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경은 코끼리 뼈다귀이다
<韓非子>엔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어느 나라의 임금이 코끼리를 보고 싶어 하는 백성들을 위해 먼 이웃나라의 코끼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런데 덩치큰 코끼리를 끌고 오기가 힘들어 결국 죽은 코끼리의 뼈만 가져오게 되었기에
임금은 이 뼈다귀를 백성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으로 상상하여 코끼리를 보라 했다. 이에 백성들은
그 뼈다귀를 통해 나름대로 살을 붙여 상상의 코끼리를 만들어 냈으나 어느 한사람도 그 모습이
같지 않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內經>은 코끼리 뼈이고, 이후 모든 醫書들은 백성들이 나름대로 살을 붙여 만든 상상의 코끼리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韓醫學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살아있는 코끼리를 보지 못한다. 그대신 난해한 코끼리 뼈다귀와 수천년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코끼리 그림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여기있다. 뼈다귀만으론 전체를 알 수 없다하여 땅 속 깊이
묻어 버리고 상상의 코끼리를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배꼽 잡을 일이다. 코끼리가 어느 그림엔
돼지처럼 그려 있고, 또 다른 그림엔 송아지처럼 그려 있다. 더구나 두 그림을 가지고 서로 같은 코끼
리라고 믿는다. 코끼리를 모르더라도 돼지와 송아지의 모습이 서로 다름은 아는데 돼지와 송아지가
서로 같은 코끼리라고 믿는 것은 심각한 망상이다.
이런 생각이 선배들을 욕되게 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내 어찌 금원사대가, 허준, 이제마
등 한의학사韓醫學史에 큰 획을 그은 분들께 누를 끼치겠는가. 사실 그분들은 평생 한손에 코끼리 뼈다귀를 들고 나름대로 살을 붙여 가상의 코끼리를 만들어 내신 분들인데 이러한 살붙이기도 아무나 할 수없다. 그러나 서로의 그림이 다른 것을 보면 이 또한 뼈다귀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금원
사대가는 그들의 임상 경험을 통해 확신에 찬 그림을 그렸을 것이고 장경악, 이천, 왕숙화, 이제마
등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금원사대가의 코끼리와 장경악의 코끼리, 이제마의 코끼리는
서로 다른가? 지금 우리는 코끼리 찾을 생각은 잊어버리고 오직 코끼리 비스무리한 그림 모으기에만 모든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한의원 벽에다 온갖 형태의 코끼리 아닌 코끼리 그림을 전시해 놓고서 환자들에게 자랑만 할 것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상의 코끼리 그림이 잘못되었으니 모두 불태우자는 것이 절대로, 결코 아니
다. 상상의 그림에만 매달림으로 인해 스스로 상상하는 힘, 철학하는 힘을 잃어 버리지 말고 우리도 그분들처럼 멋지게 코끼리 상상을 해보자는 것이다. 땅에 묻힌 코끼리 뼈다귀를 다시 파내어 여기에다가 우리 나름의 살을 붙이자는 것이다. 자 눈을 감고 느껴보자. 코끼리의 울음소리, 코끼리의 걸음거리, 코끼리의 체온을... 다른 상상의 그림은 단지 참고로 접어두고 우리가 직접 느끼며 상상하는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금원사대가, 허준, 이제마 등 역대 의가醫家들은 나름대로 코끼리살을 붙이며 스스로의 도道,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길로 생각하여 쫓고자 한다면 그것은 비상도非常道, 이미 우리의 길이 아니다. 그분들의 길이 우리의 걸음에 참조가 될지 몰라도 결코 우리 자신의 길일 순 없다. 이제 우리는 녹슨 나침판을 다시 닦아야 한다. 땅속에 묻혀버린 뼈다귀를 다시 꺼내야 한다. 이것만이 지금의 방황과 고뇌에서 벗어날 유일한 희망이다.
첫댓글 감동적인 말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