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25-2 20040621 236P-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지상스님은 신주 귀계 사람이다.
초년에 출가하여 견성할 뜻을 빌며 하루는 조사님께 찾아 뵙고 절을 하자,
조사께서 물으시기를 "네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무슨 일을 구하고자 하는가?" 하시니 이르기를 "학인이 요사이 홍주 백봉산에 가서 대통(신수)화상을 뵈옵고 견성 성불의 뜻을 보여주심을 입었으나 깊은 의심을 풀지 못하였사옵니다.
멀리서 찾아 와 뵈옵고 업드려 바라오니 화상께서는 자비로 가르쳐 보여 주시옵소서"
강설:
학인이 닦아 깨우침에는 기연이 닿아야 한다.
기연이란 배우는 자의 근기가 익어 마치 계란 속의 병아리가 숙성되어 껍질을 쪼아 나오려는 경지가 되었음이 기요,
이 기를 명안종사가 때에 맞추어 직지하여 밖에서 껍질을 쪼아주는 줄탁( 啄)의 순간을 이르는 것이다.
지상스님의 기와 신수대사의 연이 맞지 않았으므로 六조 대사를 다시 찾아 뵙고 껍질을 벗겨 주시기를 간청하게 된 것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그분이 무슨 말을 하던가? 네가 시험 삼아 말해 보라" 지상이 이르기를 "지상이 저곳에 이르러서 무릇 석달을 지나도록 보여 가르쳐 주심을 받지 못했나이다.
법을 위한 마음이 간절하므로 하룻 저녁에는 홀로 방장(조실)실에 들어가 '어떤 것이 이 지상의 본심이며 본성입니까?' 하고 여쭈니 대통화상께서 이에 이르시기를 '네가 허공을 보았느냐?' 하심에 대답해 이르기를 '보았습니다' 하니 그분께서(彼) 이르시기를 '네가 본 허공이 모습인 相이 있더냐?' 대답해 이르기를 '허공은 형체가 없사온데 무슨 모양이 있겠나이까?'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의 본성이 허공과 같아서 마침내 한 물건도 볼 것이 없음을 알면 이것이 이름하여 정견이요, 마침내 한 물건도 없음을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참 아는 것이며, 푸르고 누렇고, 길고 짧은 것이 있음이 없으며, 다만 본원이 청정한 깨달음의 體가 둥굴고 밝음을 보아 곧 밝아지면 견성성불이요, 또한 이름하여 여래의지견 이니라' 하시었습니다.
학인이 비록 이 말씀을 들었으나 오히려 뜻의 이치를 밝히지 못했사오니, 빌건대 화상께서는 열어보여 주옵소서"
강설:
신수대사께서 "가히 마음이 허공 같아 한 물건(相)도 없음을 아는 것이 바른 지견이요 참으로 아는것(깨달음)이요, 일체 상이 없는 청정한 覺體가 원명함을 보아 반야지혜가 밝게 드러남이 견성으로 성불인 것이요 이름하여 불지견이라"하신 설법은 틀린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만 신수대사의 법문은 현상(나타나 있는 相)이라고 이름하며 현실이라고 이름하는 차별 경계인 부처님은 부처님(覺人)으로써 머물고 중생은 중생으로써 머물러 행하는 그 가운데서 본성이 부처요 깨쳐 들면 곧 성불이며 불지견에 이르름을 설하신 차별문이라, 본성 성품을 직시하는 평등문으로 살피면 이 차별문은 보는 것과 볼것 있음으로 갈라져 상견을 이룸이 되는 것이다.
방장은 곧 조실이며 선지식의 거처하는 방을 이르는 것으로써 방장의 유래는 유마힐거사의 방이 一丈 (사방10척 폭3㎡)이였음으로부터 생긴 명칭이며 조실이란 것은 제4조 우바국다존자가 제도한 사람마다 산 가지(籌) 하나씩을 쌓은 것(주실)이 祖실로 변해 오늘에 이른 명칭이 되었으며 이 방에 거처하는 선지식을 조실이라 하게 된 것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그(신수) 대사의 말씀이 오히려 보고 앎이 남아 있으니 그러므로 너로 하여금 요달치 못하게 된 것이니라, 내가 이제 너에게 한 게송을 보이리라"
강설:
한법도 보지 않음은 곧 한 가지의 相도 있음이 없음이니 일체에 능소가 끊어진 평등함이라 한 법도 보지 않는다는 소견과 밝아 청정하여 빈 것에 공하다는 소견을 지으면 相見이 되어 능소(주객)로 둘로 벌어 지게 되는 것이니 본래 찾을 것도 보아야 할 자성이 달리 있음이 없는 것이다.
지상이 게송을 다 듣고 마음이 막힘 없이 밝게 깨닫게 되어서 이에 게송을 지어 이르기를
강설:
공하다는 생각과 한 법도 없다는 空見의 소견을 갖게 되어 空한 것과 공함을 아는 상대적 소견이 허공에 뼈를 만듦이니, 허공같이 비어 공하다는 말들이 방편으로 일러 보인 교설임을 깨닫지 못해 空이라는 상에 국집해서 보리를 구함이 깨닫기 전과 다를 바 없는 것임을 깨닫고 보니, 잘못되면 삿된 소견의 병통이 되므로 명안조사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능소로 벌어져 어긋나게 된다는 뜻이니 명안조사의 가르침이 이토록 중요하다 하였다.
지상이 하루는 조사께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3승법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셨사오나 제자가 알지 못하겠사오니 원컨대 가르쳐 주시옵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자기 본심을 觀하고 밖으로 법상에 집착하지 말라. 법은 四승이 없으나 사람 마음이 스스로 등급을 가리니
보고 들음에 굴리어 외우는 이것이 소승이요,
법을 깨달아 뜻을 아는 이것이 중간승이며,
법에 의지하며 수행하는 이것이 대승이며,
만법에 다 통하여 만법을 모두 구족했으나 일체에 물들지 않고 모든 법상을 여의어서 하나도 얻은 바가 없음을 이름하여 최상승이라 하니라.
乘이란 바르게 행한다는 뜻이며 입으로 다투는데(말에) 있지 않으니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되 나에게 묻지 말라,
어느 때나(항상) 자성은 스스로 같으(自如)니라"
지상이 절하여 사뢰고(계합하였음으로) 조사께서 세상을 마치실 때 까지 곁에서 모시었다.
강설:
석가세존이 들어 교설하신 3승(성문<양수레> 연각<사슴수레> 보살승<소수레>) 최상승(백우거-일불승)은 차별문이며, 평등문인 본성의 실상을 살피면 이러한 3승이니 최상승이니 하는 것이 없는 것이나 모두 깨쳐 들게 하시기 위한 방편(수단으로써 假設)인 것이며 본성을 관해 깨달으면 모든 방편설이 실다움이 아닌것이다.
또 사람의 근기를 나누면 보고 들은 방편에 굴림을 당해서 등급(차별상)에 국집하여, 목적이 되는 본성의 실상은 깨달아 보지를 못하고 말만 외우는 것은 소승(근기)이고, 깨달아 뜻을 아는 것이 중(中)승이고, 법(眞理)에 의지해 수행하는 것이 대승이며, 모든 실상의 진리를 통달하여 일체지를 깨쳐 갖게 되어(증득) 상에 끄달려 집착함을 여의고 증득했으되 얻는 바 없음을 얻은 것은 최상승(일불승)이라 하셨으나, 이 드러 보이신 것도 차별문의 방편을 면하지 못함임을 또한 알아서, 알음알이로 외워서 앎으로써 삼으면 知解종자를 면하기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乘이란 바르게 한다(평등문)하셨다.
차별문으로 살피면 승은 올라 탄다는 뜻으로 그 법위에 이른다 하는 뜻이다. 이러한 방편을 국집해서 말로 만 외워 아는 것은 헛된 짓이요 다툼(말에 끄달려 분별함)에 있음이 아니므로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셨다.
법거량 끝에 절하는 것은 直旨를 계합해 깨달았음에 감사함을 보이는 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