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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정동 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사랑~^^*
■ 아내
1999년 초부터 남편은 이유없이 코가 막히고 목안이 답답하다고 했어요. 감기인 줄 알고 동네의원에 갔습니다. 차도가 없었어요. 8월27일 서울대병원에 갔어요. 의사가 이비인후과 아닌 신경과로 가라고 하더군요.
의사는 "루게릭병으로 추정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1주일 동안 입원해 진찰을 받아보자고 했답니다. 남편은 제자들이 생각났대요. 수능(修能) 후 입원하겠다고 했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은 나중에야 했어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술도 안 마시는데 술 마신 사람처럼 발음이 부정확했거든요. 남편은 영어의 R 발음이 안 된다고 힘겨워했어요. 서 있는 것도 힘들고, 칠판에 필기하는 것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1999년 12월29일, 그날 같은 때가 다시 올까요.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남편이 잠시 외출했어요. 동성고 교사 부부동반 망년회가 있었거든요. 영화도 봤어요. 명동에서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 '해피엔드'.
웃고 떠들고…, 제가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 남편은 기억하고 있더군요. '무슨 영화가 저렇게 야해? 그 여배우 시집갈 수 있겠어?'라고 했답니다. 지나고 보니 꿈결 같은 행복이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2000년 1월 우연히 남편의 약봉지를 보게 됐습니다. 겉봉투에 쓰인 글을 읽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어요. '이 병은 수년 내에 사망할 수 있으며 이 약을 먹으면 3개월간 수명이 연장된다….' 그게 무슨 뜻이었나요.
그날 저녁 남편은 아이스크림과 양갱을 사들고 귀가했어요. 성내천 둑길을 한참 걸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어요. 남편도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울었습니다.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됐어요. 시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어요. 세상의 한약방이란 한약방은 다 찾아다녔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도 다 먹여봤어요. 얼마 뒤 남편은 모든 걸 끊어버리더군요.
하느님도 원망했어요. 아주 많이요. 왜 착한 우리 남편에게 이런 병을 주셨느냐고, 남편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지금은 다시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어요. 이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저희는 루게릭병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어요. 남편의 몸은 점점 굳어졌어요. 2002년에는 숟가락을 들지 못하더니 1년 뒤는 포크도 잡지 못했어요. 지금은 왼쪽 엄지발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정돕니다.
풍납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저는 아침에 남편을 씻기고 소변기를 채운 뒤 등교합니다. 오늘처럼 손님이 집에 오시는 날이면 조퇴를 하지요. 제가 없는 텅 빈 집에 남편은 우두커니 누워 있습니다.
음식은 모든 걸 갈아서 먹여요. 근육이 마비돼 씹을 수가 없거든요. 침을 흘려 자주 닦아줘야 해요. 한쪽으로만 누워 있으니 고통도 심해요. 번갈아서 방향을 돌려줘야 합니다. 침대에서 자주 미끄러지기도 하고요.
돌이켜보면 행복했던 10년이었어요. 남편과 제 고향이 같아요. 충남 예산. 다방에서 처음 본 남편은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인 것 같았어요. 저희는 1988년 만난 지 6개월 만에 약혼했습니다.
남자를 안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전데…. 남편은 알뜰했어요. 은행업무나 이런 건 자기가 더 잘한다고, 저는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라고 했어요. 그런 남편이 참 믿음직스러웠어요.
1989년 12월23일 결혼한 후 두 아들이 태어났어요. 지금 고3, 고1이에요. 남편이 분양받은 신도림동 아파트에서 91년 송파구 장미아파트로 이사왔어요. 옆동에서 이곳으로 온 지는 2년 됐습니다. 계단이 불편했거든요.
'단란한 가정', 우리 부부의 꿈이었습니다. 그 깨진 꿈이 너무도 아쉬워 남편에게 술에 취해 투정을 부리기도 했어요. 그런 제게 남편은 발가락으로 마우스 눌러 쓴 시(詩) 한편 '내 아내에게'를 내놓았어요. 저는 참 나쁜 여자지요.
내 아내에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수천 번을 말해도 아깝지 않은 내 아내에게
어쩌다가 나는 사랑한단 말 한번 제대로 못하는
멋없는 남편으로 살아왔던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햇살이 고와서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는 내 아내는
그 햇살보다 더 빛나는 미소를 가지고 있다
커피를 마실 때 프림과 설탕을 듬뿍 넣는 그녀지만
가끔은 바싹말린 장미 꽃잎가루만 넣은 독한 커피를
기꺼이 같이 마셔주는 내 생애 단 하나의 여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변치 말고 헤어지지 말고 살아가자던
젊은 날의 약속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나 이제 아내에게 고백합니다
당신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살아서든 죽어서든 당신만을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해볼 수 있는 모든 걸 해봤습니다. 한약, 수지침, 쑥뜸, 기공치료, 테이프요법, 작업치료, 운동치료…. 인터넷에 나오는 '요로요법'을 보고 제 소변을 보름정도 받아마시기도 했어요.
문득 소설 속 고등어가 생각났어요. '어쩌다 나는 화살처럼 자유롭던 푸른 바다를 떠나서 소금에 절여있을까'라고 한탄하다 석쇠에 올라서는 '대체 무엇 때문에 바다 속을 그렇게 힘들게 헤엄치며 다녔을까'라고 생각했다지요.
2000년 봄날 성균관 명륜당 앞마당 은행나무 아래로 갔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 작성해놓은 석사학위 논문 원고를 한참이나 바라봤습니다. '더 공부를 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도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꿨어요.
그날 저는 박사학위 과정 입학원서를 샀어요. 2004년 8월 바라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 일이 여러 신문과 방송에 보도된 뒤 제자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습니다. 편지는 '선생님은 저를 모르실 겁니다…'로 시작됩니다.
"고 3때인가요. 영어수업 도중에 '요즘따라 왜 이리 혀가 꼬이냐. 나도 늙어서 이제 발음도 매끄럽게 안 된다. 애들이랑 공이나 차고 월급 받아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엔 재미있는 유머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아내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날 맞선에서 저를 만났다고 합니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감정을 숨길 줄 모르고 얼굴 가득 호감을 보이던 순진한 여자였어요. 아무리 순진한 여자도 아이 둘 낳으면 호랑이 마누라로 변한다지요?
제 아내는 지금도 학생인지 교사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순진합니다. 아내는 제게 자기가 맡고 있는 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줍니다. 공부 잘하고 얌전한 아이보다 말썽 피우는 개구쟁이가 더 좋다나요.
제가 큰소리라도 치면 아내는 '결혼 전에는 아빠도 오빠들도 자기에게 큰 소리 한 번 안 치고 예쁘다고만 했는데'라며 친정언니들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 모습이 귀여운 막내 여동생을 연상시킵니다.
아내는 제가 안 보는 데서 가끔 눈물을 흘립니다. 제 앞에서는 언제나 환하게 웃지만 가끔 퉁퉁 부어 있는 두 눈을 볼 수 있거든요. 그때마다 저는 각오를 다집니다. 아내의 '환한 미소'를 지켜줄 책임이 제게 있잖아요.
틈틈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수필과 달라 시는 시심(詩心)이 떠오르지 않으면 쓸 수 없어요. 내년 가을쯤에는 첫 시집을 내고 싶은데, 제목은 이미 정해놨어요.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 기적을 바라며
배우 김명민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내 사랑 내 곁에'라는 영화에서 루게릭병에 걸린 전도유망한 법학도(法學徒) 역을 맡아 몸무게를 20㎏이나 줄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원규·이희엽 부부를 만나게 된 계기였다.
상대역은 '해운대'에서 1000만명을 삼킨 여우(女優) 하지원이다. 그가 맡은 역은 장례지도사다. 그와 비슷한 여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문득 '그런 남자가 실제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지인(知人)에게서 '굳은 손가락으로 쓰다'라는 이원규의 책을 받았다. 하루 A4용지 한 장씩의 글을 꼬박 1년간 발로 써 냈다는 책에는 한국판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었다.
휴대전화로 연락하자 아내는 '화요일은 병원에 가야 하는데…'라고 주저했다. 전화기로 뭔가 웅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이희엽은 '그냥 오세요'라고 했다. 오후 3시 반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다니는 날이었다.
기자가 물으면 부부는 침묵으로 대화했다. 아내가 들어 올린 글자와 숫자가 적힌 판을 남편은 눈짓으로 짚었다. 이후에는 말을 조합해야 했다. 질문 하나에 답하는 데 몇 분씩이 걸리는 인터뷰였다.
―'굳은 손가락으로 쓰다'가 몇 부나 팔렸습니까.
"2005년에 처음 나왔을 때 1만1000부가 나갔대요. 그 덕에 인세도 받아봤지요. 원래 제가 생각했던 제목은 그게 아니었어요. '강철 무지개'였지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육사의 시 '절정'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입니다. 서양에서 철은 사악한 힘의 상징이지요. 동양에서는 철이 악령(惡靈)을 쫓는 힘을 가졌다고 봅니다. 강철 무지개는 더 이상의 절망이 있을 수 없는 현실을 보게 됐을 때 비로소 두둥실 떠오르는 무지개지요."
―신문 방송에 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돕는 사람들이라도 생깁니까.
"자기들이 이런 약을 만들었는데 먹어보라는 전화가 대부분입니다."
―두 분이 영화의 실제 모델입니까.
"아니에요. 한 언론에서 김명민과 대담(對談)을 주선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요. 영화사에서도 홍보용으로 쓴다며 촬영을 해가긴 했어요."
―1주일 내내 집 안에만 있습니까.
"화요일과 금요일은 병원에 물리치료 받으러 가요. 일요일에는 성당에 갑니다. 성균관대 수원캠퍼스로 약 타러도 가고요. 한국 ALS협회 회의에는 두 달에 한번 참석합니다."
―약값이 많이 들지요.
"성균관대에서 (만나게 해준 약을 발명한 유서홍 박사가) 저희에게 혜택을 주신 덕에 무료로 먹고 있어요."
―한국ALS협회에는 어떻게 간여하게 된 겁니까.
"제가 한국루게릭병연구소와 인터넷 카페 '루게릭병 네트워크'를 몇 분과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루게릭병 알리기와 환자 서로 간의 정보 교환, 상담, 투병기(鬪病記), 간병기(看病記)를 공유하는 거지요. 2001년 6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ALS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어요."
―왼쪽 엄지발가락으로 그 모든 글을 씁니까.
"느리긴 하지만 쓸 수는 있어요. 치료제 시판허가를 얻기 위해 청와대와 관련 상임위원회에 소속된 국회의원들께 편지도 보냈고요. (그가 보여준 메일함에는 청와대와 국회의원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다. 한 의원은 한참이 지났는데도 메일을 열어보지 않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진기자가 '메일을 아직도 안 열어봤네'라고 해 알게 됐다.)"
―가장 필요한 보조도구가 뭡니까.
"음성변환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영어는 A자를 치면 단어가 주르륵 뜨는 식이래요. 그런데 한글은 그게 안 된대요. 호킹 박사가 쓰는 프로그램도 한국에서 개발했다는데 왜 못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마지막까지 쓸 수 있는 게 눈 근육이라면서요.
"그래서 안구 마우스가 나온 겁니다. 루게릭병은 참 힘든 병이에요.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서울대 이상묵 교수가 오죽하면 '루게릭병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이야기했겠어요. 휠체어도 최근에 하나 맞췄어요. 550만원짜리인데 회사에서 50만원 깎아줬어요."
―왜 보조 도구가 필요합니까.
"할 수 있다면 보조 도구를 이용해 강의를 하고 싶어요. 1주일에 2~3시간 정도의 특강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대학교수 해보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거든요."
―치료에 이곳저곳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은데 벌어놓은 돈은 있나요.
"학교는 그만뒀지만 용돈 정도의 연금이 나오고 아내가 혼자 벌지요. 넉넉지는 않아도 굶을 정도는 아닙니다."
―본인을 자꾸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교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엘리펀트 맨'이라는 희곡이 있지요. 존 메릭이라는 남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메릭은 다섯 살 때부터 다발성신경섬유종증과 프로테우스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알았어요. 옷을 벗고 휘어진 제 몸을 거울로 볼 때 그 생각이 나더군요. 성당에서 미사 볼 때 우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뼈마디가 제 자리를 찾더니 '뽀빠이'처럼 알통을 확인한 적도 있었어요. 꿈이었지만요."
―아이들이 고3, 고1이라는데.
"루게릭병에 걸렸을 때는 초등학생이었지요. 말 안 들을 때 '아빠가 휠체어 끌고 학교에 간다?'라고 하면 금세 '앞으로 잘할게요'라고 해요. 아이들 이야기는 쓰지 말아주세요."
―왜 계속 시를 씁니까.
"명색이 시인인데 시집 한 권을 남겨야지요. 마음대로 되지는 않아요, 수필이면 금세 쓰겠는데. 내년 가을까지는 낼 계획입니다. 지금 모인 게 한 40, 50편?"
―기적을 바랍니까.
"바라지요."
―기적이 일어나면 뭘 하고 싶습니까.
"(…) 지하철을 다시 타보고 싶어요. 출입이 힘들어 지금 사는 2층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12층에 살았어요. 세상이 그리워질 때면 휠체어에 앉아 하염없이 한강과 강변의 건물들을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잠실 철교 위를 끊임없이 오고가는 지하철을 바라보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그저 그립고 부럽기만 하지요."
집을 나서며 끝내 할까 말까 망설이던 질문을 던졌다. '평균 5년 내 사망한다는데 10년을 버텼다. 언제까지 살고 싶으냐'는 것이었다. 이원규는 컴퓨터 자판을 발로 누르기 시작했다. '빨리 죽어야지.'
아내가 부엌으로 갔다. 뒤도 안 돌아보고 "무슨 소리야. 90까지는 살아야지!"라고 외쳤다. 괜히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자책이 일었다. 밖은 밝았다. 닫히는 문 뒤로 다시 침묵에 포박당할 부부가 떠올랐다.
병들고 가난한 내가
지조 높은 그녀를 사랑해서
나 자신과 그녀에게 죄를 지었다.
꿈길로 이어진 하늘에서 내려와
내 곁에 날개를 접은 천사 같은 그녀는
오늘도 환한 미소로 나의 하루를 밝혀주고 있다.
말문이 막히고 숨통이 막히고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는 나는
그녀 앞을 무작정 가로막고 둥지를 틀어
먹이를 날라 오는 어미 새를 대하듯
그녀의 땀방울을 쪼아 먹고 있다.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찬란한 비상의 하늘로 훨훨 보내야 한다는데
나는 도리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녀의 날개에서 깃털을 뽑아내며
오늘도 나 자신과 그녀에게 죄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