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서민층에서 유행했던 '화투 타령'이다
일제는 이 땅에 화투를 남겼다
19세기말 유입 70년대 고스톱까지…
"저항 의식 마비 목적"
정월 솔에 쓸쓸한 내 마음
이월 매화에 매어 놓고
삼월 사쿠라 산란한 내 신세
사월 흑싸리에 축 늘어지네.
오월 난초에 나는 흰나비
유월 목단에 웬 초상인가
칠월 홍돼지 홀로 누워
팔월 공산 허송한다.
구월 국화 굳어진 내 마음
시월 단풍에 우수수 지네.
동지 오동에 오신다던 님은
섣달 비 장마에 갇혀만 있네.
일제시대 서민층에서 유행했던 '화투 타령'이다.
화투의 1(솔)부터 12(비)까지를 각 달과 연결시켜 식민지 백성의 '허무한 삶'을 읊고 있다.
일제시대 때 이미 화투가 서민층에게 널리 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들어 온 화투로 나라 잃은 백성의 무력감을 짙게 드러낸 것도 흥미롭다.
요즘에는 고스톱으로 대표되는 화투 노름이 서민의 일상에 뿌리내리면서 '국민 오락'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화투판을 벌이는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종류만 해도 민화투, 육백, 삼봉, 섰다, 도리짓고땡, 고스톱…. 수도 없이 많다.
게다가 화투 노름의 '최고봉'으로 자리잡은 고스톱은 '전두환 고스톱'이니 '삼풍 고스톱'이니 하며 시류에 따라 새롭게 규칙이 만들어지고 있다. 고스톱 가짓수가 워낙 많다 보니 처음 만나 노름을 할 때에는 규칙을 먼저 정해야 할 정도다.
이렇게 일상의 '노름 잡기'로 뿌리를 박은 화투는 언제부터 우리들 가까이 다가왔을까. '국민 오락'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의문을 품어 보는 이는 많지 않다.
막연히 일본에서 들어왔을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화투는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게 민속학계의 정설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가져왔다는 설도 있지만 19세기말 대마도의 일본 상인들이 항구를 통해 조선에 퍼뜨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일본인이 조선 땅에 거류지를 만들고 이 곳에서 일본인들이 화투 노름을 하면서 더욱 확산됐다고 민속학자들은 보고 있다.
민속학자들은 화투의 전래 시기보다는 화투 노름이 일제시대 급속도로 확산됐다는 점에 더욱 주목한다. 일제시대 들어 각계각층으로 급격하게 전파된 데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재야에서 의·식·주 등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연구해 온 서석규(64)씨는 "일제 침략기를 산 노인들한테 '일본에 간 한국인들에게 화투 20∼30목을 선물로 줘 고향에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저항 의식을 막기 위해 화투를 보급했으며, '조선의 몸과 정신'을 노름판에서 탕진하도록 한 일제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 화투 노름을 경계했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조 마지막 왕인 순종은 창덕궁 궁녀들이 소일거리로 화투를 치는 것을 보고 '망국 놀이'를 한다고 갈기갈기 화투장을 찢어 던져 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서씨 자신도 그런 경험을 갖고 있다고 한다. 충청북도 영동에서 살았는데 동네에서 화투 노름을 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할아버지가 불러 모아 "왜놈 노름까지 하느냐?"고 꾸짖고 화투장을 불태우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는 것이다. 패가망신으로 이어지기 십상인 도박에 대한 경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화투가 일본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일제시대 의식 있는 사람들은 더욱 경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제는 1945년 항복과 함께 이 땅을 떠났다. 그러나 일제가 뿌려 놓은 화투 노름은 일제와 함께 물러가지 않았다.
일본에서 새롭게 개발된 화투 노름이 들어와 '각광'을 받았다. 고스톱에 대표적인 경우다. 50년대 일본에서 개발돼 70년대 초에 이 땅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고스톱은 '설사' '쇼당' '독박 '등 언제 상황이 뒤바뀔지 모르는 규칙에 힘입어 노름 잡기 판을 석권했다.
일제가 식민지 시대 '저항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화투를 의도적으로 전파시켰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셋만 모이면 고스톱을 친다는 우리의 모습은 일제의 애초 의도가 완벽하게 실현됐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자료출처 nate 지식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