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에 러시아의 마지막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 그리고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왼쪽부터 장녀 올가, 마리, 니콜라이 황제, 황후 알렉산드라, 아나스타샤,알렉스,타치아나 왼쪽 마리부터 오른쪽 알렉스까지 거의다 금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죽어서 매장되었다.)
▣ 아나스타샤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독일 헤센의 공녀였던 황후 알렉산드라와 그들의 아이들.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의 사이에는 장녀 올가를 비롯하여 타치아나와 마리,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의 네명의 딸과 황태자이자 유일한 아들인 막내 알렉세이의 5자녀가 있었다. 정식이름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프, 러시아의 황녀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그녀는 1901년 6월 5일 러시아 황제인 짜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사이의 네 번째 딸로 태어났다. 땅딸보에 맵시도 없고, 가장 품위가 없다는 실례되는 말을 듣기도 한 이 황녀는 대신 첫째가는 장난꾸러기로도 알려져 있었다. 18세가 되던 1918년에 있었던 로마노프의 일가의 처형이후 다른 가족과 함께 공식적으로 나타난 바 없다. 20년대이래 유럽에서는 로마노프의 생존자를 사칭하는 이가 많이 나타났는데(대개는 사기꾼으로 판명이 났지만), 이 중 가장 애용(?)되었던 이름이기도 하다.
* 페테스부르크의 제국령에서부터 얼음덮힌 시베리아대륙과, 아시아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다스렸던 러시아제국은 300여년간 로마노프왕실에 의해 다스려 졌다. 그러나 다른 유럽국가와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왕족간 내부분쟁, 정치적인 갈등, 다른나라와의 전쟁 등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로마노프 황실은 19세기 말까지도 절대권력을 유지했고, 화려하고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다.
* 그러나 이런 로마노프의 영광도 짜르 니콜라스 2세로 끝을 맺었다.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남편이었던 니콜라스 2세는 정치적으로는 그리 유능한 리더는 아니었기에 많은 정치적인 중유한 문제들을 신하들에게 미루었던 것이다. 권력이 남용되었고, 국민은 왕족의 부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황태자인 알렉세이를 고치기 위해 왕궁으로 초대되었던 사제 라스푸친이었다. 1차대전으로 황제가 비운 궁에서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라스푸친은 1916년 암살될 때까지 독단적인 조언과 권력을 휘둘렀고, 러시아는 점점 혼란속으로 빠져들었고,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으로 마침내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스 2세는 퇴위하였다. 전황제와 황제일가는 이후 찰스코의 궁전에 연금되었고, 이후 1년여 연금생활을 전전하던 황제와 일가는 다음해인 1918년 7월 시베리아의 에카체린부르크에서 처형되었다 -공식적으로는.
* 그러나 일가의 실종이후 백계 러시아의 조사관들과 유럽각계에서 보낸 사설 조사관들에 의한 수년여의 현장조사와 검증에도 불구하고, 시체 하나 찾지 못한채, 몇군데의 총흔적과 피흔적, 불타버린 의상이나 보석류를 단서로 발견하는데 그쳤을뿐인 미스테리로 남았다. 20년 공식공표된 황제일가의 처형설 이후에도 일가의 전원, 혹은 몇 명이 살아남아 있었다는 증거나 가설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
* 로마노프 실종이후 유럽각지에서는 로마노프의 생존자를 사칭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우선 얼굴이 잘 알려져 있는 황제와 황후보다는 일가의 자녀들이 많이 도용되었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아나스타샤가 가장 인기있었다. 아나스타샤를 주장한 여러 사람들 중 '안나 앤더슨'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 진 한 여성의 경우가 특히 눈을 끄는데, 1920년 베를린의 한 다리에서 투신하려다 발겨된 20여세의 여성은 이후 몇십년간이나 이어진 아나스타샤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 어제밤 9시, 20세정도의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반틀라 교에서 란트벨 운하로 뛰어들었다. 여성은 경찰에게 구조되어 류초우 스트라세의 엘리자베타 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녀의 소지품에서는 신분을 표시하는 서류나 귀중품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또 본인은 신분이나 자살의 동기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다.
⇒1920년 2월 18일 베를린 경찰의 발표
* 발견된 여인은 6주간 입원하는 동안 자신의 신상에 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달돌프 정신장애자 요양원에 입원한채 공식적인 검사에 응하지 않는 완고한 태도로 2년여를 지냈다. 1922년경 같은 요양원에 있던 환자들에 의해 그녀가 황족 - 아나스타샤라는 소문이 퍼졌고, 이어서 그녀자신도 아나스타샤 황녀임을 인정했다. 이후 각계의 많은 방문객이 생존황녀의 진위여부를 가늠하려 하였고, 1928년이후 니콜라이 황제의 어머니인 마리아 황태후가 살고 있던 코펜하겐의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진 이래 1970년까지 단계적으로 계속되었다.
러시아 황실의 유일한 생종자로서의 아나스타샤의 존재는 러시아의 망명귀족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로마노프일가와 혈연관계가 있는 유럽각계의 귀족과 왕족들의 예민한 문제이기도 했으므로, 영국과 독일의 유력한 귀족들이 그녀가 러시아의 황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재판비용으로 많은 재산을 썼으나, 결국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그녀역시 승소하지 못했다.
¶ "폐하의 가족들 중, 앞으로 2년까지 살아남을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 백성의 손에 의하여 남김없이 살해될 것입니다."
⇒1916년 12월 라스푸친이 황제에게 보낸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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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안나 앤더슨으로 이름을 바뀐 그 여인은 처형이 있은 후 2년 뒤인 1920년 2월 17일 베를린에서 자살을 하려고 뛰어 내렸으나 구출이 되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신분증이 없었고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자 보호시설로 보내졌다. 1921년이 되자 그녀는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라의 시녀였던 한 여자가 그녀를 방문했을때 아나스타샤는 담요밑에 숨었으니 시녀는 그녀를 협잡군으로 가짜라고 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믿었으며 1922년 그녀가 보호시설에서 나오게 되자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나중에 그녀는 그녀가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지를 설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총검에 찔리기는 했지만 총검이 무뎌서 죽지 않았으며 도망쳐 나오다가 Tschaikovsky라는 군인에 의해서 도움을 받아서 루마니아로 옮겨왔고 비록 그녀의 말이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와 결혼을 했으며, 그가 거리에서 싸움으로 인하여 죽게 되자 출산을 하여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혼자가 그녀는 베를린으로 와서 그의 aunt인 Irene 황녀를 만나려고 했다. (여기서 그녀를 부정하는사람은 왜 루마니에에서 그녀의 부모의 사촌인 마리 왕비를 찾지 않았으냐고 질문한다.) 그녀는 아이렌이 사는 궁전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서 들어가지 않고 자실을 택했다고 말했다. 아이렌 황녀는 결국 아나스타샤를 만나보았으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아나스타샤를 닮았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돌아와서 나중에 아나스타샤와 매우 닮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이렌 황녀의 아들인 시지스문트는 아나스타샤와 옛 친구였는데,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는 그녀에서 여러가지 질문을 보내서 답변을 받아보고는 그녀가 아나스타샤가 맞다고 믿게 되었다. 자신이 아나스타샤로 주장하는 그녀는 스스로를 안나 앤더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황제의 친척들의 주장은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다. 많은 경우에는 앤더슨이 진짜라고 하였고 또한 다른 많은 경우에는 그녀가 가짜라고 단정지었다. 유명한 인류학자의 한사람인 Dr. Otto Reche는 그녀와 아나스탸샤의 사진을 판독하고 두 여자가 동일인이거나 일란성 쌍둥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시험을 지리하게 늘어놓는 것보다는 이 경우에는 영화를 한편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람들은 안나 앤더슨이 정말로 가짜였다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예를들어 아나스타샤의 uncle인 어네스트가 1916년 러시아를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네스트는 이 방문을 극구 부정했다. 그러나 kaiser의 양아들은 1966년 어네스트가 비밀리에 여행을 했었다고 증언을 했다. 만약에 이것이 맞다면 어떻게 안나 앤더슨이 알 수 있었을 것인가? 어네스트는 그녀가 폴란드의 공장 근로자였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녀는 안나 앤더슨니 나타나기 직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앤더슨을 Schanzkowska라고 증언한 사람이 매수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앤더슨은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녀는 가끔 거만하고 혹은 지나친 요구를 하기도 했으며, 가끔은 사람들을 공격하고 벌거벗은채로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녀가 가족이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를 가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러시아말을 못한다는 것을 지적했으나 그녀는 러시아에서 연설했을때 러시아말을 이해했고 다른 나라 말고 답변했다. 그것은 그녀가 자기 가족을 죽인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으로 생각이 되었다. 그녀는 영어 독일어, 불어를 잘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폴란드의 공장 근로자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녀는 여러 곳에 상처가 있었는데 이것인 총검에 찔린 것이라고 했으나 반대자들은 공장에서 수류탄에 의한 사고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앤더슨은 1938년에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려는 재판을 했는데 이 재판은 1970년까지 끌었다. 이 재판에서 많은 사람이 아나스타샤를 진짜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그녀가 아나스타샤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나스타샤임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로도 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앤더슨이 아나스타샤가 맞다고 확인하였다. 그녀의 마지막 15년은 미국의 부호인 존 마나한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다가 1984년 폐렴에 걸려 화장되었다. 그녀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정말로 아나스탸샤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그녀의 머리카락과 조직 시료로 부터 DNA 검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그녀는 아나스타샤가 아니라고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아나스타샤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시체가 화장되었기 때문에 DNA 검사는 시체가 아닌 그의 유품에서 채취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더 최근에는 러시아에서 그들이 묻혀있던 탄광에서 아나스타샤의 유골을 확인하였다는 논문이 나왔다. 개인적인 생각을 묻는다면 아나스타샤는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혈우병 환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유전자 조사는 매우 간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료채취에 다른 사람과 오인될 가능성을 말하고있지만 그런 가능성은 실제적으로는 매우 적다고 보이며, 러시아에서의 연구도 무시할 성격으로 생각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