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일본리포트] 한류문화
지난 주는 한국인으로 너무도 창피한 날들이었다.
신문도 모자라 TV까지 낱낱이 까발렸기 때문이다.
지난 16일, 인기드라마 '천국의 계단'에 출연중인 최지우와 일본인 관광객
200여명이 인천 무의도 선상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국내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성사됐다는 설명과 함께.
하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최지우의 촬영이 길어져 단 한 시간도 짬을 낼 상황이 안됐던 것.
대신 한국 신문과 일본 신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일본 신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최지우의 사진까지 큼지막하게 게재하면서
요란스럽게 보도했다.
일본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선 거의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원초적인 문제부터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져 실리를 챙긴다.
한국인은 일본인과 트러블이 생겼을 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또 일본인이 별다른 내색을 안하니까 이로써 문제는 일단락됐다고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인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일본인들의 문제는 시작된다.
이번 '최지우와 함께 하는 한국투어'도 바로 이런 경우.
일본에서 대규모 전국 체인을 거느리고 있는 JTB 여행사와 한국의 L여행사는,
최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겨울연가' 신드롬에 빠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환상적인' 투어를 계획했다.
현재 '겨울연가'는 두 번째로 리바이벌 돼 NHK-TV 위성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다.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어느 정도 인기있는가 하면, 그 드라마를 보기위해
자녀들이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다는 일본인 부모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이 드라마를 즐기는 연령대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이 드라마에 푹 빠져 버린 것.
어느 방송인은 자신의 휴가 때, 하와이에서 더빙한 이 드라마의 테이프를
가져가 보고는, 마지막에 엉엉 울었다고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실토를 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토통신의 한 고위 간부는 그다지 큰 기대를 안하고
'겨울연가'에 대한 책을 냈는데, 수십 만부가 나가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바람에, 그 출판을 기획한 기획자가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고 너털 웃음을
지었다.
이렇듯 일본에서 현재 '겨울연가'는 한국 못지않은 '겨울연가 신드롬'을 낳고
있다. 따라서 보통 한국 투어가 2만~4만엔인데 비해, 최지우를 만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7만9000엔, 8만9000엔하는 투어에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몰린 것이다.
문제는 L여행사 측이, 최지우와는 전혀 접촉이 안된 상태에서 일본의 JTB
여행사에 큰소리를 치며 '최지우 투어'를 계획하고 진행한 것이다.
일본 JTB 여행사의 관계자는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신문에 최지우씨가 소속돼 있는 프로덕션에서 문제 제기를 했다는
내용이 보도됐어요. 하지만 떠나기 전 날까지 L여행사 측에서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L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틀림없이 최지우씨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투어를 신청한 고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켜 드렸어요. 그런데 서울에 가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한국관광공사가
중간에서 힘써 주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한국인들이 아무리
'괜찮아요'라는 생활문화에 젖어있다 하더라도 이 정도인 줄 정말이지 알지
못했습니다. 일은 일이니까 약속이 지켜진 줄 알았지요."
JTB여행사 관계자는 "출발 전까지 몇 번 서울에 확인전화를 했다"며
"두 번 다시 한국과 일을 안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최지우 측과의 교섭은, 사실 기획단계에서 이미 허락이
나온 줄 알았다고 했다. L여행사에서도 그렇게 얘기했고, 또 일본에서라면 그런
순서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
한데 한국은 그 반대였다는 것이다.
그래도 JTB 측은 마지막 순간까지 믿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한국 신문에도 크게 보도됐고, 최지우 본인도 어떡하든 일본팬들과
만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내심 안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알려진 대로, 최지우의 촬영이 길어져 무의도 바닷가 먼
발치에서 '천국의 계단'을 촬영하는 모습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육안으로 최지우를 볼 수 있는 거리에 접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일본 관광객들이 일본에 돌아온 후, JTB 측에 여행경비 전액을 환불
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 그 중 일부는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나선 사람도
있었다.
이에 JTB 측은 여행객들이 요구하는 대로 전액 환불해 준다고 말했고,
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한국 측에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때부터 한국인의 망신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본의 최대 통신사인 교도통신은 이를 기사로 작성하여 전세계에 타전했고,
주간지는 대서특필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번 사건을 확대 재생산하여 방송했다.
한 채널에서는, 마치 최지우가 일부러 안 나온 냥, 여행사의 사전 접촉 여부는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최지우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키며 여행객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일방적으로 최지우를 성토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사비 1000만원을 들여 일본여행객들에게 선물했다는 보석상자 이야기는 단 한
곳에서도 언급조차 없었다.
대신 처음 보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치 최지우가 미리 약속을 해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장소에 안 나왔다는 인식만 강하게 심어줬다.
최근 한국인들은 아시아권에서 불고 있는 한국의 대중문화 열풍에 걸핏하면
'한류'를 들먹이며 자화자찬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한류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한국영화 '쉬리'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가 일본인들에게 많이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에서 만큼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가을동화'에 이어 '겨울연가'로, 일본인들의 차디찬
가슴에 따뜻한 장작불을 피우게 한 것. 세대를 뛰어 넘어 일본인들을 '겨울연가'
신드롬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한류의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기도 전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어 버렸다.
이를 두고 한국특파원 출신 기자가 한 마디 했다.
"한국의 '괜찮아요' 문화의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얼버무리면 된다고 하는, 또 어떻게 되겠지하는 안일한 사고방식이 이번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치명적으로 이미지가 다운된 최지우
측에서 가만 있으면 안돼요. 여행사 측에 확실하게 그 책임을 묻고 그에 응당한
손해배상을 받아내야 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적당'이라는 건 없습니다."
일본과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은 제발 약속 좀 잘 지켰으면 좋겠다.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도와주려고 중간에 다리를 놓은 나도 피해자 중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yoo jae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