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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79강 枝末法會, 善見比丘(大方廣佛華嚴經 解釋)
(2) 顯法業用
又善男子야 我經行時에 一念中에 一切十方이 皆悉現前하니 智慧淸淨故며 一念中에 一切世界가 皆悉現前하니 經過不可說不可說世界故며 一念中에 不可說不可說佛刹이 皆悉嚴淨하니 成就大願力故며 一念中에 不可說不可說衆生差別行이 皆悉現前하니 滿足十力智故며 一念中에 不可說不可說諸佛淸淨身이 皆悉現前하니 成就普賢行願力故며 一念中에 恭敬供養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如來하니 成就柔軟心供養如來願力故며 一念中에 領受不可說不可說如來法하니 得證阿僧祗差別法하야 住持法輪陀羅尼力故며 一念中에 不可說不可說菩薩行海가 皆悉現前하니 得能淨一切行如因陀羅網願力故며 一念中에 不可說不可說諸三昧海가 皆悉現前하니 得於一三昧門에 入一切三昧門하야 皆令淸淨願力故며 一念中에 不可說不可說諸根海가 皆悉現前하니 得了知諸根際하야 於一根中에 見一切根願力故며 一念中에 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時가 皆悉現前하니 得於一切時에 轉法輪하야 衆生界盡호대 法輪無盡願力故며 一念中에 不可說不可說一切三世海가 皆悉現前하니 得了知一切世界中一切三世分位智光明願力故니라
화엄경 선견비구 이야기가 계속 되고 있는데 십행의 선지식인 선견비구는 지난 시간에 설명한 대목을 보면 상당히 잘 생겼지요. 부처님 모습과 거의 유사한 그런 얼굴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끝부분인 정시법계(正示法界)를 보면 정수범행(淨修梵行) 정수범행(淨修梵行)이라며 범행을 청정하게 잘 닦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주 여러 번 나오고 있지요.
오늘이 지장재일이고 며칠 전이 사월 보름이었고 하안거 결제날인이었습니다.
근래에는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상당히 뜻 깊게 보내지마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부처님 당시에는 이 결제일을 아주 중요시 여겼고 그 다음 해제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일 년 중 그 이틀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어요.
왜 그런가 하니 부처님의 생애를 보면 출가하신 뒤 육년 동안 고행이라고도 하고 수행의 기간이라도 표현을 하는데,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었지요. 수행을 하지 않은 선지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 보면 수행이란 말이 아주 자주 나옵니다.
정수범행(淨修梵行), 정수범행(淨修梵行), 아주 훌륭한 행을 청정하게 잘 닦았다는 말이 선견비구 부분에서도 나오는데 수행 중심으로 살다보니까 사월초파일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으며 부처님 당시에 당신 생일을 잘 치른 적이 없어요. 뒤에 우리 후손들이 그랬지요.
평소에도 수행을 하지만은 부처님 당시에는 특히 결제라고 하는 그런 기간을 통해서 마음을 더 가다듬지요. 그래서 사월 십오일 결제날을 아주 중요시 했습니다.
그 결제가 이제 끝나는 해제일, 그렇다고 해서 수행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락이라고 생각하니까 해제일도 상당히 의미 있게 생각했습니다.
일반불자들로 이야기를 하면 삼일기도라고 하면 기도 입재날과 회향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입재날은 사실 가야돼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입재날은 가 놔야 그래야 기도에 동참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백일기도도 마찬가지이고요. 시작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불교는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라서 결제날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백일기도 회향했다고 해서 그 다음날부터 기도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약속했던 그 날까지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의미 있게 보낸 걸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결제, 해제, 또는 입재와 회향을 뜻 깊게 생각합니다.
종교 중에서도 불교가 가지고 있는 특장(特長), 아주 특별한 장점은 사실 수행이에요.
물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안목으로 설법하신 설법의 내용, 교리가 아주 우수해요. 다른 종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우수하고 또 깊고 복잡해요. 그런 것은 또 불교철학으로, 교리로 자랑할 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수행이라는 것이 밑받침이 되어 있지 않으면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불교의 아주 특별한 장점을 말할 때는 너도 나도 말할 것 없이 수행을 듭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수행을 중심으로 불교단체가 형성되었고, 결제라고 하는 것도 이제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개 기도라고 해서 입재를 하면 그건 쉬워요.
지장기도면 지장기도, 관음기도이면 관음기도를 절에 가서 할 경우도 있고 집에서 할 수도 있고 차 안에서나 어디에서나 틈 나는 대로 하는 것, 이건 이제 거의 상식화되어 있는 이야기이지요.
그 다음 참선이라는 것은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지요.
주력은 자기가 ‘옴 마니 반메 훔’을 하든지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하든지 자기가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그렇게 일체 생활 속에서 놓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걸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경전 공부를 할 때, 경전을 통한 수행은 어떤 것인가 할 때 그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드러내서 이야기를 잘 안하지요. 왜냐하면 경전 속에 너무 흔하게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금강경에 보면 여러 번 나오지요.
‘서사(書寫) 수지(受持) 독송(讀誦) 해설(解說)’ 이 네 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사경이지요. 요즘은 출판을 한다든지 컴퓨터로 경을 입력한다든지, 이게 다 사경에 해당되지요. 옛날에는 출판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가 쓰지요. 너도 나도 씁니다. 쓰는 일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에요. 그래서 경전에 보면 어느 경전 할 것 없이 서사(書寫), 쓴다고 하는 것을 큰 수행으로 생각합니다.
경전을 가지고 수행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관세음보살을 권하는 것도 아니지요. 예를 들어서 금강경이나 법화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거의가 서사(書寫) 수지(受持) 독송(讀誦) 해설(解說)이에요.
서사(書寫)는 출판하는 것, 쓰는 것이지요. 제목만 써도 좋아요. 기도 삼아 제목만 써도 좋고 또 반야심경 한 편을 가지고 천 번 만 번 써도 좋고, 그 다음은 법화경이나 금강경을 쓴다든지 컴퓨터로 입력한다든지, 볼펜으로 쓰든지 붓으로 쓰던지 그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잠깐 동안 부처 불(佛)자 한 자를 써도 좋고 관세음보살을 써도 좋습니다. 그게 서사(書寫)에요. 그럼 경(經)이 될 거 아니에요?
지금은 출판을 하니 작은 책, 큰 책 종류에 따라서 얼마든지 많으니까 그걸 지니고 다니는 것입니다. 인쇄된 경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수지(受持)입니다.
옛날에는 경책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을 상당한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로는 말이 천상에 왔는데, 자기는 어떻게 해서 천상에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스님이 경을 좀 싣고 가자고 해서 그 경을 운반해 줬더니 그 인연으로 천상에 태어났다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 그 자체를 지니고 운반해 다니는 것이 수지입니다.
요즘 같으면 핸드백 속에 들어가는 작은 경전이 많잖아요. [불자수지]라는 책도 있잖아요. 가지고 다니는 용(用)의 경전이라는 뜻이거든요. 가지고 다니는 자체가 수행입니다. 경전 수행의 한 종류에요.
집에서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니고 다니는 것도 그래요. 지니고 다니면 보게 되고, 보게 되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다 보면 깨닫게 되지요.
서사(書寫) 다음에 수지(受持)이고 수지 다음에 독송(讀誦)이지요. 읽고 외우고 읽고 외우고, 수지하다 보면 자꾸 읽게 되고, 읽다보면 외우게 되지요. 세 번째가 독송이거든요.
그 다음에는 해설(解說)입니다. 경전에서는 위인해설이라 하는데 두 자로 하면 해설입니다.
경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요, 모른다고 하지만 모르는 것이 아니에요. 그 나름대로 다 알고 있어요.
어디에서 경전 강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테고, 부처님 제자 이야기가 나오면, 얼핏 들으니까 항상 따라다니는 제자가 1250명이라고 하더라는, 그런 것들도 간단하게 이야기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십대제자는 훌륭한 점이 다 있으니까 그 훌륭한 점을 소개할 수도 있지요.
이런 등등이 다 해설입니다. 뭐 경전을 속속들이 몰라도 상관이 없고, 한문경전을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깊이 알면 더욱 좋지만요.
또 까다로운 교리, 그거 알아야 된다고 생각할 것도 없고,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 불자님들이 아는 만치만 해설해 주면 그것도 훌륭한 수행입니다.
그래서 서사(書寫) 쓰는 것, 수지(受持) 가지고 다니는 것, 독송(讀誦) 읽고 외우고 하는 것, 해설(解說) 설명하는 것이지요.
이 경전을 통한 수행은 경전의 사종(四種)수행이라고 해서 이 네 가지를 꼽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경전에 보면 청수(聽受)라는 말이 있어요. 그것도 수행의 한 가지인데 듣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여기 나와서 한 시간 남짓 듣지요. 듣는 것도 수행이거든요.
옛날에는 그런 것이 없어서 사종수행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지금은 전부 녹음기만 켜면 나오고, 라디오, TV만 켜면 나오는 시대이니까 청수가 포함되지요.
그런데 옛날에는 꼭 설법하는 장소에 가야 들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못 듣잖아요. 지금은 들으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경전에 보면 청수(聽受), 듣는 것도 수행의 한 방법이라고 해 놨어요. 옛날에는 엄두도 못 냈지요.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있거나 한 달에 한 번도 어려워요, 일 년에 그저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게 듣는 일인데 지금은 마음대로 들을 수 있으니 그것도 좋은 수행입니다. 청수(聽受)도 넣을 수 있습니다. 들을 청(聽), 받아들일 수(受), 그래서 경전 상의 용어로는 청수(聽受)라고 되어 있어요. 귀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잖아요.
그것도 하나의 수행이라도 해서 청수(聽受)까지 합하면 오종수행(五種修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경전을 통한 오종수행입니다.
경전의 깊은 뜻을 우리가 마음으로 깨달아서 생활화 되어 버리면, 반야심경 하나에서 만이라도 공의 이치를 생활화해 버린다면 사실은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수행방법이겠지요.
그렇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차선의 방법은 이 종이로 된 경전을 대하는 것, 경전을 쓰고 출판하고 또 그것을 이제 지니고 다니고 읽고, 보고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 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또 이것을 내가 아는 만치 해설해 주고 하는 것, 이것이 경전을 통한 수행의 전부입니다.
그렇게 알면 돼요. 불교는 수행이 장점이고 경전을 통한 수행은 그렇게 다섯 가지로 집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경전에 자주 나오지만 특히 금강경이나 법화경에는 자주 나옵니다. 경전 상에서 경전의 사종수행, 경전의 오종수행, 이런 식으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주 지적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결제철이지만 윤달 들면 윤달이라고 또 기도하고 그러지요? 그런 것은 불교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수행이니까 이런 기회에 경전으로서의 수행에 대한 이해는 분명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선견비구 이야기에 정수범행(淨修梵行), 정수범행(淨修梵行)이라고 여러 번 나왔었습니다. 지난시간의 끄트머리 단락인 정시법계(正示法界) 부분에 보면 의연득법(依緣得法)이라 해가지고
선견(善見)이 답언(答言)하사대,
선남자(善男子)야 아년(我年)이 기소(旣少)하며 출가우근(出家又近)이라, 아차생중(我此生中)에 어삼십팔항하사불소(於三十八恒河沙佛所)에 정수범행(淨修梵行), 그랬지요. 범행을 청정하게 닦았다. 그것을 두 자(字)로 하면 수행(修行)이 된다고요.
유불소(或有佛所)엔 일일일야(一日一夜)에 정수범행(淨修梵行)하며, 거기 또 있지요? 그렇게 수행했고
또 혹유불소(或有佛所)엔 칠일칠야(七日七夜)에 정수범행(淨修梵行), 이것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 다음 페이지에도 또 나오고 또 나옵니다.
수행한다는 것이 불교의 아주 두드러진 장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선, 기도는 잘 아는데 경전으로서의 수행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되어지는가? 사종수행에다 하나를 더 더한다면 오종수행이라 할 수 있는데 서사(書寫) 수지(受持) 독송(讀誦) 해설(解說) 청수(聽受), 해설해 주면 듣는 사람이 있으니까 듣는 사람도 역시 수행에 해당된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지니고 다니는 것도 수행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디 나갈 때 스님들이 잘 드는 조랭이가 있는데 거기에 꼭 경을 넣어 다닙니다. 경을 넣어 가는 것하고 안 넣어 가는 것하고 마음이 달라요. 몇 달을 돌아다녀도 한 번 펼치지 않습니다. 혹 읽을 때도 있지만 솔직히 잘 안 읽어요. 잘 안 읽지만 경전 책을 넣어가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든든합니다. 믿음이 가요, 그 참 이상하지요. 여기에서 수지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는 것, 지니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수행이라고 하는 그 말이 사실은 맞아요. 그만치 몸과 마음의 자세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할 곳은 현법업용(顯法業用)이라 그랬어요. 법의 업용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우선남자(又善男子)야 아경행시(我經行時)에, 도량을 거니는 것을 경행이라 그러지요. 경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좋은 수행이에요.
탑을 돌든지 법당을 돌든지 아니면 법당 안에서 돌든지, 그 나름대로 경을 외는 사람은 경을 외고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를,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뭔가를 하면서 도량을 거니는 것은 좋은 수행이지요.
경행을 하면서 일념 중에, 여기 에서는 선견비구가 선재동자에게 하는 법문이며 선견동자 자기의 이야기입니다.
일념중(一念中)에 일체시방(一切十方)이, 나는 경행할 때 한 생각 가운데 일체시방이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모든 시방이 내 한 마음 속에 나타난다, 왜냐?
지혜청정고(智慧淸淨故)며, 내가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지혜가 청정하니까, 내 지혜는 명경지수와 같아요. 아주 밝은 거울과 고요한 물과 같아요.
밝은 거울에도 온갖 것이 다 나타나고, 멈춰 있는 깨끗한 물에도 온갖 것이 다 나타난다는 것이 지혜청정이거든요. 그러면 시방세계가 환히 다 나타나거든요.
내 한 생각 안에요. 내가 지금 이렇게 도량을 거닐지만 그냥 거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세계는 그렇다는 거지요.
일념중(一念中)에 일체세계(一切世界)가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또 일념 중에 일체세계가 다 나타나는데
경과불가설불가설세계고(經過不可說不可說世界故)며, 말로 설명할 수가 없고, 설명할 수가 없는 세계를 한 생각 가운데 다 지나가니,
그냥 내 마음 속에서 온 세계가 다 지나간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한 생각 가운데서 그런 세계가 나타나니
일념중(一念中)에 불가설불가설불찰(不可說不可說佛刹)이 개실엄정(皆悉嚴淨)하니, 엄정이란 말은 아주 잘 장엄이 되어 잘 꾸며져 있다는 그런 뜻인데 불가설불가설,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치 많은 세계가 잘 꾸며져 있다는 뜻입니다. 한 생각으로 세계를 다 꾸민다는 말입니다.
참 마음같이 신통자재한 것이 없지요. 마음같이 신통자재한 것이 정말 없어요. 마음으로는 갑자기 억만장자도 되고, 대통령도 백번 천 번 다 되지요. 어디든지 여행도 마음대로 가고, 수억만 광년도 순식간에 가지요.
햇빛보다도 몇 천만 배 빠르게 갈 수 있지요. 그건 념(念)속도 이지요. 빛의 속도보다도 천만 배 더 빠른 게 마음의 속도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먼 곳이라 해도 일 찰나 사이에 다 갈 수가 있지요. 그 참 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은 오묘 불가사의하지요.
일념 중에 불가설불가설 세계가 다 청정해지고 그래서
성취대원력고(成就大願力故)며, 큰 원력을 성취한다.
일념중(一念中)에 불가설불가설중생차별행(不可說不可說衆生差別行)이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중생들의 갖가지 행동, 그것이 내 한 생각 속에 다 잘 나타나니.
만족십력지고(滿足十力智故)며, 열 가지 지혜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지혜가 열 가지 지혜이거든요. 이 열 가지 지혜의 힘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까닭이며,
일념중(一念中)에 불가설불가설제불청정신(不可說不可說諸佛淸淨身)이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부처님의 아주 뛰어난 몸이 다 앞에 나타난다. 왜냐?
성취보현행원력고(成就普賢行願力故)며, 그 까닭은 보현행의 원력을 성취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행의 대표되는 행을 보현행이라고 해요. [보현보살 십대행원]이라고 그랬어요. 아까 서사 수지 독송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보현행에서 경전 수행을 어떻게 했는가는 저기 570쪽을 넘겨보면 나옵니다. 잠깐 보겠습니다.
경을 쓰는 것이 왜 그렇게 수행인가? 옛날에는 출판 같은 것은 상상을 못했기 때문에 그저 썼어요. 썼는데 570쪽 중간에 상수불학(常隨佛學)이 있지요?
출판을 상상 못했기 때문에 전부 쓰는 것입니다. 쓰려니 먹이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지요. 종이가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옛날에 보현행원을 이야기 하는 데 있어서
부차 선남자야 언 상수불학자(常隨佛學者)는, 나는 부처님을 따라서 항상 배운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사바세계 비로자나 여래가 처음 발심해서 정진 불퇴했다, 아주 정진을 열심히 했다는 거지요.
불가설불가설 신명(身命)으로 이위보시(而爲布施)라, 이 몸과 목숨으로서 보시에 사용했다. 어떻게?
박피위지(剝皮爲紙)야, 피부 껍질을 벗겨 가지고서 종이를 삼고 석골위필(析骨爲筆)이야, 뼈를 가지고 붓을 삼고
자혈위묵(刺血爲墨), 피를 가지고 먹을 삼아
서사경전( 書寫經典), 경전을 서사했다.
이게 사경이지요. 그렇게 정성을 들여 온 목숨을 다 들여서 사경을 했다는 거지요. 부처님 가르침이 너무나 좋아서 불법에 심취하고 깊이 반해 놓으면 먹으로 쓰는 것 가지고는 성에 안 차는 거예요.
자기의 피를 뽑아서 써야 되고, 금으로 써야 되고 은으로 써야 되지요. 그래서 금으로 쓰고 은으로 쓴 것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피로써 쓴 것도 남아 있어요.
그래서 경전 서사하기를 적여수미산(積如須彌山), 수미산처럼 많이 쌓이도록 했다.
위중법고(爲重法故)로 불석신명(不惜身命)이라, 법을 중요하게 여긴 까닭에 신명을 아끼지 아니 했다.
이 불법이 너무 좋아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사경하는 것이 수행 중에서도 알아주는 수행이고 그것은 보살행 중에서도 대표되는 보현행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현행의 원력 때문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김동리씨가 쓴 [등신불(等身佛)]이라는 소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몸을 결국 소신공양(燒身供養) 올리는 이야기이거든요.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 소설을 쓰게 되었느냐 하면 곤양 다솔사에 최*씨가 살았는데 김동리씨가 그곳에 와 가지고 불교공부를 좀 했어요.
김동리씨에게“불교는 한 번 심취하기 시작하면 자기 몸을 불태워도 아깝지 아니 하며, 또 불로 태워도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그저 환희심이 날 정도로 그만큼 좋은 것이 불법”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유명한 소설가가 와서 불교를 공부하겠다며 자기 이야기를 하고는 불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니까, 불법을 하루 이틀에 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충 이야기 하고는 그렇게 설명을 했지요.
불법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몸을 다 태워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싶다고, 경전에도 그런 사례가 많지만 실제로 중국에는 그런 사례가 많다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머리 좋은 소설가는 그 이야기 한 마디를 듣고는 [등신불(等身佛)]을 쓴 거예요. 그래서 유명한 소설이 되고 했는데 우리나라에도 손가락을 태운 사람들이 많지요.
법화경에 보면 팔을 태우고 손가락을 태우고, 몸 전신을 태우는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를 내어 먹을 삼고, 살 껍질을 가지고 종이를 삼고, 뼈로서 붓을 삼았다고 한 이것이 허황된 말이거나 공갈이 아니에요.
불법이 좋다는 감동이 일어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불법을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충만해 있기 때문에 환희심으로 하기 때문에 몸을 태워도 뜨거운 게 아니에요. 뜨거우면 못하지요. 그걸 누가 하겠어요.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환희심이 더 센 거예요. 불법에 대한 환희심이 더 세니까 그 뜨거움을 충분히 감내할 수가 있는 거지요.
아무 감동도 없고 물에 물 탄 것 같고 술에 술 탄 것처럼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정말 좋다, 라는 생각이 저 깊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면은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품에도 나오잖아요. 피로써 경을 썼다.
그런 일은 과거에 얼마든지 있던 일이고 소신공양도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고 그래요. ‘보현행원력을 성취한 까닭이다.’라는 말의 내용에는 그런 엄청난 속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념중(一念中)에 공경공양불가설불찰미진수여래(恭敬供養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如來)하니, 불가설불찰미진수여래, 그 많은 여래께 공경 공양하나니
성취유연심공양여래원력고(成就柔軟心供養如來願力故)며, 유연한 마음을 성취해 가지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마음이지요. 법을 좋아해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깨달으신 대로 가르쳐 주신 그 이치를 깨달아 그 이치에 계합이 되면 사람 마음이 부드러워 지고 편안해 지고 평화로워 지지요.
늘 행복감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게 유연심이지요. 그런 마음을 성취해서 여래에게 공양하는 원력인 까닭이다.
일념중(一念中)에 영수불가설불가설여래법(領受不可說不可說如來法)하니, 한 생각 가운데 그 수많은 여래의 법을 영수(領受), 받아 들이니
득증아승지차별법(得證阿僧祗差別法)하야, 아승지 차별법을 증득해서, 득증(得證)은 깨달아서, 이 말이지요. 불교에는 수많은 교리와 가르침이 너무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 아승지와 같이 많은 차별법을 깨달아서
주지법륜다라니력고(住持法輪陀羅尼力故)며, 법 바퀴의 다라니, 주지(住持), 거기에 머물며 가지는 힘 다라니이며,
일념중(一念中)에 불가설불가설보살행해(不可說不可說菩薩行海)가, 또 한 생각 가운데 불가설불가설 보살의 행해가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그 많은 보살행, 보살행이 어디 한 두 가지입니까? 생각만 일으키면 처처에 보살행이고 일마다 보살행인데 그렇게 많은 보살행이 다 눈앞에 나타나나니
득능정일체행여인다라망원력고(得能淨一切行如因陀羅網願力故)며, 모든 일체행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인다라망과 같은 원력이 있는 연고이다. 일체행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인다라망과 같다.
인다라망이라고 하는 것은 자주 비유를 드는데 제석천을 인다라라고 하지요. 제석천이라고 하는 하늘에 왕이 있는 궁전을 그물로 뒤덮었는데 (망(望)자는 그물 망 자이지요.) 그 그물을 뭘로 짰는가 하니 다이아몬드 구슬로 짰어요. 수 억만 개의 다이아몬드 구슬이 그 그물에 주렁주렁 열렸어요. 그러니까 제석천궁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이며 그 아름다운 궁전을 또 그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구슬로써 그물을 짜 가지고 덮었으니까 빛나고 아름답지요.
그런데 그 구슬 하나하나에 다른 여타의 구슬이 전부 나타나고 또 옆의 구슬에는 다른 구슬이 전부 나타나고, 이것이 전부 서로 비치고 비춰주고 하는 그런 모습이 인다라망이지요. 인다라 궁전, 제석천의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과 같다, 풀면 그렇게 되는 거지요. 모든 행이 그렇게 연관관계를 갖고 있어요. 연결 짓고 있어요.
오늘날 인터넷 사이버 세계의 원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인다라망의 원리와 너무도 똑 같다고 그러거든요.
인터넷을 해 보면 거기에서 전부 온 세계가 다 연결이 되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어디서 누가 어떤 문장을 하나 보니 이것은 북한의 김일성대학에서 인용해 놨다고 해 놨어요. 그럼 김일성대학 글자를 클릭을 딱 하면 바로 김일성대학이 나오지요.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김일성대학에 가서 여기 저기 곳곳에 과마다 찾아다니다가 거기서 또 미국의 무슨 무슨 대학, 아니면 무슨 연구소라고 되어 있으면 또 그곳을 클릭하면 그 연구소가 바로 나타나 버려요. 세상이 지금 이런 세상이 되었어요.
불교공부를 하거나 예를 들어서 사회책을 읽다가 ‘번뇌’라고 하는 낱말을 모른다면 ‘번뇌’라는 낱말을 클릭하면 바로 사전이 떠버려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어요, 지금.
그게, 요 인다라망이라고 하는 그물의 비유와 너무나 똑 같아요. 전부가 다 비쳐요. 거기 그물에 있는 모든 구슬은 하나의 구슬에 다 비쳐요. 또 이쪽에 있는 구슬에 다른 구슬이 또 다 비쳐요. 그럼 지금 인터넷에 들어가면 이 집 것이나 저 집 것이나, 예를 들어 그 집에 링크만 되어 있으면 전 세계 어느 곳 하나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어요.
무슨 과학에서 음악으로, 음악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종교로, 불교에서 기독교로,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전체가 서로 다 연결되어 있어요. 지금 이 세상하고 똑 같아요. 그대로,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계연기와 똑 같지요.
이 우주가 전부 그물관계처럼 연관되어 짜여져 있다, 라고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설파하셨고 깨닫고 설파하신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실지로 그렇게 관계가 되어 있고 그렇게 관계가 지어져 있으니까 그런 실현이 가능한 거예요. 관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런 실현이 안 됩니다. 절대 될 수가 없는데 본래로 그렇게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실증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불교의 이런 가르침이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자꾸 맞아 떨어지는 거지요. 자꾸 근접해 옵니다. 천문학의 문제라든지 물리학의 문제라든지 분야 분야마다 전부 맞아 들어가고 있어서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은 재미가 있어가지고 그야말로 아주 즐거워하지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참선을 하는데 선(禪)사상이 자연리턴(return) 사상 중에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 잡거든요. 지금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자연스런 것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거든요.
건축을 하는데도 간결한 걸 아주 우선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선(禪)스타일을 주제로 삼는데 가보면 딴 거 아니에요.
아주 간결해요. 주방이라든지 거실이라든지 전부 선방처럼 그런 식으로 꾸몄다는 겁니다. 다른 거 없어요. 간결을 그 건축의 주제로 삼고 만든 것을 선(禪)스타일이라고 해요. 현대건설에서 제일 많이 하더라고요.
내가 무슨 아파트를 살 일은 아니지만 신문 밑에 선전을 보면 선(禪)스타일이라고 이렇게 해 놨어요. 그게 본래는 Zen Style이라고 이렇게 표시가 됐다가 요즘은 또 한문으로 써 가지고 선(禪)스타일이라고 해 놨어요. 내가 그걸 유심히 살펴봤어요.
그렇게들 하는데 이게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고, 유럽을 휩쓸어서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거예요. 지금 지식층에서의 선(禪)이라 하는 것은 서양에서 들어온 선(禪)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보니까 1,700년 전부터 있던 거거든요. 그래서 새롭게 선(禪)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요. 그것이 모든 분야에서 이제 생활화로 들어가는 거예요.
선(禪)음악을 여러분들은 아시지요? 명상음악, 그것이 전부 일종의 선(禪)음악이에요.
선(禪)미술, 선화(禪畵)는 일찍이 있었던 거고요. 건축에 있어서도 선(禪)스타일을 최고급으로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식도 무늬 하나 없이 깨끗하게 대패질을 해 놓고 그 위에다 딸랑 뭐 하나 딱 올려놓는 거, 그런 간결미이지요.
선의 정신을 일곱, 여덟 개로 표현 한 것 중에 간결이란 말이 있어요. 자연스러움이 있고 간결이 있고 그래요. 자연스러움, 간결함 이것을 건축에 도입을 해서 선전을 하더라고요.
여러분들이 사시는 방을 선 스타일로 바꾸려면 간단해요. 여러분들은 선을 잘 아시니까, 아주 자연스럽고 그리고 간결해요.
좋다고 해가지고 그냥 이것 저것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잔뜩 갖다 쌓아 놓는 거 그거 아니에요.
작품이 좋다고 하니까 이해도 못하면서 비싸게만 주고는 서양화도 갖다 놓고, 동양화도 갖다 놓고, 되도 않는 큰스님이라고 하는 이름만 보고는 그냥 엉터리 글씨도 잔뜩 갖다 놓지요.
벽에다 하나를 걸어야 옳은 자리에 세 개 네 개 다섯 개를 막 걸어 놓는 거예요. 많이 걸면 좋은지 알고요.
그건 무식 선전이지 별겁니까? ‘나는 이렇게 무식합니다. 나는 이렇게 무식하니 좀 알아주십시오.’결국 그거 밖에 더 됩니까? 그런 거예요.
선(禪)스타일이라고 하는 데는 그런 거 없습니다. 아주 간결한 것을 주제로 삼습니다. 요즘 아주 고급아파트 광고를 보니까 선(禪)스타일이라고 많이 나와 있더라고요. 일본사람들은 일찍이 건축에 도입해서 살던 것이고 그렇습니다.
선(禪)문화라는 게 무서운 거예요. 대단한 거예요. 서양에서는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간결한 것이 선(禪)이라고 하더라, 이렇게 알고만 있으면 그게 곤란한 거지요. 그러니까 정신이 선(禪) 정신이 되어야 가능한 거예요. 간결하게 해놓고는 아무래도 섭섭해 보여서 이것 갖다 놓고 또 부족해 보여서 저것 갖다 놓으면 그러면 그건 이미 아니지요.
그동안 세상이 발전하면 할수록 옛날에는 허황되게 생각됐던 것이 자꾸 현실로 증명이 되니까 불교의 우수성이 드러나서 불교에 인생을 안 바칠래야 안 바칠 수가 없다고요. 너무 잘 맞아 떨어지고, 갈수록 부처님의 깨달음이 빛이 나니까요.
망원경도 돋보기도 없었던 그 시절에 어찌하여 우주의 드넓은 공간을 보고, 사물을 보듯이 그렇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너무나 완벽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불자들이 사이버 세계를 이야기할 때 걸핏하면 들먹이는 것이 이 인다라망이라고 하는 이 말입니다.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말로만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가서 클릭만 하면 그냥 뜨니까요. 유럽이 됐든 어디가 됐든.
저 유럽에 나가서 자기 메일을 인터넷에서 불러 편지를 쓰고 답을 받고 해 보면 실감이 납니다.
우리나라에 앉아 가지고서야 가까우니까 왔다갔다 하겠지 싶지요? 저기 어디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편지를 주고받아 보십시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더 신기해요. 우리나라에 앉아 편지를 주고받는 것과 똑 같으니까요.
거리도 없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고 무량원겁이 일념이고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이야. 하나의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지요. 화엄경은 그 소리를 합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먼지 속에 온 시방세계가 다 들어 있다고.
그리고 공간도 없어요. 중국 저 서쪽 끄트머리에 가서 편지를 쓰면 그냥 바로 가는 거예요. 1,2초 안에 가 버리고 1,2초 안에 와버린다고요. 시간이 어디 제약이 있습니까? 공간이 제약이 있습니까? 그걸 화엄경에서는 삼천 년 전에 이미 이야기를 했어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시간과 공간이 이렇게 펼쳐져 있으면서도 시간과 공간이 제약이 없는 세계가 있다는 거지요.
시간과 공간이 자연에 대해 원융무애한 그런 세계가 있으니, 옛날에 불교공부를 한 사람들은 참 답답했겠어요. 경전에만 그렇게 되어 있지 안 보여주니까요. 보여줄 근거가 없으니까요. 지금은 그냥 과학으로 다 보여줘요. 천이통 천안통 다 보여줘요. TV만 틀면 천이통 천안통이 다 돼요. 가만히 앉아서 미국의 소리를 다 듣고 다 보지요. 휴대폰 들고 다니면서 어디에 가 있어도 다 듣지요.
또 화상 전화가 있어서 다 보지요.
그런데 삼천년 전에 그런 이야기를 다 해 놨으니, 그런 미세한 항목까지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그 원리는 그대로 다 이야기 해 놨거든요. 그러니까 불교에 안 미치고는 배길 수가 없지요.
득능정일체행여인다라망(得能淨一切行如因陀羅網), 그러니까 모든 보살의 일체 행위가 인다라망처럼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저 외국에 나가서 내가 휴지를 하나 딱 버렸다. 이 멀리 외국에까지 와서 휴지 한 장 버린 것이 나하고 관계가 있겠나 싶어도 천만에요. 그게 다 일체 행에 전부 연관이 되어 있어요.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 나가서 휴지 한 조각 버린 것이 나의 전 삶과 연관이 딱 되어 있어요.
언젠가 그 사람의 인적 상황에 대해서 딱 클릭을 하면 나타나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원융하니까요.
지금 삼천년 전 부처님의 설법소리를 녹음할 수 있다잖아요. 과학자들은 그걸 지금 시도하고 있어요. 설법소리를 지금 녹음하려고 하고 있어요. 삼천 년 전에 설법하신 게 우주 공간에 아직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녹음기를 그 시간에다 딱 맞추면 그냥 녹음이 되는 거예요.
안 그러면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한 시간 속에 무량한 겁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거, 현재 이 시간 속에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가 전부 포함되어 있다는 그 말이 안 맞아 져요. 이제 과학이 발달하면 그걸 증명할 겁니다. 공간적인 것은 이미 다 증명이 되지요.
일념중(一念中)에 불가설불가설제삼매해(不可說不可說諸三昧海)가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모든 삼매,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만치 많은 모든 삼매의 바다가 다 나타난다. 어째서 그러냐?
득어일삼매문(得於一三昧門)에 입일체삼매문(入一切三昧門)하야, 하나의 삼매를 얻은 것 가운데 일체 삼매문에 들어가서
개령청정원력고(皆令淸淨願力故)며, 개령 청정원하야, 원(願)한 힘의 까닭이다. 그것을 다 청정하게 하는 까닭이다. 청정은 완성, 원만, 성취의 의미가 있어요. 원만하게 하는, 완성하게 하는 그런 원의 힘인 까닭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한 삼매문에 일체 삼매가 다 들어가고, 또 낱낱 삼매에 모든 삼매가 다 들어가고, 아까 설명한 인다라망하고 똑 같은 거지요.
일념중(一念中)에 불가설불가설제근해(不可說不可說諸根海)가, 이것은 이제 모든 근(根)이지요. 우리가 근이라고 하면 오근(五根), 육근(六根), 그래서 기관을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기능, 예를 들어서 안근(眼根)이라고 하면 눈은 보지요. 그 능력이에요. 눈의 기능입니다. 기관과 기능과 능력이 전부 근(根)이라는 말로 표현이 되는데 그 많은 근이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전부 앞에 나타나니, 왜냐하면
득료지제근제(得了知諸根際)하야, 모든 근의 경계, 안이비설신의, 모든 근의 경계를 전부 알아가지고서
어일근중(於一根中)에 견일체근원력고(見一切根願力故)며, 하나의 근(根) 가운데 일체 근을 다 보는 그런 원의 힘 때문이다.
일념중(一念中)에 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시(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時)가, 일념 가운데 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의 때가,
아까는 근(根)과 삼매가 나왔는데 여기는 시간이지요. 일체 그런 많은 시간이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다 나타나는데
득어일체시(得於一切時)에 전법륜(轉法輪)하야, 일체 시에서 법륜을 굴려, 부처님의 법의 바퀴를 굴려서
중생계진(衆生界盡)호대 법륜무진원력고(法輪無盡願力故)며, 중생계가 다하되 법륜무진 원력, 법륜은 다함이 없는 것을 얻은 그런 원력, 법륜은 다함이 없어지이다, 하는 그런 것을 얻은 원력인 때문이다.
일념중(一念中)에 불가설불가설일체삼세해(不可說不可說一切三世海)가, 이것은 시간이지요. 일체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이지요. 그런 모든 것들이
개실현전(皆悉現前)하니, 전부 앞에 나타나니
득요지일체세계중일체삼세분위지광명원력고(得了知一切世界中一切三世分位智光明願力故)니라, 득요지 일체 세계중 일체 삼세 분위지 광명이 원력인 연고이다. 그것은 이제 일체 삼세 ....(녹음 끊김) 광명을 요지하는, 깨달아서 아는 그런 원력인 연고이다.
이런 내용이 선견비구의 법에 대한 업용을 나타내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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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화님, 늘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에 게으른 제 자신을 비춰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인다라망과 인터넷 세계, 참 절묘하게 맞아 들어감이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
경전의 四種修行--書寫, 受持, 讀誦, 解說, 여기에 聽受 한 가지 더해서 五種修行.. 一念中에 모든 법이 다 나타나... 연보리님! 고맙습니다. _()()()_
오늘도 경전 말씀과 큰스님 자상하신 해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불교란 "수행(修行)의 종교"입니다,,,! 연보리 법우님,,수고 많이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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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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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重法故로 불석신명不惜身命이라...법을 중요하게 여긴 까닭에 신명을 아끼지 아니 했느니라...연보리 님! 수고하셨습니다.._()()()_
法界緣起 一微塵中含十方 一念卽是無量劫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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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으로서의 수행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되어지는가? 사종수행에다 하나를 더 더한다면 오종수행이라 할 수 있는데 서사(書寫) 수지(受持) 독송(讀誦) 해설(解說) 청수(聽受), 해설해 주면 듣는 사람이 있으니까 듣는 사람도 역시 수행에 해당된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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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불교의 특장;수행 淨修梵行
피부를 종이로 삼고 뼈를 붓으로 삼고 피를 먹으로 삼아서 경전을 서사한다
나무 입법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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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망(望-網)자는 그물 망 자이지요.) 그 그물을 뭘로 짰는가 하니 다이아몬드 구슬로 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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