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 년 05 월 21일(수) [09:40] |
|
2014 년 05 월 23일(금) [14:50] |
|
|
|
인천공항~오키나와(2)~인천공항 |
|
|
|
|
09:40 |
* ’→ 일본 - 오키나와→ ‘출발일 보기’→ 5월 21일
오키나와 2박 3일 < 일 정 >
제1일(5월 21일) 오전 07:30 인천국제공항 3층 M카운터 모임
◆ 09: 40 인천국제공항 출발 ~ 11 : 55분 오키나와 국제공항 도착(약 2시간30분 소요)
- 오키나와 월드
- 옥천동굴
- 에이샤 공연
- 문화왕국 관광
-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태평양 최후 격전지)
- 라구나 가든 호텔(수영장 시설) 숙박 예정 * 수영복
제2일(5월 22일)
- 에메랄드 빛 해안 답사
- 오키나와 expo해양공원
- 에메랄드 비치
- 돌고래 쇼
- 수족관
- 파인애플 파크
- 안좌모(석회암 절벽)
- 선셋 디너 크루즈(2시간)
- 다이아치 호텔 숙박
제3일(5월 23일)
- 슈리성(류크왕국 역사유적) 답사
- 면세점, 자유 쇼핑
- 13 : 00 오키나와 국제공항 출발
- 15 : 20 인천국제공항 도착
-----------------------------------------------------------------------------------------------------------------
<자료 > 오키나와
면적 2,265㎢이고 동서 약 1,000㎞, 남북 약 400㎞의 해역에 분포된 크고 작은 섬들로 형성되어 있다. 온난한 아열대 기후로 덮여있다. 드맑은 바다는 산호로 덮여있으며 일본에서는 손꼽히는 관광지이다.
1945년부터 27년간 미국의 직접통치하에 있었지만 1972년에 반환되었다. 현재 주일미군기지의 75%가 배치되어 있다.
오키나와켕(沖縄県)
오키(沖)에 어장을 나타내는 〈나바(漁場)〉가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고기잡이에 사용되는 〈우키나와(浮縄)〉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는 다른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고 역사적으로는 17세기 초까지 류우큐우(琉球) 왕국이라는 독립된 국가였다. 태평양전쟁에서는 전인구의 1/3가량이 희생되었고, 전후에는 미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이런 복잡한 역사 때문에 이 지역사람들은 지역의식이 강하다. NHK조사에서도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여기서는 타지역을 본토라고 부르며 본토사람들에 대한 불신감이 강해서 배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곧 친절한 본성을 드러내고 만다. 현 밖으로 나가면 언어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내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곳 사람들은 결코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은 혈연자를 묶는 〈문중(門中)〉이라는 독자의 제도가 있으며 지역 연대의식이 강하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느긋한 성격으로 약속시간에 늦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탕수수, 양식해초, 파인애플, 담배, 류우큐우 가스리(琉球絣), 도자기 등이 특산품이다.
----------------------------------------------------------------
유구(琉球)는 고려 말에 중산(中山)·산남(山南)·산북(山北)의 3부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고려 및 명나라와 각각 교섭을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 후인 1401년(태종 1)에 찰도가 다시 사신을 보내 수호하고, 매년 신하라 칭하며 방물(方物)을 공납해왔다. 그 중에는 조선이 공인하는 세견선으로 내왕하고 관직을 받은 자도 있었다.
유구는 해외 무역으로 생계를 삼았는데, 토산물과 안남(安南)·샴(暹羅: 지금의 태국) 등 남쪽 산물을 중개하였다. 조선과 유구의 교통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표류민을 자주 송환해왔다. 유구에는 조선에 오는 해로를 잘 아는 자가 적었다. 때문에 일본의 승려·상인으로서 유구에 거주하는 자가 사신이 되어 오는 경우가 있었다.
* [조선왕조실록] “유구 琉球 ”에 대한 총 검색건수 : 865 건
- 태조 1권, 1년(1392) 8월 18일(정묘) : 유구국의 중산왕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다.
- 태조 2권, 1년(1392) 9월 11일 : 유구국(琉球國)의 사신과 오량합(吾良哈)241) 의 사람들이 조회에 참예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은 동반(東班) 5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오량합은 서반(西班) 4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그 종자(從者)들은 6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유구국에서 방물(方物)을 바치었다.
- 명종 3권, 1년(1546) 2월 1일(무자) : 표류하여 유구국에 갔던 박손 일행이 돌아와 그 풍속을 기록하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동지사(冬至使)의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보니, 본국의 박손(朴孫) 등【제주(濟州) 사람으로서 모두 12인이다.】이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이르니, 그 국왕이 지성껏 후히 대하고 또 궁궐 뜰에서 궤향(饋享)하였다 한다. 교린(交隣)의 후의를 사례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다만 통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니 본국 사신이 만일 중조(中朝)에서 유구국 사신을 보거든 마땅히 이 일을 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박손(朴孫)이 복건도(福建道)의 수차(水車)를 보고 그 제도를 상세히 익혀가지고 본국에 돌아와서 장인(匠人)을 가르쳐 제작하니, 그 용도가 농작에 매우 이로왔다.】주서(注書) 윤결(尹潔)이 박손 등의 말에 따라 유구국의 풍속을 기록하였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의 풍속은 남자는 귀천이 없이 모두 머리 좌각(左角)에 크기가 주먹만한 상투를 틀어감는데 머리숱이 많으면 깍아서 감하고 비단 헝겊으로 싸서 돌린다. 그 비단 헝겊의 색깔은 푸르기도 검기도 붉기도 한데 귀인(貴人)은 누런 색을 사용한다.
신은 신지 않고 말을 타거나 보행할 때도 모두 맨발이다. 의복 제도는 우리 나라 승려의 옷과 같고, 오직 조아(朝衙)에서만 사모(紗帽)를 쓰고 금·은·옥의 띠를 하는데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처럼 하였다. 여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치마[裙]를 입지 않고 상(裳)을 몇 겹으로 둘러서 살을 드러내지 않으며, 머리 뒤에 쪽을 틀고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오직 귀인만이 화잠(花簪)을 쪽을 튼 곳에 꽂았다. 다닐 때는 항시 얼굴을 의령(衣領)속에 숨기고 두 눈만 내 놓을 뿐이다. 의복 제도는 역시 승려의 옷[僧衫]과 같았다.
그 지방은 항시 따스하고 춥지 않아서 남녀의 살결이 곱고 윤택하였는데, 여자는 미색이 많고 화장을 하지 않았다. 또 여자도 관직이 있어 모든 여정(女政)은 다 여관(女官)이 재결하고, 조아(朝衙)도 국왕에게 하지 않고 왕비에게만 한다. 여관이 나다닐 때에는 말을 타도 안장에 걸터앉지 않고 안장 위에 웅크리고 앉아 두 발을 한 등자(鐙子)에 얹되 마치 호상(胡床)에 앉듯 한다.
말 머리에서 벽제(壁除)하는 소임이나 복종(僕從)들은 모두 여인을 쓴다. 경상(卿相)의 자제로서 연소한 자를 택하여 그들에게 은냥(銀兩)을 많이 싸 주어 바다를 건너 남경(南京)에 들어가 유학하면서 남북 양경(兩京)의 어음(語音)을 겸해 익히게 하고, 그들의 학문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배를 보내어 데리고 돌아온 다음 그들이 배운 바를 시험하여 능통한 자에게는 관직을 주고 능통하지 못한 자에게는 은냥을 도로 징수한다. 그러기 때문에 자제로서 남경에 들어가 유학한 자는 자신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함을 알면 감히 돌아오지 못한다.
국속(國俗)은 관후(寬厚)·정직(正直)하고 교사(狡詐)·기망(欺罔)하는 풍습이 없다. 공사(公私)간에 모두 형장(刑杖)을 쓰지 않으며, 여리(閭里)에서는 서로 헐뜯거나 비방하지 않았고 서로 싸우거나 다투지도 않았다. 죄과(罪過)가 있으면 유사(有司)가 이를 기록하여 세 번 범죄한 연후에야 먼 외딴섬으로 내쳐서 종신토록 나오지 못하게 한다. 상인이 보화(寶貨)를 가게에 벌여 놓고 팔다가 혹 무슨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가고 지키지 않아도 도둑질해 가지 않는다.
농사는 정월에 씨앗을 심어 5월에 수확하고 6월에 심어 10월에 수확하고는 10월 이후에는 토란을 그 전지에 심어서 연말에 캐는데, 토란은 우리 나라에서 심는 것과 같으나 맛이 향긋하여 익히지 않아도 목구멍을 찌르지 않았다. 밭곡식도 1년에 두 번 수확한다. 11월의 기후가 우리 나라의 3월∼4월과 같아서 본래 빙설(氷雪)이란 없다. 주민들은 단자(緞子)를 입거나 혹은 사릉(紗綾)을 입는데 갖추어지는 대로 사용하고 귀천의 등급이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삼년 동안 흰 것을 덮어 쓰고, 조상(弔喪) 등의 일은 대략 우리 나라와 같은데 초상 중에도 고기 먹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장사(葬事)를 지낼 때는 바위를 깎아 궁옥(宮屋) 형태로 만들고 그 안을 파내어 공허하게 한 다음 목판(木板)으로 문을 만들고 널을 그 속에 두는데, 한집안에서 죽은 자는 모두 그 속에 넣었다. 제사 때에는 문을 열고 제사가 끝나면 즉시 닫았다. 재력이 불능한 자는 바위 구멍이 궁옥처럼 생긴 데를 구하여 그 속에 널을 두며, 땅에 묻지는 않았다.
화폐(貨幣)는 동전(銅錢)을 쓰는데 1백 전(錢)은 그 가치가 쌀 2 두(斗)에 해당한다. 혼인(婚姻)을 할 때는 신랑 집에서 먼저 돈을 신부 집으로 실어보내면 잔치 등의 모든 예식은 다 신부 집에서 베풀고 신랑 집에서는 한가지도 준비하는 일이 없다. 혼인 기일이 이르면 신랑은 성장(盛裝)을 하고 말에 오른 다음 여러 족속들이 뒤를 옹위하고 간다. 두 은합(銀榼)을 사용하여 폐물(幣物)을 담고 꽃을 꽂고는 말 머리 앞에서 인도한다고 한다. 또 그들 풍속은 승불(僧佛)을 성대하게 섬기며 사가(私家)나 관청에서나 모두 불상을 벌여 놓는다.
산천(山川)은 기준(奇峻)하고 토지(土地)는 비옥(肥沃)하였으며 사슴과 노루는 있어도 승냥이나 범은 없으며 또한 꿩도 없었다. 나무로는 잎사귀가 일산과 같은 것이 있는데 매우 부드럽고 질겼으며, 부인 중에 귀부인들은 그 잎사귀로 관(冠)을 만들어 쓰고 다니는데 그 잎사귀를 허리까지 드리워서 남이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다. 또 모든 포장(包裝)을 하는 데도 다 이 잎사귀를 사용하고 농부가 밭갈이하거나 김맬 경우에는 역시 이 잎사귀를 사용해서 삿갓을 만든다. 풀로는 큰 파초같은 것이 있는데, 기둥처럼 된 것을 베어서 겉껍질은 버리고 속껍질을 취하여 3등급의 베(布)를 만드는데 그 껍질의 안팎에 따라 베가 거칠고 가는 것이 다르게 된다 한다. 제일 속에 있는 것은 극히 가늘고 윤택하며 색깔이 깨끗하기가 눈과 같아서 그 곱고 정밀하기가 비할 데 없다. 여자들의 의복 중에서는 이것을 최상으로 삼는다 한다.
국왕이 임어하는 궁전은 그 높이가 5층인데 판자로 덮었고 왕은 홍금의(紅錦衣)에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한 중[僧]과 마주 앉아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명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망궐례를 행한 것이라 한다.】 백관들은 관직의 서차별로 반열을 나누어 뜰 아래에서 하는데, 박손(朴孫) 등을 백관의 반열 뒤에 세워서 일시에 절을 하도록 하면서 ‘그대의 나라도 명나라의 신하이니 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첫댓글 5월에는 서울역사 포럼에서 오키나와를 역사탐방 차 여행합니다.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 섬으로 역사탐방 떠나시네요
태평양전쟁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유익하고 멋진 탐방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가서 보고 듣고 느기고 깨닫고 각오를 다질 때입니다.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