밥 한 그릇. 깔깔한 입안을 김치 국으로 달래고 長時間 山行을 위해 밥 한 그릇을 남김없이 비웠다.
2. 頭陀山 日出
2-1. 댓재 山神閣
예정보다 한 시간이 지체되어 茶 한잔 마실 여유도 주지 않고 산행을 서두른다. 이미 지체된 시간 좀 늦으면 어떤가. 셀프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신발 끈을 졸라맨 다음 휴게소를 나온 것이 04시 40분 頃. 휴게소 건너편 돌로 포장된 널따란 길로 들어서니 아담하게 지은 山神閣이 있고 山神閣 右側으로는 백두대간 종주 標識旗들이 촘촘히 매달려 있다. 山神閣 內部를 살펴보고 싶었으나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볼 수가 없었다.
2-2. 햇대등
山神을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나마 오늘 우리 대원들의 無事山行을 간절히 빌고 나무숲으로 진입하여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오르기를 20여분. 몸도 풀리고 땀도 나기 시작한다. 평소 같으면 몇 번이고 땀을 훔칠 만도 한데 워낙 기온이 낮아(영하20도) 입김이 스쳐간 옷깃이 금새 얼음으로 바뀐다.
東海 市街地의 불빛을 바라보며 걷기를 30여분, 숨을 몰아쉬며 오른 곳이 오늘 산행의 첫 번째 봉우리 『햇대등(표지석 : ←댓재 0.9km, 통골 3.6km →/ 04시58분)』이다. 고도가 높아 갈수록 기온이 더 떨어지는지 寒氣가 들어 지체할 수가 없다. 햇댓등 標識石 뒤쪽으로 뚜렷한 길이 나 있으나 대간 길은 표지석 좌측(서쪽) 비탈로 난 길을 따라 가야한다.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서서 완만한 능선 길을 가다보니 공터 갈림길이 나타난다. 쫓기는 시간, 살 속을 파고드는 추위로 쉴 念도 못 내고 932봉, 명주목(05시 13분)을 지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 곳이 『1028봉(05시41분)』.
오르고 내리며 휘어져 돌아가도 東海 市街地의 불빛은 계속 등 뒤를 따라 붙는다. 겨우 한 시간 정도를 걸었는데 숨은 더 가빠지고 허벅지 근육이 당기기 시작한다.
2-3. 통골재
힘들게 1028봉에 올랐다가 발 앞쪽으로 힘을 주며 내려 선 곳이 山竹이 群落을 이룬 『통골재/목통령』이다. 「←햇대등 0.9km, ↓ 통골 하산 길 0.9km, 두타산 3.6km」의 里程標가 세워져 있다.
2-4. 1243봉
잠시 휴식(06 : 15~06 : 22분). 다시 완만한 山竹 길을 걷다보니 급 비탈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콧물을 연방 훔치며 높아지는 山峰을 넘고 돌았더니 다리 힘도 빠지고 땀이 밴 바짓가랑이가 뻣뻣하게 얼어 스칠 때마다 서걱거린다. 약해지는 마음을 되살려 먹고 된 비탈을 천천히 오른다. 어둠도 서서히 사라지고 동녘 하늘에 뜬 하현달도 빛을 잃어 가는데 산 능선을 따라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비탈길을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경사가 완만해 지는 공터에 도착(07 : 03)했는데 1243봉을 좌측에 오른쪽 측면을 돌아 頭陀山 頂上에 오르도록 길이 나 있다.
하늘은 점점 더 선홍빛으로 변하고 海水面을 따라 겹겹이 떠 있는 구름이 마치 疊疊山峰을 이어 놓은 것 같이 壯觀을 이룬다. 이번에도 日出을 볼 수 있겠다. 日出 순간을 사진으로 담고 싶은 이태인 총무, 우리를 앞질러 나가고 우리도 빨리 四面이 툭 터진 頂上에 올라 日出을 보겠다는 慾心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2-4. 頭陀山 頂上
頭陀山 頂上 直前 안부부, 마지막 가파른 오름 길에 힘을 더하여 『頭陀山 頂上』에 도착(07 : 23분)을 했다.
頭陀山 頂上을 막 올라서면 무덤 1기가 바로 나타나고 그 뒤로 「동해시자연보호위원회」에서 세운 『頭陀山, 海拔1,352.7m』정상석이 있으며 우측에는 이정표와 대형 山行圖가 세워져 있다. 일출을 기다리며 頭陀山 頂上石을 중심으로 단체 사진도 찍고 사방을 돌아보며 조망도 했다. 산 아래로는 東海市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바다도 보이는데 오늘은 구름으로 수평선인지 雲海線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靑玉山은 咫尺에서 稜線으로 이어져 있고 山 아래로 깊은 계곡을 따라 작고 큰 바위 산이 절승을 이루었는데 아마도 人口에 膾炙하는 武陵溪谷인 듯 싶다.
「頭陀山(1352.7m)은 삼척, 동해의 분수령으로 이 두 고장을 대표하는 산이며, 시민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겨진다. ‘두타(頭陀)라 함은 人間事의 모든 煩惱를 헐어 없애고 物質을 貪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佛道를 수행하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산 어귀의 三華寺, 天恩寺의 모산(母山)으로 자리 잡고 있다. 頭陀山은 靑玉山 高積臺와 함께 海東 三峰으로 불리고 있다.(두타산 안내 표지판)」
煩惱란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모든 妄念(욕망, 노여움, 어리석음 등)이라고 하는데 이런 망념을 어찌 떨어 낼 것인가?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우리 日常生活 自體가 妄念이 아닌가. 나 같은 俗人으로는 修行하기 어려운 課題일 듯싶다. 頭陀山이 佛敎의 도량(道場)이라 하니 오늘 이 山行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俗世에 찌든 妄念을 덜어 냈으면 좋겠다.
해가 올라왔음직도 한데 구름에 가려서인지 雲海線만 황금빛으로 빛나고 해는 보이질 않는다. 日出을 기다렸다. 드디어 젓꼭지 같은 밝은 점하나 구름 속에 보이더니 순식간에 半圓을 그리며 光彩가 눈을 가려 어지럽게 만든다. 아마도 깨달음의 晶體가 태양으로 形象化되어 나타난 모양이다.
산 꼭지(頂上)라 손, 발끝이 모두 저리고 몸의 열기도 식어간다. 더 이상 지체하기가 힘들어 반쯤 솟은 해를 뒤로하고 정상석 좌측 숲 속으로 이어진 大幹길을 따라 靑玉山으로 향했다.
3. 박달령
07시 40분에 두타산 정상에서 가파른 내림 길을 내려서니 완만한 능선길이 펼쳐 지고 바다가 있는 右側으로는 깎아지른 절벽 같은 지형을 이루었는데(西高東低) 아래로는 武陵溪谷의 景觀이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새롭게 펼쳐진다.
무릉계곡의 경관을 보며 쉬엄쉬엄 걸어 도착한 곳이 『박달령(1,160m / 08 : 20분경)』이다. 嶺의 정상에는 작은 돌무더기가 두 개 있고 이정표를 세워 두었는데 「←두타산 4.5km(1시간10분), 청옥산 3km(50분)」로 되 있다.
記錄(산림청)에 依하면 「박달령」은 頭陀山과 靑玉山을 잇는 6km 남짓한 산등성이로 거대한 횃대 같아 의가등(衣袈嶝 : 옷걸이 고개라는 뜻)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고개로 맑은 날에는 멀리 울령도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시야가 맑지 못한 관계로 울령도는 확인을 하지 못했다.
4. 청옥산(靑玉山)
박달령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후 10여분을 가니 『문바위재』, 너덜지대를 지나 한바탕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능선 분기점에 올라서니 『청옥산 샘터 갈림길』이정표가 나온다.
샘터 갈림길에서 2, 3분 정도를 걸으니 『靑玉山 頂上, 1403.7m』이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고 청옥산 頂上石(해발 1403.7m, 청타 산악회)과 이정표, 그리고 청옥산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며 산불 방지용 태양열 무선 안테나도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에는 「무릉계 15.8km, 3시간 20분 / 두타산 3.6km / 연칠성령 1.3km / 고적대 2.3km / 중봉(삼척시) ↓ / 샘터 →」로 표시되 있다.
청옥산 안내판에는 “북으로는 고적대, 동으로는 두타산과 연결되어 있는 東海 三峰 중의 하나로 예로부터 보석에 버금가는 靑玉이 발견되고 약초가 자생함에 靑玉山이라 불리었다 한다.”라고 산의 地名 由來를 간단히 기록해 놓았다.
손과 발끝이 시리고 오금이 저린데도 1352.7m의 두타산과 1403.7m의 청옥산을 올랐으니 오늘 산행의 큰 고비는 넘긴 것 같다. 산의 고도가 높기도 했지만 날씨가 워낙 추워 대원들의 모자에는 서리가 내렸고 배낭 속에 넣어 둔 물병도 얼어 물을 먹을 때마다 얼음을 깨야 했다. 그리고 흐르는 콧물을 닦는 것 또한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雪上加霜으로 박기양 교감은 청옥산을 오르기 전부터 오금에 이상이 온 모양인지 자꾸만 뒤로 쳐진다. 아무래도 두타산을 오르면서 무리를 했나보다.
5. 連七星嶺
쉬는 것도 잠시. 청옥산 정상석을 중심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정상 산불방지용 태양열 무선안테나 시설물 울타리 철망 우측으로 주렁주렁 달린 표지기를 따라 『連七星嶺』을 향하여 출발했다.(09 : 15).
댓재를 출발하여 4시 20여분을 추위와 씨름하며 두타, 청옥산을 넘고 햇대등, 명주목이, 목통령, 박달령, 문바위재까지 무려 5재를 지나왔으니 허기가 져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도착한 곳이 『連七星嶺(09 : 50)』.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김밥)을 먹고 있다. 배도 고프고 지친 터라 배낭을 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 물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댓재 휴게소 아주머니가 은박지에 싸 준 김밥을 풀어 한 쪽을 입에 넣으니 밥맛은 없고 얼음 알이 입안을 굴러다니는 것 같다. 그냥은 도저히 먹을 수 없어 준비해온 보온 물병의 물을 따라 마시며 한 줄의 김밥을 먹으니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다. 남은 밥을 다시 말아 배낭에 넣고 담배 한 대를 붙여 물고 주변을 살펴보니 무릉계곡 방향으로는 키 보다 조금 낮은 돌탑이 있고, 방향 표지판(무릉계곡 12.3km, 2시간 50분 / 대피소 5.2km, 1시간 20분 / 청옥산 3.5km / 고적대 2.3km)과 연칠성령을 『난출령 또는 망경대』라 불렀다는 지명 유래판도 세워 놓았다.
연칠성령(連七星嶺)은 무릉계곡에서 시작된 물줄기를 따라 가면 문간재를 지나 사원터(상원사 옛터)에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청옥산에서 북서쪽으로 연결된 하장면 중봉 당골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연칠령』 또는 길이 험하다 하여 『난출령』 이라고도 한다. 연칠성령 북쪽의 산마루에는 인조1년 이식(李植:1623년 )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고 이곳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하는 『望京臺(망군대)』가 있다고 한다.
6. 고적대(高積臺)
백봉령까지는 반을 왔는가? 갈 길은 멀고 남은 시간은 짧고 날은 추워 점심시간도 오래 갖지 못하고 고단한 몸을 일으켰다. 윤희 선생님과 산타님은 이곳에서 무릉계곡으로 하산하고 나머지는 고적대로 향했다.
연칠성령을 출발하여 완만한 흙 봉우리 2개를 지나 안부로 내려서니 큰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듯한 직각 암봉(巖峯 : 高積臺) 하나가 우뚝하다. 저 巖峰을 어떻게 기어올라야 하나 걱정을 하며 바위 앞에 이르니 굵은 로프가 설치되 있고 가파른 것을 제외하고는 오르는데 큰 무리는 없다. 워낙 경사가 심하여 오르며 쉬고 오르며 쉬기를 서너 번. 『李植』이 이곳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며 임금님을 그리워했는가? 대단한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바위로 이루어진 전망대를 좀더 지나 『高積臺 頂上』에 올라선다(11 : 40분).
정상에는 해발 1353.9m, 1996년 1월 1일이란 頂上石이 있고 이정표도 세워 두었는데 「청옥산 2.3km / 괘병산 2.5km」로 표시되 있다. 잠시 가쁜 숨을 고르며 지도를 보니 李植이 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았다는 『望京臺』는 『高積臺』 훨씬 전으로 무심코 지나친 것이다.
『高積臺, 1,353.9m』 안내판에는 “동해시, 삼척시, 정선군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이 臺를 이루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쪽으로 뻗혀진 청옥산 두타산이 아울러 海東 三峰이라 일컬어지며 신선이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으로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哀歡이 서린 곳이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안내판의 설명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高積」이란 돌이 높게 쌓인 것을 말하고 「臺」는 의상대사가 수도했던 곳으로 이 둘을 합하여 『高積臺』란 이름이 붙은 듯 하다.
7. 고적대 갈림길의 암벽과 바위 전망대
깎아 세운 듯한 고적대에 올라보니 전망이 너무 좋아 사방을 조망하며 10여분 휴식을 갖고 우측으로 난 급경사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산행 전 大雪이 있었다면 꽤 고생했을 구간이다. 안부로 내려가다 보니 멋진 절경 하나 나타나는데 암벽 절리 사이로 뻗어 나온 소나무며 바위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전나무가 어우러져 마치 동양화 한 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
뒤따라오던 이총무, 다리에 이상이 생긴 박교감은 천천히 오겠다며 먼저 가라는 말 전해주고 절경을 놓칠세라,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무릉계곡을 내려다보며 앞서 걸었다.
사원터 갈림길을 지나 20여분을 내려오니 바위 난간에 서서 산악대장과 조규연선생님이 무엇인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 曰 『바위전망대』란다. 전망대에 내려서니 무릉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두타산부터 박달령을 거쳐 청옥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산 중턱 쯤에는 선명ㅎ지는 않으나 얼음으로 덮인 두 줄기 폭포가 보인다. 산악대장의 설명으로는 폭포 근방으로 두타산성이 있다고 하는데 거리가 멀어서인지 肉眼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한국 관광공사의 자료에 의하면 “『頭陀山城』은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국민관광지 무릉계곡내에 있는 석성으로 동석산성이라고도 불린다.
102년(신라 파사왕 23년)에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1414년(조선 태종 14년)에 삼척부사로 왔던 김맹윤이 높이 1.5m, 둘레 2.5km의 산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 쳐들어 와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산 성으로 피난하였다. 당시 아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남북15리 절벽에 도열시켜 적 에게 위세를 보이자 왜군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백복령 방면으로 퇴각했다. 빨래하던 노파가 이 산성의 사정을 제보하듯이 이방의 계략대로 알려주었더니 왜군은 이 기령을 넘어 우회 침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치밀한 계략. 왜군들은 성중에서 전 멸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 고장 청년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격침했다는 항쟁지로 현재 성터 가 남아 있고 호국의 얼이 담겨 있는 곳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8. 갈미봉 정상
수박 겉핥기식으로 무릉계곡을 眺望하고 갈 길이 바빠 전망대를 떠났다. 전망대를 떠나 안부하나를 지나고 완만한 흙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선 곳이 『갈미봉, 1260m』정상이다(12 : 05분경). A4용지에 『백두대간종주/갈미봉1260m/三國志산우회』라 쓴 하얀 코팅지가 나무에 걸려 있다.
9. 이기령 임도 표지판(이상한 이름도 있다)
갈미봉 부터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으로 몇 개의 작은 봉을 오르내린다. 공터, 공터가 하나 더 지나 Y자-갈림길. 높은 봉(1,142.8봉)을 돌아 좌측으로 발길을 옮기니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가 심어진 곳이 나타난다. 그리고 잡목들이 사라지고 아름드리 老松地帶가 나타난다. 아마도 人家가 멀지 않은 것 같다. 작은 봉을 두 개 넘었나. 山竹 길을 따라 내려 선 곳이『이기령, 815m, 13 : 10분경』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배낭을 내려놓고 물 한 모금, 담배 한 대 붙여 물고 대간 길 좌측으로 보이는 林道로 나가 보니 이기령 표지판을 세워 두었다. "현위치-이기령/원방재30분/부수베리80분/정상150분/정상직전120분"
이기(耳基)는 예전에 동기(銅基:구리터)라 하였는데 이곳에 동점(銅店)도 있었다고 전해지며 동기(銅基)가 속전(俗傳)돼 이기(耳基)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표지판에 「부수베리 80분」으로 되 있는데 이름이 하도 이상하여 산행 후 부수베리에 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땅이름 사전?) 찾아보았더니 '부수베리는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 있는 마을로 된장공장이 유명하다고 한다.
부수베리의 어원은 「원래 고구려 계통의 말로 '부수/부시'는 소나무, '베리'는 벼랑을 뜻」한 것인데 同音을 끌어들여 語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돌과 돌을 마찰시켜 담뱃불로 이용하던 부싯돌이 많이 나는 곳이라는 것과 연관시켜 「부수베리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10. 枯死木 봉우리 上月山
휴식도 잠시. 점심 때 먹다 남은 김밥을 꺼내 출출한 배를 채우고 추억의 건빵도 간식으로 꺼내 놓았으나 인기가 없다. 날씨 탓인가 보다. 안상경교감, 이곳에서 하산 한다기에 미쳐 도착하지 못한 박기양교감과 함께 가기를 권하고 다른 대원들은 耳基嶺을 떠나 上月山으로 향했다(13 : 30분).
경사가 점점 심해가는 비탈을 힘겹게 오르니 헬기장(970.3m) 나타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발 앞쪽으로 힘을 주며 급경사를 내려와 안부에 도착 하는가 싶더니 다시 급하게 올라 친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사람 미치게 한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힘들게 산봉을 오르니 큰 枯死木이 있고 한쪽 귀퉁이가 날아간 판자가 하나 걸려 있는데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희미하게『上月山』이라 쓰여져 있다.
상월산(980m, 14 : 15분경), 높은 산에서 달을 본다는 뜻인가? 정말 힘들고 숨 가쁘게 하는 산이다. 정상에서 우측을 내려다보니 80도는 족히 됨직한 경사를 이루고 樹林이 鬱蒼하며 골의 깊이도 까마득하다. 그리고 거대한 巖山이 정상 아랫쪽으로 보이는데 주변 樹木과 어울려 絶景을 이룬다. 巖山 중턱으로 雲霧라도 휘감고 지나간다면 月宮 仙女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내려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1. 원방재
항상 후미로 산행을 하던 김명자선생님 오늘 몸이 가쁜한가보다.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다. 상월산을 올라 치더니 앞서 나간다. 아마 고향땅을 밟고 하는 산행이라 몸이 가벼워 진 모양이다.
김명자선생님을 앞서 보내고 후미에서 천천히 巖山의 秘境을 감상하며 봉우리를 2개나 더 오르내리고 리본을 따라 비탈길로 들어서니 좌측 바로 옆에 임도가 보이고 『원방재에 도착(730m, 14 : 45분경)』을 한다.
12. 1022 헬기장
앞서 가던 대원들과 합류, 잠시 휴식. 지금까지 잘 오던 김명자선생님 원방재에서 하산 길 택하고 나머지는 해지기전 백봉령에 도착할 料量으로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모두 지친 모습이다.
유선만교감, 윤희원, 조재방사장, 조규연선생님 아직도 힘이 남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사진 오르막길을 올라챈다. 마음만 급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재촉하여 산봉우리 하나를 오르니 거대한 산이 앞을 가로 막는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너무 지쳐서인가?
되돌릴 수 없는 길이라 산악대장 앞서가고 김찬석사장과 이총무와 함께 쉬엄쉬엄 작은 봉을 두어 개 돌고 올랐는가? 골짜기를 사이에 큰 산을 계속 돌아나간다. 제발 비켜 가기를 바라면서 오른 곳이 862봉. 862봉 급한 경사진 길을 내려와 안부에 도착하니 그렇게 피하고 싶던 큰 산(1022봉)으로 통나무 계단이 끝 모르게 고도를 높이며 이어져 있다.
오르다 쉬고 또 오르다 계단 옆 나무에 의지하기를 여러 번. 헬기장이 있는 정상에 오른다(15 : 55분경). 산림청에서 세워 놓은 표지판에는 「← 원방재 2.09km / 백봉령 5.0km」로 표시되 있다. 부지런히 가야 해떨어지기 전에 『백봉령』에 도착할 것 같다. 5분여 휴식을 갖고 또 출발이다. 걸음은 늘인데 마음만 바쁘다.
13. 백봉령 가는 길
급경사 돌계단을 내려와 잠시 쉬고 다시 잡목을 헤치고 좀더 가니 앞서 가던 대장이 허기 져 못가겠다며 쪼크렛을 꺼내 먹고 있다. 후미 팀 모두 휴식. 남은 간식을 먹으며 기력을 보강해 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다시 오르막 길. 원방재 이 후의 구간은 잡목지대로 지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산림청에서 길 정비를 잘 해둔 관계로 별 어려움은 없다.
987.2봉. 계단을 오르는 것이 더 힘들어 옆으로 비켜가며 또 몇 번을 나무에 의지하며 산 봉울 올랐는가? 다시 급경사 내리막 길, 또 959봉을 빤짝 올라 완만한 내림 길, 끝인가 했더니 또 작은봉(863봉), 더 높은 無名峰, 죽우욱 ---- 내려 가다 고만 고만한 봉을 서너 개 넘고. 점점 날은 어두워 오는데 백봉령이 지금쯤이면 보일만도 한데 어디쯤인지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14. 목적지 백봉령(白伏嶺)에 도착하다.
어디쯤인가? 깎아지른 능선 아래로 차도가 보이고 건너편에는 산(자병산) 하나를 밀어버렸다. 개발도 좋지만 저런 산 하나를 깎고 밀려 사라지는 것이 아쉽고 안쓰럽다.
헬기장 하나(17 : 40분경). 전망대인가? 『옥계』방향, 『망상』방향 표지판, 그 옆으로 쉴 수 있는 의자도 마련해 두었다. 안내판을 슬쩍 지나치고 철탑을 지나 소나무 숲 속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내려서니 『어서 오십시오 아리랑의 고장 정선입니다.』라고 새겨진 경계석이 눈앞으로 확 다가온다. 그리고 도로변에는 『여기는 백봉령(白伏嶺)입니다. 해발 780m』라고 쓰여진 대형 표지판이 세워 두었으며 길 건너 쪽에는 백두대간 안내판과 주차장이 있고 그 아래로 포장집 간이매점도 있다.
15. 멀고 힘들고 미련하도록 忍耐를 要했던 山行 이야기
매점 안으로 들어서니 안에는 木彫刻品이 가득했고 먼저 도착한 대원들은 벌써 감자전에 旌善 막걸리를 한 잔씩 한 모양이다. 배낭을 내려놓자 자리를 내 주고 盞부터 권한다. 걸쭉하고 색이 진한 것이 입맛을 당기게 한다. 목마른 김에 우선 쭉 --- . 그러고 보니 먼저 온 山岳隊長이 보이질 않는다. 두 잔을 비울 때 대장 도착하고 이총무도 곧이어 들어온다. 날씨도 차고 막
걸리도 차고 온 몸이 오들오들 떨려 더 이상 마시지를 못하고 자리를 뜬다.
자리를 旌善邑 某處 食堂으로 移動하여 메기 매운탕에 버섯전골(윤희원사장 제공)로 저녁 식단을 마련하고 김명자선생님이 고향턱으로 내 놓은 양주로 잔을 채워 오늘의 무사 산행을 자축하는 잔을 부딧쳤다. 알짱한 분위기 돋우너라 참이슬 더 청해 마시며 멀고 힘들고 미련하도록 忍耐를 要했던 山行 이야기로 오늘의 일정을 마쳤다.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① > 산신각(山神閣)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없는 토착 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해 먼저 護法神衆이 되었다가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다. 산신을 호랑이와 老人像으로 표현하고 탱화로써 이를 도상화한 전각이다. 산신각은 한편으로는 가람의 수호신의 기능을 갖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래의 산신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나타나낸다. 한적산왕대신 등 제산신정화를 봉안한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산신(山神)은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토속신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민중의 자연신앙(自然神仰)이 불교에 흡수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불교에서 산신(山神)을 섬기는 마음에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정신이 담겨있다.
산신기도를 올리는 의의는 가택(家宅)의 안녕, 풍년과 풍작(豊作), 사업번창과 모든 소원의 성취를 기원하는데 있고, 산신기도의 의식절차와 예절은 신중기도(神衆祈禱)와 거의 같으나 산신기도의 주력(呪力)은 <산왕대신(山王大神)>이다
< 참고자료 ② > 통골(桶里)의 지명 유래
“통리초등학교 안쪽에 크고 넓은 골짜기 전체를 통골이라 한다. 마을의 사방에 산이 높고 그 가운데로 길게 골짜기가 형성되어 흡사 구이[구유]처럼 생긴 곳이라 하여 「통(桶 : 통, 물건을 담는 기구)'字에 마을 ‘리(里)」를 붙여 통리(桶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옛날 골짜기 안쪽에 구새 먹은 통나무(속이 빈)가 많았기 때문에 『통골』이라 동네 이름이 붙여 졌다고도 하며 이 골짜기로 해서 삼척시 원덕면 쪽으로 통 하는 길이 있어서 통골[通谷]이란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우보산 (牛甫山 一名 楡嶺山) 동쪽에 와우형국(臥牛形局)의 명당이 있는데 원심(源深) 부근이 소의 여물통처럼 생겨서 와우형국(臥牛形局)에 부합되므로 구유 '桶', 마을 '里'하여 통리라 부르게 되었다고한다.
< 참고자료 ③ > 靑玉山 地名 由來
▣ 임진왜란 당시 유생들이 의병정신이 불사한다는 뜻에서 청옥산이라 정하였다 한다.
▣ 이산에는 청옥과 약초가 많이 난다하여 산 이름을 청옥산이라 하였다.
▣ 소재지: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정선군 정선읍
청옥산은 '곤드레' 나물과 더불어 '청옥' 이란 산채가 많이 자생하여 이름 붙여진 산이다. 능선이 비교적 평탄한 지형으로 그 면적이 볍씨 6백두락이나 된다는 뜻에서 지어진 '육백마지기'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랭지 채소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증갈이 무는 그 맛이 배맛같이 달다고 한다. 고등 채소 작황이 대관령보다 우위에 있으나 교통편이 나쁘기 때문에 주민 소득에 많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산행시간은 5시간 정도 소요되며 산 정상 부근에 삼신신앙 대본사가 위치하여 등산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청옥산은 동해시 삼화동, 삼척시 하장면 정선군 임계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두타산에서는 박달령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 4 km 지점에 있는 산으로 두타산과는 같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백두대간 종주 등산시 반드시 통과하는 산이다. 청옥산에서 박달령을 거쳐 두타산으로 약 2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 청옥(靑玉)이란 푸른빛이 나는 돌의 한가지로 옥처럼 투명 하지는 않으나 유리 광택이 있고 단단하여 그릇을 만드는 데 쓰인다고 국어사전에는 나와 있고, 일명 사파이어라고도 한다고도 하며 청옥산 기슭에서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
< 참고자료 ④ > 이식[李植, 1584(선조 17) ~ 1647(인조 25)]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본관은 덕수(德水).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설서·북평사 등을 거쳐 17년 선전관이 되었으나 이듬해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楊平郡 楊東面)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23년 인조반정으로 이조좌랑에 등용, 이듬해 부수찬·응교·사간 등을 거쳐 25년(인조 3) 예조참의·동부승지, 26년 대사간·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그 뒤 사친(私親)의 추숭(追崇)이 예가 아님을 논하다가 좌천되었다. 33년 부제학, 38년 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다 하여 42년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선양[瀋陽]에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43년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46년 별시관(別試官)으로 있다가 관직이 삭탈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의 한사람으로, 문장은 한국의 정통적인 고문(古文)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86년(숙종 12)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택당집》 《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
< 참고자료 ⑤ > 山城戰鬪 傳來 說話
그리고 「山城 戰鬪에 관한 傳來 說話」에는 임진왜란 당시 주민들의 항쟁 의지와 투타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산의 지명과 관련이 있기로 소개를 한다.
『임진년 7월 강릉, 옥계, 삼척, 북평 등지에서 집결된 주민들 중에서 척주의 유생들이 주축이 되어 뜻있는 장정들을 규합하여 사원터를 구국이념의 의병 근원지로 삼고 백호방인 두타산성은 의병 및 주민들의 수호지로 정하고 앞산(남방)을 의병들의 정신이 불사하다는 뜻에서 청옥(靑玉)이라 정하고, 뒷산(북방)은 구국이념을 알차게 쌓는다는 뜻에서 고적대(高積臺)라 정하고 동쪽의 문간재(門間財)는 여하한 사항에도 왜침은 불허한다는 뜻이며, 서쪽의 연칠령은 의병들의 식량, 나물, 칡뿌리와 병기의 보급로로 정하고 두타산성과 쉼음산, 횃대등 지점을 칡줄로 연결, 허수아비와 초우신장(草偶神將)을 만들어 의병수가 많은 것처럼 위장전술을 쓰고, 왜병들의 척후병이 문간재와 산성입구에 침입하는 것을 좁은 골짜기에 몰아넣어 포위하고 공략하니 왜병들은 혼비백산 후퇴하여, 피소에서 집결 다른 통로를 찾던 중 빨래하고 있던 마고 할머니의 제보로, 이기리의 더바지재를 넘어 고적대. 연칠령. 중봉 등을 경유하여 두타산성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우리의병은 조총을 소유한 왜병과 3일간의 전투를 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왜병과 우리 의병 주민 등 2000여명이 전멸하고, 붉은 피가 비린내골(피내골)을 덮었으며, 파소에 흘러내린 피 줄기는 오랫동안 파소에서 맴돌았다 하여 파소. 피소라 이름하고 또 화살이 강을 메웠다 하여 전천(箭川):살천(薩川), 박곡천, 소고리천, 북천,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자료: 동해문화원, 관동대 박물관의 공동지표조사 보고서와 구전에 의한 설화를 토대로 작성>http://m21.netian.com/dutasanseng~main.htm
< 참고자료 ⑥ > 백복령 (白伏嶺 : 812m)
백복령은 강원도 동해시,강릉시,정선군 경계에 위치한 태백산맥의 줄기로서 높이가 2,706척(812m)이다.
이 지방에서는 영동에서 영서로 넘어 한양으로 가던 길목으로 한약재중에 복령이라는 약초가 있는데 이중에서도 백복이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이 곳은 진부령,한계령,대관령,백복령,댓재,신리재등과 같이 이 지방에서는 영동에서 영서로 넘어 서울로 가는 유일한 통로로 이용되던 곳이며,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하고 있다.
산 정상부에서부터 동해로 내려오면서 동해 바다가 산아래 가까이 보이고 야간에는 동해시 일부야경과 오징어잡이 어선의 불빛이 장관을 연출한다.
지명에 관한 정선군 사료에 의하면 "백복령의 고유 지명은 1662년 발간된 척주지에 백복령(百茯岺), 1870년 관동지 백복령(白複嶺), 1876년 대동 여지도 백복령(白福嶺), 18세기 후반 작가미상의 해동지도 8책 관동전도 백복령(百復 嶺)으로 한자는 일부 다르게 표기하였으나 한글은 "백복령" 으로 동일하게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래 관련 연구단체 및 인근 시.군의 도로안내판등에 표기 된 백봉령(白峰嶺) 의 "봉" 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유래를 알 길도 없다,
정선군에서는 `1972년 지역원로들로 구성된 정선군지 발간위원회에서 발간한 군지(郡誌)등에 표기한 "백복령(白伏嶺)"을 지명의 명칭으로 사용하며 표기하고 있다. 한문으로는 흰백. 엎드릴복. 고개령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