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화수계 창계 운영(咸平李氏 花樹契 創栔 運營)
1. 함평이씨 화수계 태동(咸平李氏 花樹契 胎動)
가. 화수계 태동 배경(花樹契 胎動 背景)
우리 선조님들은 일제(日帝)가 35년간 식민통치를 하면서 우리 민족(民族)의 성씨(姓氏)를 빼앗아가고 거기에다 단군 왕검(檀君 王儉)의 국조(國祖)와 각 성씨(姓氏)의 시조(始祖)를 비하인멸(卑下湮滅) 하고자 각 읍면 단위로 신사(神社)를 세우고 학교에는 봉안전(奉安殿)을 두어 인본국조 천조대신(天照大神)(아메타라스 오미가미)를 숭상배례(崇尙拜禮)토록 강요를 당하면서 울분과 비통(悲痛)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1946. 8. 15. 광복이 되자 우리 선조님들은 빼앗겼던 성씨(姓氏)를 되찾고 조상(祖上)을 정성껏 받들 수 있는 기쁨에 일가(一家)간의 한자리에 모일수 있는 함이 광주 문중(咸李 光州 門中)인 화수계(花樹契)를 하루빨리 결성하여 지난날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조상(祖上)을 모르고 지내면서 본의 아니게 일가간과 상봉(相逢) 없이 소원(疏遠) 하게 지내왔던 것을 조속히 불식(拂拭) 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서 숭조애족(崇祖愛族) 정신으로 조상 대대(祖上 代代)로 이어온 함이(咸李)의 전통사상을 복고(復古)하여 함이(咸李)의 자존(自存)을 회복(恢復)함과 동시에 번영하는 함이 문중(咸李 門中)을 만들어 나아가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광복후는 시국이 좌우(左右)익으로 분열되고 일제의 경제적 수탈(收奪) 여진(餘震)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도 먹지 못하는 아주 혼란스럽고 가난한 시절였음에도 광복 후 1947. 6. 1. 전국성씨중에서 제일 먼저 함평이씨(咸平李氏) 광주 화수계(光州 花樹契)를 장헌(章憲)(목사공파(牧使公派). 민협(敏協)의 자(子)) 민암(敏岩) 민석(敏錫) 대교공파(待敎公派) 홍서(弘緖)의 자(子)) 용근(龍根)(도행(道行)) (효우공파(孝友公派) 재준(載俊)의 자(子))께서 주축이 되어 창계를 하였으며 그후 곧이어 송계(松溪) 계택(啓澤)(현령공파(縣令公派) 영헌(永憲)의 자(子)) 인신재(忍愼齋) 계령(啓寧)(기성군파(箕城君派) 용헌(龍憲)의 자(子))께서 주간이 되어 임원과 공히 화수계(花樹契)의 활성화(活性化)를 기함과 동시에 제반(諸般) 문중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갔었다.
나. 광복(光復)(1945. 8. 15) 전후 광주정황(前後 光州情況)
우리나라는 1910. 8. 29. 한일늑방(韓日勒邦)이 된후 일제(日帝)는 35년간 식민통치(植民統治)를 하면서 한민족(韓民族)의 말살(抹殺)과 황국신민화(皇國臣民)를 기하기 위하여 국가(國家)의 존립체제(存立體制)인 국조(國祖), 국기(國旗), 국화(國化), 국어(國語)를 송두리체 없에버렸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우리나라 국조(國祖)이신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설화(設話) 또는 신화(神話)라고 날조하면서 비하인멸(卑下湮滅)시키고 그대신 도(道), 군(郡), 면(面) 단위로 신사(神社)를 세워 일본국조(日本國祖) 천왕대신(天王大神)(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숭상 신봉토록 하였다.
둘째는 국가(國家)를 표상(表象)하는 우리나라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를 1910년 8월 29일 한일늑방(韓日勒邦)과 동시에 강하(降下)하여 없애버리고 일장기(日章旗)를 국기(國旗)로 하였다.
셋째는 우리나라 국화(國化)인 무궁화를 거짓으로 눈해피 꽃이라고 속여 우리 민족(民族) 스스로가 파없에도록 하고 그대신 사꾸라꽃(벚꽃)을 관공서(官公署), 공회당(公會堂), 명승고적지(名勝古蹟地)등 사람이 많이 모이고 멈추어 가는 곳에 심었다.
넷째는 1938년 1월 1일에는 우리나라 국어인 조선어(朝鮮語)를 폐지시키고 일본어(日本語)를 국어(國語)로 하였다.
다섯째는 1940년 8월에 창씨개명(創氏改名)하여 한민족(韓民族)의 뿌리인 성씨(姓氏)를 없애고 이자(二字)인 일본인성(日本人姓)으로 창씨(創氏)하여 사용토록 하였다. 이와같이 식민정책을 수행하면서 우리 국민이 피땀흘려 생산(生産)된 곡식(穀食)을 공출(供出)이란 미명하에 수탈(收奪)하여 갔기에 우리 국민(國民)들은 헐벗고 못먹고 질병(疾病)으로 죽어만 갔었고 거기에다 배우지도 못하여 낫놓고 ㄱ자(字)도 못그리는 무식(목불식정(目不識丁))으로 살아가야 했다.
특히나 일제말엽에는 생활고(生活苦)의 고통도 컸지만 자녀(子女)들의 징용징집과 정신대(挺身隊)강제 입대로 사생(死生)의 기로에 있었기에 어느 성씨를 막론하고 화수계(花樹契) 결성은 염두에도 둘 수가 없었다. 유득 광주(光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 도청소재지로 시골에 비하면 행정, 교육 교통,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이 가속화된 편이였다.
그러나 일제는 어디까지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수탈에 목적을 두었기에 광주(光州)라 하여 특별히 다를리는 없었다. 광주는 1896년 7월 1일 전국(全國)을 13도 구역으로 확정함에 전라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고 1914년 4월 광주면(光州面)이 되었고 1931년 4월 읍(邑)으로 승격(昇格)되였으며 1935년 10월 1일에는 광주부(光州府)로 승격되여 광복후 1949년 8월 15일 광주시(光州市)로 개칭될때까지 부제(府制)로 시행되였다.
광복당시 1940년도 광주인구는 60,463명인데(조선인 52,513, 일본인 7,878, 중국인 51, 외국인 21,) 살았으며 이중 일본인은 대부분 관공서(官公署) 은행직원과 상공업에 종사하였고 조선인은 농업과 노동 그리고 극소수는 관공서(官公署) 직원과 상업에 종사하였다. 특히나 일제(日帝)의 수탈에 견딜수가 없어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또는 하와이로 이민가는 동포도 많았다. 관공서(官公署)는 도청 부청(시청)을 비롯한 법원, 경찰서, 세무서, 우체국, 헌병분견소가 있었으며 학교는 서석초등학교를 비롯한 4개교가 있었으며 중학교는 광주서중(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4개교가 있었다.
산업체로는 종방(鍾紡)(일신, 전남, 방직공장)과 도시(道是), 약림(若林), 제사(製絲), 공장이 있었고 금융기관은, 광주 금융조합과 호남(湖南)은행 등 3개소가 있었으며 주로 농업 관리기관이 많았었다. 농사시험장(농총진흥원), 전남축산시험장, 전남잠업시험장 등과 여기에 부수된 기관으로 10개 기관이 있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8.15광복이 되자 일제(日帝)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살수가 없어 만주등 외국으로 떠나갔던 사람들과 일본(日本)에 강제로 징병과 징집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속속 귀국함에 따라 광주의 인구(人口)는 급진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에는 83.000으로 증가되었고 1946에는 2만명이 고향으로 돌아와 103,000명이 되었고. 그때의 치한은 1945년 9월 10일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정이 실시되였다. 미군정 피크대령은 일본인(日本人)으로부터 행정권(行政權)을 인수받아 한국인 지사로 최영욱(崔泳旭), 광주부윤(光州府尹)(시장)에 서민호(徐珉濠), 광산군수(光山郡守)에 최성준(崔聖俊),을 발령하였다. 그때의 행정(行政)구역은 41개정(町)이였고 1946년 4월 11일에는 정(町)을 동(洞)으로 개칭(改稱)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문제가 전남신보를 통하여 발표되자 인민위원회측의 찬탁과 이를 반대하는 반탁시민 궐기대회를 1946. 2. 14. 서중학교 교정에서 개최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여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갑작스러운 인구증가와 쌀부족으로 쌀값이 오르고 쌀을 구할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게 되어 미국의 원조하에 겨우 살아가고 있을때였다.
咸平李氏 光州宗親會誌에서 발취 31世 30世孫 建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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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화수회, 화수회 '그러길래, 왜 화수회라 그랬을까 궁금했었는데
이런 배경을 갖고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