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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읍성에 입성
신사복 정장에 경운기 몰고 가는 촌로가 갓쓰고 자전거 타는 것처럼
어쩐지 어색해 보여 유심히 쳐다본 것이 유죄였나.
시비(?)를 걸어온 그와 말 길이 터지자 그는 고성농요전수교육관에
얽힌 이야기를 스스로 쏟아냈다.
아마 자가용(?) 몰고 어느 잔치집에라도 다녀오는 중이었을 듯 한데
사람 그리웁기는 그 분이나 나그네나 다를 게 없으렸다.
산에서는 물론 다른 대로들에서도 노령자와 말을 트면 늘 그랬다.
하긴, 상대할 짝이 없는 촌락이 이즈음의 실정이니까.
내 응수가 적절한 장단이었는지 끝이 없는 노랫가락처럼 잘도 이어
가는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차단한다?
가야 할 길이 장장인 나그네가 이 무슨 한담놀이인가.
적잖이 미안했지만 그의 건승을 빌며 배낭을 둘러멨다.
사천시 경계 직전인 고봉교차로에서 낙남정맥 부련이재로 넘어가는
임도가 어엿한 3번군도(郡道)로 승격되어 있어 반가웠다.
부련이재에서 마감하고 막연하게 걷고 있을 때 비에 젖어 후줄근한
늙은이를 마다 않고 고성읍까지 태워준 고마운 젊은 이 생각이 났다.
설비업을 한다 했는데 지금쯤은 더 번창해 있겠지!!
사천시 정동면에 들어섰다.
철(鐵)을 캐려는 사람들이 외지에서 모여들어 취락이 형성됐다 하여
객방(客坊)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감치에서 40리 사천읍의 반은 넘어선 듯한 위치다.
고성군 상리면 동산천과 상동천이 합류해 사천강을 이룬 후 도로와
함께 가기 때문에 사천읍 한하고 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상당 부분 차로(33번국도)를 떠나 강뚝을 걸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고성과 사천의 경계, 객방마을 입구
모처럼 무심코 걷는 길이었다.
낙남정맥과도 진주에서 재회할 때까지 멀어져야 하는 길.
지루하다 생각되면 뚝길로 접어들어도 보고 만마(萬馬), 복상(伏象),
감곡(甘谷), 대산(垈山), 노천(魯川) 등 마을 이름마다 각기 내력이
있겠지만 이 또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도처에서 진행중인 도로의 확장과 교차로, 지선공사 등에 의해 훼방
당할 때마다 짜증나려 하여 휴게소 주차장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좀 전에 반대편으로 달리다가 걸어가시는 어르신을 보았습니다.
공사때문에 먼지도 많은데 사천읍까지 모셔드릴까요"
하마터면 중년남의 고마운 호의에 넘어갈 뻔 했다.
정동(正東)면소재지 이후에는 아예 사천강을 따라 수청(洙淸), 예수
(禮樹)를 거쳐 동계역(東溪驛)이 있던 고읍(古邑)까지 나갔다.
고읍과 사천읍은 구분이 애매할 정도로 한데 어우러진 양상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고읍은 고려 ~ 조선초기에 걸쳐 사천현 치소(治所)가 있던 곳이다.
사천읍성을 축조하고 치소를 옮겨감으로서 구읍 또는 고읍으로 밀
리게 된 때가 세종27년(1445)이라니까.
그후 정동면면소재지가 되었으나 그마져 대곡리숲으로 이전해갔다.
비록 현기(縣基)를 잃고 면소(面所)는 떠났으나 사천읍과의 지리적
밀접성을 힘입어 사천읍과 동반 발전하고 있다 할까.
역사의 순리
하룻밤 의탁할 곳(고읍리:크리스탈찜질방)을 확인한 후 사천향교와
고읍에서 현기를 뺏어온 사천읍성을 돌아보았다.
도유형문화재 제220호 사천향교는 세종3년(1421)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의 화를 피하지 못하고 소실된 후 인조23년(1645) 현 위치
(사천읍 선인리 119) 에 복원했단다.
사천향교도 창립시기만 있을 뿐 장소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통영, 고성, 사천의 기록들이 전반적으로 부실한 느낌이다.
누락인가 생략인가.
힘써 고개를 넘어야 하는 방문객들을 배려하는가.
대부분의 향교와 달리 쪽문이 열려 있으니.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는 향교의 전형이다.
배향(拜享)인물 또한 기본 오성(五聖) + 열조(列朝)의 현인들이다.
사천향교 역시 이 룰(rule)을 벗어날 리 있겠는가.
다만, 열조의 현인들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분명하다.
단골로 등장하는가 하면 가뭄에 콩나듯 하는 인물도 있으니까.
역사의 순리인가.
사천향교
도기념물 제144호 사천읍성에 올랐다.
세종24년(1442)에 토석혼성으로 축조한 후 석성으로 증개축했으며
정유재란때 조명연합군이 왜적과 벌인 혈투는 처절했단다.
읍성 탈환에는 성공했으나 연이은 선진리성(도문화재자료 제274호
용현면 선지리) 전투에서 대패한다
선조31년(1598)의 일로 당시 전사한 수천 조명연합군병사의 무덤이
도기념물 제80호 조명군총(朝明軍塚)이다.
"여길 꼭 들러서 가리라"고 내일 일정을 수정했다.
지금, 사천읍성 일대에는 활 쏘는 관덕정, 충혼탑, 수양루 등이 복원
되거나 새로 들어섬으로써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조성되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 보호를 명분으로 쌓은 성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백성의 피땀이 반죽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축조한 읍성이 후손의 휴식공간과 관광상품(사천8경중
1)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니까 이 또한 역사의 순리라 할까.
읍성(1), 침오정(2), 충혼탑(3), 수양루(4), 읍성사적비(5)
읍성에서 사천초교 앞으로 내려오는 길에 근무시간이 아직 종료 전
일 듯 하여 사천읍사무소에 들렀다.
늙은 나그네를 상대하려고 일어선 젊은 직원은 유재민.
나는 그의 담당분야를 모르지만 내가 들른 이유를 듣고난 그는 동료
직원들과 의논하더니 컴퓨터에서 무슨 자료를 출력해 왔다.
사천읍에서 관률로 가는 상세도면 3장.
그리고, 자상하게 설명해 준 그가 어찌나 고마웠던지!
사천에 관해 여하한 부정적 요인이 나를 지배하려 할지라도 사천에
대해서만은 나는 유재민으로 인해 한 없이 관대할 것이다.
대간의 두번째 종주 때 두 사천고등학교 교사와 교행한 적이 있다.
무심하다 여겼던 김종근,송일승(백두대간115번글 참조) 두 교사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변했다.
그들의 전화번호를 지참했더라면 아마 반가이 통화했을 것이다.
사천 소고(小考)
사천은 사물국(史勿國)에서 시작한다.
신라의 진흥왕(24대) 때(또는 23대 법흥왕 때) 사물현으로 다운되고
경덕왕(35대) 때는 사수현으로 개명된다.
('사물'은 '사이물'이라는 우리말에서 음차되고 다시 '사수(泗水)'로
훈차(訓借)된 것이라고 보는 듯)
고려 현종(8대) 때 사주(泗州)로 승격됐다가 이조 태종(3대) 때에는
사천(泗川)으로 다시 개명된다.
군과 현의 지명들중 끝자가'주(州)'자인 이름은 모두 산(山), 또는 천
(川)으로 고쳤는데, 이 때 사주도 사천으로 바뀐다.
사천시(泗川)의 내력은 통영시와 판박이다.
사천군 삼천포면이 읍으로 승격하더니1956년에는 삼천포시로 거듭
업그레이드하여 사천군으로부터 화려하게 독립한다.
한세월 후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도농복합형태의 사천시로 통합한다.
그러나, 새 이름, 새 청사, 양 쪽을 아우르는 새 시장, 국회의원, 기타
양 지역간에는 미해결의 숙제가 15년 세월에도 아직 많단다.
찜질방에서 사천을 사랑하는 한 중년남이 들려준 이야기다.
말길을 턴 김에"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세언에 대해 물었다.
부산 ~ 진주 간을 운행하는 전동열차 3량 중 1량은 삼천포가 종착역
인데 진주로 가는 이가 삼천포 칸에 타고가다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삼천포까지 가버렸기 때문에.
고성의 어느 분이 진주의 사돈댁에 가다가 상리면 척번정리(진주와
삼천포 갈림길 삼거리)에서 잘못들어 삼천포로 가게 되었기 때문에.
승용차로 부산에서 하동으로 출장갔던 고위관리가 심야에 귀가하던
길인데 헷갈린 운전기사가 그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기 때문에.
한 장사꾼이 장사가 잘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장사가
안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기 때문에.
어느 유랑극단이 진주로 가던 중에 잠시 삼천포에 들렀으나 실속이
없었던지 터무니 없이 해댄 악담이라는 등 설들이 분분하단다.
그러나, 이 말의 부정적인 면 보다는 지명의 홍보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어느 지점인지 모르는 이가 태반일 정도로 남해안의 자그마한
삼천포가 이 말의 유행으로 전국적 지명이 되었으니까.
더구나, 남해 창선과 삼천포 대방을 잇는 창선-삼천포대교는 사천8
경중 단연 1위에 올라 있다.
관율역의 인연
찜질방을 나선 이른 아침에 사천발 15리 관율역(官栗驛)길을 미루고
버스편으로 7km거리인 용현면 선진리((船津)로 갔다.
거북선을 최초로 참전시킨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 때는 선창(船滄)
이었다 하며 선진리성이 있는 지역이다.
일정에는 없었으나 사천읍성에서 문득 추가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
한참을 걸을 때는 후회되었으나 잠시였을 뿐이다.
처절한 전투에 화약고 폭발이라는 액운까지 겹쳐 대패했던 곳, 바로
그 결과물인 조명군총을 외면하면 후회될 듯 해서 그랬다.
조명군총
주마간산식으로 나마 살펴본 후 운 좋게도 사천읍 귀로가 편승으로
해결되어 곧 관율역길이 시작되었다.
사천읍 중심부를 길게 관통하는 '수양로'가 외곽으로 벗어날 즈음에
'두량로'가 바통 터치, 정동에서 헤어졌던 33번국도를 만난다.
구암교차로다.
국도와 크로스(cross)하는 두량로는 이름대로 두량리(斗良)길이다.
중선포천(中宣浦)을 건넌 두량로는 예전엔 밀물 때 배가 들어왔다는
축동면 배춘리와 양동삼거리를 지나 두량농공단지를 휘돌아 간다.
두량 들의 젖줄 두량저수지의 금곡천 관율교를 건너면 두량2리다.
사천과 15리길 관율역이 있던 관율마을의 새 이름이다.
사천읍은 각기 내력을 지닌 마을 이름들을 다 지우고, '4' 자도 빼고
일률적으로 1, 2, 3, 5, 6리로 통일하는 건조한 작업을 왜 했을까.
관율교
잘 닦여진 길을 전세낸 듯 한가로이 걸으며 평화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는 늙은 이처럼 봄갈이에 바쁜 들의 일손들도 그리 보였는데 함께
즐기자는 듯 머리 위를 맴도는 잠자리경비행기들도 평화로워보였다.
아뿔사, 여기가 한국 첨단항공우주산업의 메카렸다.
낙남정맥 한티재에서 해후한 젊은 이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건만.
왜 사천이 적지(適地)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천의 비상(飛上)은 항공
산업의 발전에 달려있다는 것이 시 당국자들의 판단인 것 같다.
말 상대를 만나려고 마을 안으로 갔으나 한낮인데도 아무도 없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시골 마을들의 현실이다.
정자나무 아래에서 겨우 한 분을 만났으나 귀 잡순 노령이라 답답할
뿐이었다.
동문서답일 뿐 아니라 당찮은 일본말을 하는 것이 기이하기도 했다.
내 궁금증은 이 길이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죽봉마을)로 이어지는지
여부였는데....
포기하고 마을 끝 얕은 고개를 넘어가다가 길보다 조금 높은 밭에서
(길을 깎아내린 듯) 일하는 초로남(初老男)에게 익스큐즈를 했다.
북북서로 다가오는 야트막한 능선 일대가 정촌면 화개리란다.
그러니까, 동(우측)에서 북으로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저 산줄기가
돌장고개~무선산~계리재~화개리뒷산으로 이어지는 정맥이다.
낙남정맥이 맺어준 한 인연이 있는 곳인데 들러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관율마을 이장 강명식
일손을 아예 놓고 내 앞으로 다가와 이야기판을 벌인 그는 관율마을
이장 강명식(姜明植)님이다.
내가 10년 연상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 깍듯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조금 전에 나를 답답하고 당황스럽게 했던 노옹이
바로 그의 부친이라니.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가 모질게 고생해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다.
아마, 그 때 일본말을 익히셨는데 무의식간에 튀어나오는 듯.
그래도, 96세의 고령인데도 양주가 해로하셔서 복 받은 가정이라고
온 사천땅의 부러움을 사고 있단다.
봄 밭갈이에 열중중인 그의 시간을 많이 빼앗는 것이 결례거니와 내
시간도 여유롭지 않아 일어섰다.
'관율길'이 따로 있고 구전으로 알고 있다는 관율역 터를 그의 설명
따라 굳이 확인하고 다닐 형편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 날 밤에 진주의 찜질방에서 그의 전화를 받았다.
내 명함(표지기)의 '늙은山나그네의思母曲'이 궁금하다고.
'사모곡'이라는 세 글자가 맘에 걸렸던가.
호남정맥 제암산에서 표지기를 보고 전화했다는 분과 흡사했다.
노부모를 지성으로 모시고 사는 분이라 그런가.
짧은 표현 속에 많은 사연이 함축되어 있다고 느낀 것이.
수 개월 후의 통화에서 부친의 작고사실을 알고 위로했는데 지난 달
(2010년 11월)에 그의 안부 전화를 또 받았다.
사천땅(관율)에 다시 들러달라는 그의 부탁에 인사말 이상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느껴져 고맙기 그지 없다.
이 인연은 장차 어떻게 커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