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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 300년 만에 다시 태어나다
수도권 문화유산 답사 1번지 강화에서 강화산성 성돌이 코스는 아직 생소한 편이다. 강화 사람들조차 남문에서 남산을 거쳐 서문까지 반토막 성돌이 산행을 할 뿐 서문에서 북문 구간은 아직 길조차 없는 곳이 있으며, 견자산 구간은 버려지다시피 황량하다. 강화군에서는 오는 2012년까지 강화산성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하루 속히 강화산성 탐방로가 정비돼 많은 사람이 찾게 될 날을 기대하며, 이번 <월간 산> 4월호에 강화문화원(원장 우광덕)과 강화향토사연구소(소장 류중현)의 도움으로 강화산성 성돌이 완주 코스를 1707년 축성 이후 처음으로 소개한다.
▲ 남문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강화산성 일대. 성벽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멀리 염하와 유도, 조강, 그리고 강 건너 북한 땅이 보인다.
파란 하늘을 담은 바다가 시린 쪽빛으로 눈부신 아침, 48번 국도를 따라서 염하를 단숨에 건너 강화산성 남문에 섰다.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강도남문(江都南門)’은 해맑은 햇살 아래 고풍스러운 자태가 더 없이 단아하기만 하다. 총 연장 7.122km인 강화산성 성돌이 산행을 약속한 날, 하늘은 축복이라도 받은 양 더 없이 맑기만 하다. 토산품판매센터 2층에 있는 강화문화원에서 걸어서 불과 3~4분 거리. 강화향토사연구소 류중현(64) 소장과 송민헌(61·전 강화읍장), 전상원(56·강화문화원 총무이사)씨가 강화산성 남문 앞에 선 것은 오전 9시30분.
강화도 문화재급 건축물의 현판에 관한 책까지 펴낸 바 있는 류중현 소장이 대뜸 ‘강도남문’ 현판을 가리켰다. 폭우로 무너진 것을 1974년에 복원할 당시 김종필씨가 썼다는데 이름을 뭉개 버려서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문루 천장 아래를 지나면서 류 소장은 강화산성의 사대문을 지키는 사신(四神)을 소개했다. 이른바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남문 안파루(晏波樓) 천장에는 남쪽의 수호신인 ‘붉은 봉황’ 한 쌍이 아로새겨져 있다.
성곽 복원 공사 덕분에 잃어버린 숲길
“전에는 성벽 아래쪽으로 해자가 있었는데……지금은 모두 묻고 잔디로 덮어 버렸어요.”
▲ 북문 진송루. 원래는 문루가 없는 암문이었다.
류 소장의 지적대로 남문 일대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해자의 흔적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걸 없애 버렸다니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기왕에 지표조사까지 마쳤고 2012년 복원을 목표로 한다면 원래의 강화산성 모습대로 되돌려놔야 옳을 텐데 자칫 졸속 공사가 될까 염려스럽기만 하다.
남문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익살스러운 표정의 거북이가 반기고, 그 등에 얹힌 비석 하나가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다. 숙종 때 고려시대 이래의 토성인 강화 내성을 현 규모의 석성으로 수축하고 선두포둑을 쌓은 강화유수 민진원의 송덕비다.
▲ 서문 첨화루를 지키는 백호.
성돌이 산행은 남문에서 남산과 남장대터를 거쳐 서문까지가 첫 번째 구간으로 강화군에서 2007년에 실시한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성벽 길이가 2,784m로 네 개의 구간 가운데 가장 길다. 이 구간은 강화산성 복원 계획에 따라서 성을 중심으로 양쪽 10m 구역 내 잡목이며 아름드리 참나무까지 모두 베어내다 보니 멀리서 보면 흡사 옛날 빡빡머리 중학생 시절, 호랑이 학생 주임이 바리캉으로 머리 한가운데만 밀어 버린 복장 불량 친구의 ‘고속도로’처럼 흉하기만 하다. 강화 사람들의 산책로로서도 요긴한 산길이자 숲길이었는데 여름철 뙤약볕을 어떻게 견딜지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성곽을 따라서 제법 가파른 언덕에 올라서자 널찍한 밭이 펼쳐진다.
“여기 일대가 조선시대 활터로 ‘대흥정(大興亭)’이 아마도 저 파란 지붕 집쯤에 있었을 겁니다. 1931년에 편찬된 ‘강도지’에도 사진이 나오는데 이 부근이 맞습니다.”류 소장이 가리키는 활터는 고려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읍내를 굽어볼 만큼 높으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누가 봐도 정자 하나쯤 세울 만한 위치다. 그러나 성벽 바로 아래까지 바싹 붙여서 나무 한 그루 없는 밭이다 보니 폭우에 산사태를 걱정해야 할 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남산 위의 저 느티나무’
남산 정상까지 ‘440m’ 지점을 가리키는 이정표에 이르자 길이 본격적으로 가팔라졌다. 여기서 성 안쪽 숲길로 ‘290m’ 접어들면 약수터가 있다. 높이 올라갈수록 성벽은 온전하게 유지된 모습을 드러낸다. 민가에서 가까운 성벽은 대부분의 성돌을 빼 가서 석성의 자취는 간 데 없고 토성의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류중현 소장은 성 안팎을 꼼꼼히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그가 찾는 것은 성돌을 떼어냈을지도 모를 화강암 암벽지대다.
“이 높은 곳까지 돌을 지고 올라왔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가까운 데 있는 바위에서 적당한 크기로 돌을 쪼개서 성을 쌓은 거지요.”
북산에서 견자산, 남산까지 이어지는 강화산성 축성 공사가 완료된 것은 숙종 37년(1711년) 4월의 일이다. 주로 팔도 승군들이 동원되어 성을 쌓았는데 북한산성 역시 같은 시기에 완공됐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현대식 무기의 발달과 전술·전략의 변화로 인해 두 성 모두 실전에 써먹지는 못한 채 버림 받고 말았다.
해발 222.5m인 남산 정상에 이르기 전의 가파른 성벽 구간에서는 강화 읍내와 견자산 그리고 멀리 염하와 조강, 북녘 땅까지 한눈에 보인다. 울창하게 자란 숲에 가려서 읍내 전경이 다 들어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1876년의 빛바랜 흑백사진에는 온통 민둥산 능선에 견자산과 북산까지 이어진 완벽한 자태로 찍혀 강화산성의 성가퀴가 뚜렷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이 부근 어림이 당시의 촬영 지점이었던 게 분명하다.
▲ 남장대터 발굴 현장.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남산 꼭대기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읍내 어디에서도 잘 보이는 이 나무는 강화 사람들에게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와도 같은 ‘남산 위의 저 느티나무’인 셈이다. 널찍한 정상 일대의 남쪽 끝자락에서는 남장대 터와 봉수대 터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깊이 파들어 간 토양 단면을 보니 뭔가 나오긴 하는 것 같은데 사진을 찍지 말아달라는 담당자의 부탁이다.
장작 짐 실은 달구지 행렬로 붐비던 서문안길
남산 꼭대기에서는 90도 꺾여서 서문으로 내려가는 길이 이어지며, 고려산과 국화리 저수지 풍경이 시선을 끈다. 정상에서 불과 100여m쯤 내려간 지점에서는 암문이 처음 나타난다. 암문은 어른 키 높이 정도 되는 규모로 북한산성 암문보다는 훨씬 작다. 여기서 성 안쪽으로는 약수터 가는 길이 이어진다.
“이쪽은 모두 왜송이군요. 빨리 자라서 좋기는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나무라서…….” 전상원씨의 말에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조선 소나무의 기품이라든가 아름다운 자태와는 거리가 먼 외래종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서문과 덕신고등학교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길이 급경사를 이룬다. 붙잡고 내려갈 만한 나무조차 없기 때문에 보조 로프를 매어 놓았는데 안전시설 치고는 영 어설프기만 하다.
덕신고등학교에서 복원된 성벽 위로 해서 석수문을 지난 후 연무당 옛 터에 내려서자 시간은 벌써 11시가 다 됐다. 강화 사람들의 성돌이 산행은 여기서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오늘은 북산과 견자산으로 해서 다시 남문까지 잇는 완전한 ‘성돌이’가 목표다.
“50여 년 전만 해도 이 서문으로 해서 장작 짐 실은 달구지가 한 번에 스무 대씩 줄 지어 들어가곤 했어요. 그때 사진을 찍어두는 건데…….”
서문 첨화루와 천장에 버티고 있는 호랑이 그림을 돌아보며 류중현 소장은 자동차가 별로 없던 시절의 풍경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 연무당 옛터 부근에 있는 석수문.
강화 정수장 일대, 사라진 성벽
두 번째 구간인 서문에서 북문까지는 1,640m. 네 개의 강화산성 구간 가운데 가장 훼손이 심한 곳이다. 짧은 거리에 걸쳐서 복원된 서문 성벽 끝자락에서 주택 지역으로 올라서자 성벽은 밭 가장자리를 지나기도 하면서 겨우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집이 몇 채 들어선 곳에서는 아예 길조차 끊겨서 돌아서 가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특히 강화 정수장 일대는 아예 성벽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다. 그냥 철제 울타리 아래쪽으로 돌아서 가야 다시 성벽이 이어진다. 강화산성 사대문을 잇는 성돌이 산행을 연례행사로 기획 중인 전상원씨가 대뜸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정수장 구간을 벗어나 야트막한 고개부터 다시 성벽이 이어진다. 48번 국도상의 진고개에서 갈라져 향교골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넘어가는 부분은 성벽이 끊어져 있고 산기슭으로 해서 다시 이어지는 성벽 위로는 느티나무와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역시 민가 근처의 성벽은 토성 형태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대부분 성돌이 사라진 상태다. 왼쪽으로 밤나무 과수원을 끼고 300m쯤 따라가자 안부에 이르고 성벽이 끊어진 부분이 나온다.
“아무래도 여기가 서암문 같은데……강화산성에는 사대문 외에 암문이 네 개 있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류 소장의 지적대로 잘 살펴보니 성벽을 일부러 파낸 것 같지는 않고 문이 무너지면서 생긴 흔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성 안 향교골 일대에서 성 밖으로 드나드는 길이 나 있는 걸로 봐서도 암문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데, 지표조사 보고서에서도 이곳을 ‘서암문 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것은 주변 발굴작업을 통해서 장대석과 같이 암문을 구성하는 석재가 나와야 복원작업이 가능한 일이다.
올라갈 수 없는 ‘향교산
’‘서암문 터’를 지나자 길이 다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오른쪽 아래 숲 사이로는 강화여중고 건물이 얼핏 보인다.“어릴 때 이 산을 강화향교 뒤에 솟아 있다고 해서 ‘향교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외지 사람들에게 ‘향교산’은 해발 120m 남짓한 언덕에 불과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만 어릴 적 놀이터 추억을 지닌 전상원씨를 포함해서 평생을 강화 읍내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산성의 모든 봉우리가 흡사 자신의 몸의 일부라도 되는 양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향교골’이나 ‘궁골’ ‘향교산’과 같은 지명이 바로 그것을 입증한다.
북문고개 서쪽의 120고지를 정점으로 하는 두 번째 산성 구간은 서암문 터에서 150m 지점에 위치한 100고지부터 온전한 성벽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나무와 더불어 잡목이 점점 무성해지더니 급기야 120고지 일대를 차지한 정부시설물의 철조망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한북정맥이나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을 타다 보면 늘 겪는 일이지만 강화산성과 같은 문화재에서 이런 장애물을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다.
편안한 선택은 성벽 안쪽으로 40~50m 내려가서 산허리를 타고 이어지는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다. 삼림욕을 즐기며 북문까지 걸을 수 있는 이 길은 강화 사람들의 훌륭한 산책로이기도 하다. 솔잎이 수북이 깔려서 걷기 좋은 숲길은 북문 주차장 화장실 뒤쪽에서 정부시설물로 통하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만난다.
북장대 터는 어디에
“오읍약수 가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점심 식사 하시껴.”황해도 억양이 섞인 듯한 류 소장의 강화 말투가 이젠 제법 익숙하게 들린다. 그러고 보니 답사팀 일행은 아직 물은커녕 변변히 쉬는 시간도 없이 남문부터 서문을 거쳐 북문까지 강행군을 한 셈이다. 갑자기 갈증과 더불어 허기가 밀려드는 것도 당연한 일. 벌써 정오를 넘긴 시각이다. 북문 주차장은 마침 화장실이 있으니 성돌이 산행 코스를 제대로 만들자면 여기쯤 식수대와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휴게소가 있으면 딱 좋은 장소다.
“샘물이 나오니까 나랏님도 울고 강화 백성들도 울고, 나중에 실향민까지 울었다니……사람들 다섯 번 울려서 ‘오읍(五泣)’ 약수라고 하는데 물맛 좋시다.”
북문을 나서니 길은 두 갈래. 오른쪽 벚나무 늘어선 길이 오읍약수로 향하고, 왼쪽 은행나무 가로수가 길게 늘어선 내리막길은 송해면 신당리 송학골로 향하는 길이다.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으로 아름다운 길일 테니 최소한 두 번은 더 와야 그 진면목을 대할 수 있겠다. 송민헌씨의 귀띔으로는 여기 벚나무들 모두 류 소장과 약수터 조기회원 60명이 낸 회비로 심었다는데, 벌써 30여 년을 넘기면서 강화의 명소로 꼽히기에 이르렀다.
동동주로 목을 축이고 묵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나니 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고려궁지 옆의 왕자우물을 돌아보고 다시 북문에 오른 시각은 오후 1시30분. 강화산성 세 번째 구간인 북문에서 북산을 거쳐 동문까지는 1,641m, 성벽과 성돌이 가장 잘 보존된 구간이다.
▲ 남문 일대 복원된 성벽 구간. 원래 성벽 아래 해자가 있었다.
류중현 소장이 북장대 터라고 추정하는 곳은 성벽 안쪽으로 2~3m 솟아 있는 지형인데, 주춧돌 같은 옛날 건물 흔적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래주머니로 쌓아올린 예비군 참호가 그러한 기대를 산산조각냈다.
느티나무 지나 동문으로
북장대 터에서 북산까지는 300m, 치성(雉城)을 이루는 북산 정상에서는 북한 땅과 강화도 북부 일대, 염하 건너 문수산과 갑곶리 일대, 견자산과 강화읍내, 건너편 남산, 혈구산, 고려산 등 사방이 잘 보인다. 아마도 성곽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석성으로 완성된 조선시대라면 당연히 이곳에 북장대를 세웠음직도 한데 정답은 곧 있을 발굴작업 결과에 달려 있다.
동문으로 내려서는 길 중간에서 류 소장이 또 하나의 암문 터를 가리켰다. ‘북암문 터’로 추정되는 곳인데 성벽이 무너져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게다가 서암문 터와 달리 이 부분은 보통 암문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성돌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일반 성벽과 쉽게 구분된다.
북암문 터에서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민가를 지나면서 자취를 감추고, 간신히 흙더미 윤곽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더러는 성벽 위로 밭이나 집이 들어서 있는 데다 담장까지 길을 막는 정도다. 산길이 끝나고 주택가로 내려서니 상황이 더욱 안 좋다. 성벽으로 짐작되는 곳에 포장도로가 나 있는데, 길 옆에 들어선 집 지붕이 길 바닥과 거의 같은 높이거나 약간 높기 때문에 성벽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강화중학교로 내려서는 길이 바로 성벽과의 경계를 이루는데, 중간에 느티나무 고목 두 그루가 길손을 반긴다. 느티나무에서 동문까지도 성벽 위로 집들이 들어서 있어서 성돌이 답사 코스는 부득이 강화중학교 담장을 끼고 동문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를 수밖에 없다. 드디어 세 번째 구간의 끝인 ‘강도동문(江都東門)’ 앞에 서니 강화중학교 교문 안쪽의 뾰족한 조형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국민교육헌장 기념탑이다.
견자산 일대는 최씨 무인 정권의 근거지
2003년에 복원된 동문은 한양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한루(望漢樓)’ 현판을 달고 있다. 동문 옆으로는 옥림리를 거쳐 연미정(燕尾亭)과 월곶돈대, 월곶나루로 향하는 길이 잘 나 있지만 차들의 왕래는 비교적 뜸한 편이다.
강화산성 마지막 구간인 동문~견자산~남문은 1,045m로 가장 짧다. 마침 혈구산 산행을 함께 했던 박태광(66·민학회 감사)씨가 나서서 동문에서 견자산으로 이어지는 성벽 흔적을 일러주었다. 17대째 강화에 살고 있는 박씨는 ‘고려박물관’을 세워도 될 만큼 많은 고려시대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일대에서 고려 청자가 많이 나왔어요.”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면 나왔고, 심심치 않게 밭 가운데서도 쏟아져 나왔던 게 고려 청자였다는 박태광씨의 목격담은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강화는 경주처럼 고려시대 문화의 보고인지도 모를 일. 전상원씨 말로는 어릴 때 엿 바꿔 먹을 정도로 산기슭이나 밭에서 흔하게 나왔던 그릇이 바로 ‘청자’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마 견자산 일대가 그랬을 겁니다. 최우, 최항 같은 실력자의 근거지가 바로 여기였고, 군사들 조련장이 지금의 강화중학교 운동장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기록에 보면 고려 고종 때 여기서 큰 불이 나서 가옥 800여 채가 탔다고 그래요.”
류 소장의 말대로라면 청자 조각이라도 안 나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법도 하다. 게다가 삼별초가 강화를 떠날 때 배에 싣지 못하는 물건들, 특히 그릇 종류를 항아리에 담아서 밭 한가운데 묻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강화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어느 밭 한가운데서 고려 청자가 무더기로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해발 60m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한 이곳이 당당하게 ‘견자산(見子山)’이라 불리는 건 다 그만한 사연이 있어서다. 왕자를 원나라에 볼모로 보낸 고종이 이곳에 올라서 아들을 그리워했다는 딱한 이야기다. 게다가 견자산 동쪽 자락 ‘살채이’는 이성계 세력이 집권 과정에서 어린 ‘창왕’을 죽인 곳이라는 비참한 유래를 갖고 있으니 결코 만만하게 볼 언덕은 아닌 셈이다.
고도(古都)로서 거듭 나기를 기원하며
현충탑이 있는 견자산 꼭대기에 거의 다 올라서야 성벽이 뚜렷하고, 그 아래쪽은 수풀이 무성해서 여름철에는 성벽이 있는지조차 구분하기 힘들 게 뻔한 상황이다. 성벽은 현충탑 뒤편 능선으로 이어지다가 강화 읍내로 이어지는 48번 국도 목화예식장 부근으로 떨어진다. 산기슭에 밭이 있는 데다 집이 여러 채 둘러싸고 있으니 성벽은 그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
길을 건너자 류중현 소장이 공영주차장 입구를 가리켰다.
“바로 여기가 복개하기 전 ‘아래 수문(下水門)’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이제 강화에서는 복개천 아래로 사라져 버린 ‘하수문’ 대신 서문 옆에 세 개의 홍예문을 가진 다리 ‘상수문’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하수문 자리에서 남문까지 대략 100여m는 참으로 볼품없게 복원해놓은 성벽이 이어진다. 오히려 성벽 안쪽으로 깊게 뿌리 내리고 자란 느티나무며 버드나무가 주인공 역할을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7.122km, 강화산성 성돌이 산행을 마치면서 발견한 것은 강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고려’와 고려의 수도 ‘강도(江都)’가 변함없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강화읍장을 역임했으며, 5대째 읍내 관청리에서 살고 있는 송민헌씨는 고려의 옛 수도로서 강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각별하다. 가급적 옛것을 없애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는 복원을 원칙으로 이뤄지는 도시 계획이 송씨의 지론이다. 성은 비록 끊어지고 흩어졌으며, 왕국은 멸망한 지 600여 년이 넘었을지라도 참성단이나 고인돌과 같은 거석문화에 더해 경주나 공주, 부여와 같은 고도(古都)로서 강화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재평가돼야 한다는 강화 사람들의 오랜 염원이 강화산성 복원과 더불어 실현될 날을 기대해본다.
<주변명소>
오읍약수
고향 그리워 다섯 번 흘린 눈물
고려 고종 때 생겼다고 전하는 약수로 강화산성 북문 밖에 있다. 1232년 강화로 천도한 고종은 2년에 걸쳐 내성과 궁궐, 관아를 세웠는데, 당시 강화 사람들이 동원되어 북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뭄 때문에 고통이 심했다. 급기야 고종은 북문 앞에 제단을 쌓고 기우제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막 제를 끝내려는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큰 바위에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맑은 물이 솟구쳤다. 지금의 오읍약수는 이렇게 생긴 것이며 제를 지내던 모든 이들이 “살았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려서 ‘오읍약수(五泣藥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왕족을 포함해서 많은 고려 사람이 39년 동안 강화에 살면서 떠나온 고향 개성을 그리워했다. 당시 사람들은 바로 강 건너 고향 땅이 빤히 보이는 이곳 약수터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슬피 울었는데,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이 울고, 왕이 울며, 백성 모두가 울었다는 ‘오읍(五泣)’ 약수의 전설로 내려온다.
왕자정(王子井)
고려 왕자들이 마시던 우물
고려궁지 서쪽 담장 끝자락 산기슭에 있는 우물로 항상 맑은 물이 넘쳐흐른다. 고려시대 왕자들이 마시던 우물이라고는 하나 별도의 안내판이 없기 때문에 외지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가까이 있는 ‘왕자정묵밥집’은 바로 ‘왕자우물’에서 따온 상호다. 묵밥집 바로 아래에서는 높이 25m 가량의 650년생 은행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봄철 북문에 올라가는 길은 벚꽃 터널을 이뤄 강화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