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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강의 11-1 (2005. 11. 25 이근호 목사)
고린도전서 14장을 봅시다.
1-2절을 보면 ‘사랑으로 방언을 구하라’고 하지요.
고린도전서 1장부터 13장까지 신나게 잘 오다가 갑자기 14장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이야기는 십자가 이야기였습니다.
십자가가 확장되면서 교회가 발생됩니다. 그 교회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이 교회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신령한 것을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것을 통해서 그 교회가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십자가가 신령한 것을 제공한다’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면 될 텐데,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고 ‘교회가 신령한 것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여기?관심이 많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십자가에 의한 열매인데, 십자가가 실체고 교회는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거든요.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라고 교회가 있는데, 사람들은 교회 하나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와 신령한 孤湧?동원시키고자 하는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여기 꽃이 만개했습니다. 빨간 꽃, 분홍 꽃 등등. 그렇데 이것이 가짜거든요. 조화잖아요. 만약 여기에 진짜 꽃이 오면 조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짜 꽃이 뭐냐? ‘신령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예리한지 몰라요.
사람들이 교회를 추구한다는 것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신령한 것을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교회 있고 사람들이 있으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은 <구조주의>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 상대가 없으면 못 삽니다. 못 만나면 전화라도 해서 서로 소통을 해야지 하루 종일 입 다물고 가만있으면 못 삽니다.
신령한 사람은 영적인 것과 내통하는 사람이고, 육적인 사람은 육적인 것을 쉴 새 없이 주고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신령한 영적인 것과 교통이 될 때만 교회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지금까지 고린도전서는 십자가로 설명을 한 것입니다. 왜 십자가로 설명해야 하는가 하면, 그 당시 신령한 것 주장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신령한 것 이야기 안 한 종교단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가짜입니다.
이런 가짜 속에 진짜가 뭐냐 하면 십자가뿐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십자가로 교회를 설명했고, 그 십자가는 신령한 것으로 주어지지 인간이 제조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끝에 보면, “영의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라고 했지요.
유일한 영이 십자가입니다. 영으로 통하는 길은 십자가 외에는 없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성령은 일하시고, 십자가를 벗어난 영적인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십자가가 전해질 때 교회가 생기는데, 이 교회는 신령한 십자가의 내용을 담는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이 육적인 교회를 염두에 둔 영적인 신령한 교회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왜 둘 다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약속’
교회를 수 십 년 다니고,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하지만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해 잊어버리고, 신령한 것의 중요성에 대해 시시하게 여기고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을 합니다. 과연 복음이 무엇인가?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예수님은 누구시지? 이런 질문에 쉽게 답변이 안 나와요.
그 답은 ‘약속’입니다. 참된 기독교의 진리는 ‘약속’입니다. 글자도 간단합니다. ‘약속’
전도연, 박신양이 출연하는 ‘약속’이라는 영화도 나왔어요.
하나님의 자기 약속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신령한 것을 구하라는 이 말을 한 이유는, 마지막 때에 신령한 것에 의해서만 교회가 교회된다는 것을 그전부터 약속을 한 게 있기 때문에 ‘약속’차원에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약속이란 것은 내 쪽에서는 어길 수 있지만 약속하신 분은 도무지 그 약속을 어길 줄 몰라요. 반드시 지킵니다. 마지막 때 구원 받을 때 약속 믿어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약속을 차버리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몇 년을 다니고, 복음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존의 것은 다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약속’ 이것만 하나 붙잡으면 다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 약속을 안 믿는 인간들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안 믿는 사람 혼자 손해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든 안 믿든 간에 약속이 먼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중에도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방주 만드는 일이 약속 때문에 한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노아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큰 배를 왜 만드는가? 비도 안 오는데 하면서. 그러나 어떤 소리를 하던 노아는 약속을 믿으면서 계속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창세기 8장에서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언약’이란 말을 잘 안 써니까 ‘약속’으로 합시다.
營탔?왜 예수 믿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임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만약에 내가 믿는다면 내가 스스로 철회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다고 하면 내가 믿고 있음을 내가 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안 믿고 싶으면 안 믿겠다는 그런 뜻이 됩니다.
가끔 스스로 기독교가 뭔지, 복음이 뭔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생각하다가 안 믿어도 되잖아!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속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한 번 믿어볼까’ 라는 것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내가 한 번 믿어보다가 시시하고 재미없으면 발 뺄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고 자기 결단(혹은 맹세)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자기 맹세는 자기가 분 풍선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풍선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언젠가는 꺼진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많이 넣으면 풍선이 커질 수는 있지만 입에 힘이 빠져 못 불면 다시 풍선은 사라지고 껌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시작할 수도 없고, 육적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왜? 그 신령함은 구약에 이미 약속된 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신령한 것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너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약속하신 바에 의하면 신령한 단체, 신령한 사람이 등장하게 되어 있는데 그게 너냐? 라고 묻는 차원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명령은 무슨 뜻인가 하면, ‘너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날 사랑함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너 신자 맞아?’ 하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하나님이 예언한) 마지막 때에 등장한다는 영적인 사람 맞아? 라고 묻는 것입니다. 진짜 맞다면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육적이고, 신령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하는 것은 ‘신령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령한 사랑이 아니고 내게서 나오는 사랑을 하게 될 경우에는 상대방이 내 사랑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을 나타내면 그 사랑을 내가 철회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랑을 베풀었다면 베푼 것으로 족히 끝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한 사랑이 아니고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해서 나를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신령한 관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신령한 일이 되어야지 나의 의지에서 나오는 육적인 것이 되면 얼마 못가서 한계를 드러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 예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 본문을 ‘어떻게 하면 교회에서 방언, 예언을 만들어 냅니까?’ 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으면서, “목사님, 나는 어떻게 하면 방언, 예언을 할 수 있습니까?”하고 나오더란 말이지요.
순복음 이단이 방언을 한다고 한 것은 내 쪽에서 나오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들이 갖고 있는 욕망, 내 쪽에서 교회 만들어서 그것으로 천당 가려고 하는 자들과 조용기의 욕망이 맞아 떨어져서 수십만 신도가 모인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육적인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교회에서는 이것을 부러워해요. 육적으로 크게 되니까.
사람의 덩치가 크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덩치가 작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약속 받아들이면 약속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신령한 약속을 안 받는가 하면, 육적으로 느긋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육적으로 아쉬운 것이 있더라도 영적인 사람이 아니면 육적으로 신령한 것을 추구하다 보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방언, 예언을 할 것인가?’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자들은 10년 방언하다가도 11년째 방언 안 나오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약속이 어디서 나오느냐?
예레미야 23장 21-22절에 “이 선지자들은(거짓 선지자)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3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천상 회의가 하늘나라에서 열립니다. 열왕기상 22장에도 보면 천상회의 장면이 나오는데 그에 대해 미가야 선지자가 하는 말이 있어요. 이 미가야가 왕의 편에 선 어용 선지자 400명과 싸움을 하는데, 뺨까지 맞아가면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천상회의에 참석했는데 왕의 선지자들에게는 거짓말하는 영이 들어가서 거짓을 말하도록 하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미가야 외에는 모릅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늘의 천상회의에서 약속한 것만 이루어집니다. 진짜 천상회의에 참여하고 온 성령으로 오신 분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되어 있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천상회의에 참여하고 내려온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뿐입니다.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예수 믿고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는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에서 방언, 예언, 통역을 하도록 하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교회 다닌다고 내 백성이 아니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천상회의에서 약속한 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백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가 나를 세상 죄에서 돌이키게 했느냐? 라고 고린도교인에게 물으면 그들은 꼭 “예수님 때문에 제가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하지요.
따라서 예레미야 23장에서 있었던 그 천상회의의 약속은 누가 온전히 이룹니까?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셔서 그 약속에 따라 구원 받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진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라는 것을 방언과 통역과 예언과 하나님의 계시로 이 세상에 증거하게 됩니다.
이제 좀 윤곽이 잡힙니까?
내가 방언을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약속”입니다. 길을 가면서도 생각하세요. “약속”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약속”을 잊지 마세요.
예레미야나 미가야가 천상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들이 참석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이것도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그냥 약속에 적용자가 된 것이에요.
이것은 예레미야, 미가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참된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들도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대한 내용을 예언으로 말하고, 이것을 전하게 되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신령한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생각은 ‘내 행동 여하게 따라서 천당도 가고 구원도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품성인데, 이것을 뛰어넘어서 ‘나는 육적인 자가 아니야. 신령한 것을 받아서 구원 받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 이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나타나는 희한한 기적입니다.
민수기 11장을 보겠습니다.
먼저 17절을 봅시다.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25절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70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여기에 보면, 신이 임할 때만 예언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예언이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언은 인간이 조작해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9절에 보면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가 다 예언하고 방언도 하고 통역도 하는 다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 회의록에 나와 있어요. 이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구체화 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그 신령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6-7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것은 바로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흑암에 있던 이방인들이 구원 받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거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보면,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10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12-13절에 보면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것이 바로 약속이지요.
이 약속이 고린도전서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안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루어지겠지요.
이것이 이루어지는 현상이 뭔가?
그것이 바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신령한 것에 의해서 나중에 종합 정리된 것이 뭔가?
그것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영적으로 신령하게 해석해야지 육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육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이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이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많은 말씀, 민수기, 예레미야, 이사야 등등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의 해당자가 되는 것입니다.
약속을 십微×【?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가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지요.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보통 인간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을 습득해서 아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내가 습득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들어가야 압니다.
저기 벽에 그림이 걸려 있는데, 장미꽃이 피어있고, 아름다운 별장이 있는데 이것을 밖에서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별장에서 뒹굴고 뛰놀면서 장미꽃을 딸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인간을 예수 안에 집어넣어요. 그런데 예수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밖에서 그림으로 보는 것처럼 감상할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우상이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데, 예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신분에 조금의 변화도 주지 못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니까 [헤리포터]이야기 하는 것 같아요. [헤리포터]에는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가 있는데 ---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안에서 못 박혔는데 무슨 그런 할 말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이것은 십자가 안에 들어갔는데 죽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세계가 십자가 안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울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거울 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은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세 친구를 불 속에 집어넣는 사람이 타 죽었어요.
저는 성경을 보면서 참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발견해요. 몇 가지 여담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같은 홍해를 건너는데 이스라엘은 건너고 애굽 군사는 다 빠져 죽었어요. 이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그렇게 차별할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똥, 오줌도 안 눕니까? 똑같은 인간인데.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무척 노력해도 자기 능력으로 풀어줄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잡히도록 조치한 이상 어떤 수를 써도 예수님을 풀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자기 결정으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예수님은 빌라도의 선고에 의해 죽도록 짜여져 있어요. 이것은 누가 변개할 수 없어요. 이것이 강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죽도록 되어 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도록 선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산에 계신 손무성 목사님을 아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분 이야기 들으면 참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하여튼 인생이 안 되는 쪽으로 흘러요. 교회에서도 조금만 더 참고 있었으면 당회장 될 걸 나오고 나면 그런 사실이 귀에 들어오고, 떠나고 나면 그 자리가 더 좋게 되고 늘 이런 식이랍니다.
목사님 아들 이름이 ‘요한’인?올해 수능시험 쳤습니다. 평소에 상당히 침착한 성격인데 시험 치는 날 침착하지 못했데요. 이런 것을 보면 참 재미있어요. 손 목사님은 하나님의 신령한 약속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사람 같아요. 절대로 육적인 것은 못 잡도록 하세요. 하나님께서 방해공작을 펼치는데 얼마나 철저히 방해를 놓는지 기적의 이불로 둘둘 쌓인 것 같아요. 되는 일이 없어요.
정수기 회사에서 관리직으로 잘 있다가 영업직으로 돌려서 떠나게 되었어요. 계속 두고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
물론 오 목사님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예수님이 안 죽고 싶어도 죽어야 해요. 그리고 홍해 바다에 애굽은 들어오고 싶어도 끊겨야 합니다. 왜? 거울 속이기 때문에, 풀무불이 타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곳이 바로 예수 안입니다. 이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신령한 것 때문에 내가 살았다고 고백하는 자들을 가리켜 바울은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특징은 거울 속에 있기 때문에 거울 밖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사에 어떤 글을 보면 ‘신앙은 불타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비록 너희들이 나의 육체를 태울지라도 신앙은 타지 않는다.
이러한 진짜 신령한 안목으로 고린도전서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고린도전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 안”. 이것은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 속이지요. 밖에서 보면 죽은 자로 보이고, 안에서 보면 밖에 있는 사람이 죽은 자로 보이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이 그 말씀 아닙니까?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이런 신령한 것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지, 예수 밖에 있는 자가 자신의 종교적 열성으로 인해 예수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정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너희들은 육적인 것을 사모하지 말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신령한 것이 뭐냐? 바로 복음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가 구원한 자들이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에 방언과 예언이 필요하고 통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의 차이점이 뭐냐? 방언은 하나님보고 이야기 하고, 예언은 사람보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 방언과 예언 사이에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서 방언을 예언으로 전환시키는 이것이 바로 또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약속대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책으로 읽지만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영적인 것으로 풀이해야지 육적으로 풀면 안 된다고 했어요.
방언, 통역, 예언을 한 세트로 묶으면 오늘날의 성경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있기 전까지는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신령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통역 없이는 이해가 안 되는 그러한 계시 사건들을 하나님이 은사로 주었습니다.
물론 당시 엉터리 방언들도 많이 있었어요. 따라서 이 예언을 통해서 사도의 심사를 받아야 했어요. 이것을 말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고 했지요. 여기에서 질서란 말은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방언이란 특이한 은사를 주므로써 교회라는 것이 하나님의 신령한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인간들이 만들거나 주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방언은 방언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질서를 위해서 통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방언만 해 버리면 무질서해 지지요.
다시 말하지만 무질서는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판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판단을 사도가 해야 합니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복음이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만 증거되는 것이 참된 교회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방언, 통역, 예언이라는 그 당시의 은사들이 일어났던 痼都求?
그러면 방언이 오늘날 성경입니까? 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현재 이 꽃이 꽃입니까? 하면 ‘꽃입니다.’해도 맞고, ‘꽃 아닙니다.’ 해도 맞아요. 꽃은 꽃인데 이것이 조화잖아요. 진짜 꽃은 아니잖아요.
고린도전서 당시의 방언이 오늘날 성경입니까? 라고 하면 맞을 수도 있고, 안 맞는 말일 수도 있는데, 안 맞는 말이라는 것은 성경책을 영적으로 이해할 때만 그 당시에 말하는 방언이지 성경책을 문자 그대로 본다면 방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책을 영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영이란 것은 십자가가 어느 통로로 나오는가 하는 것이 영입니다. 신령한 것이 아니면 십자가를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깊은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모른다고 했지요. 나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 바로 영입니다.
영이란 말은, 이상한 말, 괴상한 말이 영이 아니라, 십자가를 고백하면 그 자체가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십자가 밖에서 문자적으로 풀고 해석하는 것은 방언도 아니고 통역도 아니고 예언도 아닙니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하고 좀 쉽시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이 새 방언이지요?
방언이란 말은 뜻을 전달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방언인데, 누구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 뜻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전달합니까? 새 방언으로 전달하는 현실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 약속입니까? 요엘 2장에 나오는 약속이지요.
이 약속을 할 때 이 성령이 누구를 통해 주어진단 말입니까?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다고 했어요. 따라서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때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그것이 바로 마지막 때의 예언이요, 방언이요, 기적인 것입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들이, 병 고치는 일만이 아니고 모든 일들이 마지막 때에 성도에게 주어지는 예수님이 일으키는 은혜요 이적으로 등장합니다. 그 이적 가운데 제일 큰 이적이 바로 예수 믿고 자기 죄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고린도전서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보니까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자기 약속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되는 그런 영적인 사람이 등장하는 것. 이런 목적으로 그 당시에 방언이란 현상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잠시 쉬겠습니다.
광주 11-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수능시험 잘 치나 못 치나 구원 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데 이 사회가 구조주의 사회여서 주류에 서지 아니하면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의할 내용이 고전 15장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강의를 잘 들었는지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부활이 왜 있는 것입니까? ‘약속’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되고 싶어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안 죽고 싶다고 안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되어 있고, 처형하도록 되어 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활되어야 해요. 부활될 수밖에 없어요.
‘약속’속에는 부활도 들어 있고, 죄 용서도 들어 있고, 영생도 들어 있고 다 들어 있습니다. 골라잡아 선택할 것 하고 거부할 것 거부하고 이렇게 되지 않아요. 한꺼번에 다 우리 운명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시험 치나 안 치나 합격이에요. 이것을 [지옥의 하나님]에서 “구원은 무시험 합격”이라고 했습니다.
입시생들에게 대학도 무시험으로 가면 좋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시험 합격이란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수요는 적고 공급은 많기 때문에 추려내야 합니다. 공무원은 자리가 1개 비었다면 그 자리에 취직하려는 사람이 30명이면 3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1명만 합격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추려내야 하기 때문에 시험이 있지만, 천국은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곳은 천국이란 이름의 지옥입니다. 결국 이것은 종교지요. 그런데 진짜 천국은 수요 공급에 따른 경쟁이 아니라 이미 천국 가기로 생명책에 예정된 자에 한해서만 약속대로 우리 안에서 폭발하지요.
이번 부산 APEC 보고 알았는데, 성도는 천국의 불꽃놀이입니다. 온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놀이입니다. 천국이 팍팍 터질 때마다 성도 1명이 뚝뚝 튀어나와요. 하나님은 깜깜한 어두운 밤에 불꽃놀이를 하고 계신 거예요.
부활의 영생이란 것은 수요 공급의 경쟁에 의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작정한 자는 반드시 구원이 되도록 그렇게 결정을 한 거예요. 천국 자체가 밀려오는 거예요. 천국 자체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실현됩니까? 아닙니다. 이 문제가 신학적으로 어려운데, 그러면 누구한테 실현되는가? 또 예수님입니다.
전 시간에 예레미야, 이사야의 예언, 천상회의 하는 장면 그것도 예수님을 가리같? 구약에서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말씀도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다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종결됩니다.
예수님 믿고 그 이후에 무엇이 또 있는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모든 일은. 예수님 믿고 그 다음에 또 다른 것 하고? 뷔페식당에 가서 김밥 있고 잡채 있고 탕수육이 있다고 하면, 빈 접시에다 김밥 담고, 잡채 담고, 탕수육 담고 그 다음에 또 뭘 담고 하는 식으로 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쟁반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쟁반에다 우리를 담아버리지요. 이렇게 되면 그 쟁반 안에 김밥도 있고 잡채도 있고 다 있어요. 이 쟁반 자체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잡채, 김밥, 탕수육이 다 담겨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우리가 동참하다 보니까 우리에게도 부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전 15:22-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여기에서 “죽은 것 같이”라는 말은 구원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해 달라고 외쳐도 그것은 죽음에서 나오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국 가고 싶어요.’라는 외침도 죽음의 다른 양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은 계급이나 차등 없이 구원 받는 다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은 예수님이 깃발의 앞에 서서 깃대 잡은 우리의 선도자 모습으로 나옵니다. 부활의 장면에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니고 죽음의 첫 열매가 된다면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죽었다가 살아나는 첫 열매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예수님보다 먼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나사로도 있고, 야이로의 딸도 있고 하지만 이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입니다. 이런 소생은 장차 올 부활의 예고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한테 와서 예수님으로 이미 종결된 사항입니다. 이 부활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죽은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죽은 자가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들어와서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시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정죄함’과 ‘부활’을 연관시켜봅시다. 왜 연관을 시키는가 하면 고전 15장 끝에 보면 이런 것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두 자로 하면 뭐죠? “약속”입니다.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결재 서류 올려서 도장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기안 작성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요. 정죄해도 아무소리 못할 사람이에요. 우리는 지옥에 가도 따질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이란 이유 때문에 정죄함을 받지 않아요. 평생 지은 내 죄가 어디로 가 버렸습니까? 없어져 버렸어요. 이것은 교체작업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 있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서 우리는 죄 없이 되고, 주님은 주님대로 의롭게 되고 예수 안에서 놀라운 이런 변화가 생깁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소망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제 다음 재앙은 개구리 재앙. 이런 식으로 고대했겠습니까? 다음 내려질 재앙이 개구리 재앙인지 돈까스 재앙인지 아무도 몰랐어요. 그런데 개구리 재앙이 내리고, 그 다음에는 이, 그 다음에는 파리-- 이런 프로그램은 순전히 주님만이 혼자 알고 계시고 나머지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하나하나 풀어져 나오는데 그것이 10가지 재앙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마지막 재앙을 내리라고 한다면 ‘애굽 사람들 모든 지갑에 돈이 바닥나기, 혹은 애굽 사람들 집이 불타기’ 이 정도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엉뚱하게 애굽의 모든 장자 죽이기를 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여튼 하나님은 너무 엉뚱해서 우리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감춰진 비밀’이라고 하는데 --
세상에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신 가져갈 아이디어를 우리는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왜 이런 생각을 못합니까? 못 하도록 감춰버렸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조정하셔서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 사람이 없도록 만듭니다. 기껏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교회 잘 다니기, 헌금 잘 하기, 찬양대 봉사하기’ 이런 정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겨우 가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서 구원 얻는 이런 아이디어는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박사 학위 딸 필요도 없고, 직분 딸 필요도 없고, 그런데 김을수 집사님은 언제 장로 됩니까? 연세가 그쯤 됐으면 장로 돼야 되는데. 장로 하고 싶은 생각 있으면 말씀하세요. 우리 노회가 공연히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장로 되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약속에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장로 안 돼도 느긋한 것입니다. 약속에 포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이런 것이 필요치 않아요.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것도 약속입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절대로 천국에 와서는 안 될 사람들은 도저히 이런 말씀이 안 믿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놀라운 기적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안 믿어진다고 거부해요.
왜 이렇게 못 믿게 하는가 하면, 부활이란 부활 안 됨, 이것을 전제로 한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부활 안 됨을 가지고 고전 15장에서는 율법 아래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특이하게도 부활의 반대를 율법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부활을 이해하면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구나. 이렇게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정체를 드러내는데 활용되는 부활입니다.
여러분들이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이 세상을 정죄해야 합니다. 세상 전부를 지옥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조주의 사회에서 고난 받겠지요. 그러나 고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내 속에 있는 부활의 능력이 그렇게 시키니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지요. 그런데 이것조차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단 말이지요.
부활은 ‘너 살릴게’가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를 고발하는 일을 하게 합니다. 아직도 부활의 느긋함을 이해 못하고 죽는 것이 무서워 벌벌 떠는 사람을 고발하는 입장에 서라고 우리를 부활 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부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육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흙에 속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했고 흙에 속했다는 말은 재료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연약함, 허약함을 말합니다. 마귀가 공격하면 눌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함을 육과 흙으로 보고 있습니다. 죽음에 얽매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쉽게 해 봅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거치고 난 부활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이미 거친 사람이 됩니까? 죽음까지도 이미 거처 간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잖아요.
죽음을 통과하고 난 후의 완제품을 우리가 받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는데,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니까 이 땅에서 죽음의 혹독함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부활에 참여된 것을 기쁨으로 느끼게 합니다.
죽음은 이미 거쳐 온 것이기에 충분이 죽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느긋하게 부활되었다 이 말입니다. 죽어도 상관없는 느긋함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가 부활을 아는 자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흙에 속한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속한 영광과 하늘에 속한 영광이 다릅니다. 별의 영광과 달의 영광이 다르듯이. 지상의 영광과 하늘의 영광을 비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5장 55절을 봅시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 재미있지요?
영희야! 영철아! 이것은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사망아! 사망은 인격체가 아닌데 사망아! 하고 부르고 인격체 다루듯이 하지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여기에서 ‘사망아!’ 하는 것은 ‘율법아!’하는 뜻입니다. 율법이 사망을 조장하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아! 혹은 사망아! 네가 지금 어디를 겨냥하고 있느냐? 이미 우리는 거쳐 왔는데.
그러니까 타깃이 두게 있는데 하나는 죽음의 타깃(A)이고 하나는 부활의 타깃(B)이라고 하면, 성도는 죽음을 거쳐서 부활 속에 있거든요. 그런데 율법은 활을 들고 어디에 쏘는가 하면, A타깃을 향해 쏩니다. 그러니까 부활 쪽에 있는 사람이 ‘사망아! 네가 지금 어디를 향해 쏘느냐?’ 하고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가 A쪽에 있으면 아프겠는데, 이미 사망을 지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나와 함께 사시는 분이 부활이기 때문에 B쪽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공격을 해도(너 간음했지! 살인했지! 거짓말 했지! 등등)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어요.
‘목사님! 그 말을 믿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왜 없는가 하면, 실제로 자기는 육이고 육은 안 죽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육에서 나오는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어간다는 말은 아파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죽음을 느끼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은 모두가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이것은 개,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살고자 하는 본능을 자기 힘으로 꺾어서 부활로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내 느낌상 여전히 살고 있지만 성경을 보니까 이미 우리는 죽었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더라는 것이지요.
마치 내가 저녁 안 먹으면 배고프듯이 믿고 어쩌고 할 것 없이 확실한 것처럼, 예수님 말씀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그 말씀이 자연스럽게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육의 떡보다 영의 떡이 더 그리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일 수 없고 숨길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집에 누워서 ‘이제부터는 예수 안 믿고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도, 이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면, 비록 내가 살려고 애를 쓰도 그것은 허상이고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내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어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오지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누가 훔쳐갈까 봐 꼭꼭 감춰 두었어요. 누구도 손 못 대도록.
지금 현재의 우리 목숨은 버릴 생명이에요. 버려도 괜찮아요. 거지 나사로가 죽었지요. 없어져도 괜찮다고요. 거지로 죽어도 괜찮아요. 귀한 생명이 있다면 VIP로 모시고 갈 테니까.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5-58)
이 말씀은 ‘이제 됐다’ ‘안심 하라’는 것입니다.
15장 2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확실한 ‘약속’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하면서도 무슨 생각이 자꾸 드는가 하면, 교회 이렇게 온 분들에게 말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봉투에다 천만원씩 넣어서 나눠드리면 얼마나 기뻐할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돈은 안 주고 말만 나불대는 내가 일종의 사기꾼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람들은 지금 돈이 그리워서 왔는데 나는 말만 하고 돈은 오히려 내가 받으니 일종의 사기성이 농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그럴 경우에도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고 사도바울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세요.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15:2)
돈 천만원 가지고 구원을 얻을 것 같으면 그냥 천만원 줘버려요. 수십억을 줘도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구원 되도록 해야지요. 그것은 복음이지 돈으로는 안 돼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돈이 10억 있는 사람도 있고 1억 있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점이 있는데, 10억 있어도 한 시간 후에 죽을 수 있고 100억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와 상관없이 한 시간 뒤에 죽을 수 있어요.
죽음에는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논할 때는 죽음을 기초로 해서 논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인간이 왜 돈만 챙기느냐? 죽어가는 인간이 왜 교회 안 나오는가? 죽어가는 인간이 왜? 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만 따라다니는 줄 알지 죽음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몰라요. 이런 자를 잠언에서는 ‘어리석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자가 어리석은 거예요.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쌀이 창고에 쌓여 있어서 더 넣을 공간이 없어요. 1인당 쌀 재고량이 20년 전보다 1/4로 줄었습니다. 쌀을 먹지를 않아요. 새벽 1시까지 비디오보고 자는데 아침에 밥맛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우유나 빵으로 때우지.
쌀 소비를 안 해요. 그런데 농민이 쌀 생산한 것에 대해 정부에서 보조금 지급하면 국제 협약에서 입도 못 뗍니다. 국제 협약에서 정부가 쌀 보조금 못주도록 해 놓았어요. 게임을 하면 공정한 규칙에 따라 해야지요. 우리나라도 농민에게 쌀 보조금 안 줄 테니 너희나라에서도 주지마라고 서로 협약했어요. 서로 이 약속을 지킬 때만 우리가 휴대폰이라도 하나 더 수출할 수가 있는 거예요.
농민 인구가 豁?7%도 안 돼요. 나머지 93%가 농민들 살리기 위해 있습니까? 농민들한테 쌀 보조금 지급하면 도시 빈민들이 얼마나 더 어려워진다는 것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대구 칠곡에 있는 어떤 농민은 벤츠타고 다닙니다.
조류독감 유행하면 치킨집 안 된다고 데모하고, 비브리오 균 돌면 동해안에 횟집 망합니다. 그러면 나라에서 횟집 하는 사람 다 보조해야 합니까?
이 세상이란 곳은 어차피 죽도록 되어있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죽음을 통과한 부활이 아니라 이 죽음을 통해서 죄를 알라는 것이지요.
성도가 이 땅에서 처절한 죽음을 맛보면서, 성도로 하여금 ‘네가 무슨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야했던가’를 아는 것을 가지고 부활의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지요. 율법이 날아와서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면, 여기도 맞고 저기도 맞고 천번 만번 맞아도 당연한데, 지금은 이미 부활 안에서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죄는 죄대로 온 몸으로 느끼면서 절실하게 죽음을 절감하면서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믿고 감사하면서 찬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15장 45절을 보겠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구절 보니까 실로암교회가 생각나요. 옛날에 이 구절 강의할 때 그 장소에서 했거든요. 그 때 기억나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화장실 ---
여기 보면, 왜 산 영이 되었다고 하고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살려준다는 말은, 아담은 살아있음의 최초지요. 살아있어서 문제없다면 살려준다는 말이 동원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살아 있는데 이 사람이 뭔가 잘 못 되어서 죽음으로 가니까 살려주는 영이 없으면 어떤 인간도 아담에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43절에 “욕된 것”이란 말이 나오는데, 욕되다는 것은 천하다는 것입니다. 무가치하다는 뜻입니다. 42절에는 “썩을 것” 43절에 “약한 것” 이런 것은 전부 첫 사람 아담의 것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도 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약하고, 썩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뭐 또 희망을 갖느냐? 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이러한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이 행한 것에 대해서 이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 당신이 돈을 줬어, 나에게 뭘 준 것이 있는데?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근원적으로 우리는 살려내는 분입니다.
그리고 15장 초반에 보면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있지요.
5절에 보면, 게바에게 보이시고, 12제자에게, 그리고 500여 형제에게, 그리고 바울에게도 보였다고 하지요.
여기에서 상당히 어려운 논쟁거리가 하나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지요. 부활 후 그 부활된 몸이 십자가 죽기 전의 그 몸으로 돌아간 몸입니까, 다른 몸입니까?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 있지요.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만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다시 나왔지요. 그 때 그 나사로와 죽기 전의 나사로가 같은 몸입니까, 다른 몸입니까?
같은 몸입니다. 그러니까 동생들이 알아보고 주위 사람들이 알아봤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도 이것이 해당 되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심한 논쟁거리에요. 왜 논쟁거리인가 하면, 영, 육, 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그들의 논리가 다 깨질 판이에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다른 몸이라면 영1, 영2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3분설이 아니고 4분설이 되지요. 육도 육1, 육2가 되어야 합니다. 혼도 혼1, 혼2가 되고. 이렇게 되면 6분설이 됩니다.
영, 혼, 육 이렇게 나눌 때는 서로 전혀 다른 요소가 있을 때 끊을 수 있어요. 논리를 전개할 때 끊어지면 그 끊어진 것을 책임을 져야 해요. 예수님은 죽을 때 육은 보내고 영혼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은 죽었어요. 그러면 부활은 뭐냐? 육적인 부활이 되려면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도 따라와야 해요. 육이 따라오면 그 전의 육과 같은 육이라면 예수님께서 뭘 통과 못합니까? 문을 통과 안 했잖아요. 물 위를 걸은 적은 있지만. 예수님께서 벽을 통과하고 이런 적은 없었잖아요.
사람의 몸이 딱딱한 금속이나 물질을 뚫는다는 것은 에너지 반발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못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통과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에 귀신일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후에 문이 닫혔는데 제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귀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귀신이란 것은 영혼만 있는 것을 귀신이라고 합니다. 육체가 없는 것이 귀신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한 것이 아니고 그냥 귀신으로 떠도는 것이지--
진짜 육 같으면 뚫리지 않아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만든 영, 혼, 육에 맞추다보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귀신이라고 합니다. 귀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이 전과 동일한 육 같으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안면이 있기 때문에 엠마오로 내려갈 때 예수님을 다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실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더란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마리아가 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 갔을 때에, 동산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리고 천사일수도 있고.
그러면 무엇부터 규명되어야 하는가 하면, 천사는 육이 없잖아요. 토마스 아퀴나스나 이런 학자들은 그렇게 말했어요. 육이 없는데 어떻게 동산지기가 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천사 3명이 찾아왔을 때, 육의 모습으로 찾아왔잖아요.
이런 것을 영, 육, 혼 3분설로 이해를 하려고 하니까 가르치는 사람도 무리수를 두고, 듣는 사람도 골치 아프고 --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부활이란 죽어서 소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활은 지상에서 측정할 수 없는 다른 법칙과 원리가 통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떡을 잡숫고, 문이 닫혔는데 들어오는 것은 예수님이 육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귀신이 아니고, 세상과 다른 부활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왜 자꾸 예수님을 영, 혼, 육으로 이해하려고 하는가 하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문을 통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부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을 보면서 라이벌 의식을 느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 따라잡으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나는 죽어야 마땅한 인간인데 예수님처럼 부활시켜 주신다니 너무 감사하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끝내면서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령에 의한 신앙생활은 부활신앙이 있으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대단히 작고 보잘 것 없게 만듭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보면, ‘인생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부활은 예수님의 대단함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잘 것 없어요. 우리를 아주 작게 봐야 돼요.
자신을 개미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개미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별 큰 고민거리가 아니고 근심거리가 아닙니다.
부활신앙이란 것은 자신을 더욱 더 작고 보잘 것 없게 만들어요. 그대 앞에서 나는 한 없이 작아져야 해요. 사람이 작아져야 정상인데, 이것이 신앙생활인데, 반대로 자신이 커지면 그 속의 근심도 따라 커집니다. 걱정도 커지고 두려움도 커지고 함께 커집니다.
많은 주부들이 이혼하고 식식하게 잘 삽니다. 그런데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혼하면서 난리를 치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데, 대부분의 이혼한 가정의 자식들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드라마에 나오는 아이들은 부모가 이혼한 후에 문제아로 나와요.
부모가 이혼하면 아이는 양쪽 집에 다 다니면서 용돈 타고 하면 됩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적응력이 강해서 그래요. 아무 문제없는데 너무 사건을 심각하게 보는 거예요.
너무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게 되고, 기도도 씩씩거리면서 오래 하게 되고, 뭔가 신비로운 것을 봐야 되고, 뭔가 획기적인 것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되면 성경이 주는 자유가 ‘약속’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약속이 되어버려요. 이것은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부활장(고전 5장)을 끝내면서,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개미도 그냥 개미가 아니고 죽은 개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나를 주님이 사용하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