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 선생님.
이제 올 한 해도 며칠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새 해가 되면 저도 한 살을 더해 어느새 화갑입니다. 뿌듯함보다는 그 동안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그저 부끄럽기만 합니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시적 화자인 젊은 청년이 생각나지않습니까? 문득 그 외롭고 고뇌에 찬 청년이 마치 나의 분신이라도 되는 듯이 자꾸 지난 세월에 비친 제 얼굴을 안쓰럽게 들여다 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해 놓은 일이 무엇이었으며, 아동문학을 한답시고 30년 세월을 버티어 온 것이 내 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그동안 아동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대로 작품을 써 온 것이기나 한 것일까, 앞으로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만한 작품이나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그 동안 나는 동심을 핑계로 거짓부렁의 글을 써 온 것은 아닐까 하는 갖가지 상념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할텐데, 혹시 내가 죽고 나면 몇 사람이나 나의 작품을 기억하며 그리워할까,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감동의 봇물을 쏟아부을 만한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층계 수를 헤아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 층계 수에다 현재의 제 나이를 더해 80이 넘으면 혼자 즐거워하고, 그 숫자에 턱없이 못 미치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갖는 되먹지 못한 버릇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꾸 뭔가 좋은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2.
K 선생님.
요즘 들어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문학을 시작했으며, 글쓰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의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학을 처음 시작한 70년대 초만 해도 날카로운 필봉이라도 휘둘러 어지러운 세상과 사회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80년대엔 남들이 나를 작가라 칭하며 부러워하는 눈길에 어깨를 들먹이며, 그래 나는 너희들이 못하고 할 수 없는 문학을 하며 세상에 의미있는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그래도 제법 문학의 본질에 가까운 생각으로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한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생각이 싹 가시고 속물적인 생각만을 하는 것 같습니다. 듬직한 원고료를 받아서, 아니면 두둑한 인세라도 받아 늘 쪼달리며 사는 아내에게 믿음직한 남편이 되고 싶다, 그것도 아니면 작품을 써서 그 보상으로 모을 만큼 돈이라도 모이면 도시 가까운 농촌에 황토방이라도 하나 마련해 문학을 잊고 살아 보겠노라는 바로 그 속물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 이러니 어찌 지금까지의 내 문학이 사이비가 아닐 수 있으며, 이 이러니 어디 문학을 한다고 남들 앞에 떳떳하게 얼굴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정말 부끄럽고 부끄럽고 치사한 생각입니다.
3.
K 선생님.
정말 나이 육십에 가까워지다 보니 이제야 글이라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은 멋 모르고 원고를 쓴답시고 글을 휘갈겨 온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언제 한 번이고 퇴고를 제대로 한 적이 있었으며, 대학 노트에 깨알같이 작품을 썼다가 지우고 고친 적이 있었으며, 언제 한 번이고 남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고 부러워하거나 자신의 작품을 부끄러워 한 적이 있었으며, 언제 한 번이고 작품 속의 등장인물과 한 몸 한 뜻이 되어 뒹군 적이 있었으며, 언제 한 번이고 작품을 제대로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제대로 한 적이 있었으며, 언제 한 번이고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마음 속을 엿보고 함께 괴로워하고 아픔과 고통을 같이 한 적이 있었으며, 언제 한 번이고 나와 작품이 일치되는 그런 작품을 쓴 적이 있었단 말인가. 하루에 원고 80매를 쓴 필력을 자랑하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 생각하면 그런 제 자신이 부끄럽고 치사하고 더럽게 생각됩니다.
이렇게 후회하는 이제는 작품 하나라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완벽주의를 고집하고도 싶습니다. 작품 발표에 초조해 하지 않으며,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2004년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연간집에도 선뜻 작품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이제로 제대로 된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발표한 작품이 단편 소년소설 <세한도에 봄볕 들다>와 <시오리 눈길을 걸어>, 그리고 장편 아동소설 <혼자 걷는 길>입니다. 이제는 글자 하나에도, 이제는 어구 하나에도, 이제는 문장 한 줄에도 뼈를 깎는 아픔으로 자신을 투척하는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4.
K 선생님.
이제는 사람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여유로운 웃음을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편협하게 사람을 대하고 사귀어 왔는지 제 자신이 그저 부끄럽고 초라할 따름입니다. 그 동안 무신론자로만 살아왔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이제는 제대로 여유로운 마음으로 종교 하나쯤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부로 재직하는 제 친구를 대부로 하여 천주교에 귀의할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 동안은 정말 마음의 빗장을 닫은 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은혜를 베풀었으니 너도 그 은혜에 보답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며 내게 은혜를 입었던 사람의 침묵에 배신감을 느낀 적이 한 두번이었으며, 이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다며 이빨을 간 적이 어디 한 두번이었으며, 대가 마음의 문을 열어 손짓하는 데에도 행여나 상처를 입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전전긍긍한 적이 어디 한 두번이었습니까.
이제는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동문학이 무엇입니까.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구나 제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순진무구한 아동문학을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 주위엔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그런 사람까지도 사랑하며 진정한 아동문학 작품을 써 보고 싶은 자신감과 용기도 생깁니다.
5.
k 선생님.
이제는 작품을 나보다 잘 쓴다는 후배가 있으면 격려하고 칭찬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나도 그만큼 잘 써야겠다는 오기도 생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동화작가 한정기 선생의 장편 아동소설 <멧돼지를 잡아라>을 읽고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도 이만큼 쓸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가졌습니다. 작품의 서사 구조를 엮어가는 탁월한 구성력, 갓 잡아올란 생선 비늘처럼 번뜩이는 감수성으로 버무러진 아름다운 문체, 아이들의 동심에 대한 놀라운 관찰력을 보고 그만 주눅이 들었습니다.얼마 전에는 동화작가 이상미의 아동문학평론 신인상 당선작인 <흙 동무도 내 동무>를 읽고 나도 이런 소년소설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가진 적이 있으며, 동화작가 이채울의 동화집인 <도시로 간 작은 배>를 읽고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에 대한 그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내게도 아직 남아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며, 동화작가 최영의의 동화집 <교실을 지키는 허수아비>를 읽고는 그 빛나는 상상력과 작품을 엮어 가는 다양한 기법의 찬란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맥파 동인집에 실린 동시인 김종순의 주옥 같은 시를 보고, 이 이렇게 맑은 심성과 빛나는 이미지 구사력을 가진 사람이 왜 동화를 쓰지 않을까 하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나보다 작품을 잘 쓰는 동료 작가나 후배 작가의 좋은 작품을 보면 시기심 대신 진정으로 축하해 주고, 나도 그런 좋은 작품을 쓰고 싶은 창작 의욕이 불끈 불끈 치솟아 오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선의의 경쟁자가 내 곁에 있기에 나에게는 좋은 자극이 될 수 있구나, 이런 작품을 시금석으로 삼아 나의 상상력에도 불씨를 놓아야 하겠구나 하는 긍정적인 세계관도 가져 보게 됩니다. 이런 걸 보면 이제야 나도 철이 조금 드나 봅니다.
6.
K 선생님.
며칠 전에 우리 아동문학인협회에 아름다운 소식을 들은 적이 있겠지요? 전임 주성호 회장이 우리 회의 발전 기금으로 일천만 원의 거금을 보시한 일 말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 흔한 일도 아니며, 이런 일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건을 보고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지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쩨쩨하게도 그 동안 밀린 회비의 자그마한 액수에도 놀라 이걸 어떻게 하나 전전긍하는 데에도, 전임 주성호 회장은 그런 아름답고 거룩한 일을 저질렀으니 어찌 내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사건은 두고 두고 우리 부산아동문학사 위를 소문처럼 떠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불씨가 모든 회원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지폈으니까, 앞으로는 회원 모두가 네 일 내 일을 가리지 않고 헌신할 게 틀림 없습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그런 거금은 투척하지 못합니다만, 우리 회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좋은 글을 많 쓰고, 무럭무럭 커 올라오는 후배 작가와 시인들을 위해 앞 길을 환히 열어주고, 그들의 귀에 새록새록한 좋은 경험을 들려줄 것이며, 비록 쓰잘 데 없지만 제가 가진 모든 지식을 그들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으로 쓸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저도 이제는 철이 조금은 드나 봅니다.
7.
K 선생님.
밤이 깊었습니다. 그 동안 선생님께서는 너무 오랜 침묵을 지켜 오신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알게 된 30여 년 전부터 선생님의 다채로운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능숙한 서사적 기술을 믿어 온 터입니다. 새해부터는 그 예리한 필봉을 다시 휘둘러 후배들이 탁월한 동화작가로 우러러 볼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저도 글자 하나 하나에, 어구 하나 하나에, 문장 한 줄 한 줄에 뼈를 깎는 장인정신을 발휘해 좋은 작품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새해 첫날부터 한 사흘 간 집 사람과 함께 남도를 여행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가난한 서생의 집에 시집 와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온 한 여자에 대핸 뉘우침과 고마움의 여행이 될 것이며, 또한 저에게는 새로운 문학의 길을 위한 새로은 충전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협회 회원 모두가 건강하고, 그 분들의 집집마다 나날의 삶에 은혜와 은총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린이였다>라는 안데르센의 말을 떠올리며 한 해의 끝에서 뒤돌아보는 제 부끄러운 넋두리를 가름할까 합니다. 부디 오늘 밤도 좋은 꿈 많이 꾸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 다시 뵙기로 하고 이만 물러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첫댓글 김문홍 선생님의 말씀에, 목이 콱 메입니다. 한 해 동안 좋은 글들 많이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에는 소원하시는바를 이루시고, 빛나는 건필의 을유년이 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김문홍 선생님, 늘 좋은 글로 카페를 빛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동료나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글을 쓰도록 제 자신부터 노력해야 될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멋지고 아름다운 동화를 보여주시길 빕니다.
늘 감동이 있는 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동화 많이 쓰실 겁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치열한 작가정신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겸허한 김형의 고백에 새삼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도 재주가 없지만 부산아동문학을 위해 새해에도 후배 양성에 부족한 역량을 쏟아 붓겠습니다!
30년 전 젊은 시절, 퍼득이는 시어 하나를 낚아올리기 위해 밤을 하얗게 밝히곤 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진실을 도려내어 한 장, 한 장 모자이크한 김형의 자화상을 보며, 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요. 김형은 너무 치열하게 썼고, 연구했고, 생활해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더 나아가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비장하리만치 단단한 비상을 준비하니,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모든 동료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오늘 김형의 이<아동문학 시론>은 이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생생한 자료로 남을 것입니다.
천주교로 귀의하신다니, 그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저도 새해부턴 신앙생활에 좀 더 센 불을 붙여볼까 합니다. 새해 첫날 부터 사모님과의 남도 여행, 자막 위로 잔잔하게 떠오르는 한 편의 드라마 영상같습니다. 은은한 추억들 짚어가며 모처럼의 여유에 흠뻑 젖기를 바랍니다.
아슴히 느껴지는 것들을 꼬집듯 적어 놓아 가슴을 파네요. 지금껏 헛문학을 하고 헛삶을 살아온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여행 하십시오. -내가 본 것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김박사의 아동문학 통신이다.
선생님. 오늘은 감동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감동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셔서 후배들의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 주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김문홍 선생님,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쓰신 글은 선생님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저희들의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 가슴에 세겨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