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유도왕 기무라 마사히코
1917년 큐슈의 구마모토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유도를 수련하기 시작하여 고교 때
이미 4단까지 오릅니다.
18세 때 5단으로 승단하고 20세에 전일본 오픈에서 우승한 뒤 이후 13년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유도의 지존이었습니다.
그는 생애 단 네 번 패했는데 그건 모두 20세 이전 성장기의 도장간 시합이나 강도관 도장내 시합의
패배니까 사실상 무패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유도계에는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지금 극진공수의 100인 조수는 기무라가 이틀 연속으로 200명의 상대를 메친 것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다만 최영의는 기무라보다 한 술 더 떠 3일 연속 300인과 싸웠지만.
최영의는 기무라를 자신이 아는 무도가 중 자신과 동등 혹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수련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1950년 유도를 떠나 프로 유도란 걸 시작합니다.
이는 역도산이 스모계를 떠나 레슬링 훈련하러 하와이로 간 것과 같은 시기죠.
당시 스포츠가 상업화 되기 전이어서 유도를 아무리 잘 해 봤자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가 프로 유도니 레슬링이니 하는 걸 시작하게 된 사유가 부인이 결핵에 걸려 당시 엄청 비쌌고
전후 일본에서 구하기도 어려운 스트렙토마이신을 구하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가 무도가로서의 자존심을 좀 구긴 덕분에 부인은 완쾌되었고 자녀들도 훌륭히 길러 냈습니다.
1951년 가토 5 단과 야마구치 6 단이라는 유도가 두 명을 이끌고 브라질로 건너가
지난 20년간 패한 적이 없다던 저 유명한 그레이시 유술의 엘리오 그레이시와 싸우게 됩니다.
먼저 가토가 엘리오와 싸우는데 초크에 걸려 기절하고 맙니다.
유도의 메치기 같은 기술은 별로 소용이 없었지요.
탄력 있는 매트에 한 판 메치기를 해 봤자 별 치명상을 못 줬으니..
몇 주 후 기무라와 엘리오의 시합이 개최됩니다.
유도냐 브라질 유술이냐.
2만 명의 관중이 모여들었고 브라질 대통령과 부통령이 링 사이드에 임석했습니다.
그레이시 일가는 커다란 관(棺)을 하나 끌고 나왔습니다.
데스 매치라는 걸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한 제스쳐 였는지도 모릅니다.
기무라 84kg, 엘리오 63kg.. 기무라는 여러 차례 엘리오를 메치고 초크를 성공시키지만
엘리오가 항복하지 않자 그냥 기술을 풀어버립니다.
팔 꺽기에 들어 가지만 엘리오는 기브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팔이 하나 부러졌지만 엘리오는 시합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컨이 타올을 던져 시합은 끝났습니다.
무려 네시간이 넘는 혈투였습니다.
사실 엘리오의 측근들은 기무라와의 시합을 말렸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기무라가 첫번째 초크(조르기)를 걸었을 때 엘리오는
자신이 잠깐 실신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무라는 초크를 풀어 버리고 다른 기술을 시도 했다고 합니다.
엘리오는 이 인터뷰에서 기무라를 신사로 평가하더군요.
기무라 시합으로 유명한 것이 1954년 크리스마스 날에 벌어진 역도산과의 세기의 대결이었습니다.
세기의 대결로 표현했지만 사실 쇼 레슬링에 지나지 않는 각본이 있는 시합이었지요.
각본은 첫 시합은 무승부 그 다음 두 시합은 각각 1승 1패 씩 한다는 것이었죠.
무승부로 하기로 한 그 첫 시합이 그날 벌어진 겁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기무라와 역도산은 그 각본을 계약서로 만들어 날인 하기로 했는데
역도산은 기무라의 날인이 들어간 계약서를 받아 쥐고 자신의 날인이 들어간 또 한 부의 계약서를
기무라에게 교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사람 좋은 기무라는 역도산의 말만 믿고 계약서 한 부를 받지도 못하고 시합에 임했습니다.
시합 각본은 역도산은 기무라의 가슴에 가라데 촙을 날리는 것이었는데 기무라가 (고의인지 실수인지)
역도산의 사타구니를 찼고 역도산은 기무라의 목을 공격했습니다.
기무라가 쓰러지자 얼굴에 무자비한 킥을 날려 그만 KO 되고 맙니다.
이 때 링사이드에서 한 사람이 비호처럼 링으로 달려 가는 게 보였습니다. 최영의였죠.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막고 난리가 나고....
이튿날 사람들은 그 사나이를 막지 못했다면 만인현시하의 살인극이 빚어 질 뻔했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최영의가 1923년 생 기무라가 1917년 생이니 여섯 살 나이차가 있었고
최영의 역시 유도를 수련했으므로 기무라를 선배 대접을 해 줬지요.
그런데 역도산이 기무라를 마구 두들기자 그만 이성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만 해도 최영의는 31세의 팔팔한 청년이었으니까요.
당장 기무라의 추종자들이 역도산을 죽이겠다고 대거 상경합니다.
그 중에 최영의가 있었습니다.
불안을 느낀 역도산은 집에 엽총을 걸어두고 제자들로 하여금 경비를 서게까지 합니다.
최영의는 역도산을 혼내주려고 벼릅니다만 나중에 기무라가 역도산 한테 얼마간의 돈을 받고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는 것을 알고 기무라를 찾아가 난리를 치기도 합니다.
이후 최영의는 역도산에 대한 분노가 더해져 역도산에게 도전하지만 교묘히 도전을 회피했고
최영의를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합니다.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기무라나 최영의는 언론 플레이를 하는 역도산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역도산은 정말로 최영의를 두려워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직접 겨룬 기회는 없었지만 자신이 1승 1패를 기록한 톰 라이스가 그의 일격에
그대로 뻗어서 들것에 실려나가는 것을 보고 질려 버린 것이죠.
그가 특히 두려워한 것은 이작은 사내가완력으로도 월등히 신체가 큰 자신과 대등하다는것이었지요.
한 여흥 자리에서 재미로 팔씨름을 했는데 간신히 최영의를 이겼지만
열받은 최영의가 그자리에서 손가락 힘으로 동전을 구부리는 걸 보고 아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역도산과 최영의가 사이가 벌어집니다. 또한 기무라도 최영의와 소원해졌습니다.
최영의 입장에선 레슬링이니 뭐니 쇼 같은 게 도대체 맘에 들지 않는 것이었죠.
하지만 기무라는 부인의 약값을 대기 위해 무슨 일이든 돈 되는 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기무라의 마지막 시합은 그가 42세 때 벌인 산타나와의 발리 투도 시합입니다.
엘리오를 이긴, 유술과 복싱과 카포에라를 하는 종합 무술인이지요.
그 첫 시합은 기무라가 이기고 두번째 리벤지매치는 무승부를 기록합니다.
기무라든 역도산이든 최영의든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 어려운 청년기를 보내고
모두들 자기 분야에서 치열하게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습니다.
역도산 1963년 몰, 기무라 1993년 몰, 최영의 1994년 몰.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 중 오직 엘리오 그레이시만이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1914년 생이니 올해 우리나이로 91 세지요.그의 아들들이400전 무패라는격투의 전설 힉슨 그레이시,
그리고 초기 UFC를 휩쓴 호이스 그레이시등입니다.
첫댓글 일본 사람한테 배울점은 많으나 일본은 젖대젖 나라 겠지요.~
네~ 일본은 젖대젖 나라에요. ㅎㅎㅎ
대단한 인물들의 전설이네요.
뒷담화 ㅎㅎㅎ
태권도일본의전설도 알만하군요 울아들은 합기도7년차이네요.
이왕 배움이라면 깊이있는 배움을 해야합니다. 일반관장보단 훌륭한 관장님을 찾으세요.
일반과훌륭함이라함은...?
돈과 명예? 설명을 제대로 하려면 .... 넘 길어요.
군산에 역도산을 서울어느 극장앞에서 단한방에 쓰렸드렸다는 선배님들의 말을 들은 기억이 생각 나는군요, 무기없이 주먹으로만 싸우던 그시절리 다시 돌아 오기를...........
그땐 정이 있었죠.
재미있게 잘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