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 거절을 당할 것은 예상했습니다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성문을 나서며 로랑이 말했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고드와 우리나라가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선뜻 도와 줄리가 없지 않느냐."
"이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고드 성으로 가보는 것이 좋겠다. 큰 성에서는 우리의 말에 귀 귀울여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를테니까."
그 때, 길 옆의 수풀 속에서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지금 수도인 고드 성으로 가시나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붉은 색의 짧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것이었는데, 그녀의 큰키가 그녀가 그다지 마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호리호리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크로이츠는 그녀의 옷 차림새를 보고 그녀가 특별히 정해진 장소없이 도시와 도시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보부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럴 계획입니다. 아가씨."
하지만, 크로이츠는 그녀에게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녀의 피부나 얼굴이 지나치게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느 재산많은 집안의 외동딸 처럼. 그렇지만, 그의 생각에 부르군드에서 자신에게 첩자를 붙일 이유도 없었다.
"행색을 보니 보부상인 것 같은데, 아가시를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은 것 같군요."
"실례잖아요. 사람을 그렇게 깔아 보다니."
그러면서 그녀는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를 손으로 툭툭쳤다.
"같은 보부상이라 해도, 취급하는 물건이 다르면 행색이 조금 틀릴 수도 있는 거죠."
"그랬군요.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크로이츠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엉뚱하게도 로랑이 그녀에게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래요? 좀 볼 수는 없을까요?"
그러나 이 한심한 부하의 시선이 주머니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에 박힌것이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은 날카롭게 보이는 눈을 매력적으로 웃어보이며 주머니 안에서 주먹 크기의 무언가를 꺼냈다.
"좋지요. 여러분들이 사신다면 더욱 좋구요."
별거 아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일행은 그녀가 꺼내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주먹만한 보석이었던 것이다.
'보석은 마법과 마력의 집합체'란 말이 있다.
보석 안에는 마력이 숨겨져 있어서, 그 마력이 따라서 색깔과 크기가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지만, 보석은 마법을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마법사들이 비싼 값에 구하는 것이었다.
이 보석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연금술'이라고 부르는 고대의 술법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도, 영겁의 숲 암브로시아의 어딘가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 진다는 설도, 막강한 마력을 가진 드래곤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푸른 빛이 나는 보석으로 최상급은 아니었지만, 그 크기로 보건데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보석이 노란색 부터 시작해서 녹색, 청색, 자색, 적색으로 갈 수록 비싸진다는 것은 아시죠? 자색과 적색은 너무 귀해서 없다고 봐도 좋으니까, 이 정도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보석이에요."
너무 놀라운 일이어서 크로이츠 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조각 품었던 의심이 그제서야 풀린 것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이 정도의 보석을 가지고 다닐 정도라면 그녀의 자태가 너무 고왔던 것도 이해가 간다.
포보스가 혀를 내둘렀다.
"휘유. 이 것 하나면 작은 성 하나를 살 수 있겠군요. 지금 살 돈이 없는게 아쉬울 정도인데요."
그러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대답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고드까지 가면 마법사 길드에서 살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로랑이 말했다.
"고드까지 가실거라면, 우리와 함께 가는 것도 좋을 겁니다. 괜찮겠죠, 왕자님?"
왕자라는 말에 그녀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아가씨께서 거부감만 느끼시지 않는다면 동행하는 것도 좋겠지."
크로이츠는 로랑이 자신의 신분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좋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프롬나드 왕국의 왕자, 크로이츠입니다. 비록 도움을 청하러 고드로 남루한 행색으로 가는 길입니다만, 목적지가 같다면 동행하는 것도 즐거운 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단발의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며 흔쾌하게 승낙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유명하신 왕자님과 함께라니 영광입니다."
"별 말씀을."
그러면서 그는 그녀에게 4명의 소개를 했다.
그녀는 소개가 끝나자,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는데, 레이나와는 다른 가볍고 경쾌한 인사였다.
"'테트라'라고 불러 주세요."
......
그날 밤이었다.
로랑은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것에 잠이 깼다.
그것은 포보스가 깨우는 것이었는데, 평소에 급한 일이 아니면 자는 것을 깨우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로랑은 튕겨지듯 일어서서 무기를 뽑아드는 것이었다. 이어, 주위를 휙 둘러보면서 포보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왕자님은?"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사방은 조용했고, 워렌과 데킨은 모닥불 옆에서 태평스럽게 자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깜짝 놀랐다구요."
보포스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로랑에게 크로이츠가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자는 순간에도 나에 대한 충성으로 가득한 모양이구나."
로랑은 머쓱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분부하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왕자님?"
"우리와 동행하기로 한 아가씨가 계속 잠을 못이루더니 서쪽 계곡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지 모르겠구나."
포보스가 킥하고 웃는 소리를 내자, 로랑은 금새 둘의 의도를 알차리고는 얼굴이 벌개져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자리를 빠져나가 계곡으로 내려간 로랑은 바위에 걸터 앉아있는 테트라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밝은 달빛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바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로랑에게는 마치 여신이 강림한 것 같아 보였다.
로랑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낸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늦게까지 잠을 못이루시다니."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은 얼굴로 그를 보더니, 고민 같은 것은 없는 밝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아뇨. 물 흐르는 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대답은 로랑에게 있어서 무척 의외였지만, 동시에 참으로 향긋한 대답이었다.
"아... 그랬군요. 걱정이 돼서 왔는데, 괜한 일이었네요."
"거짓말. 내가 이리로 올때 당신은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는데, 어떻게 내가 여기있는 줄 알았다지요?"
로랑은 멋적게 웃었지만, 원채 거짓말에는 재주가 없는 그는 넉살좋게 진실을 털어 놓는 것이었다.
"로랑, 당신은 상당히 자신만만하네요. 내게 호감이 있다고 진심을 다 드러내놓고도 나를 설득할 밑천이 남아있나 보죠?"
"염려마세요. 마음이라는 것은 말이 전부가 아니니까."
로랑은 그렇게 웃어 넘겼다. 그러자, 테트라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묻는 것이었다.
"고드 성에는 무슨 일로 가시지요? 프롬나드 왕국의 상황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지만, 아무리 급해도 고드쪽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예부터 고드 왕국은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일어나는 일외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기로 유명하잖아요?"
"물론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아요. 이 고드 왕국에서 얼마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후원자를 얻거나 몇명의 동료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묻는다.
"왜 하필 고드죠? 그런 의도라면 오크족의 나라인 '무우'가 더 나을 텐데."
"왕자님 께서는."
하고 대답을 시작하는 그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도움을 바라시는 거예요."
"너무 순수하군요. 동족으로서의 정은 그다지 신뢰할만한 것이 아닌데."
로랑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화제를 바꿨다.
"그 얘기는 그 정도로 해두죠. 이젠 당신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살짝 미소를 흘렸다.
"그것도 왕자님이 시킨 일인가요?"
"아뇨, 그냥 개인적으로 묻는 겁니다."
"그다지 유쾌한 얘기가 아니라 실망스러울 텐데."
그러나 테트라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는 로랑의 눈빛에 못이겨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희 집안은 그다지 유명하진 않았던 무도장을 경영했었어요. 산속에 있는 데에다가 국경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끔씩 찾아오는 마적들을 제외하면 아주 조용하고 한적한 도장이었죠. 아버님은 무척 온순하고 의기있는 사람이어서 원한관계도 없었는데, 어느날 습격을 받아 돌아가셨죠. 가족들은 모두 살해 됐구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저는 가문에서 숨겨두었던 보석들을 팔아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마치 남얘기를 하고 있는 말투였다.
"습격이라니, 마적이었나요?"
"아뇨. 마적들은 오히려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어요. 마적들이 군대에 쫓길 때 도와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 이후로는 마적들이 주기적으로 집안에 술 같은 것을 들고 놀러 오곤 했었는데, 그 일로 반역죄에 몰린 거죠. 배신이라고 할 순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왕국에서 버림을 받은 거에요."
로랑은 그녀의 말에 할말을 잃고 있었다.
어려운 얘기를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버리는 것에 놀랐고, 태연하게 말해버리는 것에 놀랐다.
"어때요? 너무 짧긴 했지만, 이 정도면 제 얘기가 대충 된 셈이죠?"
"죄송합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신경쓰지 말아요. 오래전 일이니까."
로랑은 30세가 체 안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조금은 위로가 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몹시 마음이 아팠던 것 같군요. 그렇게 덤덤하게 얘기를 줄이시는 걸 보니."
그녀는 잠깐 동안 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쾌활하게 말을 맺었다.
"미워할 대상도, 복수의 마음도 없으니까요."
......
테트라가 크로이츠 일행과 동행을 하게 된지 일주일 정도 후의 일이었다.
근방의 지리를 잘 아는 그녀의 인도를 따라 길을 가던 일행은 길목에서 한 소년을 만났는데, 소년은 자신을 근방 귀족의 시동의 시동이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은 쪼르르 달려와서 크로이츠에게 물었다.
“크로이츠 왕자님 이십니까?”
일행은 적지 않게 놀랐다. 분위기로 보아 이 소년은 며칠동안 길을 지키며 그들을 기다린 것 같았는데, 그들을 여기서 기다린 것도 놀랍거니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것이었다.
크로이츠는 소년에게 대답했다.
“제가 크로이츠 입니다만, 어인 일이지요?”
어린 소년은 그에게 우스꽝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다.
“저의 주인님께서 왕자님을 보고자 합니다. 곤란한 일이 있어 그러니, 한번 만나주시지 않겠습니까?”
크로이츠가 잠시 망설이자, 그의 뒤에 있던 포보스가 말했다.
“무슨 일인 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방문을 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좋은 후원자를 얻게 될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크로이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동에게 안내를 부탁하자, 소년은 총총걸음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들판 길에서 북쪽으로 보이던 숲을 가로질러 가자,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고성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 규모는 큰 저택 정도 밖에 안 돼보이는 작은 성이었지만, 성벽 곳곳에 비단으로 만든 휘장이 걸려있는 모습이 무척 호화스럽게 보였다.
“이쪽 입니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이 간단한 구조의 고성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성안의 중앙에 서로 이어져 있는 3개의 건물이 서있었고, 기껏해야 50보 정도의 거리로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일행은 성의 외양을 감상할 시간도 없이 저택으로 들어서야 했다.
저택 안은 성 주인의 부를 한눈에 알게 해 주려는 듯, 긴 홀이 펼쳐져 있었고, 홀을 따라 황금으로 된 촛대가 2열로 늘어서 있었다. 홀의 끝에는 맹수의 가죽으로 치장을 한 의자가 있었는데, 조금 전의 시동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일 뿐인 소년이 푸른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크로이츠가 발을 들여놓자, 한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아마도 소년의 누나인 듯한- 여인이 먼저 그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르군드 성의 레이나와 같은 우아한 자태를 풍기는 이 여인은 일행을 정중하게 소년 앞으로 인도했다. 소년은 뭐가 못 마땅한지 모르지만,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드 왕국의 부호 가문 ‘팬드라건’의 31대 가장 ‘튜터’요. 먼 길을 오셨는데, 쉴 사이도 없이 홀로 인도한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크로이츠는 그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의아해했지만, 그의 누나의 얼굴을 보고 금새 분위기를 알아 차렸다. 그녀가 무안한 얼굴로 동생에게 눈치를 주는 모양이, 곤란한 일이 생겨 그녀가 크로이츠를 초청했지만, 동생은 그것을 싫게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었다.
“크로이츠입니다. 곤란한 일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곤란한 일이라 할 것 까지야…”
크로이츠의 동생 뻘이 되어 보이는 소년이 그렇게 말끝을 흐려버리자, 그의 누나는 얼굴이 발개져서 대신 말을 잇는 것이었다.
“이해하십시오, 왕자님, 튜터가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저희의 사정은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크로이츠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튜터는 한번 그녀를 쏘아보더니만 자리에서 일어나 홀을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셰노트’로 튜터의 누나입니다. 얼마 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는 동생과 제가 가문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크로이츠는 ‘셰노트’라고 중얼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한달 전에 한 ‘포그스’족의 한 사람이 이 곳에 찾아왔는데, 그는 저희의 삼촌이 되시는 ‘거해리트’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서신의 내용은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이 성의 소유를 자신에게 넘기라는 것이었습니다. 튜터가 아직 어리다는 것 때문이죠.”
“있을 수 있는 일이군요.”
“동생과 저는 항변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문에 있는 가솔들 중에도 삼촌에게 매수가 된 사람들이 있어서… 삼촌은 우리에게 가장의 권리를 증명하고 싶다면 삼촌이 제의한 마상시합에 응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변호해줄 기사를 모아보란 뜻이었죠.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지만, 한 분도 우릴 돕겠다고 나서주시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을 제외하면 이 근방에서 삼촌과 포그스 족의 사람들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마침 왕자님께서 고드 왕국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시동들에게 부탁을 해, 이 근방의 길목에서 기다린 것입니다.”
크로이츠는 걱정과 두려움에 가득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제발, 저희 두 사람을 위해 싸워주세요, 왕자님.”
“사정은 잘 알았습니다. 아름다운 셰노트. 하지만 보시다시피 우리에게는 창이나 방패도, 시합에 나갈 말도 가지고 있지를 않아요.”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가문에는 좋은 말과 무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크로이츠는 조금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당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삼촌분의 입장도 들어보지 못한 데에다가 사적인 가문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왠지 내키지가 않는 군요."
그는 거절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했는지 하얀 얼굴에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왕자님이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튜터는 혼자서라도 싸우려고 할거예요. 그렇다면 동생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녀가 말끝을 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크로이츠는 슬쩍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영리한 포보스가 재빨리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왕자님께서는 처음부터 도우실 마음으로 이곳에 오신 겁니다. 이제와서 거절을 하실리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크로이츠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녀의 눈물 젖은 눈을 쳐다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렸다.
"도와주는 것은 나를 포함한 4명이오. 그 포보스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물론,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포보스가 워렌이나 로랑, 데킨에 비해서는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도 일대일의 승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긍심 강한 프롬나드의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포보스가 어이없어 반문을 하려는 순간,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팬드라건 가문을 위한 시합이니, 가문에서도 한 사람 정도는 나와서 스스로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소? 당신을 위해서 싸우려는 우리에게, 이 가문이 지킬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 주길 바라오."
그러자, 홀 안쪽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가문을 비겁자나 겁장이의 소굴로 착각하지 마시오, 왕자! 당신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나, 튜터 팬드라건이 이 성의 후계자이며 지도자임을 모두에게 보여줄 거요!"
무척이나 어린 목소리였지만, 그의 당찬 기세에 크로이츠는 미소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소. 젊은 성주여."
......
밤이 깊어갈 무렵, 크로이츠는 조심스럽게 방에서 빠져나와 팬드라건 가문의 아가씨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자 방문이 살짝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지만, 그녀는 잠옷 차림의 시녀였다.
크로이츠는 조용히 물었다.
"늦은 밤에 무척이나 실례지만, 잠시 셰노트 아가씨를 뵐 수 있을까요?"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왼쪽으로 이어진 통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가씨는 지금 연습장에 계셔요."
말을 마친 시녀는 크로이츠가 다시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하품과 함께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늦은 밤에?"
크로이츠는 중얼거리며 시녀가 가리킨 통로를 따라갔다. 간간히 벽에 걸린 촛등에 의해 밝혀지는 어둑어둑한 통로를 지나자, 철로된 문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손으로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기척도 없었다.
크로이츠는 다시한번 노크를 하고 참을성있게 기다려 보았지만,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그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철문을 열었다. 손질이 잘된 철문은 생각과는 다르게 미끄러지듯 열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 안의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그 방은 처음 그녀를 만난 홀만큼이나 넓고 트인 공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벽에는 진귀해 보이는 각종 보검이나 방패들, 창과 화살 같은 무기들이 걸려져 있었다.
'대대로 귀한 무기들을 사서 모아놓은 것이군.'
통로와는 달리 수많은 촛대로 밝혀지는 방안은 꽤 밝은 편이었고, 팬드라건 가문의 아가씨는 그 중앙에서 검을 하나 손에 쥐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낮에 입고 있던 화려하고 무거운 복장이 아닌, 움직이기 편한 가벼운 천옷을 입고서.
밤색의 땋은 머리에 진한지 연한지 알 수 없는 눈썹이 그녀의 생기있는 눈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고, 노래에 맞춰 움직이는 듯한 몸의 윤곽선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아름다움이 풍겨나왔다. 천성이 전사였기 때문에 심미안이 없는 크로이츠였지만, 그녀의 경쾌하고 빠른 검의 움직임에는 완전히 빠져들어서 한참 동안을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녀의 검무는 두명의 눈이 마주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 듯 했지만, 금새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한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크로이츠는 머쓱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셰노트의 검무를 보다가 정신을 빼앗겨서 본의 아니게 실례했군요."
그녀는 그의 말에 살짝 눈웃음을 짓는다.
"좀 더 보기를 원하신다면 계속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방금 본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는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있는 것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낮에 보았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틀리군요. 나는 상당히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자, 그녀는 낮에 보였던 첫인상과는 대조적인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망하신 것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크로이츠는 그녀가 검을 검집에 넣어 벽에 세워놓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부지런히 검무를 연습하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아름다운 셰노트."
"저를 필요로 하게 될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호오, 전투에서도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싶은 거요?"
"그렇기를 바랬지만, 튜터는 제가 그럴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제 솜씨가 빠를 지는 몰라도 사람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을 거라고... 동생은 짖궃어요. 아무리 이유를 물어보아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크로이츠는 미소지었다.
"상냥한 동생이군요."
"네?"
"동생은 그대가 상처를 입거나 남에게 상처입히는 것을 바라지 않는 거랍니다. 아마도 그대를 아끼기 때문이겠죠."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셰노트, 그대의 검은 빠르고 아름답지만 어깨와 허리의 움직임을 보면 상대가 금방 검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어요. 움직임이 읽힌다면 검이 아무리 빨라도 소용이 없다오."
그녀는 잠자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참, 그러고보니 검술얘기를 하려고 이곳에 온게 아니었는데."
크로이츠가 슬며시 말을 돌리자, 그녀는 무언가 기대하는 눈으로 묻는다.
"왕자님께서는 어인 일로 늦은 시간에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는 순간적으로 말이 막혔다.
"혹시나 내일 마상 시합 후에 경황이 없을지 몰라 지금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지만..."
미안해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소문을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내가 여기서 부르군드의 신물 바르문크를 찾고 있다는 걸 말이오. 나는 혹시 그대가 그 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해서 찾아온 거요."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바르문크가 부르군드의 성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녀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크로이츠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대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물론, 억지로 말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다시 한번만 생각해 줘요. 그리고 나를 도와 주기를. 내가 당신을 돕기 위해 포그스족과 싸우기로 한 것처럼."
"그 검에 대해서는..."
그녀는 머뭇 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것은 얼마 없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한 어르신에게 들은 것 밖에는..."
"어르신이라니, 그게 누구죠?"
"저도 잘 모르는 분입니다. 몇년에 한 번씩 아버님만 뵈고 돌아가시던 분이라..."
"혹시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소?"
그녀는 머리칼을 살랑거리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걸 아는 사람은 이곳에 없습니다."
"아쉬운 일이군요."
"왕자님... 꼭 그 검을 구하셔야만 하는 것입니까?"
"용족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없어선 안될 것이오."
"제가 아는 바로는... 그 검이 있는 신전에는 용족이 세운 결계와 신전을 지키는 괴물이 있다고 합니다. 바르문크가 이름만 전해지고 세상이 나온 적이 없는 이유가 그것이죠. 이제까지 부르군드의 성주들이 오랜기간동안 사람들을 보내왔지만, 태반이 넘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신빙성은 없는 것 같지만."
"왕자님께서는 제 말을 흘려 듣지 마십시오."
그러나 크로이츠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잖소? 용족이 만든 결계라니. 바르문크를 사용했던 '헤메쉬'는 인간이었고 용족을 쓰러뜨리기 위해 그 검을 썼다고 하는데, 왜 용족이 그 검을 지키기 위해 결계를 세웠을까요? 게다가 헤메쉬가 죽은 지도 벌써 3000년. 그 괴물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이나 엘프가 아닌 이상, 3000년이나 살 수 있는 생명체는 없어요."
그녀는 그의 말에 난감해 할 뿐이었다.
"저도 그저 들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 어르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해결되면 그를 찾아 보겠소."
크로이츠는 말을 마치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방에서 물러 나왔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등뒤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크로이츠 왕자님."
"?"
"내일은... 제 동생을 지켜주세요."
크로이츠는 근심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