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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하십시오
지난 주, 딸 현아의 일로 도중하차했던 대간 차갓재로 가기 위해
문경시 점촌의 찜질방에서 밤을 보냈다.
문경시의 다운타운(down town)은 문경읍이 아니고 점촌이다.
1995년 점촌시와 문경군이 통합, 문경시가 됨으로서 점촌시의
중심가가 새 문경시의 심장부가 되었단다.
차갓재의 진입점인 생달리행 버스는 동로면에서 환승해야 한다.
새벽같이 동로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북상 때 식중독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벌재 ~ 문경간을 진주
산악회의 도움을 받을 당시만 해도 볼 품 없는 지방도로에 불과
했는데 지금은 어엿한 59번 국도다.(백두대간 17회, 18회 참조)
생달리행 버스를 타려면 일각이 여금인 이른 아침의 1시간여를
기다려야 한다니 난감했다.
택시를 탈까 했으나 주차중인 택시의 연락번호는 먹통이었다.
hitch-hike는 통행 차량을 전제로만 성립되는데 쓸쓸하기 그지
없는 아침의 지방도로에서 무엇을 향해 손을 들어본단 말인가.
승용차를 상대로 손 든 것은 내 hitch-hike 불문율을 깬 것이다.
2남 1녀의 승용차는 내 배낭을 담기 위해 트렁크를 열어야 했다..
이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얼마 가지 않아 방향이 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구 동성으로 나의 목적지까지 갔다가 되돌아
가자고 합창을 했다.
그리고는 차갓재 입구(큰 차갓재와 작은 차갓재 갈림길), 차량
진입이 가능한 마지막 지점에 나를 내려놓았다.
성불하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답례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 뿐이었다.
약초 채취에 나선 그들은 불도(佛徒)이기 때문에.
무수한 편승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차량에는 염주와
묵주, 십자가가 있었다.
특히 불도들의 헌신은 나를 반백년 훨씬 전으로 데려가곤 했다.
20대 초반의 비구니 금련(錦蓮)이 한 소년에게 쏟은 정성은
종교를 뛰어 넘은 인간애였다.(우리의 이야기들 210번 글 참조)
거동을 하지 못하는 암자의 소년에게 수시로 찾아와서 위로와
격려를 주던 목사의 아들 Y형(훗날 W 대학교 총장)을 대면할 때
마다 금련은 승려가 아니고 누님같았다.
늙은 山나그네의 한 斷想
한 기독교재단의 대학에 몸담고 있을 때 나는 불교학생 서어클
(circle)활동을 묵인하고 음성적으로나마 지원했다.
아마도 그 비구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본래 예수의 주문은 단호했다.
유유상애(類類相愛)를 지양하라고 했으나 여전히 끼리끼리다.
나는 교직원 신규채용 때의 신도(信徒)조건을 삭제해 버렸다.
항의와 비판이 잇따랐다.
나는 그리도 무력하고 자신이 없느냐고 맞받았다.
신앙이 곧 능력이라는 사고는 맹신도들의 착각이거나 타기해야
할 독선이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며 요즈음 말 많은 스크린 쿼터
(screen quota) 식으로 보호막 속에서 안주하려는 사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유능한 비신도를 크리스쳔으로 교화시킨다면 일석 이조
아니냐는 일갈로 응수했다.
차갓재
대간 차갓재에 오른 후의 걸음은 성큼 성큼했다.
새목재의 식중독도 옛 일이었을 뿐이다.
차갓재부터 조령 삼관문까지는 백두대간 한 중간이라고 서로
다투는 형국의 안내판들이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미산 직전의 눈물샘 물맛이 유난히 시원했다.
지금의 大美山으로는 눈섭(黛眉) 아래의 샘을 이해할 수 없다.
사계절 마르지 않고 종주자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는 샘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黛眉山으로 환원하면 안될까.
(눈물샘의 유래는 더불어사진자료실 592번 사진에 있슴)
위/ 눈물샘
아래/ 대미산
부리기재에서 잠시 중평리 쪽을 응시했다.
그 밤의 극과 극의 일이 감회가 새로와 남하중에 꼭 찾아보리라
다짐했건만 기회를 잃고 말았다.
지난 주에 그 앞으로 차를 타고 통과했지만 딸 현아의 일로 인해
겨를이 없었고 오늘도 하늘재에서 기다리고 있을 바부산과의
약속 때문에 중평리로 내려설 수 없으니.(백두대간 17회,우리의
이야기들 162번 글 참조)
중평리 아래 갈평리 주변의 산들이 또 수난중이다.
901번 지방도로 저지대 대부분이 수중에 잠기게 되었기 때문에
새 길을 위해 산 허리를 짜르고 있다는 것.
이 일대가 땜이 된단다.
1.000m대의 너덜지대 지나 꼭두바위봉 이후는 800~900m대의
아기자기한 능선이 서북쪽을 향해 속도감을 높인다.
만수봉 갈림길 관음재를 통과한 후로는 안도하게 되었다.
17시 30분의 약속 이행이 확실시 되었으니까.
우여곡절 있는 하늘재의 밤
통화불능지역이 많은 구간인데 포암산 정상에서는 하늘재의
바부산과의 통화가 가능한 것이 다행이었다.
바부산은 서울의 한 산악전문 서적 출판사(廷相) 사장이다.
대학시절 왕성하게 한 산악부 활동이 동기가 되었을까.
전망이 밝지 않은 우리 출판 현실에도 외길을 가고 있다.
내가 백두대간 종주를 준비하는 중에 알게 된 이후 내게 많은
자료로 도움을 주고 있다.
산악부 활동시기 하늘재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단다.
그와 하늘재에서 만나 다음 날 조령 삼관문까지 진행하기로
약속한 당초의 날은 지난 주였다.
그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파약되었는데 나 또한 딸의 일로 도중
하차가 되고 말았다.
결국 약속은 부활되었고 약속대로 그가 먼저 하늘재에 도착하여
포암산에서 내려오는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포암산 정상
그러면 그렇지!
시원한 막걸리에 대한 부푼 기대를 가지고 하산했을 때 아무렴....
바부산의 손에는 차디 찬 막걸리가 들려 있었다.
거푸 마셨다.
우리를 위한 멋장이 집(천막)이 들어서 있고 한 사람은 저녁식사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문경시청의 김무제.
지방 산악회로는 가장 모범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하고 싶은
문경 <산들모임>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한 분이다.
바부산과의 인연으로 우리를 위해 봉사중인 그다.
중평리 사건을 낳게 한 한 시간여의 실랑이(백두대간 17회 참조)
당시 폭발 직전의 짜증이 팽배했던 하늘재가 아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것은 달디 단 공기다.
막걸리와 소주는 화수분이다.
먹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지 않는 밤이었다.
우리를 위해 특근(?)을 한 하늘재산장의 윤성영 이미수 부부가 더욱
분위기를 잡아 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