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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 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 3·1 운동과 임시 정부 대통령 추대
1919년 3월 1일, 삼일 운동이 일어났다. 나라 잃은 세월 10년, 억눌리고 핍박받았던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열망을 뿜어냈다. 삼일 운동은 평화적인 시위였다. 민족 대표 33인의 지시 사항 가운데 마지막은 비폭력을 당부한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인들을 모욕하지 말라. 돌을 던지지 말라. 주먹으로 때리지도 말라. 그런 행동은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지도자는 인도의 간디이다. 하지만 3·1 운동은 간디가 유사한 운동을 일으키기 3년 전에 일어났다. 이는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선각적 용기를 보여준다.
3·1 운동의 뉴스는 전 세계에 퍼져갔다. 약소국의 용기있는 저항에 세계의 양심들은 찬사를 보냈다. 1919년 4월 6일자 <로스엔젤레스 타임즈>는 '생명의 존엄성'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들의 선언은 우리의 독립 선언에 버금가는 것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목소리다. 신의 가호로 미친 세상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 "
그러나 미친 세상은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고 약소민족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평화적인 시위에 대하여 일제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되갚았다. 조선 총독부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 1728만 8989명 중에서 무려 83만 1667명이 체포되었다.
3·1 운동의 소식을 듣고 이승만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미국의 국무부에 전보를 보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애국자들이 일본으로부터 탄압을 받지 않도록 미국이 중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인 동시에, 이승만의 일생을 바꾸어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그중에서 정부의 요인 명단을 발효한 곳은 6곳이었다. 이승만은 6곳에 모두 최고위급 각료로 이름을 올렸다. 45세 전후에 그의 카리스마는 전 민족적으로 퍼져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적인 활동을 펼쳤던 세 곳에서는 모두 최고 지도자였다. 이승만은 노령의 대한 국민의회 국무총리,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한성 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각 임시 정부마다 체계가 다르고 규칙이 달라서 국무총리, 집정관 총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지만, 이병주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 모든 망명 정부가 대통령으로서 받든 사람은 오직 이승만이다."
이승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직위는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였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에서 13개도의 대표 25명이 국민대회를 거쳐서 최고 지도자로 추대한 것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한성 정부가 이승만을 추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민주 정부의 수반으로서 이승만의 개인적인 탁월함, 한성 정부 요인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점, 이승만이 미국에 한국 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할 때 적임자라는 요인 등이 중요했다. 동시에 "한성 감옥 인맥"이 한성 정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복당동지"였던 신흥우와 이상재가 그들이다. 특히 성자와 같은 삶으로 한국인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던 기독교 교육자 이상재가 이승만 추대에 앞장섰다.
한성, 노령, 상해의 임시 정부는 결국 하나로 합쳐져서 통합 상해 임시 정부가 된다. 1919년 9월 상해 임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세워져 임시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우리 민족과 정부의 대표자로 등장하게 된다. 임시 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첫 업무에 대해서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은 대한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열강의 정부 수반들에게 외교 관계 개설을 제안하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한 셈이었다. 자금도, 강력한 지지자도 없는 소규모 망명 단체가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따름이다."
♣ 왜 외교 노선인가?
임시 정부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선택한 독립 운동 방법은 외교 노선이었다.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 이미 그의 노선은 암시되어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주변국에 의해 자주권을 침해받게 된 원인은 자주적인 외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외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일찌감치 간파했다.
외교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무장 투쟁론의 한계 때문이다. 1920년대에 이미 일본은 세계의 3대 군사 강국이었다. 전성기에 7백만에 이르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일본을 무력으로 물리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설령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힌다고 해도, 우리 민족이 받아야할 보복은 참혹했다.
일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고조되었던 국내외의 항일 운동 세력에 대해서 잔인하게 보복했다. 1920년 노령 연해주에서 4월 참변이 일어났다. 일제는 독립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한인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을 저질렀다. 우리 계레 300여 명이 죽고 100여 명 체포당하는 비극이었다.
뒤이어 간도 사변이 일어났다.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간도 한인사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이었다. 3469명이 피살당하고 179명이 체포당했으며, 71명의 여인이 강간당했다. 민가 3209호, 학교 36개교. 교회당 36개가 일본군에 의해서 불타버렸다.
이처럼 우리가 일본군을 공격하면 일본군은 엄청난 보복을 동포들에게 퍼부어댔다. 무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가 없고, 일본군을 공격한 대가로 치러야하는 우리 민족의 희생도 너무 컸기에, 이승만은 외교 노선을 주장했다.
둘째는 국제 정세를 읽는 이승만의 안목이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일본과 미국의 충돌을 예상했다.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일본은 구미 열강, 특히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미국과 필연적으로 대결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때가 도래하면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력 투쟁도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한국인의 자력(自力)에 의한 일본과의 정면 대결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소모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승만은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결국 미국의 힘을 이용할 때만 한국의 독립은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친미(親美) 외교 노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 운동의 유일한 길이자 마지막 보루였다. 그가 임시 대통령이면서도 정부의 소재지인 상해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활동하기를 고집했던 이유도 이러한 신념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11년 11월 3일 임시 정부 요인 취임에 즈음하여 상해로 전보를 보냈다.
"원동(遠東)의 일은 총리가 주장하여 하고 중대한 일은 나와 문의하여 하시오. 구미의 일은 나에게 임시로 위임하시오. 중대한 일은 정부와 문의하겠소. 정부와 이곳은 절대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소."
본인은 친미 외교 노선에 집중하기 위하여 미국에 있을 것이니, 상해를 중심으로 한 임시 정부의 일은 총리인 이동휘가 진행하되,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역할 분담을 제안한 것이다.
이승만의 외교 노선에 이동휘는 즉각 반발했다. 그는 이승만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연해주의 한인 사회당 세력과 연결된 인물이었다. 상해에서도 독립 운동가들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보급했다. 그의 노선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 독립군들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이었다.
이념에서나 독립 운동 방법론에서나 정반대인 이승만을 향해서 이동휘는 "사회주의적 소양이 부족하다, 대가리가 썩었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동휘식의 무장투쟁론이 뜻은 장하지만, 현실적으로 무모하다는 비판은 임시 정부 내에서도 제기되었다.
춘원(春園) 이광수는 <독립신문>에서 무장투쟁론을 '급진론'이라고 지칭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 급진론은 다만 입으로만 말하는 급진론이니, 인재를 내고 금전을 내고 조직적이고 공고한 독립당을 내놓기 전에는 아무리 급진을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앉은뱅이에게 달음질을 하라고 재촉함과 같다."
맨주먹으로 수백만 일본군과 싸우자는 주장을, 걷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달리라고 재촉하는 것에 비유했으니, 적절한 표현이다.
상해 임정에서는 그 후로도 독립 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은 친미 외교 노선을 폭넓게 지지했다. 이상재와 안재홍이 1925년 3월 비밀리에 결성한 흥업구락부는 서울에서 학계, 언론계, 실업계, 관계(官界), 그밖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명 인사들을 포섭했다. 그들은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독립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후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외교 노선을 둘러싼 갈등은 이승만과 이동휘의 대립에서 보여지듯이,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했다.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과 공산주의자였던 이동휘의 대립으로도 읽혀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외교 노선을 걸었던 이승만을 비판하고 소위 '무장 투쟁'을 했다는 김일성을 높게 평가하는 흐름이 있다.
2012년 당시 국회의원 임수경이 탈북자를 '변절자'로 불렀다고 하여 소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폭로한 탈북 대학생 백요셉은 자신이 참여했던 수업에서 교수가 가르친 내용을 소개했다.
"김일성이 총을 쥐고 만주에서 피를 흘리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는데, 이승만이는 미국으로 도망가서 카바레서 블루스나 추고 양키 기생들하고 춤이나 추면서 '마이 컨트리 X됐다'하고 있었겠지? 라는 말을 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이 그 교수를 나꼼수 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 나라 대학의 한 단면을 보여준 기사이다. 대학에서 가르칠 정도이면 한 사회의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데, 전부가 아니라 일부 지성인들의 수준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싶다. 먼저 김일성이 피를 흘리며 독립 투쟁했다는 부분이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독립 투쟁을 했던 기간은 길게 잡아야 3-4년 정도이다. 일찌감치 소련 영토로 넘어가 소련군 장교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음은 널리 알려졌다.
그나마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했다는 부분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북한 정권의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공화국 영웅' 최현은 빨치산들의 투쟁담을 회고한 「회상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들 마적(馬賊)들에 대한 정치 공작을 그만두고 미리 준비해온 아편을 한줌 꺼내 보이면서 탄약을 팔라고 하였다. 마적 두목 구점은 그제야 눈을 번쩍거리며 좋다고 웃는 것이었다 ...
나는 가만히 권총을 꺼내어 주인 앞에 갖다 댔다. 사태의 돌변에 주인은 어쩔 줄 모르고 10만원을 내놓고는 자기 아내에게 2만 5천원을 더 가져오게 하여 엎드려서 살려만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인을 인질로 잡아 차를 불러 타고 용정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모안산 밑까지 와서 산속으로 도망을 쳤다. 그날 무역 상인에게서 뺏은 돈이 트렁크에 가득했다."
마적이니 아편이니 인질이니 뺏은 돈이니 하는 단어가 어쩐지 독립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의 비서 출신으로 남로당 지하 총책이었던 박갑동은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김일성패는 국내에서의 시민 생활의 경험이 없으니 인민 대중과의 혈연적, 정신적 연결이 없다. 그들은 조국을 모르고 일찍이 만주 땅으로 넘어갔거나 또는 그곳에서 출세한 자들이다. 그들은 만주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땀을 흘리고 노동은 하지 않고 떼를 지어 다니며 약탈, 살인 그리고 아편 장사까지 하고 다니던 패들이다.
그런 짓을 자랑삼아 '항일 유격 투쟁'이라고 하나 우리가 국내에서 한 '항일 독립 투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
김일성패는 이렇게 하여 무고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강탈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며 불을 질렀던 것이다. 아무리 독립이 좋다해도 이렇게 강도질하는 데까지 독립의 이름을 붙여서야 그 독립이 무슨 독립이 되겠는가. 이런 자들이 북한의 정권을 쥔 데서 해방 후 우리나라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러한 김일성패의 정체를 모르고 그들이 정말로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한 애국자이며 양심적인 사람들인 줄 알았다 ... "
이승만이 카바레에서 블루스나 추고 양키 기생과 놀아났다는 말은 엄격하게 따지면 고인(故人)에 대한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 독립 운동가 시절, 이승만은 사과 한 개로 하루를 때우기도 했고 생일날 하루 종일 굶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승만을 처음 만났을 때, 신비한 매력을 가진 노신사가 너무나 값싼 음식을 시키는 것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는 에피소드 역시 유명하다.
이박사가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들을 줄줄이 졸업한 국제법 박사로서, 얼마든지 미국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조국 독립을 이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일생을 바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 내외의 유품을 모아놓은 이화장에 가보면, 그분들이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사실 확인도 없이, 선동적인 거짓말이나 하고 다니는 소위 '지성인'들이 많다는 것이 이 나라의 두통거리다.
총들고 피흘리며 싸우는 무장 투쟁이 아니라 외교로 독립 운동을 했다는 것을 편한 길로 갔다고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 주체성이 없이 강대국에 의존하려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 노선을 참으로 힘겹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나라도 없는데 외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가. 더군다나 일본과 오랜 기간 우호 관계를 지속했던 미국을 움직여 일본을 물리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인가. 세상에 어느 나라가 멸망해버린 약속국을 위해서 다른 강대국과 싸워주겠는가. 그 일이 성사되게 만들고 또 성사되기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허망하며 고통스런 세월인가.
결국에는 이승만이 옳았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면, 우리가 총 들고 싸워서 일본을 물리친 것이 아니고, 미국이 원자폭탄까지 사용해가면서 일본을 굴복시켰다. 그 시간이 오기까지 이승만은 숱한 모멸과 무시와 비판을 견뎌내야 했다.
이승만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가리켜 이영훈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고 했다.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뜻이니, 자기 분수를 모르고 상대가 되지도 않는 강자와 맞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마침내 수레를 막아서 방향을 돌려버린 사마귀가 되었고,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이 되었다. 허문도의 논평이 적절하다.
"이승만은 ... 나라가 망차자 그 혼의 불씨를 가슴에 담아 지구 저쪽으로 가서는 한평생이 다 가는 기약 없는 수십 년을 버텨내어, 기다렸던 천시(天時)에 그 불씨를 갖다 대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