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국문학자. 본명 동탁(東卓). 경북 영양(英陽)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1941년 혜화전문(惠化專門)을 졸업하였다.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근무하다가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ㆍ박목월(朴木月)과 함께 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해방 후 명륜전문 강사를 거쳐 1948년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 재직 중 병사(病死)하였다.
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이다. 1962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자유문학상(1956) 수상. 1971년 서울 남산에, 1982년 고향인 경북 영양군 일월면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장지(葬地) :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
아버지는 헌영(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 류씨(全州柳氏)이다. 4남매 중 둘째 아들이며,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ㆍ25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작품 활동은 1939년 4월 [문장(文章)]지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같은 해 11월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이 추천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풍의상>에서는 전아한 한국의 여인상을 표현하였고, 〈승무〉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지(告知)시키고 있다. 조지훈의 작품 경향은 <청록집(靑鹿集)>(1946)ㆍ<풀잎단장(斷章)>(1952)ㆍ<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1956)의 작품들과 <역사 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박목월(朴木月)ㆍ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고사(古寺) 1>ㆍ<고사 2>ㆍ<낙화(落花)>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시편에 담긴 불교적 인간 의식은 사상적으로 심화되지 않았으나, 유교적 도덕주의의 격조 높은 자연 인식 및 삶의 융합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풀잎단장>과 <조지훈시선>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 종래의 <청록집> 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달리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ㆍ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으로는 <역사앞에서> <다부원(多富院)에서> <패강무정(浿江無情)> 들이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연보】
1939년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지에 추천되어 등단
1941년 혜화전문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 강사
1946년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유문화사) 간행
1948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임
1952년 처녀시집 <풀잎단장>(창조사) 간행
1953년 평론집 <시와 인생>(박영사) 간행, 평론집 <시의 원리>(산호장) 간행
1956년 시집 <조지훈 시선>(정음사) 간행. 자유문학상수상
1959년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부임. 시집 <역사 앞에서>(신구문화사) 간행.
1962년 수상집 <지조론>(삼중당) 간행
1964년 시집 <여운>(일조각) 간행, 수필집 <돌의 미학>(고대출판부) 간행, 평론집 <한국문화사서설>(탐구당) 간행
196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1973년 <조지훈전집>(일지사.전7권) 간행
【특징】 회고적 자연 친화, 불교적 선 감각, 민족적 정서, 동양적 예지, 조탁된 서정ㆍ시어.
【문학 세계】
조지훈은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과 <봉황수>를 정지용의 추천으로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단했다. <고풍의상>은 그 표제가 말하고 있듯이 한국의 고전적 생활 문화에 담긴 여성적 품위와 의상미가 결합된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작품 속에 표현된 한국의 전아한 고전미는 독자로 하여금 평화적 삶의 내적 질감을 공감할 수 있게 한다.
또 <봉황수> 에서는 궁전의 건축미의 몇 가지 요체를 예각적(銳角的)으로 묘사하면서 조선시대의 주권을 행사한 권력자들과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을 대비하여 피지배자의 고통과 비장감을 토로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 의식과 민족 의식을 서정적 대상을 삼는 초기의 시적 성과는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펴낸 <청록집>에 집약되어 있다. 해방 공간에서 조지훈은 순수한 시정신을 지키는 사람만이 시인으로 설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개성의 자유를 옹호하고 인간성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적 열정은 시집 <역사 앞에서>에서 지사적인 목소리로 나타난다. 당대 정치의 부패상과 사회적 부조리, 민족 분열과 동족 상잔이라는 타락한 현실을 투철한 역사 의식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특히 <다부원에서> 는 전쟁의 참상을 체험한 바탕 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을 절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쟁시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고전 문학의 연구와 한국문화 일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국문화사서설>을 냈다.
【작품 세계】
초기시를 대표하는 <청록집>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회고적(懷古的) 취미, 자연적 친화성(親和性), 불교적 선감각(禪感覺)을 그 주요 바탕으로 삼고 있다. 어렸을 때 한문을 익힌 까닭에 일찍부터 당시(唐詩)에 친숙했었고, 유교적 가정에서 자라 장자(長者)의 기풍을 갖추었으며, 불교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주어서, 이러한 요소들이 작품에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시의 생명을 무엇보다도 미세계(美世界)에서 추구했으며,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이론을 통해서도 이것을 주장했다.
한시가(漢詩家)나 시조시인과 같은 전통적인 시감각으로 동양적ㆍ고전적 시세계를 노래하여 십대 소년기에 이미 대가적(大家的) 위치에 올랐으나, 끝내 이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여러 번 실험적인 시작(詩作)을 시도한 적은 있으나, 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미세계의 영역으로 돌아왔으며, 우수한 작품들은 다 이 계열에 속하는 것들이다.
8ㆍ15와 6ㆍ25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사회시편(社會詩篇)도 상당히 많은 분량에 달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대부분 시집 <역사 앞에서>(1959)에 수록되어 있으나,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초기 작품보다 떨어진다.
광복 이전의 작품은 <청록집>과 <풀잎단장(斷章)>(1952)에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일제 말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고전적 감성을 바탕으로 한 옛것에의 향수와 선적(禪的)인 관조의 감각이 주조를 이루었다.
▶초기시 : <청록집>을 통해 자연을 노래하거나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의 향수, 불교적 선감(禪感) 등을 표현했다. 서정성을 바탕으로 동양적, 고전적인 시세계를 애조를 띠면서도 심미적 안목으로 표출하였다.
▶후기시 : 6ㆍ25를 분기점으로 하여 회고적 취향과 동양적 자연에서 벗어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역사 의식을 반영하였다. 이들 시는 높은 예술적 차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나, 고조된 사회 참여 의식이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사회적 부조리 때문에 역사의식을 내포한 사회 참여시가 되어 저항적인 시혼을 발휘하였다.
【
국문학사상의 위치】
- 일제말기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저항하여 회고(懷古) 취미나 선적(禪的) 감각, 애수 등을 노래함
- 고전적이며 관조적인 품격의 시를 썼으며, 절개와 용기의 지사로 일컬어진다.
【시】*<고풍의상>(1939) *<승무>(1939) *<봉황수>(1940.이상 「문장」지 추천작) *<낙화>(1946) *<완화삼(玩花杉)>(1946) <파초우(芭草雨)> *<풀잎 단장>(1952) *<민들레꽃>(1956)
【시집】*<청록집>(1946.공동시집, 해방 후 최초시집.을유문화사) *<풀잎 단장(斷章)>(1952.창조사) *<조지훈시선>(1956.정음사) <역사 앞에서>(1959.신구문화사) <여운(餘韻)>(1964.일조각) <청록집 기타>(1968) <청록집 이후>(1968)
【시론집】<시의 원리>(1953.산호장) <시 창작법>
【수필집】<창에 기대어>(1958) *<지조론>(1962.삼중당) <돌의 미학>(1964.고대출판부)
【평론집】<시와 인생>(1953.박영사)
【저서】<시의 원리>(1953.산호장)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1964.탐구당)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1964)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1964)
【번역서】 <채근담>(1959)
【전집】<조지훈전집>(전7권.1973.일지사)
-------------------------------------
<조지훈의 시세계> - 조남익
조지훈의 시세계는 6ㆍ25전쟁을 경계선으로 하여 불교적인 미의식의 세계와 민족적ㆍ정치적인 사회시(社會詩)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의 가장 우수하고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전자(前者)의 세계로 그는 이 방면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제1기 : 시집 <청록집>(1946) <풀일 단장>(1952) <조지훈시선>(1956) - 민족적 정서, 전통에의 향수, 불교적 선미(禪味)
▶제2기 : 시집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 조국의 역사적 정치 현실 참여
조지훈은 1939년 4월호 [문장]지에 청록파 시인 중 제일 먼저 <고풍 의상>이 첫 추천 작품으로 발표되었고, 이어 <승무(僧舞)>(1939.12) <봉황수>ㆍ<향문(香紋)>(1940.2) 등으로 추천을 통과, 박두진보다 한 달 늦게 시단에 데뷔하였다.
그의 시는 일제 말기 말살되어 가는 우리의 정신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전아한 우리말의 회고적 에스프리를 바탕으로 민족적 정서ㆍ전통에의 향수ㆍ불교적 선미(禪味) 등을 조탁된 서정으로 표현, 세련되고 고품(高品)한 시격(詩格)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같은 청록파라 해도 ‘정상에서 두 손을 활짝 벌리고 하늘을 향해서 있는 자세가 두진(斗鎭)의 것이라면, 노송(老松)에 기대어 솔바람 소리와 개울물 소리에 눈을 감고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지훈의 자세’(정한모: <청록파의 시사적(詩史的) 의의>)로 볼 수 있다. 즉 박두진이 인생을 위한 자연시인이며, ‘해’의 시인이라면, 조지훈은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고전적ㆍ의고전적(擬古典的)인 시인이었다.
이것은 그의 시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였다. 그의 감각적이며, 미려(美麗)한 시풍은 자기에게 알맞은 언어와 정조(情調), 제재를 발견, 일가를 이루었지만, 그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송재영(宋在英) 교수는 그의 <조지훈론>(197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한정된 언어의 구속을 받음으로써 ‘그의 시는 액자 속에 갇힌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 그러나 모든 사람의 눈에 너무나 익숙한 풍경화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의 심미적 표현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시인이란 미의 사제(司祭)요, 미의 건축사다”(나의 시의 편력)는 그의 말에서 보듯 그는 전통적 시관(詩觀)을 지킨 정통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근대정신이나 현대의식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멀리 당송명가(唐宋名家)의 한시율(漢詩律)까지 이어지는데, 이것은 항일투사였던 그의 아버지(趙憲泳)가 아들을 일인(日人)에게 맡기기를 싫어하여 중학을 보내지 않고 집에서 한학을 가르친 그의 성장 과정과도 관계가 있다. 그는 나중에 혜화전문에 들어가 문학 공부를 했고, 서구적인 시작법(詩作法)을 시도하게 된다. 그는 가장 전형적 완벽한 고전주의의 시인이었다.
<조지훈론-자아와 자연의 동질성> - 서익환
시인 조지훈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시인의 한 사람이다. 세칭 청록파 시인으로 박 목월, 박 두진과 함께 일제 식민 통치 말기에 민족의 얼과 정서를 지키기 위해 숨어서 시를 쓴 민족적 전통시인이다. 세계 제2차대전이 종식되고 일제의 식민통치의 굴레에서 벗어나 조국광복을 맞이한 후 카프 문인들의 이데올로기적 프로문학에 대항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했고, 6ㆍ25전쟁시에는 종군문인단을 결성하여 생사를 걸고 전쟁터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였으며, 종전 후에는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지조의 시인으로서 또 양심 있는 지성인이요 학자였다. 결국 그를 지조와 절개의 시인이요 학자이며 고고한 선비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러한 그의 생애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시인 조 지훈은 1920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부친 조헌영과 유노미 사이의 3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조 대대로 문벌이 융성한 전통적 유교가문이었다. 특히 13대 호은공 조전 이후 현재까지 가문의 기반이 되어온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 세워진 월록서당은 유년 시절부터 소년 시절까지 그의 교육을 담당한 곳이다. 현재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이 월록서당은 그의 문학적 재능과 학자적 탐구정신과 지절의 선비적 정신을 계발하게 한 발원지가 되었다. 그는 이 서당에서 한문학,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배우며 정심수덕, 안빈낙도, 상문호학하는 유교적 인간관을 확립하고 문학적 소양을 기르게 된다.
그리고 시인 조지훈의 시세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이고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혜화전문학교를 다닌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경향파 문학을 거쳐 시문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탐미주의, 상징주의, 아방가르드 문학,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등에 경도되었다. 그의 독서체험은 키츠, 예이츠, 발레리, 콕토, 릴케, 헤세 등과 도연명, 이백, 두보, 한산, 백락천, 소동파, 육방옹 등의 작품을 탐독하였고, 성서, 그리스 신화, 유교, 불교, 노장을 함께 읽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독서체험은 그의 시세계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인 조지훈의 문학수업은 평행하는 두 줄기의 문학세계, 곧 서구지향적인 시세계와 한국적 전통지향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게 한 근원이 되었다. [백지(白紙)] 동인 시기에 쓰여진 <화상기(華悲記)> <계산표(計算表)> <진단서> <공작(孔雀)1,2> 등 탐미주의적ㆍ모더니즘적 경향의 시들과 1939년 3월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에 <승무(僧舞)>의 추천과 1940년 2월에 <봉황수(鳳凰愁)> <향문(香紋)>으로 추천을 완료한 시들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이러한 습작기의 시들이나 추천 시기의 시들의 성격은 그의 시세계의 전개과정을 예측하게 해준다.
그러면 시인 조지훈의 시세계의 본령은 무엇일까. 그의 시세계의 변모과정을 통해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의 시세계의 변모과정은 그의 생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와 같은 생애와 시세계의 변모과정은 그 특성에 따라 6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지훈은 <조지훈시선>에서 5기로, 자전적 시론인 <나의 시의 편력(遍歷)>에서는 7기로 구분하고 있다. 즉 <조지훈시선>에서는 (1) 습작 시기, (2) [문장] 추천 시기, (3) 오대산 월정사 시기, (4) 경주 순례, 방랑 시기, (5) 해방을 맞기까지와 해방의 격동기를 지낸 시기로 구분되어 있고, <나의 시의 편력(遍歷)>에서는 (1) 추천 시기, (2) 동인지 시기, (3) 오대산 월정사 시기, (4) 「문장」 폐간 후 낙향 시기, (5) 방랑시기, (6) 고향 초옥에서 해방을 기다리던 시기, (7) 해방으로 인한 일대 전환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지훈의 시기구분은 시집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총괄적이고 종합적인 시기구분으로는 다소 미흡함을 지적할 수 있다. 그래서 6기로 나누어 시기구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제1기(1930∼1939) 자아 상실 : 이 시기는 문학수업(1930-1936)과 습작기(1936∼1939)나눌 수 있다. 문학수업기에는 유교적 전통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또한 외국 동화, 동시를 통해 문학에 대한 기초적 소양을 쌓기 시작한다. 이러한 문학수업은 습작의 준비단계이기도 하다. 지훈이 16세가 되어 습작기에 들어서는데, 이때 지훈은 두 전통 사이에서 고민한다. 즉 서구적 전통에 기반을 둔 문학적 체험과 유교적 전통에 기반을 둔 정신적 체험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그의 갈등은 심미주의적, 모더니즘적 시 속에서 잠정적으로 해소된다. 여기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화비기> <월광곡> <백접(白蝶)> <재단실(裁斷室)> <계산표(計算表)> <인쇄공장>이다.
(2) 제2기(1939∼1940) 자아 모색 : 이 시기는 신교육 및 불교 교육을 통해 자아를 찾는 시기이며, 조부 조 인석의 슬하를 떠나 상경하여 혜화전문학교에서 수학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그는 [문장]에 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다. 그가 시세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만난 전통문화와 민속은 지훈의 시세계를 민족적 전통지향으로 이끈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고풍의상> <봉황수> <무고(舞鼓)> <승무> <가야금> <고조(古調)> <향문(香紋)>이다.
(3) 제3기(1941. 4월∼12월) 자아 확립 : 이 시기는 학업을 끝내고 월정사 강원 강사 생활을 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인간으로서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 가장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준 시기로 [문장] 추천시가 보여준 전통 지향적 경향에서 순수서정시로 전환된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관조적, 선적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가 절정을 이룬다. 그가 주장한 시의 순수서정성과 전통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문학관을 이 시기의 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산방(山房)> <산 1, 2> <정야(靜夜)> <고사(古寺)> <밤>이다.
(4) 제4기(1942∼1945) 자아 갈등 : 일제의 식민지 탄압이 극한에 이르렀던 이 시기에는 민족말살정책으로 말과 글을 빼앗긴다. 친일문학이냐 저항문학이냐 소극적 은둔문학이냐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대다수의 문인들은 친일문학을 택하지만 지훈은 후자를 택한다. 이렇듯 냉혹한 현실에 부딪친 그의 자아는 극심한 갈등에 빠지게 되며 방랑과 향수와 기다림의 정서가 시로 표출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파초우(芭蕉雨)> <완화삼(玩花衫)> <고목(枯木)> <율객(律客)> <낙화(落花)> <피리를 불면> <창(窓)>이다.
(5) 제5기(1945∼1959) 자아 탐구 : 해방과 6ㆍ25전쟁 1950년대에 해당된다. 식민지의 타율적인 공간에서 해방의 자율적인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순수와 비순수, 순수와 참여, 민족문학과 프로문학의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분열, 6ㆍ25 전쟁, 자유와 행하는 정치가 사이의 모순 등으로 끊임없는 혼란이 이어진다. 결국 지훈과 현실사회와의 만남은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의욕과 갈등이 교차하는 이차적인 대립상을 보여주며 그는 그 속에서 부단한 자아 탐구의 자세를 시로 형성화해낸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풀잎단장> <화체개현(花體開顯)> <코스모스> <그리움> <병(病)에게> <손> <절정> <역사 앞에서> <눈 오는 날에> <묘망(渺茫)>이다.
(6) 제6기(1959∼1968) 자아 발견 : 1960년대의 사회적 격동기에 해당한다. 그는 시, 학술, 문단 활동 등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고 타계한다. 계속되는 자유, 민주에 역행하는 정치, 사회적 모순과 비리, 그런 역사적 현실 속에서 지훈은 외롭게 지절을 지키며 시작을 쉬고 학문의 길로 눈을 돌린다. 다시 말해 지훈은 역사적 현실과 만나게 되지만 그 속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시집 <여운>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역사, 자아의 세계를 성찰하는 자세로 시집을 내보낸 것이다. 이 시집에는 자신이 탐구해온 자아의 참모습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결집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은 <설조(雪朝)> <추일단장(秋日斷章)> <아침> <여운> <범종(梵鍾)> <혼자서 가는 길> <종로 5가> <눈> <폼페이 유감(有感)> <귀로(歸路)> <혁명>이다.
그러면 시인 조지훈의 시세계의 본령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자연의 동질성에서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훈은 1939년 일제 말기 최고의 문예지인 [문장]을 통해 시단에 등장한 시인으로 전통적 서정성을 현대시에 계승, 발전시킨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의 제재와 주제, 그리고 형식과 언어에 있어서 드러나는 전통성은 이러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제재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자연 관조, 선(禪) 취미 등을 채택한 것이라든가 시형과 시어에 있어서 고아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한국문학의 전통(지속성)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지향적 시세계가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지훈 또한 그 제재 및 주제의 이행과정에서 볼 때 여러 단계의 변모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과정을 거쳐서 그의 시는 강렬한 전통지향성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세계의 변모는 한마디로 습작기의 서구지향성에서 [문장]의 추천 이후의 전통지향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외형적인 시세계의 변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는 어떤 일관성이 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아에 대한 탐구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지훈의 초기적 유년기에서 청소년기에 이르는 동안 조선 전통의 서당식 교육과 학교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문학수업을 통해 획득한 서구문학의 영향 속에서 출발한다.
사실 이러한 문학적 출발은 우리 문학사에서 그리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년대 한국 시단을 풍미한 서구시의 강력한 영향이 갓 습작을 시작한 지훈의 시적 감수성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초기 시작품으로 <화비기(華悲記)> 계열의 시와 <계산표> 계열의 시에 나타나는 서구지향성은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단계에 머물고 있는 한 젊은 시인의 어설픈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적인 관심은 객관적 현실세계의 문제보다는 자아의 내면적인 세계와 이의 심미적인 표현에 집중되었고, 따라서 그러한 어설픈 서구 풍조의 모방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적 세계의 심미적 표현이란 보다 더 깊은 정신적 기초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나마 심미주의와 모더니즘에 경도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내적 세계의 심미적 표현을 위해 필요한 정신적 토대를 찾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 서구편향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대 한국 시단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고, 습작기를 채 벗어나지 못한 지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미주의와 모더니즘 역시 서구의 정신사에 연결된 것이라는 점에서, 지훈이 추구하는 내면적인 세계의 심미적 표현을 위한 정신적인 근거로서는 불충분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지훈의 딜레마를 해결해준 것은 그를 「문장」에 추천해준 정 지용이었다. 정지용은 지훈에게 서구지향적인 시의 경향을 버리고 한국적 전통지향적인 서정시를 쓸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 지용의 처방은 지훈이 지향하는 바, 자아의 내적 세계의 심미적 표현이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 지용의 충고를 받아들임으로써 지훈의 시는 보다 더 안정된 기반 위에서 자아의 내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정신적 준거가 결여된 서구지향성이 필연적으로 표피적인 모방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그 자신의 삶과 정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세계를 기초로 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힘의 존재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훈이 도달한 근원적인 힘이란 사실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시 속에서 전통문화, 민족정서, 불교와 선미 등 여러 가지 형태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연’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문화란 사실상 자연에서 출발된 것이고, 서구적인 정신과 동양적인 정신의 변별점 역시 자연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근원적인 방식의 차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신적 자세란 시대에 따라서, 또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다소 다르게 발현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내면적 질서와, 개별적인 자아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아를 탐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지훈의 시세계가 도달하게 되는 궁극적인 귀결점이 동양적 자연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훈 시의 근원적인 세계로 ‘자연’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따라서 지훈이 탐구한 자아와 그 배후에 존재하는 자연이 그의 시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나타났을까, 지훈은 시에 있어서 영감과 주의력이 협동하는 창조적 무의식을 상상력이라고 규정하면서, 시란 이것들이 일체화된 ‘상상적 실현’이며 따라서 가공의 허구가 아닌 ‘생활의 진실한 체험의 표현’이기 때문에 ‘자연’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지적한 자연이란 말할 것도 없이 동양적 자연이요,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생활 속에 밀착된 자연이다.
결국 그의 시작품의 근원적 세계인 ‘자연’이란 좁게는 순수한 대상적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넓게는 그가 체험한 삶 전체를 포괄하는 자연인 셈이다. 이 ‘자연’은 그의 시 속에서 때로는 순수한 대상적 자연으로. 또 때로는 전통문화나 민족정서로 혹은 불교적 선미 등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특히 이 ‘자연’은 그의 정신세계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자아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역사의식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아에 대한 응시는 곧 ‘자연’에 이르기 위한 것이고 자연에 대한 관조는 다시 자아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순수서정시와 민족문학을 지향하는 그의 문학관에 비춰보면, 그가 자연을 통해 탐구한 자아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인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은 자아의 배후에 존재하는 거대한 근원적인 질서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 지훈은 초기의 심미주의와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통해서 시세계에서 탐구한 자아의 문제와 자연의 본질을 해명하려고 시도했으나 전통적 가문과 유교적 인간관을 바탕에 깔고 형성된 그의 생애가 그와 같은 서구지향적 시를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그가 창조한 시세계는 민족전통지향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지향의 시세계에서 자아와 배후에 존재하는 근원적 질서의 총체인 자연을 탐구했다. 그것이 동양적 자연이요 선적 자연이며, 허무주의적 자연이다. 또 근원적인 세계인 자연은 해방 이후 사회와 인간과 역사로 전이되고 있다.
(2) 이상과 같은 시세계를 창조한 지훈은 청록파 시인이라는 유파적 명칭을 얻은 시인으로.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 문학의 건립을 주창한 순수서정시의 시인이다.
<조지훈 시비(詩碑)>
파초우(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아라.
들에도 싫지않는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불교적 색채가 돋보이는 선적 분위기와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섬세하고 우아하게 민족의 정서를 노래한 시인 조지훈. 1920년 경북 영양 생으로 본명은 동탁(東卓).
가풍이 엄격하여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독학으로 혜화 전문을 마쳤다. 39년 그의 대표작 <고풍의상> <승무>등으로 「문장」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등단하였다. 46년에는 박두진ㆍ박목월과 함께 시집 <청록집>을 발간하여 이때부터 이들 3인을 청록파라 부르게 되었다. 그들의 공통된 시풍은 자연을 소재로 한 자연예찬의 서정이 담겨 있다.
서울 남산 순환도로 입구에 지훈의 3주기를 맞아 1971년 제자들의 주선으로 건립된 <파초>의 시비는 장남 광렬(光烈)이 맡았고 비양(碑陽)의 글씨는 배길기(裵吉基)가 썼고 비음의 글을 김종길(金宗吉)이 짓고 김응현(金膺顯)이 썼다. 역사ㆍ민속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평범한 관심을 가진 학자였다.
첫댓글 정정햐세요
조지훈의 모는 전주이 李씨가 아니라
全州류柳씨 류노미입니다.
제가 고쳐놓았습니다. 잘 발견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