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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1년 여름호.
【백기완 선생님 특집】 대담
역사가 우리를 기록한다
일시 : 20021년 4월 3일
장소 : 푸른사상 서울사무소(한국출판콘텐츠센터 402호)
대담 : 방동규(방배추)․맹문재(사회)․조문호(사진)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강민 선생님께서 살아 계실 때 광화문 촛불 집회에서 몇 차례 뵙고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네요. 선생님께서는 백기완 선생님과 오랜 친구여서 이번 『푸른사상』 여름호의 특집 대담에 자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을 언제 처음 만나셨는지요?
방동규 : 1954년 겨울 즈음이었어요. 내 나이 스물하나, 백기완의 나이 스물둘이었지요. 그때 내 주위에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많았어요. 한 친구가 너는 머리가 좋으니 공부 좀 하라면서 이동우라는 친구를 소개해주었어요. 그래서 이동우를 몇 번 만났는데, 그가 “내 힘으로는 안 되니 좋은 친구가 있다.”며 백기완을 소개해준 것이에요. 이동우는 나중에 국민대학교 경영대학원장을 역임했지요.
그래서 백기완을 찾아갔어요. 백기완은 후암동 부잣집에서 가정교사로 있었어요. 주인은 남대문시장에서 어물을 파는 상인이었는데, 백기완은 그 집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지내고 있었지요. 백기완이 나를 보더니 “네가 배추냐?”라고, 무조건 반말로 인사를 해 기분이 좀 언짢았어요. 그러더니 “너 한 번 붙으면 몇 명이나 이기냐?” 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어요. 그래서 내가 “한 열 명은 자신이 있지.”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내 따귀를 올려붙이는 것이었어요. 어안이 벙벙했지요. 아파서가 아니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였지요.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백기완이 벼락같은 소리로 “사내새끼가 주먹을 쓰려면 3천만을 울고 웃겨야지. 겨우 열 명을 때려? 그걸 힘자랑이라고 하냐? 너하고 동무 안 해. 재수 없는 놈, 당장 꺼져!”라고 일갈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저런 놈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 싶어 나도 동무 안 한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어요.
그렇게 우리 집에 돌아왔는데, 이상했어요. 그날부터 괴로웠어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했어요. 괘씸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옳았거든요. 그래서 일주일쯤 되어 미아리에서 후암동까지 걸어가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 동무하자.”라고 했어요. 그래서 친구가 되어 금세 친해졌어요. 백기완이 “너 고기 좀 먹을래. 남자답게 한 근씩 먹자.”라고 해서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사다가 구워 먹었어요. 나하고 시 쓰는 이추림하고 이동우하고 넷이 먹었어요. 그런 뒤부터 백기완이 나를 굉장히 위해주었어요.
맹문재 : 참으로 극적이고 멋있는 인연의 시작이네요. 그 뒤 두 분이 자진 녹화대 활동(나무심기운동)이며 농촌운동 등을 함께하셨지요.
방동규 : 우리는 만나면 이승만 정권이며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없앤 것 등을 타도했어요. 그때 백기완은 자진 학생 녹화대, 국민생활 정화연맹, 자진 농촌계몽대 등의 단체를 가지고 있었어요. 백기완은 농업 국가를 만들려면 나무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근류균(根瘤菌)이 있어야 옥토를 만든다고 했어요.
백기완은 소나무, 포플러 등의 묘묙을 구한 뒤 각 중고등학교 다녔어요. 학교에 가서 우리의 나라의 애국은 간단하다, 일요일에 나와 나무 한 그루만 심어달라고 강연했어요. 그런 식으로 여의도, 한강변, 관악산 등에 나무를 심었어요. 또 학생들을 동원해 남산의 소나무 송충이를 잡았어요. 송충이를 잡기 위해 식당에서 사용하고 버린 나무젓가락을 주워다가 씻고, 미군 부대에 가서 깡통을 주워오고, 큰 드럼통을 열 개 정도 마련해 학생들이 잡아 온 송충이를 휘발유를 붓고 태웠어요.
국민생활 정화연맹 활동으로 충무로와 명동에서 난리가 났어요. 리어카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백기완이 연설을 했어요.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가정을 사랑하는 것이다, 얼른 집에 들어가자 등이었어요. 일종의 국민 정신계몽 운동이었지요. 그러니 장사를 망친다고 가게들이며 깡패들이 야단들이었지요. (웃음)
자진 농촌계몽대 활동은 시골의 재래식 화장실, 시궁창 등을 청소하는 것이었어요. 문맹퇴치 운동으로 한글도 가르쳤어요. 농촌계몽대 활동에는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어요.
백기완과 함께 이와 같은 운동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했어요. 지도자다운 생각과 행동을 볼 수 있었어요. 백기완은 1960년 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적도 있어요. 계몽운동만 할 것이 아니라 4․19혁명 세력이 주도하는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용산구에서 출마했는데 돈이 없어 플래카드 걸 때 힘들었어요.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께서 이십대 초반인데 그와 같은 활동을 한 것이 놀랍네요. 방배추 선생님도 그렇지요. 그 뒤에 두 분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방동규 : 백기완은 4·19혁명을 거치면서 한일협정 반대 투쟁, 박정희 독재 투쟁 등 반독재 투쟁에 나섰어요. 나는 1964년 봄 ‘파독 광부 2진’으로 서독에 갔어요. 갑자기 집안에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되는 위급한 일이 일어나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의식이 없는 어머니를 두고 떠나가는 죄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독일의 유연탄 광산은 한국의 무연탄 광산과 다르게 채탄 방식이 달랐어요. 겉으로 보면 그냥 평지이지만, 지하 1,200미터 아래까지 내려가 작업했어요. 죽음을 무릅쓴 것으로 그야말로 피와 땀과 눈물의 노동이었어요. 석탄을 캐면서 갱도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60킬로나 되는 쇠동발을 세우는데, 작업이 끝나면 그대로 두고 나와요. 그런데 쇠동발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그걸 뽑아오는 광부에게는 수당을 주었어요. 나는 위험천만한 그 일을 돈을 벌기 위해서 여러 번 했어요.
어느 날 갱내에서 채탄작업을 하다가 낙반사고를 당해 깔려 기절했어요. 독일인 반장이 헌신적으로 구출해 겨우 살아났어요. 나는 몸을 회복했는데도 기억상실증에 걸려 이전의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독일인 반장의 지극정성으로 회복했어요. 그 독일인 반장은 네덜란드 출신인데 독일 광부의 딸과 결혼해서 광부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내가 광부 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셨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서독에서 광부 생활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파리 생활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방동규 : 3년간의 광부 생활을 마치고 계약을 연장할까, 아니면 귀국할까 등을 생각하다가 세상을 더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프랑스로 건너갔어요. 파리 조지생크가(街)에 있는 <차이나타운>이란 중국집에 접시닦이로 취직을 했어요. 주인은 정 씨 영감이었는데, 함경도 출신이었어요. 열아홉 살 때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정치인들의 이전투구에 환멸을 느껴 프랑스로 망명한 1세대 교포였어요. 애국심이 크고 정치 견해도 비슷해 잘 지냈어요.
어느 날 일을 끝내고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크게 싸워 그곳을 나왔어요. 나는 공동체주의에 관심이 많은데 정 영감은 사회주의를 혐오해 충돌한 것이지요. 그분을 생각하면 정말 죄송한 생각이 들어요. 2년 가까이 나를 자식처럼 돌봐주었는데 왜 그랬는지 후회가 되어요. 간호사 출신인 여자와 살다가 사별했고, 자식이 없어 나를 아들 삼고 싶다고 했어요. 또 귀국해서 고향 가까운 강원도에 화장품 원료가 되는 꽃을 키우자고 했어요.
<차이나타운>을 나온 뒤 6개월 동안 집시들을 따라다니며 거지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가 독일에서 함께 광부 생활을 하던 박진만의 도움으로 다시 접시닦이로 취직을 했어요. 차츰차츰 돈을 모아 귀국할 수 있는 비행기 비를 마련했어요. 그런데 귀국하면 다시 프랑스를 오기 힘들 것 같아 이복형님을 찾기로 마음먹었어요. 형님은 한국전쟁 때 조국의 앞날을 위해 떠난다는 쪽지를 남기고 의용군으로 갔어요. 그 형님이 살아있는지 궁금했어요. 낙동강 전선에서 포로가 되어 북한으로 갔다고 의용군으로 갔던 옆집 아이가 전해주었거든요. 1967년 동백림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찾아가는 일은 매우 위험했지만, 형님이 보고 싶어 갔어요. 그렇지만 북한대사관에서 형님을 찾을 수 없다고 답변해 허탈하게 되돌아왔어요. 1970년 9월 말 김포공항에 도착했어요.
맹문재 : 참으로 파란만장한 이국 생활을 하셨네요. 언제 또 좀 더 듣고 싶네요. 귀국한 뒤 백기완 선생님을 언제 만났는지요?
방배추 : 기완이를 제일 먼저 만났지요. 명동 대연각호텔 옆의 백범사상연구소를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이 새끼야, 자본가를 위해서 피땀 흘리고 온 것이 노동운동인 줄 아냐.” 하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웃음) 그렇게 기를 죽여 놓고 여기저기 전화해서 모이게 해 술을 마셨지요. 그 뒤에도 “차림새가 그게 뭐냐, 부패분자 너 조심해.” 이런 말을 했어요. (웃음)
백기완은 예전의 열혈청년 단계를 넘어서 있었어요. 박정희의 반독재에 대한 투쟁에서 재야세력의 중심에 서 있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백범사상연구소는 심우성이 차린 한국민속극연구소의 아래층에 있었는데 이부영, 백낙청, 황석영, 고은, 김지하, 강민, 천승세, 임헌영, 이호철, 김성동, 구중서, 황명걸 등 지식인들이 드나들었어요.
맹문재 : 그 뒤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방배추 : 충무로 3가 대원호텔 앞에다가 ‘살롱드방’(방 씨 살롱)이라는 고급양장점을 차렸어요. 국제복장학원 속성과에서 3개월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패션이라는 말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지요. 가게의 인테리어를 고급스럽게 하고 조수도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을 섰어요. 그랬더니 장성 부인들, 고급 공무원 부인들, 연예인들이 고객으로 모여들 정도로 큰 반응을 얻었어요. 그런데 살롱드방 위층이 기원이어서 재야인사들이 자주 드나들었어요. 그래서 매일 술값을 책임져야 했고, 분위기도 좋지 않아 가게를 접었어요. 어머니가 서운해하셨지요.
내 주머니에 돈이 있다니까 돈을 꾸어 달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수표를 보증으로 받고 30만 원을 빌려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부도 수표였어요. (웃음)
맹문재 : 양장점을 그만두고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방동규 : 살롱드방을 접고 잠시 제약회사에 다녔어요. 일하면서 농촌 공동체 생활에 대한 계획을 세우려고 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회사의 젊은 동료가 나의 구상을 듣더니 감동해 함께 사표를 내고 그의 고향인 경북 구룡포로 내려갔어요. 거기에서 일자무식이지만 그지없이 순박한 안이만이란 젊은이를 만나 함께 일했어요. 그렇게 6개월 정도 일하다가 백기완한테 편지를 보내냈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기꺼이 찾아주었어요. 기완이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짜보았는데, 땅을 구하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어요.
맹문재 : 경북 구룡포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데, 그만큼 공동체 삶에 대한 꿈이 컸다고 볼 수 있지요. 백기완 선생님께서 다녀가신 뒤 어떻게 되었는지요?
방동규 : 1972년 겨울 백범사상연구소를 찾았어요. 그리고 백기완, 김오일과 함께 강원도 신철원 울음산 530미터 고지를 답사했어요. 눈 앞에 펼쳐진 웅대한 신천지에 숨이 막히고 황홀했어요. 그리고 얼마 뒤 김오일의 주선으로 땅 주인을 만났어요. 지포리의 마을 유지인 최재돈 어른이었어요. 환갑 정도 나이인데 줄이 잘 잡힌 양복에 백구두를 신고 머리를 포마드 기름을 발라 넘긴 인상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술과 담배는 안 하는 분이었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지내온 일들과 앞으로의 농사 계획을 말씀드렸어요. 한 삼십 분 정도 듣더니 그 땅을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어요. 믿기지 않은 일이었지요. 그리고 부인한테 술상 좀 봐 달라고 하시면서 “내 아우님 하시겠는가?”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큰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고 그분과 부인께 큰절을 올렸어요. 최재돈 어른은 나를 대서소에 데려가서 증여계약서까지 작성해 나눠 주셨어요.
그분은 열일곱 살 때 왜정 놈들이 공출을 못 했다고 아버지를 구타하자 화가 나서 그 순사를 때려죽였어요. 그런 뒤 일본으로 밀항해 조선소의 노동자로 일했어요. 그런데 신분이 탄로 나는 바람에 만주로 가 독립운동단체에 몸을 담았어요. 연락하는 일을 했는데 그런 활동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필요하다네요. 광복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니 일본 순사 때려죽였다는 경력으로 인민위원장에 추대되었어요. 그렇지만 9·28수복 때 국군에게 잡혀 부역 혐의로 사형당할 뻔했어요. 다행히 대위 계급의 사촌 동생이 있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그래서 조상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에요. 읍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땅을 주면 사람 버린다고 했어요.
맹문재 : 방 선생님과 조우석이 함께 지은 『배추가 돌아왔다』1∼2권(다산책방, 2006)을 보니 땅 증여계약서의 작성일이 1973년 4월 1일로 되어 있네요. 그 뒤 농장을 개간한 상황을 듣고 싶네요.
방동규 : 10만 평의 농장을 포함해 100만 평의 땅을 얻은 뒤 필요한 물자를 주위 사람들에게 지원을 받았어요. 백기완은 농장을 꾸리라고 20만 원을 주었어요. 일반 월급쟁이의 두 달 치 월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지요. 그 돈으로 농기구를 샀어요. 백기완은 트레일러가 달린 차 한 대도 빌려와 도와줬어요. 논, 밭, 과수원 등으로 토지를 나눈 뒤에 개간을 시작했어요. 명동의 찻집 ‘카페 떼아뜨르’에서 일하던 박근서라는 아이와 구룡포에서 함께 일했던 안이만도 불러들였어요. 어떤 날은 하루에 삽이 일곱 자루나 부러지기도 했어요. 농장의 이름도 ‘노느메기밭’이라고 지었어요. 노느메기는 잔치 때 음식을 함께 나눠 먹듯이 수확물을 공동분배한다는 뜻의 순우리말이에요.
선우휘 선배가 소개해준 수원 임업시험장에 가서 밤나무 400그루, 호두나무 200그루를 가져와 심었고, 왕진연 매제가 보내준 오동나무 5,000주도 심었어요. 선우휘 선배는 흑염소 20마리, 오동나무 300그루도 보내주셨어요. 콩, 옥수수, 고추, 들깨, 도라지, 축산 사료용 작물도 심었어요. 그러는 동안 어머님이 선을 보라고 해서 6월 서둘러 이신자와 결혼했고, 가을에는 박근서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흙담집도 한 채 지었어요.
아내까지 합세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간해 나갔어요. 척박했던 땅이 옥토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더없이 만족스러웠어요. 700마리나 되는 흑염소가 몰려다니는 모습은 장관이었어요. 사람들도 찾아들기 시작했어요. 이부영, 김도현, 김정남, 최민 등 재야인사와 문화예술인들이 놀러 와 유신시대의 답답함을 땀을 흘리며 풀었고, 일이 끝난 저녁에는 시국 이야기며 흥겨운 노래판을 즐겼어요. 백기완이 굉장히 좋아했고,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선생님도 다녀가셨어요.
1974년 1월 중순 아내가 만삭이 되어 몸을 풀려고 서울의 동생 집으로 갔어요. 막 집에 들어서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정보부원들이 들이닥쳤어요. “여보, 잠깐 다녀올게.”라고 인사하고 집을 나왔는데, 대구의 대공분실에 붙들려가 간첩죄로 구속되고 말았어요. 철원 농장에서 김일성과 무전교신을 했다고 보름 동안 몽둥이로 맞고 전기고문을 당한 뒤 서울 서대문교도소 독방으로 옮겨졌어요. 도대체 내가 왜 간첩죄를 뒤집어써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안이만이 잠시 시골에 갔다가 내게 들었던 반독재, 이상촌 등의 얘기를 동네방네 자랑삼아 떠벌려 그것을 들은 사촌형이 ‘빨갱이 배추’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수사기관에 알린 것이었어요. 수사기관이 뒷조사를 해보니 외딴곳에서 농사를 짓고, 반체제 거물급 인사들이 찾아드는 등 시국사건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어 나를 거물급으로 여긴 것이에요. (웃음)
맹문재 : 감옥에서 백기완 선생님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방동규 : 백기완은 장준하와 함께 긴급조치 1호로 끌려왔어요. 나는 긴급조치 2호였어요. 어느 날 건너편 건물 복도를 거닐고 있는 백기완을 발견했어요. 너무 반가워 “야, 기완아!” 하고 불렀지요. 그랬더니 내 쪽으로 와서는 “배추, 기죽지 마! 기죽으면 안 돼!”라는 인사말을 하고 갔어요. (웃음)
당시의 문인들과 지식인들은 기개가 있었어요. 서대문형무소에서 이호철, 임헌영, 유홍준, 이재오 등도 만났어요. 나는 6개월 만에 출소했어요. 나중에 안 것이지만 선우휘 선배가 직접 청와대에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죄 없는 방동규를 선처해달라고 했대요. 12년 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에게 고문당할 때도 선우휘 선배의 도움이 컸어요.
맹문재 :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네요. 출소한 뒤에는 어떠한 활동을 하셨는지요?
방배추 : 어머니와 함께 아내가 있는 장위동의 동생 집으로 갔어요. 아내의 품에 안겨 있는 딸아이를 내려다보았어요. “얌마!” 그랬더니 방글방글 웃는 것이에요. 내가 감옥에서 나오면 아이의 이름을 짓기로 했다며 어머니가 말씀하셔 ‘방그레’라고 지었어요. 방글방글 웃는 모습을 보고 평생 웃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 것이지요.
나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곧장 노느메기밭으로 내려갔어요. 다음 해는 둘째 딸 ‘방시레’가 태어났어요. 아이들은 그곳에서 개구리도 잡아먹고, 메뚜기도 잡아먹으며 잘 자랐어요. 그런데 우리 농장이 남파 간첩 침투의 루트라면서 정부가 철폐령을 내려 할 수 없이 농장을 접었어요. 청춘을 바쳐 이룬 땅을 눈물을 머금고 정리했어요.
맹문재 : 너무나 어이가 없고 안타깝네요. 그 뒤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방동규 : 제세그룹 이창우 회장의 도움으로 양수리에 가서 양토(養兎)사업에 뛰어들었지요. 건축가 조건영의 소개로 알게 되었지요. 제세그룹은 1978년 부도를 맞았지요. 토끼 기르는 사업도 콕시즘이란 전염병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뒤 선우휘 선배의 도움으로 현대건설에 입사해 울산에 내려갔어요. 그리고 2년 뒤인 1979년에 아랍에미리트로 파견근무를 나갔어요. 직원 200명을 관리하는 중장비 공장장으로 상하수도 등 도시 인프라 공사를 맡았어요. 그런데 소장이 너무 빼먹는 것을 참지 못해 건의했다가 찍혀 귀국 조치를 당했어요. 동두천 가는데 돌산이 큰 것이 있는데, 소장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거기에서 정주영을 만나 야단을 맞았어요. 그래서 참을 수 없어 사표를 썼어요.
1982년 말 안양에 가서 중국집 <영홍관>을 운영했어요. 나의 매제가 장소를 주선해주었어요. 옛날 안양역 앞이어서 위치가 좋았고 장사가 잘 되었어요. 선우휘, 이부영, 백기완 등이 단골손님이었어요. 동네 불량배들이 손을 벌려 골치 아팠고, 파출소며 경찰서 사찰계며 중앙정보부에서 내 움직임을 적어갔어요. 그렇게 한 5년 정도 했는데, 집주인 아들이 한의사여서 한의원을 한다고 비워 달라고 해서 나왔어요.
맹문재 : 1986년 『말』지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민언협사무국장으로 수배 상태에 있던 김태홍은 광주에서 태어나 1970년 『한국일보』의 입사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았어요. 1980년 한국기자협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86년 『말』지 발행인 및 편집인으로 이른바 ‘보도지침’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어요. 전두환 정권은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보냈는데, 『한국일보』의 김주언 기자가 제공한 그 보도지침을 『말』지에 실어 폭로했기 때문이지요.
방동규 : 1986년 여름 어느 날 건축가 조건영 후배가 전화를 했어요. 김태홍이 쫓기고 있으니 고향까지 동행해주길 부탁하는 것이었어요. 혹시 불심검문에 걸리면 해결해주는 보디가드를 해달라는 것이어서 흔쾌히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김태홍과 조건영을 만나 수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탔어요. 김태홍이 광주 출신이기 때문에 거기까지만 가면 도와줄 친구들이 많았지요. 광주에 도착하자 김태홍이 내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하려고 한잔하자고 했지만, 나중에 잡혀서 취조를 당할 때 몰라야 불지 않는다고 말하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집이 도곡동 주공아파트였어요. 샤워를 하고 설핏 잠이 들었는데, 수사기관 사람들이 들이닥쳤어요. 남영동 대공분실에 붙들려가서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어요. 그곳에서 “이 중위”라고 불리는 이근안 고문 기술자에게 당한 것이지요.
맹문재 : 『배추가 돌아왔다』(다산책방, 2006)에 이근안과 관련된 글이 세 꼭지나 실려 있네요.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이네요.
방동규 : 감옥에서 나와 사당동에 신발가게를 차렸어요. 그러는 동안 오윤 판화가의 누이 오숙희의 남편이 서초동에서 만둣집을 내었는데 운영이 잘 안 된다고 봐 달라고 해 가보았어요. 주방장의 수준이 안 되어 바꾸고 내가 맡아 했어요. 만둣집 이름도 <만두향>에서 <개성만두>로 바꾸었어요. 손님들이 표를 가지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먹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어요.
맹문재 : 그 무렵(1987년) 백기완 선생님은 민중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요. 그때는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요?
방동규 : 나는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것을 반대했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이애주, 홍선웅, 임진택, 최열, 김용태 등이 주축이 되어 선거운동을 했어요. 처음에는 선거운동본부에서 나를 접촉시켜주지 않았어요. 막판에는 같이 있었어요.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의 아버님과의 추억도 좀 들려주세요.
방동규 : 내가 젊은 날 무슨 일로 도망치다가 백기완의 집에서 6개월 정도 신세를 진 적이 있어요. 기완이 신혼 때였어요. 그때 기완의 아버님하고 친해졌어요. 아버님과 단둘이 식사를 했는데, 그때 꼭 반주를 하셨고, 식사 뒤에는 담배를 피우셨어요. 그래서 담배가 피우고 싶어 “아버님, 횟배가 있어 죽겠어요. 담배를 피우면 없어진대요.”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아버님이 눈치를 채시고 “그래, 약이니 한 대 피워라.”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이었어요. 그 뒤 맞담배까지 하게 되어 기완이가 마땅하지 않게 여겼어요. 기완의 아버님은 휘문고 출신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분이에요. 『동아일보』 기자도 하셨지요. 김구 선생님과 고향이 같았어요. 아버님 성함이 백홍렬이셨는데 정말 그릇이 크신 분이셨어요. 기완이보다도 아버님이 대단한 분이셨어요. 일본에서 공부할 때 큰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학비를 김범린 등 다른 학우들에게 주고 자신은 오두막집으로 하숙집을 옮길 정도였어요. 김범린은 나중에 동국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하지요.
어느 날 신신백화점 근처의 육교를 건너다가 아버님을 만났어요. “배추야, 잘 만났다. 주머니를 다 털어봐.” 하시며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땅바닥에 놓고는 쓸 만큼 가져가시는 것이었어요. 어느 날 시청 앞 중국집을 지나가는데 음식 냄새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좀 먹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들어가 음식을 드셨대요. 그리고 주인한테 “지금 돈이 없으니 한 달 뒤에 가져다줌세.”라고 했대요. 그랬더니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대요. 아버님은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며 “너를 만나 살았다.”고 하시면서 가셨어요. 그렇게 멋있는 분이셨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내가 빈소에서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기완이 싫어했지만, 그만큼 아버님과 정이 들었고 존경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별명이 ‘배추’가 된 사연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방동규 : 한국전쟁 때 연합학교로 운영되었어요. 이 학교 저 학교 학생들이 창고나 교회나 텐트를 치고 수업을 했지요. 그때 전부 남녀공학을 했어요. 당연히 남학생들은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했지요. 그런데 나는 베잠방이에 밀짚모자를 쓰고 헐렁한 고무신을 신고 다녔어요. 그래서 여학생들이 나를 배추장사 같다고 배추장사라고 불렀어요. 나중에는 줄여서 ‘배추’라고 부른 것이에요. (웃음)
맹문재 : 선생님의 개인사에서 ‘17 대 1’이라는 싸움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에요. 그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방동규 : 어쩌다 텔레비전을 보면 17 대 1로 싸운 일이 소개되고 하데요. 10 대 1도 아니고, 20 대 1도 아니고, 꼭 17 대 1로 말하는 것은 나의 일화에서 연유한 것은 사실이에요. 텔레비전에서는 한 명이 열일곱 명을 이긴 것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졌어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겨울 무렵 친구와 함께 가는데 저쪽에서 몰려오는 것이에요. 그때 낙원동에 정치대학이 있었는데, 나중에 건국대학교로 되지요. 그 학교에 독사라는 제일 센 놈이 있었어요. 그와 내가 서울대학교 앞 이화동 네거리에 한 판 붙었어요. 그놈이 후배들한테 얘기해 떼거리로 복수하러 온 것이에요. 나는 그때 술이 잔뜩 취해 싸울 수 없는 상태였고, 숫자들도 너무 많았어요. 그렇지만 물러서지 않고 다섯 명씩 오라고 하고 싸웠어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기절했어요. 순찰하던 경찰이 발견해서 서울대병원에 입원시켰어요. 코가 부러졌고 이빨 안으로 꿰매었어요. 두 달이나 병원에 있었어요. 어느 날 그들이 치료비를 가지고 사과하러 왔어요. 그래서 몇 명이었냐고 물어보니 17명이라고 했어요. (웃음)
맹문재 : 오늘 조문호 선생님께서 사진을 찍어주고 계셔요. 함께해주셔서 감사해요. 조문호 선생님은 백기완 선생님을 언제 처음 뵈었는지요?
조문호 : 1982년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해서 백기완 선생님 댁으로 가서 처음 뵈었어요. 그때는 백 선생님이 어떤 분이지 전혀 모르고 갔었어요.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어떤 일인지요?
조문호 : 백 선생님께서 1987년 민중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예요. 그때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지지하는 사람들이 정말 대단해서 마치 백 선생님이 당선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웃음)
맹문재 : 또 다른 개인적인 인연을 들을 수 있을까요?
조문호 : 언젠가 양평에 있는 김영수 사진작가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백 선생님께서 김영수의 오줌 색깔을 보고 술을 끊으라고 하셨어요. 결국 김영수 작가는 술 때문에 세상을 떴지요.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는 어떻게 하셨는지요?
방동규 : 백기완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기완을 돌보는 채원희한테 전화가 왔어요. 기완이 심산상 타는 날이었어요. 채원희는 기완이가 글씨는 쓰시는데 말은 못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이 새끼야, 이 새끼야.” 하면서 엉엉 울다가 전화를 끊었어요.
백기완은 나에게 “역사가 우리를 기록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만큼 자신을 역사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지요. 참으로 존경할 모습이에요.
맹문재 : 오늘 선생님의 귀한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앞으로 자주 찾아뵙고 말씀을 듣고 싶네요. 내내 건강하세요.
방동규(방배추)
1935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1954년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 입학했다. 백기완 등과 녹화사업 등을 함께했다. 30세에 독일에 건너가 3년간 광부 생활을 했고, 4년간 프랑스 생활을 했다. 1970년 귀국해 양장점 ‘살롱드방’을 운영했고, 1973년 강원도 철원에서 ‘노느메기밭’을 일구다가 간첩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79년 중동 아랍에미리트에서 근무했고, 1986년 『말』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91년 서해화성 경영자, 1994년 중국 공장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01년 헬스클럽 강사, 2005년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봉직했다. 본명보다 별명 ‘배추’가 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