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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포럼 83회 포럼 이기영 목사님의 <아가서 3장~4장> 독후감
제출자 : 곽은서
일시 : 2023년 4월 6일 (목)
Ⅰ. 아가서 3장 요약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아 3:1~4)
주님이 당신을 주지 아니하시는 것은 믿음을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주님이 하신 것이며, 임재의 느낌이 없어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게 하려고 말입니다. 환경으로 말미암아 이런저런 느낌들이 내 안의 평안과 안식을 내안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다만 느낌에 불과하고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알기에 믿음을 사용하게 하시려고 임재를 주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내가 원하는 느낌을 주지 않으신 것이지 주님은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이 다시 임재를 주십니다. 그가 간절히 주님을 찾고 구하니 임재를 주십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말합니다.
임재를 주셨다고 해서 믿음의 연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얼마나 반복될지 모릅니다. 주님의 이김을 나의 이김으로 얻기까지 이러한 믿음을 사용할 수 있기까지 믿음의 훈련과 연단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간절히 찾으니까 주께서 긍휼히 여겨서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롬 8:1~2).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아 3:4)
우리는 먼저 육으로 나고 영으로 났습니다. 육으로 날 때는 정욕이 나를 잉태하게 하고 죄악 중에 출생하였습니다(시 51:5). 그런데 영으로 날 때는 사랑이 나를 잉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그 사랑 안에서 나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낳으시고자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누림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사랑과 은혜를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 여인도 아직도 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를 붙잡고 다시 들어가고자 하는 자의 자리가 나를 잉태한 자의 방입니다. 나를 낳은 그곳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들어가면 언제나 행복하고 만족하고 배부르고 평안하기 때문에 소유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소유하려고 해서는 주님의 연단하심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사랑과 은혜는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입니다(롬 8:12, 롬 12:1).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4~15)
사랑과 은혜를 소유하려고 들어서는 우리는 한 걸음도 성장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자녀가 되지 않게 하려고 때때로 자녀들을 훈육합니다. 사랑과 은혜에 반응할 줄 아는 그러한 자녀가 되어야만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니다. 사랑과 은혜에 반응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이나 성인이 되었을 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사랑과 은혜를 소유한 자가 아니라 반응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그러한 태도를 가지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마치 야곱처럼 세겜에 머무릅니다. 세겜이 더 이상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비로소 그 사랑과 은혜에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신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소유한 자가 아니라 반응할 줄 아는 이스라엘을 만드십니다.
야곱에게도 세겜족과의 충돌을 일으켜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받는 자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믿음과 훈련과 사랑과 은혜의 반응이 영적인 발돋움을 있게 합니다.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왕이 레바논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아 3:6~11)
이 장면은 약혼식 혹은 결혼식의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는 자가 누구인고” (아 3:6)
올라오는 자는 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솔로몬의 연에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연은 이스라엘 용사 육십 인이 옹위하고 있습니다. 이기긴 했는데 전쟁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주께서 그 군사를 통해서 보호하고 계십니다. 솔로몬의 군사가 그 연을 옹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지만 아직 밤에 두려움으로 인하여 허리에 칼은 찼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전혀 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4~5)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그러한 간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느낌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아 3:7)
솔로몬의 연은 침상 가마를 의미하고 주로 밤에 사용합니다. 누워서 쉴 수 있는 것입니다(7절). 그리고 9절의 연은 가마를 의미하며 주로 낮에 사용합니다. “솔로몬 왕이 레바논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아 3:9) 연합은 주님의 이김이 나의 이김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 되고, 주님의 안식이 나의 안식이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사용할 줄만 안다면 언제나 주님과 나는 하나입니다(막 9:23, 빌 4:13).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연기 기둥과도 같고” (아 3:6)
연기는 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연기 기둥과 같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먼저 성령이 충만함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언제나 믿음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견고함, 견실함, 굳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성령이 충만할 뿐 아니라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견실한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이 솔로몬의 연에 타고 있는 그는 솔로몬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곧 솔로몬의 능력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옹위하고 있는 군사는 솔로몬의 군사이지만 또 그의 군사인 것입니다.
“거친 들에서” (아 3:6)
거친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유리했던 광야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을 얻기 위해서는 거친 들에서 곧 광야에서 훈련과 연단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훈련과 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거친 들에서 올라온다고 말합니다. 거친 들에서 올라온 모습은 연단되어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 된 모습입니다. 여기에 주님과 하나 된 특징들이 있습니다.
“몰약”
몰약은 주님의 죽으심, 주님이 받으신 고난, 주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몰약과도 같다는 표현은 주님의 죽으심에 참예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고난에 참예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는 표현합니다. 헌신을 의미합니다. 사랑으로 연합되는 것은 많은 갈등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연합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알 때 그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유향”
유향은 성령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향을 내가 품으면 향을 발합니다. 먼저 육체에 대해서 죽고 성령을 믿으면 그를 따르고 좇으면 그는 나에게 열매를 주십니다. 성령의 열매를 내 안에 먼저 주십니다. 열매는 항상 먼저 내 안에 있다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향도 마찬가지로 유향이 내 품안에 있으면 사람들은 향기를 맡습니다. 먼저 내가 그 향을 내 품에 품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죽은 내 육체 안에 성령이 오시면 주님의 생각과 마음이 채워지고 내가 먼저 그 열매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다른 사람들이 얻고 그 향을 맡게 됩니다.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침노하는 것입니다. 장사는 파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사야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해야 하고, 지식이 부족하면 지식을 구해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능력을 원하면 하나님은 내게 여러 은사를 주십니다. 입술에 둔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말에 능한 자가 되기를 원하면 우리의 입술에 말의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장사가 파는 여러 가지 향품입니다(요 15:7).
“싸움에”
싸움은 이기셨는데 끝난 것은 아닙니다. 싸움은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나면 끝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최후 심판을 하실 것이며 그 후 왕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입니다. 그때 이 전쟁은 완전히 끝나서 원수는 불 못에 들어갑니다. 주님은 이미 이기셨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깨어 근신함으로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하는 싸움과 지키는 싸움은 전혀 양상이 다릅니다. 이기려고 하는 싸움은 언제나 질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은 자꾸 느낌에 속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환경과 내 느낌을 통해서 전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내게 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이미 이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키는 싸움인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레바논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아 3:9~11)
내가 주님과 하나 된다면 주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고, 주님의 평안과 안식이 나의 평안과 안식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주님과 하나 된다면 그의 영광이 내 것입니다. 장차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더 큰 영광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는 만왕의 왕으로 오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납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받으실 큰 영광을 우리도 함께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영광을 얻으셨습니다(빌 2:10, 롬 8:30).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아 3:9)
레바논은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아 1:17)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레바논에서 나오는 나무들입니다. 백향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의미하고, 잣나무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가마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운 사람들에 의해서 운반되어집니다. 절대 수레에 실어서 운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연은 가마와 같이 사람에 의해서 운반되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과 하나 된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십니다. 또한 그 영광은 내 영광이 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레바논 나무”
레바논 나무는 주님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신실하신 인성의 고상함을 의미합니다.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합니다. 항상 모든 신령함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죽으심이 내 안에서 역사할 때 나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본받아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될 때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로마서에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은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로마서 8장 14절에서는 실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이 보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내가 없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은 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2~13)고 말씀합니다. 이 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력을 시험하는 불입니다. 오직 금과 은과 보석으로만 우리가 공력을 쌓아야만 그 공력이 남아서 하나님 앞에 상을 얻게 됩니다. 역시 솔로몬의 연에서도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자리는 자색 담입니다. 이것은 그가 왕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존귀함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주님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계십니다. 그 성도들의 사랑으로 그는 영화로워집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사랑이 없으면 주님은 이 땅에서 영화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57:9)라고 고백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라고 말합니다.
Ⅱ. 아가서 4장 요약
우리는 아가서 4장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여인이 주님 앞에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을 칭찬해주시고 인정해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열매입니다. 먼저 일곱 가지 덕목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이 신부를 향해서 하는 칭찬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7절 이하에 계속 주님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이 아름다움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홀로 준비되어 주님 앞에 가서 예식을 올린 것이 아닙니다. 신랑과 하나 되어 그 사랑과 섬김을 받고 그 은혜를 받고 보니 신부가 이처럼 아름답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주님의 임재 안에 들어간다는 것, 내 온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집중시킨다는 것, 거기서 주님을 듣고 주님을 보고 주님을 받는다는 것은 삶 속에서 혹은 우리의 기도와 묵상의 삶에서 날마다,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갈등을 통해서 완성되어 갑니다. 그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사랑은 미완성인 채로 끝나지만 그 갈등을 극복할 때 비로소 사랑은 온전해지고 완성되어 집니다. 그리고 또 그 사랑 안에서 비로소 온전한 연합이 일어납니다. 그 이전까지는 분리되었다가 다시 하나 되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법을 알았지만 자기를 상관하지 않는 법을 알지 못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1장 아가 4장 1절~5절 7가지 덕목
1. 눈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아 4: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그에게서 주님이 표현되니 어여쁜 것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눈은 영적 안목을 말합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 그리고 그 은혜에 응답한 사람 곧 빛으로 나온 사람들에게는 눈이 밝아져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생긴 것입니다.
눈의 두 번째 의미는 단일초점입니다. 아가서 4장에서 여인이 왕에게 칭찬받는 것은 그의 초점이 단일초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여쁘다고 칭찬받습니다.
“비둘기 같다”는 것은 영적 안목이 대단히 뛰어남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의 일, 성령의 일,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압니다. 또한 하나님이 장차 무엇을 하실지 감추어진 비밀들도 압니다. 이것이 영적 안목을 가진 비둘기의 눈의 특징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이 비둘기 눈은 너울 속에 있습니다. 너울 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나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나 사람들이 내 영적인 안목을 눈치 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울 속의 내 눈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막연하게 알 수 있을지언정,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내 영적인 안목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안목은 있는데 그 얼굴에 너울이 없어서 영적인 안목으로 보고 알게 되고 깨달은 것들을 너무 쉽게 발설합니다. 너무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실상 스스로에게 참 무익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익하나마 부득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2. 머리털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머리털은 헌신과 순복을 의미합니다. 헌신은 주님 앞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은 참으로 기회입니다. 순종과 복종의 합성어가 순복입니다. 마음눈이 안 열려져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같은 소망을 가지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이 복종입니다. 그래서 순복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사도 바울이 쳐서 복종시킨다는 표현을 로마서 8장, 고린도전서 9장에서도 사용을 합니다. 그에게도 복종이 많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동의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일단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내 마음에 동의가 되지 않아도 그것을 무시해버리고 복종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복이 오히려 더 적절합니다.
삼손처럼 나실인의 경우를 보면 헌신된 날 동안 머리털을 밀지 않습니다. 그가 머리털은 자를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머리털을 길러졌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리털이 잘렸다는 것은 이제 그가 더 이상 사사가 아니며 나실인이 아닌 것입니다. 헌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털은 헌신을 표현하고 헌신된 사람에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헌신은 능력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염소는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소나 송아지를 드리지 못하면 염소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속죄제를 드릴 때 염소를 드렸습니다.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염소 떼는 많은 헌신, 많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 있다면 주님은 늘 내게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은 기회입니다. 언제나 우리 자신들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면 그분이 나타내시는 모든 일상 속에서 혹은 모든 관계 속에서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헌신은 더욱 많을 것입니다.
이 염소는 길르앗산 기슭에 누웠다고 하고 있습니다. 길르앗산 기슭에 누웠다는 것은 그가 제물로써 이제 충분히 준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성장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성장시킨다는 것이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하나님 앞에 더 좋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나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성장시켜야만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앞에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리’는 많다는 것으로 헌신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길르앗은 풀이 풍성한 곳입니다. 그곳에 염소 떼가 놓이면 만족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그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먹을 것이며 그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산에서 만족하리라”(렘 50:19)고 말합니다. 헌신은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염소는 길르앗산 기슭에서 배불리 먹고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살을 찌웁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명, 달란트를 계발하여 주님 앞에 나를 산제사로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염소가 배불리 먹고 살이 찜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훌륭한 제물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헌신됨으로 능력이 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 날마다 나 자신을 계발시켜 나가야 합니다. 더욱더 성령의 은사를 갖기를 힘쓰고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얻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내게 주신 그 소명적 은사를 위해서 내게 있는 달란트를 남겨 이를 남기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이처럼 자기 자신을 성장시킵니다. 그래서 길르앗에 누운 무리 염소 같다는 것은 그가 헌신했고 더 많은 능력이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3. 이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아 4:2)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는 이가 없어서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고 젖이나 먹는다고 말씀합니다. 그에게 이가 있다는 것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받아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 5:12~14)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제사장들은 털 있는 옷을 입고 제사를 드리러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털은 천연적인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육체의 수단과 방법으로, 육체의 열심으로 받아서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가진 지성과 학문으로 부지런히 연구하고 배운다고 해서 그 말씀을 영으로 받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천연적인 것들, 육체로 혹은 육체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 열심으로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섬기거나 사랑할 때 육체의 열심으로 그것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영적인 원리에 있어 쌍태는 균형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균형이라는 것은 여러 방면에 있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편식하지 않고 다만 ‘아멘’할 뿐이며 순복할 뿐입니다. 이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그가 이미 장성한 그리스도인임을 의미하고, 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은 감사하고 기쁘게 받는데 어떤 일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를 싫어해서 받아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녀를 어여쁘다 하신 이유는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사랑과 은혜에 반응하여 주님께 순종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직은 헌신의 자리까지 온전히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 헌신하고 싶어서 자신을 날마다 성장하도록 힘쓰고 자기 자신을 더욱 계발하기를 힘씁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 그 사랑과 은혜에 온전히 순복되었기 때문에 쌍태를 낳은 암양 같다고 말씀합니다. 즉 철저하게 균형이 갖추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만 인간관계를 받지 못하거나, 이것은 받는데 저것은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균형이 맞추어져 주님 앞에 순복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는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먹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수용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그 음식의 맛을 느낀 것만이 아니라 그 음식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음식이 내 온 몸에 흡수되어야 합니다. 흡수하지 못하고 그냥 배출해버리면 그는 음식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을 먹었다는 것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 받아져서 믿음으로 아멘 되었을 뿐 아니라 내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고 내 마음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 맛을 본 것은 말씀을 먹을 땐 은혜롭고 깨닫고 위로를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는 수용되었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수용되었다는 것은 내 생각이 바뀌고 내 마음이 달라져 내가 이제 의지가 발동하게 됩니다. 내가 이제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뜻을 정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온전히 아멘 되었고 또한 그 말씀이 온유와 겸손으로 받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먹은 것입니다. 이를 가졌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이제 단단한 식물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가 없으면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축복의 말씀만을 좋아합니다. 늘 어린아이들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가졌다는 것은 이제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은 천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털 깎인 암양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천연적인 것은 하나도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내 열심이나 나의 재능이나 나의 지혜나 나의 명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전혀 먹은 것이 아니고 그저 느낀 것뿐입니다. ‘이’는 받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받아들입니다. 이 받아들임은 내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받아들임은 균형 있게 될 것입니다.
4. 입술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아 4:3상)
입술이 홍색 실 같다고 말씀하는데 홍색은 구속을 말합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에 들어온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 집이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 증표로 창문에 붉은 줄을 맵니다.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수 2:21) 우리의 입은 구속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7-18)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은 홍색 실이 되어야 아름답습니다. 구속된 입술입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5~8)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먼저 그 입술을 구속시키기 위해 입술의 죄를 알게 하십니다. 그가 이처럼 입술의 죄로 인해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그 입술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구속의 입술을 가진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말합니다. 입술이 구속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주께서 그를 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입술로 쓴물과 단물을 내서는 주님 앞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쓴물과 단물을 내는 입술은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입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한 입술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의 입술은 주님의 피로 씻겨야 합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가져야 하고 구속된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내 육신의 생각과 마음으로 더러운 것들을 말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입술에는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허투루,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우리는 나로 말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로 말하고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는 것이지 사람의 지혜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 3:16)라고 말씀합니다.
5. 뺨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아 4:3하)
(1) 석류 한 쪽 같구나 : 반쪽 석류 같은 뺨
이 두 뺨이 반쪽 석류 같다는 것은 열매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성도의 옳은 행실인 열매를 보기를 원하십니다(요 15장, 갈 5:22~23). 반쪽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석류를 반으로 쪼개면 알알이 박힌 씨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매는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더욱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와 더 연합되고, 성숙될수록 오직 주님만 나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자가 될 것입니다.
(2) 너울 속에 가려져 있는 두 뺨: 내 안에 있는 생명의 결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
우리가 날마다 주님의 마음을 취하려 하고 주님의 형상을 본받으려고 하여 주님을 얻고 주님으로 채워지게 되면 쪼개어 알알이 드러난 열매로 주님 앞에 보이고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뺨에 너울이 씌워졌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나 열매들은 너울이 덮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외식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 내 열매를 보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기 위한 의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열매일 까닭이 없습니다. 열매란 내 안에 생명으로 말미암아 맺히는 것인데 보이기 위한 의는 생명은 없고 사랑하는 척 하고, 온유한 척 하고, 충성하는 척 하며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고 오히려 추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시고 주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뺨이 석류 같고 그것이 너울 속에 가려져 있을 때에만 비로소 아름다운 것입니다. 열매는 내 안에 있는 생명의 결과입니다.
6. 목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아 4:4)
(1) 확정된 영적인 의지를 나타냅니다
주님의 신부로서 가진 덕목, 그 아름다움의 7가지는 관상과 관조의 삶이며, 이로 말미암아 조명되고 합일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실하신 주님을 가만히 바라보고 그분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에도 같은 일이 시작됩니다.
다윗의 망대와 같은 목은 사람의 의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에 대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심을 봅니다. 다윗의 망대는 ‘의지가 분명하고 견고하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확정케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다윗의 심령에 닿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노래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기로 그 마음을 견고케 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이 견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믿음과 사랑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채워져야 합니다.
다윗의 망대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어도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려니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신상에 절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견고한 망대입니다.
에스더가 그 마음을 확증했습니다. 그는 그가 왕비 된 것이 이때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살고 죽음에 연연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아하수에로의 아내로, 페르시아의 왕비로 세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르드개의 권면의 말을 듣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아름답다고 하시는 신부는 견고한 망대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영적인 의지와 주를 향한 의지가 요동하지 않고 꺾이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견고한 망대와 같습니다.
(2) 원시치 못함과 영생을 바람에 대하여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원시치 못함에 대해 말합니다. 망대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원시치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멀리 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땅을 보고 살면 결코 견고한 다윗의 망대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원시치 못하여 늘 근시처럼 세상과 땅의 일을 바라보고, 육신의 일을 바라보고 사는 굽은 목은 주님이 보시기에 결코 아름다운 목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시선을 영생에 두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늘에 있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고 말씀합니다. 오늘 내 삶의 고단함과 오늘 내게 있는 고난과 징계 등 내 삶에 일어난 이 모든 일들에 그 마음이 가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앞은 바로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모든 민족의 주가 되시는 놀라운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면 다윗의 견고한 망대와 같아서 멀리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망대는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이고 일천 방패가 달린 망대입니다.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아 4:4) 곧게 세워진 망대는 공격용이 아니라 지키는 용도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대체적으로 지킴에서 출발합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삶은 주로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을 보존하고 지켜내는 과정 속에 이루어지고 그 결과 생명적인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열매로 인해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은 망대와 같다”라는 것은 자기를 지키는 순결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 생활은 근신과 깨어있음이 늘 있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
7. 두 유방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아 4:5)
(1)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균형 있는 반응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8)
믿음과 사랑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가슴입니다. 항상 주님을 향해 믿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것도 노루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민감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혹은 주님 앞에 믿음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주님을 안지 못합니다. 나를 비우고 주님께 가서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주를 바라보고 주님을 응시하면 주님이 보이고 만나집니다. 그때 주님을 안는 우리의 가슴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믿음으로 이런 설렘과 민감함으로 믿어드리지 못하다면 주님 앞에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신부들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안는 가슴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때 우리는 사랑으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안습니다.
(2)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쌍태란 믿음과 사랑이 주님을 향해서 균형 있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위대하심을 말할 때 믿음은 뛰는데, 주님의 아름다움 앞에서 사랑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받을 때 믿음은 반응하는데 주님이 주신 은혜 앞에 사랑을 드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쌍태가 아닙니다.
(3) 백합화 가운데
백합은 순결, 청결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나 사랑은 청결함이 없이는 절대 반응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청결하지 않는 양심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생각해도 그 양심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정죄하여 믿음을 방해하고 사랑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믿음을 드리고 사랑을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곧 아름다운 가슴으로 주님을 받고 안기를 원하면 그는 항상 청결한 마음을 가지기를 힘써야 하며,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 3:21~22)
항상 우리의 양심에서 우리를 책망할 것이 생기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주님 앞에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늘 하나 되기를 원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양심에 책망할 것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양심에 문제가 생기면 직관과 영교도 모두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과 사랑에도 반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아 4:5)라고 말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양심의 순결함과 청결함에 대해서 단순히 죄의 문제를 논하지 않고(죄는 요한일서 1장에서 논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한 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아니한 죄가 있으면 이에 대해서 성숙한 양심은 책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주님을 얻게 되고 주님이 당신을 주시는 관계 속에서 하나 되는 연합이 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오직 백합화 가운데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순결한 양심, 청결한 양심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과 늘 하나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그 양심에서 책망할 것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혹여 그 양심에 책망할 것이 있다면 다시 몰약 산으로 가야만 합니다.
빛은 놀라운 작용을 일으킵니다. 빛은 그림자가 있고 또한 빛은 드러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온전할수록 이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 빛에 온전히 영향을 받지 못하는 것이 내게 있음을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뿐 아니라 빛은 드러냅니다. 이 드러냄은 내 안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에 잘 알아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현재에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씀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것은 다른 죄인들과의 상대적 비교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스스로 느끼고 있는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너무나 많이 인식하고 알아지기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 곧 내가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다만 빛에 의해서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내 생각과 마음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죄들도, 비록 내가 그것을 좇지 않았고 행하지 않았어도, 알아집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사귐이 있음으로써 내 죄를 아니까 이 죄에 대해서 자백합니다. 우리가 백합화 같은 순결한 양심으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이야기입니다. 요한일서는 생명에 있어서의 죄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5~10)
오직 이 죄에 대한 인식은 빛 가운데 행할 때 우리에게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가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게 될수록 죄에 대해 알게 되는데 이것이 내 양심에 타격을 주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길입니다. 그리하면 즉각적으로 다시금 순결한 양심과 청결한 마음으로 회복이 되어집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죄에 대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안기 위해서 반드시 가슴과 마음에 품어야 할 감정입니다. 이 감정이 여전히 주님 앞에 민감하기 원한다면 언제나 백합화 가운데에 나를 두어야 하며, 순결하고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책망할 것이 있을 때 그대로 방치하다보면 어느새 그 가슴이 둔해집니다.
(4)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쌍태 노루 새끼는 두려움이 많고 겁이 많고 부끄럽고 쉽게 놀라고 감각이 예민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에서 혼으로, 혼에서 몸으로 그 질서가 잡혀야 합니다. 내면세계의 질서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고 지속적으로 유지된 상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민감해야 합니다. 겁이 많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이의 가슴 속에는 주님을 믿는 믿음과 사랑이 균형 있게, 치우지지 않고 민감하고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어야 주님과 연합이 됩니다. 생명의 특징은 믿음과 사랑에 있어서 예민합니다.
믿음은 주님을 얻게 하고, 사랑은 주님께서 당신을 주시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는 말씀처럼 연합된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온전한 관계 속에서의 연합입니다. 존재 속에서의 연합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내 가슴에 사랑을 더욱더 키워가고, 내 가슴에 믿음이 더욱더 자라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2장 아가서 4장 6절~16절 묵상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아 4:6)
이것은 신랑의 말이 아니라 여인의 말입니다. 날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 더 늦기 전에 주님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십니다. 여인은 온전치 못함을 알고 십자가와 부활의 삶, 그 언덕으로 올라가야겠다고 말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위험합니다. 아릅답다 하시고 어여쁘다 하시는 주님의 칭찬에 취하여 그 시선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게 될 때, 나의 완벽함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면 더 이상 산을 오르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 오르지 않는 자,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되지 않는 자는 더 이상 주님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주님 앞에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자기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 나를 견주니 신부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에 감히 비할 수 없으니 내가 더 아름다워지고 온전해져야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나를 여인 중에 어여쁜 자라고 하시지만 나는 나의 신랑 되신 주님을 바라보기에 완벽한 주님의 아름다움에 비하니 그의 신부될 내가 너무도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몰약 산과 유향의 산으로 오르겠다고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이룬 것도 아니기에 푯대를 향하여 그 언덕을 오르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생명의 삶을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간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완성은 없습니다. 온전한 아름다움을 가진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금 칭찬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또 다시 내 자신을 보며 거기서 온전하지 못한 나를 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온전해지는 것을 결코 중단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일이며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십자가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내가 다시 죽고 오직 부활 생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이 되고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전에는 ‘내게 어둠이 있으니 당신이 필요합니다. 내게 약함이 있어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어서 와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부족함과 나의 연약함과 나의 온전치 못함이 느껴질 때 나의 죄와 허물이 느껴질 때 “가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 온전히 처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온전할수록 자신이 온전치 못함을 압니다. 성숙할수록 자신이 미숙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주님께서는 7가지의 열매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여쁘고 어여쁜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나타난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그것을 주님을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그러한 칭찬에도 본인은 부적절하고 여전히 처리해야 될 것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며, 내가 아직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거룩해져 갈수록 자기 안의 죄를 봅니다. 그는 이 죄와 싸워서 죄를 이기고 경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아 4:6)고 말씀하는 것처럼 처리되어야 할 것이 있고, 오직 주님을 의지함으로써만 내가 온전해질 수 있음을 깨닫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0~14)
부활의 영은 권능의 영입니다. 이기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권능에 참예된다면 우리는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길 것입니다. 나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우리의 대적인 마귀를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직도 내가 온전히 이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는 주님께 헌신된 사람입니다. 자기의 목숨조차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온전히 헌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헌신한 사람은 자신이 불충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내가 주님의 죽으심에 온전히 연합되어져야만 비로소 영광의 부활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온전한 헌신을 통해서 죽음을 넘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장차 우리에게도 그 영광이 약속되어 있는데, 주님과 더불어서 혹은 주님이 받으신 그 영광을 우리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또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것처럼 그의 죽으심에 참예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것이 온전한 헌신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이러한 승귀가 일어나게 됩니다. 영광의 부활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의 부활이며 위대한 부활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부족하고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더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가서에서 말씀하는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입니다. 유향의 작은 산은 부활의 권능을 의미하는 것이며, 몰약 산은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내가 온전히 이루지 못했고 부족함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아 4:7)
아가서 4장 1절에서는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4장 7절에서는 “순전히 어여뻐서”라고 말씀합니다. 순전하기 때문에 어여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와 불의가 발견될 때마다 몰약 산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이 몰약 산은 그 죄로부터 그를 깨끗케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순전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과 연합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순전한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순전하시고 흠이 없으신 거룩함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행한다면 그는 역시 순전하여 흠이 없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할 때만 온전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 죽으심에 참여하고 또한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를 힘쓴다고 고백합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순전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2~24)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이러한 흐름 가운데 그가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유일하게 그를 인도하는 것은 그 안에 계신 성령입니다. 그렇게 될 때 법아래 있지 않고 법은 더 이상 그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순전함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고 말씀합니다.
먼저 그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면의 질서를 거스르고 방해하는 육체와 소욕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갈 5:24)이 성령의 인도함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고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 흐름이 자꾸 막혀버리는 것입니다(갈 5:17~1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고 말했습니다. 그가 육체와 소욕이 십자가에 처리된 사람이라면 그는 생명의 질서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순전하고 어여쁘며 흠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주님께서 하시는 평가입니다.
여기에 존재의 문제와 상태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했기에 지속적으로 추구한다고 고백합니다(빌 3:7~14). 그래서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한편으로는 몰약 산으로, 또 한편으로는 유향의 작은 산으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만 참 흠이 없고 순전하여 아름답다는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질서, 내면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에게 그런 열매가 나타나며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온전히 이루지 못한 자로서 나의 부적절함, 나의 죄, 나의 약한 것들이 그대로 드러날 때마다 또 다시 주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하고 그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더 많은 시간 동안 주님 앞에 흠이 없고 순전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아 4:8)
주님께서 처음으로 “나의 신부야”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가서 2장 10절 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연단의 과정을 거쳤고 주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결과로 주님은 그에게 또다시 나와 함께 하자,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주님은 절대로 그 부르심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8:29). 그러므로 주님께서 다시 함께 가자라고 부르시는 것은 바로 주님은 전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과 주님은 여전히 그 부르심 가운데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달려가고 좇아가겠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레바논은 하늘을 상징합니다. 이 땅에서 완전히 격리되어있는 높은 산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함께 하고 거기서부터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장소는 언제나 하늘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사람의 말과 하늘에 속한 가치관과 하늘에 속한 사람의 태도와 지혜와 하늘에 속한 사람의 능력을 가져야 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은 레바논에서부터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엡 2:6, 골 3:1~4).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안에 거하시고 생명이 되시는 것뿐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가서 그분의 생명 안에 내가 속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위이고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의 가치관과 행동과 성품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되면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의 존재는 하늘에 있는데, 아직도 많은 경우 하늘에 속한 자의 가치관과 인격과 성품을 갖지 못하고 그 말과 행동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하나 된 상태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상태에 있으면 하늘에 속한 가치관과 하늘에 속한 성품과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흠이 없고 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무너뜨리고 훼방하는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아 4:8)
여기서 아마나는 진리를 의미하고, 스닐은 부드러운 갑옷을 의미하며, 헤르몬은 파괴 혹은 소멸시킨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싸움에 관계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자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사자굴과 표범산은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사자들은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표범은 할퀴는 자 또는 삼키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악한 영들은 사자와 같이 으르렁대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삼킬 자는 표범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레바논에서부터 주님과 함께 있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서 또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주께서 악한 영을 멸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주님과 같이 마귀를 멸하려고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려다보라는 것은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사자와 표범이 있으니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주께서 저들을 대적하고 저들을 멸하고자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늘에 속한 나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고 드는 사자와 표범을 분별해내고 그들로부터 진리 안에서 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진리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3)
모든 일을 행한다는 것은 아마나를 의미하고, 스닐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이며, 헤르몬은 파괴하고 소멸하는 자를 능히 대적하고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하늘에 속한 자로서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레바논에 함께 가서 그곳에서 행하는 자가 되고 그곳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싸움이 알아집니다. 마귀의 의도와 목적을 알게 되고 그 방법이 알아져 적절하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고, 또한 진리 안에서 행함으로써 적절하게 마귀를 대적하고 소멸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모든 것들은 사자와 표범이 드러냅니다. 사자는 울고 많은 방법을 가지고 두렵게 만들고 염려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닙니다. 표범은 할퀴고 삼킵니다. 마귀는 사자와 같이 으르렁대서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공포와 근심과 염려를 가져다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삼켜버립니다. 으르렁대는 것에 두려워하게 되고 근심과 염려를 갖게 되는 것이지만 또 이것이 표범이 되면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해버립니다. 내가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적절하게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저를 소멸시키는 싸움을 싸울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들이 혈과 육에 속한 싸움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아 4:9)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의 누이라고도 부르시고 나의 신부라고도 부르십니다. 신부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누이는 혈통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주님에게 이 여인은 사랑으로 맺어진 신부일 뿐 아니라 혈통으로 맺어진 누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나의 누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는 일찍이 주님과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그런데 주님과 형제가 되는 것은 생명 안에서는 사실인데, 인격적 연합 즉 성품에서는 형제가 되지 못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말합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된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가 가질 때 예수님이 나의 형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곧 성품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가졌고 형제는 서로 닮습니다. 예수님의 참 동생, 아우가 되어 나의 누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인격적인 연합 즉, 자기 자신의 성품을 그에게서 보고 나의 누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신부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연합입니다. 주님은 그에게서 주님과 인격적인 연합 곧 주님의 성품을 그에게서 보고 더 나아가서 주님은 그에게서 사랑의 하나 됨을 보는 것입니다. 이때까지는 많은 부분이 주님의 짝사랑과 일방적인 사랑이었으나 이제는 상대적인 사랑에 반응을 하는 사람을 보고 나의 신부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나의 누이와 나의 신부가 결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누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과 성품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이고, 나의 신부라고 하심은 그의 사랑과 주님이 하나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아 4:9)
전에는 주님이 여인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주님을 한 번 보는 것으로 여인은 마음을 주님께 빼앗겼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여인은 충만했고 행복했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제 반대로 여인이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내어주기 때문에 그 사랑에 주님의 마음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과 같이 주님의 마음을 빼앗고 있어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드려짐으로 신부의 아름다운 행실 즉 옳은 행실이 있어야 합니다.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그녀의 눈으로부터 반응뿐만 아니라 여인의 목의 긍정적인 반응을 본 것입니다. 잠언 1장 9절에서 보이는 것처럼 목의 구슬은 순종을 대표합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아 4:10)
사랑은 상대적일뿐 아니라 상호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서로 주고받으면서 더욱더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여기에서 “포도주에 지나고”라는 것은 탁월하다는 뜻으로 결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의 사랑을 “네 사랑은 포도주에서 지나고”라고 말씀합니다.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아 1:2), 주께서 성도의 사랑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이 확장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도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아 4:10)
아가서 3장 6절은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주님을 가까이 할수록 그 향기가 더 진해집니다. 우리가 주님과 늘 가까이 하고 살면 우리는 늘 그 향기에 취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께 매료되고 매혹당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친숙함, 친밀함입니다. 여기서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는 것은 내 성도의 향기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향기는 기름에서 말미암습니다.
‘기름 바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성령으로 보게 하실 때 보게 되며, 말씀으로 거울을 들이댈 때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은 주님이 바르시고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향기를 말씀하고 그 향기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향기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성령의 냄새, 성령의 향기를 느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육신을 느끼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은사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열매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성령의 향기를 나타내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아 4:11)
꿀방울은 많은 말이나 유창한 말이 아니라 적절한 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방울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은 항상 필요할 때 적절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꿀과 같이 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 4:6)
말은 자기를 위해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듣는 이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적절한 말이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고 그 지식과 지혜가 내 안에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말하게 되면, 이는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는 것이며, “꿀방울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혀는 저장하는 장소로 공급받는 장소를 뜻합니다. 꿀은 체력이 고갈되고 약한 자를 북돋는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사 50:4)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꿀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 참된 성령의 지식과 지혜가 있다면 그는 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꿀방울처럼 적절하게 꿀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말로 곤핍한 자를 어떻게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 자기의 말을 듣고 살아야만 합니다. 남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말도 들을 줄 알아야만 꿀 송이 같은 말을 합니다. 그 혀에서 꿀방울이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칭찬한 대로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어야겠습니다.
젖은 어린아이를 먹이는 양식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돌봅니다.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권해서 그들로 자기와 같이 주님 앞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주님 앞에 서로 맡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먹여서 자라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 혀 밑에 젖이 있어서 그것으로 어린 사람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잘 먹여주어야 합니다(잠 10:11, 잠 16:21~24, 잠 23:15~16).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아 4:11)
레바논은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그곳은 천국과 같은 천상의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항상 예수의 향기가 나야 하며 레바논의 향기가 나타나야 합니다. 구별된 가치관과 드높은 비전을 가지고 산다면 그에게서는 레바논의 향기가 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내게 그 향기를 맡으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아 4:12)
동산은 공원입니다. 그곳에 가서 꽃을 보고 열매를 보며 즐기고 누립니다. 그런데 이 공원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하고 주님으로 나를 누리게 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성경에서 물은 항상 생명을 말합니다. 이 물이 우물이라는 것은 물이 저장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샘은 솟아납니다. 이 생명이 내 안에 풍성하고 충만하게 저장되어 있고 이 생명이 마르지 않고 늘 솟아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생명이 내 안에서 솟아나고 내 안에서 충만한데, 그것은 사람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나 자신의 영적인 비밀을 드러내고 그들에게 자랑하거나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늘 비밀입니다. 물론 필요한대로 그것이 나에게서 흘러나고 있습니다. 흘러나는 것은 언제나 주님을 위하여, 주님 때문에, 주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항상 비밀입니다. 우리가 아가서를 읽어가면서 깊이 받아야 될 것은 바로 이 부분들입니다. 너울속의 눈, 너울속의 뺨,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입니다.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아 4:13~14)
이것들은 동산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답고 열매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화초와 열매를 주님께서 아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이것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이 모든 열매는 주님이 먼저 취하시고, 주께서 나를 통해 각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빛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빛이 되셔서 나를 통해서 빛을 내시는 것입니다.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아 4:15~16)
오직 영적인 권위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샘과 우물은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레바논은 높은 곳, 곧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합니다. 생명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일에 대해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에서부터 그 시내가 흘러서 동산의 샘이 되고 생수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권위라는 것은 레바논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그로 말미암을 때 영적인 권위를 갖게 되고, 이러한 영적인 권위는 그 열매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샘은 지속적으로 그 샘에서 솟아나서 물이 흐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동산에 이 샘이 없이는 즉 이 생명의 흐름이 없이는 이 동산에 있는 어떤 화초도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이 레바논에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그에게 공급되니 그는 늘 생명의 흐름 속에 있는 것입니다. 또 그 흐름이 있어야만 화초를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동산 안에 화초가 무성하고 또 많은 열매가 있게 되어져서 주님이 그것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수의 우물이요”
생수의 우물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물은 저장하는 곳입니다. 물론 그 우물에도 샘이 있어서 늘 생수가 흘러나오는데 우물은 항상, 많이 저장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생명은 내 안에서 흘러나야 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흐름은 늘 지속적으로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생명은 내 안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 생명은 내 안에서 역동적인 역사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물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는 생수의 우물은 이 생명이 그 안에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히 주님 안에 귀속되어 있어서 완전히 그 생명이 내 안에 채워져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동산 안에는 온갖 화초가 있고 많은 과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 문제를 주의 깊고 관심 있게 자기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살펴야만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내 자신이 먼저 내 안에서 샘이 계속 흘러나는가의 문제를 살펴야 하고, 또 하나는 내 안에 샘이 흘러나서 생명이 충만하지 아니할 때 우리는 너무 자주 내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산에 많은 화초와 많은 열매도 없을 것입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아 4:16)
북풍은 차갑고 매서운 바람을 뜻하고, 남풍은 따뜻하고 온화한 바람으로 우리의 환경 속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환경 속에서 때로는 북풍이 불기도 하고 때로는 남풍이 불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환경을 이기지 못하니까 그 앞에 노출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고 했어도 망설이고 못 갔으나 지금은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북풍과 남풍을 모두 맞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영광이나 십자가를 통한 이김만 알아서는 주님의 고난을 잘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주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할 때 그것을 싫어하고 거절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십자가의 영광과 십자가의 승리만 알아서는 안 되고 그 반대편의 십자가가 주는 그 수치와 수욕과 고통을 알아야만 합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것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것이 같은 의미입니다.
남풍은 따뜻하고 온화하고 부드럽습니다. 북풍은 차갑고 매섭고 거셉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담대함은 자신이라는 자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를 신뢰해서 스스로 나는 어떠한 시련과 환란도 능히 감당하고 이길 수 있으며 인내할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그러나 이 성도가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주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의뢰함속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담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찾아가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 1:6)고 말씀합니다. 그 근거는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수 1:5)는 것입니다. 주님입니다. 여호수아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는 것은 결코 나 자신도 아니고 혹은 그 백성을 의뢰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죄가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불성실한 일이며 불충한 일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음입니다. 북풍이 불든지 남풍이 불든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환경의 문제는 내 안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기 보다는 오히려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끼치는 것이 아니라 북풍이든 남풍이든 간에 그것이 환경 속에 있는 어떤 시련이든 또는 환경 속에 있는 어떤 형통함이든 상관이 없이 오히려 내 안에서 생명을 더 강화시킬 뿐입니다. 내 안에서 생명의 역사를 더 역동적으로 나타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체의 비결을 가졌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일체의 비결을 가졌다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역시 같은 고백입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아름다운 실과를 먹기 원하노라”(아 4:16)
이러한 환경적인 문제는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서 그 생명을 더 역동적으로 역사하게 해서 내 안에 더욱더 많은 화초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주님의 누림이 있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은 주님의 누림입니다. 그것이 아가서 5장 1절에서 화답이 되어집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주님과 나는 언제나 신랑과 신부이기 때문에 신부가 많은 화초를 가꾸고 많은 열매를 맺으면 신랑은 그것을 보고 그것을 먹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우며 만족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신랑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내게 주시는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기쁘고 내가 만족하고 내가 즐겁고 행복한 것처럼 역시 나의 신랑 되신 주님 그분도 나로 말미암아 나를 얻음으로써 그렇게 기쁘고 만족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주님과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주 안에 있기를 힘쓰고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생명이 내 안에서 충만하고 늘 넘쳐흘러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들이 자꾸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성령의 빛 비췸과 조명하심 앞에서, 영적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나와 함께 하는 지체들과 교우들을 통해서 나 자신이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기를 힘써야만 합니다. 우리는 육이 아니고 참 영입니다. 그러므로 내 육신의 상태보다도 더 알기를 힘써야 하는 것은 바로 영입니다. 내 영적인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영성포럼 83회 포럼
이기영 목사님의 <아가서 3장~4장> 독후감
제출자 : 곽은서
일시 : 2023년 4월 6일 (목)
* 요약본의 분량이 많아 독후감을 별도로 정리했습니다. 독후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에 대한 묵상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를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잠시 거두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사용하고 믿음을 드리길 원하시며 또한 믿음으로 인내하고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길 원하십니다. 이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을 바르게 배우고 적용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믿음의 인내와 믿음의 연단을 통해 더욱 철저하게 나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주님만을 신뢰하고 의뢰하는 복된 삶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개명된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게 되는 사건을 통해 이 공과를 더욱더 적용하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나라를 얻고 당신의 의로움과 거룩함에 참예케 하시려고 철저하게 훈육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주님의 임재를 주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임재를 거두어 가시니 고스란히 환경 가운데 노출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이 임재를 거두신 것은 믿음을 훈련하고 믿음을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느낌만 변한 것뿐입니다. 주님에 대한 임재에 대한 느낌이 없다고 해서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는 두려움이나 근심에 대한 느낌에 대하여 인내해야 합니다. 믿음을 사용하여 그것을 이겨내야만 약속을 받습니다. 이 믿음의 연단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믿고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믿음의 훈련은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소유한다는 것은 주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환경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롬 1:17, 히 10:38~39).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십니다. 다만 잃어버리는 것은 그 임재의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임재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 임재를 다시 나타내십니다. 그것은 훈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훈련은 느낌에 속지 않고 믿음을 사용하여 주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될 때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임재의 느낌에 머무르면 이 느낌을 잃어버리면 주님과 따로 있습니다. 이 느낌이 있을 때 주님이 임재하신 것을 내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주께서 임재를 주지 않으시면 그 느낌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주님 없는 자처럼 서성이고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훈련은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소유한다는 것은 주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연합의 체험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능력이 곧 나의 능력이 되고, 주님의 이김이 나의 이김이 되는 것입니다.>
2. 연합에 대한 묵상
믿음과 사랑 안에서 날마다 주님과 연합한 복된 삶이 되도록 더욱 자기부인, 자아부정, 자아상실에 힘쓰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골 1:28~29).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현재성 안에 있어야 하고 지속되어야 하며 온전(순전)해야 하기에 아가서 4장 5절에 나온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아 4:5) 두 유방(믿음과 사랑)은 주님을 얻게 되고 주님이 당신을 주시는 관계 속에서 하나 되는 연합이 됩니다. 이것은 오직 백합화 가운데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가야하며 균형을 잡아야하기 때문에 균형 잡힌 영성인이 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백합화는 순결, 청결을 의미합니다. 항상 우리의 양심에서 우리를 책망할 것이 생기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믿음과 사랑에 큰 타격을 입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주님 앞에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늘 하나 되기를 원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양심에 책망할 것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양심에 문제가 생기면 직관과 영교도 모두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과 사랑에도 반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가 백합화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 3:21-22)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양심의 순결함과 청결함에 대해서 단순히 죄의 문제를 논하지 않고(죄는 1장에서 논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한 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아니한 죄가 있으면 이에 대해서 성숙한 양심은 책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주님을 얻게 되고 주님이 당신을 주시는 관계 속에서 하나 되는 연합이 됩니다. 이것은 오직 백합화 가운데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순결한 양심, 청결한 양심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과 늘 하나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그 양심에서 책망할 것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혹여 그 양심에 책망할 것이 있다면 다시 몰약 산으로 가야만 합니다.>
3. 통로와 동역에 대한 묵상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과 함께 일하길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나를 통해서 나와 함께 가십니다. 나를 통해서 나와 함께 운행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의 은과 금을 나타내십니다. 당신의 영광과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주님으로 사는 사람을 통해, 그 사람과 함께 주님은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 주님은 사랑을 받으십니다.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알고 주님을 얻게 됩니다.>
첫째, 이 주제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엡 1:6)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엡 1:12)과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엡 1:14)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온전히 영광 받으시고 영화로우시길 소원했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이 우리를 통해 적용되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길 소망합니다.
둘째, 주님의 통로와 동역을 위해 주님 안에 거하길 소원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생명을 공급받고 주님과 사귐이 있는 골방을 갖도록 더욱 힘쓰고자 합니다. 문서팀 사역을 통해 생명을 공급받고 공급하는 복된 사역이 되도록 주님을 더욱 의뢰하며 참여하고자 합니다.
4. 믿음과 순종과 사랑과 헌신에 대한 묵상
믿음은 이김으로 나타나고, 순종은 사랑의 반응과 헌신으로 나타남을 묵상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반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순종의 길을 택합니다. 믿음만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주님의 죽으심(십자가)과 부활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이 내 것이고 주님의 부활하심이 내 것이니 내가 다시 산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의 체험과 부활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반응하고자 하지 않으면 자신을 내어주거나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5. 주님께서 칭찬하신 여인의 7가지 특징 묵상
여인의 7가지 특징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부가 되도록 더욱 힘쓰고자 뜻을 정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5절 말씀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묵상하며 오직 주님으로, 주님을 위하여 성장을 추구하고 참여하는 순전한 신부가 되길 소원했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아 4:1~5)
<아가서 4장 1절 이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 가지 칭찬은 참으로 조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육체로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함양하여 사람이 보기에 그러하고 스스로 보기에 그러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 이(teeth): 순종에 대한 묵상
선택적 순종이 아니라 절대적 순종(모든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을 묵상했습니다. 이것은 편식하지 않고 다만 ‘아멘’할 뿐이며 순복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영성인이 되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수용하는 자가 되도록 자기부인, 자아부정, 자아상실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겸손과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수용하는 예배자가 되길 원합니다.
(2) 비둘기 눈 : 영적 안목
영적 가치관의 중요함을 묵상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육이 아니라 영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더욱 학습하고 훈련하고 연단하고 실제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제게 영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볼 수 있고,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실상인지, 무엇이 참 보배이고 배설물인지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선과 악, 의와 불의, 내면의 깊음과 표면의 얇음, 유익과 해로움, 쓸모있음과 쓸모없음, 가치와 헛됨, 의미와 무의미, 소중함과 하찮음을 바르게 분별하고 적용하길 원합니다.
(3) 주님의 시선에 대한 묵상
주님의 시선이 중요함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며, 주님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15:4~5). 동행팀과 역대상(성장과정)을 틈틈이 학습하고 문서팀과 함께 역대하(성장과정) 문서작업을 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라는 말씀이 제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쉼표와 단락을 통해 늘 마음의 흐름을 분별하고 점검하겠습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 있는 사람은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고 어떻게 느끼시는지 그 마음을 압니다. 그래야 주님과 내적인 사귐이 있는 자입니다. 그 사귐을 가져야 우리가 비로소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귐을 가져야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만 우리 자신이 생명으로 행하고 생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4) 입술에 대해 묵상
더욱 말의 훈련에 힘써야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도록 내 말을 듣는 훈련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말은 버리고 생명의 말은 더욱 채우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칭찬해주신 입술에 대해 매료가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입술을 소유하도록 더욱 말의 훈련을 하고자 합니다.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아 4:11)
꿀방울은 많은 말이나 유창한 말이 아니라 적절한 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방울이라고 표현합니다. 필요할 때 적절하게 나오는 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유창한 말이나 많은 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항상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이며 다만 그 말이 꿀과 같이 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 4:6)
말은 자기를 위해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듣는 이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적절한 말이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르치심 안에서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말하게 될 때에 소금으로 고르게 함과 같으며, “꿀방울이 떨어지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습니다. “혀 밑에는”에서 혀는 저장하는 장소로 공급받는 장소를 뜻합니다. 꿀은 체력이 고갈되고 약한 자를 북돋는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사 50:4)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소금으로 고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꿀입니다. 그뿐 아니라 령의 지식과 지혜가 그 안에 있다면 그는 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꿀방울처럼 적절하게 꿀을 사람들에게 주어 말로 곤핍한 자를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언제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젖은 어린아이를 먹이는 양식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돌봅니다.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권해서 그들로 자기와 같이 주님 앞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주님 앞에 서로 맡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먹여서 자라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이 일에 게으르면 주님 앞에 한 므나 그대로 가지고 가서 틀림없이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 혀 밑에 젖이 있어서 그것으로 어린 사람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잘 먹여주어야 합니다.>
6.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 대한 묵상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아 4:6)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함을 추구해야 합니다(마 5:48, 엡 4:13). 상대평가나 상대적 우월감이 아니라 절대평가 속에서 우리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함과 순전함을 향해 더욱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 과정 속에 온전하지 못한 모습 즉 우리의 결점과 부적절함과 연약함을 발견할 때마다, 생명으로 행하지 못하여 영적 사망을 경험할 때마다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십자가의 더 깊은 역사, 갈 2:20) 나아가겠습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 가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치료를 받겠습니다(마 9:12, 막 2:17, 눅 5:31, 계 3:18~19).
<사도 바울은 나는 온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룬 것도 아니요, 잡은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 앞에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는 사람,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온전함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이 칭찬할수록 내가 온전치 못함을 여전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말합니다. 자기의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다녔던 그때에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가 아니라 지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그는 신령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내게서 아름답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는 어둠을 말합니다. 아직도 여전히 그 생명으로 인해 빛이 되지 못하고 어둠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발견될 때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야 합니다.
아가서 1장에서는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아 1:12-13)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는 기름이고 몰약 향낭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작은 산입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능력이 위대해진 것입니다. 내게서 아직도 아름답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볼 때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오직 십자가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그곳에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한 옛사람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나를 아름답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게 있어서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의 자리마다, 실패한 나를 부둥켜 앉고 몰약 산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나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씻어 깨끗케 하십니다. 그렇게 날마다 구원의 큰 은혜 안에서 우리는 완전함을 향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7. 영적 권위에 대한 묵상 (아 4:15~16, 지도자과정)
영적 권위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오는 권위가 늘 함께하길 소원합니다. 더욱 주님으로 행하고 주님을 위해 행하는 주님의 복된 종이 되도록 더욱 추구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주님의 가지가 되겠습니다(요 15:4~5).
<영적 권위는 오직 레바논에서부터 옵니다. 레바논은 높은 곳 곧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 말미암았는지 나인지, 성령의 가르치심인지 사람의 지혜인지 분별하여 오직 주님으로 행하는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스스로가 영적 권위를 갖지 못하면 자기에게 있는 어떤 직분이나 사역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오직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권위를 외모를 통해 나타내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생명의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요 15:4~5).>
8. 아가서 4장 9절 묵상 (성장과정)
아가서 4장 9절 말씀을 학습하고 묵상했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아 4:9)
<여기에서 ‘나의 누이’라는 호칭이 아가서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신부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누이는 혈통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이 여인은 사랑으로 맺어진 신부일 뿐 아니라 혈통으로 맺어진 누이라는 의미입니다. 고작 주님을 필요로 하고 그 사랑에 족해할 줄 아는 여인을 주님은 신부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고, 주님이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주님이 원하는 일을 나도 원하며 (나의 기쁨을 추구하고 나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쁨 안에서 내 기쁨을 얻고 그의 만족 안에서 내 만족을 얻는 이 여인은 신부일 뿐 아니라 이제는 혈통으로 맺어진 누이가 된 것입니다. 골육 즉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골육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누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식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골육은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1)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