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충절의 고장으로 불린다.
충절의 주무대는 남강변 진주성이다.
임진왜란 때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전투의 한복판에 김시민·김천일·최경회·고종후 등이 있고, 의기 논개가 있었다.
남강변 바위절벽 위 성 안엔 촉석루(矗石樓)가 솟을 듯이 앉아 있고, 성 밑 물가엔 논개가 적장을 안고
강물로 뛰어든 바위(의암)가 있다.
진주 역사문화의 핵심 진주성의 촉석문 앞에서 도심 걷기를 시작한다.
입장료 천원으로 보는 천년 전 모습
성 안으로 들기 전 먼저 볼 게 있다. 바로 옆 장어골목 앞에 세워진 형평운동기념탑이다.
1923년 이 지역 백정 등 하층민들이 교육 차별에 반발해 ‘형평사’를 조직하고 평등운동을 전개했던 것을
기리는 탑이다.
이후 형평운동은 각 단체와 연계해 전국으로 번지며 10여년간 이어졌다.
국내 인권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탑 뒤 진주문화원 건물로 들어간다.
1층엔 실크전시판매장이, 2층엔 향토민속관이
자리잡고 있다.
진주는 비단의 고장이다.
상평공단 110여개의 비단 생산공장에서 국내 비단의
70%를 공급하고 있다.
국립실크연구원도 진주에 있다.
향토민속관의 주인공은 장석(전통 목가구·한옥 등에
쓰인 이음쇠나 장식물)들이다.
다양한 무늬가 새겨진 경첩·들쇠(손잡이)·자물통·
열쇠를 비롯해 온갖 동식물들을 본뜬 꾸밈장석들이
전시돼 있다.
모두 옛 가구나 건물에 직접 쓰였던 것들이다.
무료(월·목요일 휴관).
촉석문을 통해 진주성(1천원)으로 들어선다.
백제때 처음 쌓은 이래 고려때 대대적인 수축을 거쳐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한 성이다.
현재의 성곽은 내성(둘레 1.7㎞)이다.
본디 둘레 4㎞에 이르는 외성이 있었다고 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문화유산해설사 장일영(68)씨는 “일제 때까지 외성
흔적이 있었다”며 “특히 성밖에 대사지라 불리는
자연해자가 있었으나, 일제가 다 메워버렸다”고 말했다.
일제가 1910년 강제합병 뒤 진주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진주성 성곽 주변까지 레일을 깐 뒤 성곽의
돌을 실어날라 연못에 쏟아부어 메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그 자리에 경찰서·소방서·우체국 등 관공서 건물을 지었다.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국내 ‘3대 명루’로 꼽히는 대형 누각이다.
고려말에 지어져 지휘대로 사용 된 이래 임진왜란때도 총지휘대와 성 남쪽 지휘대로 사용됐다.
촉석루의 다른 이름이 남장대인 것은 이런 연유다.
충절의 고장엔 논개도 산홍도 진주대첩 주인공도 있어
굽이쳐 흐르는 남강 물줄기의 좌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누각을 찾아와 숱한 묵객들이 읊고
또 읊었다.
“퇴계도 읊고 다산도 읊고 좌우간 이 땅 역대 글쟁이 중 촉석루에 와 시 한수 읊지 않은 이가 없다”고
장씨는 말했다.
촉석루와 관련된 시와 글이 640여편이나 남아 있다고 한다.
시깨나 읊는 풍류객들이 이토록 진주 땅에 몰려든 건 경치도 경치거니와
그 유명한 진주 기생 때문이기도 했겠다.
북에 평양 기생이 있고 남에 진주 기생이 있었다.
미색을 갖추고 학문·예술에도 조예 깊은 이들이었다.
이들 중에 논개도 있고 산홍도 있다.
산홍은 구한말 기생이다.
산홍은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지용이 천금을 약속하며 자신을 첩으로 삼으려 하자,
‘내가 아무리 미천한 몸이어도 사람 구실은 하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될 수 있겠는가’ 하며 면전에서
거절했다. 매국노 이지용은 격노해 산홍에게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황현의 <매천야록>에 전한다.
산홍이 잠자리를 거절한 뒤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의기 산홍은 앞서 선배 의기인 논개의 사당 의기사에 참배한 뒤 시 한편을 남겼다.
이 시를 새긴 현판이 논개 사당 왼쪽 처마 밑에 걸려 있다. 오른쪽엔 매천의 시를 걸었다.
이지용이 남긴 것도 있다.
당시(1906년) 이지용은 함께 촉석루를 찾은 매국노들과 촉석루 밑 바위벽에 각자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좀 떨어진 바위 한편에 산홍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3천800명의 군사로 2만 왜적을 물리친(진주대첩) 김시민 장군 전공비를 보고,
옛 도청사 정문인 영남포정사를 지나 국립 진주박물관으로 걷는다.
묵묵히 걷던 장씨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걷는 이 흙길은 임란 때 숨진 7만여 백성·군사들의 유해인 셈이지요.”
진주성은 진주대첩 이듬해 재침입한 3만7천여 왜군에게 함락돼 거의 전 주민이 학살됐다.
박물관에선 임진왜란의 실상과 역사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천자총통·비격진천뢰, 이순신의 친필 등과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관람료는 없다(월요일 휴관).
체험학습실에서 탁본, 탈 만들기, 유물 문양 찍기, 단청 그리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인사동 골동품 거리가 진주에도
진주성 2차싸움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신 창렬사와
승병들의 넋을 기리는 절 호국사를 보고 서장대에 오른다.
남강 상류쪽 전망이 시원하다.
서문을 나서면 인사동 골동품거리다.
20여년전 흩어져 있던 골동품 가게들이 하나둘씩 모여 생긴
거리다.
상점이 대형화하고 거리가 정비되며 예스런 맛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20여집이 남아 길가에 돌절구 맷돌 불상 등 갖가지
석물들을 늘어 놓고 있다.
전통의 진주냉면이 기다리는 서부시장까지는 다소 지루한 길.
2일·7일장인 서부시장 안의 진주냉면집은 60여년째 진주식
냉면을 파는 식당이다.
집 이름이 부산냉면이었으나 3년전 진주냉면으로 바꿨다.
면발보다는 해물육수와 듬뿍 올려주는 쇠고기전 고명이
매력이다.
진주여고 네거리 지나 진주여고로 걷는다.
진주여고는 80여년 전 민족자본 성금으로 설립된 학교다.
고 박경리 선생이 이 학교에서 배웠다.
학교 안 효주기념관에 이 학교의 옛 모습과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다.
푸른재능어린이집 삼거리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 빌라 주차장 앞 비좁은 골목을 따라 잠시 오르면
일제때 지은 누각 비봉루에 이른다.
포은 정몽주가 머물렀던 곳에 그 후손이 지은 것이라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그 옆엔 관리사로 쓰이는 한식·왜식 혼합식 건물이 있다. 누각을 위에서 내려다보려면 다시 내려와
오른쪽 법혜사 골목으로 올라야 한다.
비봉시민공원 옆 계단으로, 일제때 세운 송덕비를 보며 오르면 아스팔트도로가 비봉루 위쪽으로 나 있다.
비봉산은 진주의 진산이다.
산의 형세가 봉황이 나는 모습이라 한다.
산밑으로 이어진 좁은 차도를 따라 내려가 왼쪽으로 5분쯤 걸으면 의곡사에 닿는다.
임란때 민·관군이 왜군에 맞서 이곳에서도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절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비봉산의곡사’란 편액은 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오세창이 쓴 것이다.
들머리 오른쪽 산밑엔 한자와 한글(부묘생(ㅅ 밑에 아래아)쳔목연경)이 함께 새겨진 작은 비석이 있다.
내려와 정자나무 밑에 앉으니 나무에 걸린 시계가 삐딱하다.
한 어르신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45년 됐으니 아직 어린 느티나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