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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게 즐거움 넘치는 신수도 여행
오후 5시 40분 우리는 자동차와 함께 신수도행 배에 올랐다. 보통의 연안 여객선들은 몇 군데의 경유지를 두고 운행을 하지만, 신수도행 여객선은 개인이 운영하면서 삼천포항과 신수도를 하루 몇 차례 오가고 있다.
신수도의 가구 수가 200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상주인구라야 뻔하다. 여름철에는 관광객들이 많겠으나 오늘 같은 늦가을엔 우리처럼 낭만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을 제외하면 관광객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배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승용차 4대를 실을 수 있고, 선실과 갑판을 포함하면 수십 명은 족히 탈 수 있을 것이다. 요금은 어른은 1인당 1,500원이고, 자동차는 산타페의 경우 10,000원 이란다.
자동차를 갑판에다 세우고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공간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는 아시안게임 중계방송을 하고 있고, 우리 7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신수도 주민들인 것 같았다. 학교를 다녀오는 학생, 물건을 내다 판 듯 시장을 다녀오는 할머니, 그 외에도 열 댓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시내를 다녀오고 있었다.
후에 본 것이지만 신수도엔 보건진료소, 횟집, 초등학교, 교회, 모텔 등이 하나씩 보였다. 그러다 보니 고기잡이를 하거나, 밭농사를 하는 일 이외의 집 박에서의 일상생활은 배를 타고 바다건너 삼천포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을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린 우리들은 친구네 집을 향했다. 여기서 친구라 말하는 사람은 지금 여행을 같이하는 친구의 친구로서 신수도가 고향이라서 신수도에 예전에 살던 집이 있고, 지금은 창원에서 건설회사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우연한 기회에 우리가 부부동반으로 신수도에 나들이를 간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자신의 집을 이용하라고 하면서 동행을 하게 되었다.
차에서 마트와 어시장에서 서둘러 구입하였던 음식물들을 꺼내들고 친구네 집으로 들어섰다. 집에는 사람이 살진 않지만 한번 씩 들러 청소도 하여 그런대로 깨끗하고 아늑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배를 채우고 밤낚시를 나서 볼 계획이었다. 여자들이 주방에서 옷을 넣은 닭죽을 끓이는 동안 남자들은 마당에 자리를 깔고 어시장에서 사온 키조개며 조가비, 소라 등 여러 가지 해산물을 숯불을 피워 구워 먹고 있다.
그사이 여자들은 튀김 닭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으로 합석을 하여 조개류를 같이 먹었다. 조개들은 어시장에서 직접 사 온 것들이라 싱싱하여 맛도 좋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빈 소주병을 늘려갔다.
닭죽으로 저녁을 먹은 후 여자들은 집에 남고 남자 넷은 낚싯대를 멘 채 가까운 방파제로 나갔다. 썰물이라 물때가 좋지 않아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날씨도 그다지 차지 않고 어둠이 깃든 바다와 멀리 창선대교의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다보며 소주잔을 기우리는 멋과 맛도 나쁘지는 않았다.
열두시가 가까워서야 낚시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자들은 자리를 깔고 누웠나보다. 부엌에서 닭고기 건더기를 가져다 방안에서 소주파티가 벌어졌다. 말 그대로 진솔한 세상사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친구사이고 나이도 먹은 만큼 빼고 더할 것도 없었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언제까지 마셨는지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음 날 한 친구가 자신이 3시까지 마시고 7시에 일어났다고 하여 제법 늦게까지 시간을 보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어젠 제법 많이 마셔댔었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니 이상하게 속이 편하였다. 아마도 좋은 환경에서 좋은 안주, 마음편한 친구들과 함께하며 술을 마셔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좋은 아침공기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항구는 조용하고 햇살이 제법 따스하게 비쳐나고 있었다. 능선을 올라서니 멀리 건너편의 화력발전소가 보이고, 가까운 바다 배에서 내린 해녀 한명이 물질을 준비한다. 아침엔 물이 매우 차가울 텐데 사는 것이 다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섬에는 숲은 별로 없다. 산이래야 높지 않고 거의가 밭을 일구어 봄엔 고구마와 호박을 많이 심고, 가을엔 배추를 주로 심는 것 같다. 바닷가 공터는 물론이고, 길가며 심지어 밭에도 고구마를 잘라 햇볕에 말리고 있다. 취급 정도로 보아 식용은 아닌 것 같고 녹말공장에라도 보내려나.
집으로 돌아오니 여자들은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남자들도 코를 드르렁 대며 자고 있다. 나는 차를 몰고 아랫마을로 향하였다. 마을은 몇 가구가 안 되어 보이는데 가는 중간에 제법 많은 할머니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들고 선창가를 향하여 가고 있다. 어디를 가시느냐고 물으니 삼천포에 간단다.
아랫마을을 지나오며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를 한명 태웠다. 몸이 아파 매일 삼천포 병원을 가야한단다. 차에서 내려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는데 조금 밖에 태워드리지도 못하여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니 섬이라고 무조건 낭만만 찾을 것은 아닌 것 같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람들을 깨우는데 두 명은 아침 낚시를 떠났다한다. 전화를 하니 낚시가 잘 안되어 돌아오는 중이란다. 아침밥을 하는데 모두가 부엌에 들어선다. 그래서 실격이 부족한 사람들은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너도 나도 서로들 자신들이 하려고 나서는 모습이 고맙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열시가 조금 넘어 산책을 나섰다. 어젯밤에 낚시 갔던 곳을 지나 다시 아랫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이 섬엔 윗마을과 아랫마을 두 개의 마을이 있다. 바닷가 매립지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군데군데 낚시를 하였는지 시멘트 뚝 위로 올라선 흔적이 있었다.
아랫마을에 도착해서 멸치 가공공장을 살펴보았다. 지금은 가공을 하지 않고 있는데, 조금 아래쪽에 있는 두 개의 죽방에서 잡은 멸치를 가공하는 장소이다.
마을 근처엔 채소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같은 배추라도 햇볕을 많이 받고 따뜻한 바닷가에서 자란 것들이 고소한 맛이 난다. 공터도 많아 노는 땅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에선 손이 모자라고 농사가 수지맞는 일이 아니라서 묽혀두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몽돌해수욕장과 예전 양식장을 하던 곳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산길을 넘어 해안가 초소부근에서 바닷가를 타고 올라오기로 하였었다. 이곳은 그래도 제법 큰 나무들이 서있고, 숲도 제법 울창하였다.
얼마지 않아 해안초소가 있던 곳이 나타났다. 그러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아름다운 해안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이 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지개를 켜보고 고함이라도 질러보고 싶었다. 바위틈에는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미끼와 쓰레기가 우리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였다. 바위 끝자락으로 내려서자 눈에 익은 것이 보인다. 얼마 전 1박 2일 프로그램에서 보였던 거북손과 따개비였다. 그 땐 텔레비전에서 그 곳에만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곳에도 있다니...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고, 칼을 꺼내어 몇 개를 떼어내었다. 사진도 찍고 경치를 즐기다가 어느 새 따개비와 거북손을 따는데 정신들이 팔렸다. 점심때 된장국을 끓여먹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조개잡이가 해안선을 따라 나오며 계속 이어졌다. 때론 바위가 앞을 막아섰지만 어느 새 바위 타는 것도 재미를 느꼈다. 조개잡이에는 바다고동과 작은 소라도 있었다. 마지막엔 파래와 다른 해조류도 땄다.
다들 재미있고 신기한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잡다보니 제법이나 많이 잡았다. 아름다운 몽돌해안을 걸었다. 모래가 매우 부드럽다. 여름철엔 텐트를 칠 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단다.
다시 밋밋한 산길로 올라서니 마치 우리가 오늘 올레 길 나들이를 나온 기분이다. 시원스레 바라다 보이는 바다를 끼고 걷는 것이 재미를 더했다. 이야기하며 걷다보니 어느 듯 한시가 가까워졌다.
이젠 점심을 해 먹자며 산을 내려온다. 지나오며 이곳에 사는 또 다른 친구네 밭을 몰라 남의 밭에서 무와 배추새끼를 조금 실례했다. 동네 출신인 창원친구는 그 정도야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하지만 미안했다. 점심때 우리가 채취한 해산물과 어제 남은 조개로 된장국을 끓이고 회를 먹자면 무와 배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라와 점심을 하고 있는데 이 마을에서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고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육지에 집안일로 출타를 하였는데, 친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정해진 배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삼천포에서 소형 배를 대절해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후 그 친구가 찾아왔다. 손에는 문어며, 세발낙지, 물메기, 장어 등 여러 가지 고기를 잔뜩 사가지고 왔다. 우리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가 잡거나 사 가져온 것들도 많은데 또 사들고 왔으니 말이다. 어째든 실컷 먹어보자는 심산에서 콧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자신이 횟감을 정리하였다. 평소 배를 타며 수시로 해 온 솜씨라 매우 깔끔하게 횟감과 매운탕 꺼리를 장만해 내었다. 입담은 얼마나 좋은지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드디어 모든 음식물들이 요리되었다. 정말 진수성찬이다. 회며 매운탕, 문어, 해조류 무침 등 상에다 잔뜩 올려놓고 소주잔을 기우리며 먹는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따개비와 거북손은 난생 처음 먹어 보는 것이고, 물메기 회도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아무튼 난생처음 먹어 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더하여 그 맛이란 먹어 보지 않고는 느낌이 가기 않을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다시 오전에 가 보지 않았던 곳을 향하여 나섰다. 우리는 한명이 늘어 8명이나 되었다. 오늘 만난 친구는 현지에 사는 주민이라 신수도의 사정을 훤히 잘 알고 있어 가이드 역할을 충분히 잘 해 주었다.
이곳은 예전엔 단지 사람 사는 섬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지만 점차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바람에 땅 값도 오르고, 반면에 애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살아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희망사항에 그치고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어째든 우리는 오전과 오후에 걸쳐 섬의 거의 대부분을 돌아 본 것 이었다. 마지막 배가 5시 10분에 간단다. 내차는 그 배로 나가야 하는데 이 마을에 사는 친구가 자꾸만 자고 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의논 끝에 오늘 중으로 나가기로 하되, 내 차를 배에 싣고 건너편 삼천포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그 친구가 차를 받아 보관하게 하기로 하였다.
차를 보내고 바닷가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음식물을 다 처분하여야 했다. 창원의 친구도 우리들하고 같이 삼천포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이곳에 사는 친구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와서 오라고 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부인은 고성에서 자랐는데 중신아비의 말만 듣고 이곳으로 시집을 오고 보니, 한동안 정말 눈물이 나고 눈앞이 깜깜하더라는 것이었다. 배가 없으면 꼼짝도 못하고 마을엔 우물도 없어 수 킬로나 떨어진 곳까지 가서 물동이에 물을 길러다 밥을 해 먹어야 하였으니...
그래도 지금은 아이들 다 키워 시집장가 다 보내고 부부가 같이 바다로 나가 고기도 잡고 서로를 위해가며 사는 재미가 솔솔 하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동안 웃고 떠들며 술잔도 권했다.
어째든 우리는 어느 새 마음을 나누는 모두가 친구가 되어 있었다. 세상 살아가면서 이렇게 허심탄회 하며 술잔을 권해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산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 그래도 바쁜 생활 속에서도 산을 찾는단다. 문득 우리 산악 가족들과 마음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같이 올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걸...
이젠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힘을 합하여 집안을 정리했다. 이불도 개고, 음식물도 정리한고, 쓰레기도 비웠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신수도 친구의 배에 올랐다. 멀리 창선대교의 아름다운 불빛을 바라다 보며 우리를 태운 배가 달린다. 친구는 우리의 기분을 돋우기 위하여 때론 배를 빠르고 몰기도 하고, 볼거리를 위하여 천천히 몰기도 하며 삼천포항을 향하여 달렸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10분정도가 걸리지만 우리가 함께 한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휴일을 맞이하여 자신의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 않고 우리들을 위하여 기꺼이 동행하고 자신의 집까지 내어 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소박한 친구, 중요한 집안일도 다 마치지 아니하고 친구를 향하여 갖가지 고기를 사들고 오고, 재미있는 입담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도 하며 삼천포항까지 부부가 배를 몰아 우리를 데려다 준 친구.
우리는 짧은 시간이나마 긴 우정을 나누었고, 앞으로도 함께 할 시간을 갖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삼천포항에서 서로의 가는 길을 배웅하며 서로를 포옹했다.
나는 차를 몰고 진주를 향해 오며 몇 십 년을 보고 살아도 정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한 두 시간을 만나도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 인생살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한 마음이 한 발작 앞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함께한 친구들의 고마운 우정에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사진은 다른 싸이트에다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