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우시장의 변천사
예전부터 우시장은 남자들만이 모이는 곳으로 송아지를 사다 큰소로 키워 사고,팔기도하고 송아지를 새로구매 하기도하였으며 길으던소를 웃돈을주고 농사철에 부리기좋은 암소로 사기도 했다.
특히 암소를살때는 골반[엉덩이]이나,다리,이빨[나이가늠],뿔모양,털[황갈색], 등짝을때려 소의움직임등을 살펴서 다른소와 비교하여 새끼도 잘 날수있는지 등을 확인하고 맘에드는 소를 골라서 사곤했다.
50~60년대만해도 소를 낮에는 개울뚝방이나 들판에 풀이 많은곳에 줄을 길게매달아 말뚝을박아 매놓고 하루종일 풀을 뜯어먹게하고 해가질무렵 꼴풀을 한짐가득 지게에지고 소를끌고 집에와서 외양간에 가두운 후 구융속에 쌀뜨물이나 물을 가득부어 건초나여물에 부산물을 석여서 먹였으며 겨울에는 집에서 작두로 짚을 잘게 썰어 콩깍지와 쌀겨 또는 보리겨를 넣고 여물을 큰 가마솥에다 쑤어 먹여서 키웠다.
특히 소를 팔경우 10여일전부터는 높은값을 받기위해 여물을 쑬때 콩을 넣어서 살을 찌워서 팔기도했다.
소 턱밑에는 워낭을 달아 소리를 듣고 소의 위치을 알아내기도하고, 소는 농가에서는 집과 전답 다음으로 중요한 재산으로 도난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도 목에는 워낭을 꼭 달아주었다.
돈이없어 소를 장만할 형편이 안되는사람은 장례소[일명 이반소]란 제도가있어 소를 사서 키울 사람에게 주면 키우다가 팔때는 살때의 소값을제하고 남은돈을 똑같이 나누는 방법이며, 소가없는사람은 장례소를 여러마리 길러서 만든 목돈으로 자기소를 장만하여 농사일에 이용 하기도했다.
암소를 키우다 새끼를 낳으면 집에서 어미소와 같이 키우기도하지만 우시장에가서 어미소 팔때 같이 팔거나 송아지만 팔면 어미소는 집으로 다시 끌고오는데 어미와 송아지가 서로 떨어질 때는 어미소나 송아지가 우는 소리는 주인으로써 그동안 기르면서 정도 들었지만 보기에 마음이 안쓰러워 발길을 바로돌리지 못하는 모습도 더러 보았다.
송아지는 조금 자라면 우비목[牛鼻木], 노간주나무, 느릅나무,
다래나무 등으로 코뚜레를 만들어 코를 뚤어 코에 끼면 소를 길들이 기도 좋고 특히 사나운 소를 다르기도 아주 편했다.
지금은 축사를 현대식으로 지어 전문적으로 소를 사육하고 있지만 60년대 전후로는 농촌에서 소는 재산을 늘려가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여유가 있는집에서는 1~2마리 많게는3~4마리씩 키우면서 암소는 새끼를 내기도하고 밭을갈고 농사짓는데에는 없어서는 안되는
가축이었다.
다큰 황소는 식육업자에게 팔기도하고 마차용으로 각종 물품을 운반하는일을 주로 했었다.
예전부터 소는 외상거래가 거의없고 현금으로만 거래되는 특성상 농가에서는 농사외에 소를 집에서 자식처럼 정성을 다하여 키워 논과밭을 장만 할때나 자녀들 혼인할때, 또는자식들을 어렵게 서울로 대학을 보낼때에도 소는 한몫을 톡톡히 해왔으며 당시만 해도 소는 농가에 부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화물차가 없던 시절이라 읍이나 면에 장날이면 일찍 우시장이섯고 양평군에만 해도 서부에 양수리, 중앙에 양평읍, 동부에는 용두리, 용문, 곡수에 우시장이있어 소의 매매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양평읍에는 60년도 전후 양근4리에 우시장이 있어 그주변을 우전거리라 불려왔으며 그때 주변에는 우시장의 특성상 아침 일찍 이루어지는 관계로 국밥집과 대포집[안주로 배추우거지에 선지를넣어 끌인 요즘의 해장국]이 우시장에온 사람들이 시장기를 이곳에서 해결했으며 지금처럼 정식 거간꾼[중계인]이 있는것도 아니고 소파는데 그냥 끼여들어 흥정을 거들고 돈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후 우시장이 옛날 보건소자리인 창대리[새텃말]로 이전하였고 정식으로 축협에서 지정한 중계사들이 완장을차고 중계[흥정]를 하여주었으며 그러다 몇 년 지난후 창대리[꽃동산]뒤 도살장 있는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그때는 우시장에서 돼지도 소와같이 사기도하고팔고 하였다.
그날 시세가 맞지 않아 미쳐 팔지못한 소는 우시장주변에 돈을주고 하루이틀 마겨두었다가 장이열리는곳에 가서 팔기도하고 길게는 5일정도를 맡겨서 다음장에 와서 팔기도했다.
우시장 주변에는 노름꾼들 많이 모여들어 순진하고 착한 시골사람들의 소판돈을 더러는 날리는 웃지못할 어두운면도 있었다.
그러다1975년 경매시범으로 전국에서 몇군대에서 시행을하다 1977년 축산법개정으로 일일50두미만의 거래우시장을 통페합하여 목측[눈대중]으로 체중을 가늠하던 것을 저울로하다 지금은 전자저울로 계측하여 경매로 팔리면 통장으로 바로 입금해 주지만 그 전에는 소를 팔고 사는 사람들은 허리에 전대를 다차고 돈 단속을 철저히들 했었다.
그후 옥천면 옥천리 현재 축분공장 앞에 넓은땅을 축협에서 장만하여 완전한 현대식 우시장을 개장하여 양평군에서 거래되는 소는 계통출하를 포함하여 모든소의 유통을 이곳에서 일괄 이루어지고있어 양축농가에게는 아주 편리하고 꼭 필요한 시설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화물차가 있어 소를 팔고 살때 차로 운반 하지만 그때만해도 인근 홍천,이천,여주,등 횡성장에서 소장사들이산 소를 축주들은 2~3마리씩 소를 몰고갈 사람을 사서 포장도 안된 자갈길에 한겨울 얼은 땅으로 소를 몰고 걸어오다 보면서 다친 발톱을 풍수원 마방에서 간단한 치료도 하고 소발에 짚신도 신끼고 소죽도 먹여서 다음날 아침일찍 해뜨기전 용두리장 또는 곡수장, 용문장, 멀리는 양평장까지 와서 사고,팔곤했다.
그렇게 고생한 옛분들의 수고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축산업이 발전 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위의 글은 제가 오랜시간 양평에 살며 보고 들은 사실을 나의 주관대로 표현하였으며
다른분들의 생각과 다를수 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양평축협 조합원 이 인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