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는 포유류 코풀솟과에 속한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 놈들은 특이하게도 코 위에 뿔이 솟아나 있어 자못 위세가 등등하며 사실 그 큰 몸과 뿔로 인해 천적이 거의 없기는 하다. 그러나 한편 그 무적의 뿔때문에 멸종 위기의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생존의 한 아이러니라 하겠다. 결국 진화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결과가 된 것이겠지만 아마도 그들 조상이 체구는 작지만 두발로 걷는 인간의 존재를 간과한 벌을 받는 것이겠다.
어쨋든 계속 들려오는 멸종위기의 소식들은 안타깝기만 한데 대부분의 멸종에 인간이 개입되어 있으니 이 또한 안따까움을 넘어 통탄할 일이다. 도대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저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을 외칠 수 있는 이존재는 가히 천적이 따로 없다. 그러기에 또한 철저히 외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외로운 존재에게 무소의 뿔처럼 또 혼자서 가라고 외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말은 원래 최초의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의미는 부처님이 열반하기전 최후의 유훈인 "제행이 무상하니 방일하지말고 정진하라"와 일맥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는데, 그 중 한 구절을 옮겨본다.
如獅子聲不驚(여사자성불경)
如風不繫於網(여풍불계어망)
如蓮花不染塵(여연화불염진)
如犀角獨步行(여서각독보행)
사자처럼 소리에 놀라지 말고
바람처럼 그물에 걸리지 말고
연꽃처럼 진흙에 물들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든 것은 변하고 덧없음에 탐욕을 버리고 각성을 이룸에 있어 용맹 정진할 것을 주문한 것일게다. 더불어 정진이란 결국은 혼자서 이룰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처자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모든 욕망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 했던 것이다.불교적 가르침대로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 산다면 개탄할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은 가르침대로만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아마도 기독교의 '원죄'의 문제도 그러한 인간의 속성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무소의 뿔처럼' 을 살펴보자. 무엇이 주인공인가? 무소인가, 아님 뿔인가? 문맥상으로는 뿔이겠지만 뿔이 주인공이라면 뿔이 외뿔로 서있는 것처럼 그렇게 혼자서 가라는 것인데... 뿔이 가는 것인가, 무소가 가는 것인가. 뿔은 단지 무소 콧잔등에 얹혀서 무소가 가는대로 끌려가는 존재가 아닌가? 더욱이 2각 코뿔소도 있는 것이니 '뿔처럼'은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어떻다는 것인가. 주로 혼자서 떠돌이 생활하는 "무소처럼 혼자서 가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니 그리 바꾸자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비록 뿔이 무소 콧잔등에 얹혀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무소의 한 성정을 이룬다고 볼 때 뿔과 무소는 일체를 이룬다고 할 것이며, 또한 우리네 인간도 홀로 간다 하지만 실상은 나를 둘러싼 "色"에 얹혀 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쨋든 우리는 결국 혼자서 왔다가 혼자서 갈 수밖에 없는 운명들이며 이 찰라 서로 어울려 웃고 찧고 까불며 놀고 있지만, 아아, 갈 때는 철저히 외롭게 그것도 철저히 혼자인 것이다. 어느 누가 있어 암흑을 헤매는 영혼의 저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정진을 하라는 것일게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저 연꽃처럼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외롭지만 용감무쌍하게 걸어 가라는 것이다. 그런 단련이 있어야 겨우 저 바르도의 텅빈 공간의 공포를 겨우 면할 뿐인데, 이 세상
"色"에 집착하고 애착하며 그 홀림에만 빠져있다면 우리의 가엾은 영혼은 어찌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저 마지막을 향해 일로 매진하고 있다. 그 마지막을 의연하게 맞기 위해 우리는 이제 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갈 일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