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후반기. 그가 식성을 바꾸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마운드에서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자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즌 막판까지도 씩씩하게 공을 뿌리고 있다. 이런 김병현의 이면에는 식생활을 바꾸기 위한 치열함이 숨어 있다.
올 시즌이 개막하기 전까지 김병현은 보직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자신도 선발로 뛰고 싶다는 강한 의사표현을 한 것이다. 사실 불펜에서 언제 등판할지 모르는 가운데 최상의 컨디션을 계속 유지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또한 셋업맨(중간 계투요원)이나 마무리 투수는 잘하면 본전, 못하면 패배를 책임져야 하는 정신적인 부담이 따르는 자리다. 그래서 대다수 불펜 투수들은 등판 간격이 일정하며 몸관리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선발투수를 선호한다.
김병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은 당연히 선발투수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가지고 결정한 것이지 불펜투수로 계속 던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얼마간은 경험도 축적하고 타자를 상대하는 요령도 익혀야 했기 때문에 중간 계투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셋업맨으로 승격되고 마무리 투수로 점점 굳어져 가는 자신의 보직에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자신의 에이전트를 통해 팀에 호소도 해보았다.
이런 불만은 지난해 잠시 받아들여졌다.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경기에 선발등판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경기 초반부터 공이 마음먹은 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김병현은 ‘투수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 쿠어스 필드에서 3회를 마치지 못하고 홈런 2방을 허용하는 등 4실점을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렇다고 김병현이 선발투수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올 시즌 스프링 트레이닝을 앞두고 김병현은 직간접적으로 계속해서 선발투수에 대한 바람을 팀에 전달했다. 당시 애리조나는 마무리 투수 맨타이가 합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병현의 선발 욕심은 컸다. 게다가 선발 1, 2번을 제외하고 불안한 로테이션을 보인 애리조나의 투수력을 감안할 때 김병현의 선발 진입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이런 가운데 김병현이 조금씩 마음을 정리한 것은 1월 무렵이다. 가라지올라 단장은 팀 사정상 김병현이 불펜투수로 뛰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개인 성적도 중요하지만 팀에서 필요치 않은 선수라고 판단되면, 냉정하게 돌변하는 메이저리그 습성상 김병현이 마냥 선발로 발탁해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셋업맨으로 시즌을 맞이한 김병현은 이제 확실한 애리조나 마무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선발이냐 마무리냐
그렇다고 김병현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선발투수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절대 아니다. 올 시즌을 앞두고 김병현은 잠수함 투수로 메이저리그 선발투수가 되지 못한다는 통념을 뒤집어 놓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의 말처럼 현재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메이저리그 선발투수 중 옆으로 던지는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특이한 투구 형태로 타자들이 혼란을 겪지만, 투구패턴이 어느 정도 눈에 익으면 위에서 던지는 투수보다 쳐내기 쉽고 장타가 많이 나온다는 야구이론과 좌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약점을 보인다는 야구계의 정설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병현은 “나는 예외”라고 말한다. 우선 잠수함 투수로는 드물게 151km의 빠른 공을 던지는데다 공의 변화가 심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소속이었던 빌리 오웬스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김병현 같은 선수는 야구계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김병현은 아직까지 싱커를 잘 구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선발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지금까지의 빠른 공, 슬라이더, 체인지업에 싱커까지 가미, 다양한 구질로 타자를 상대하겠다는 생각이다.
또한 김병현은 좌타자를 상대로 특별히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 올 시즌 김병현은 좌타자를 맞아 피안타율 0.191로 웬만한 우완 투수를 능가하는 뛰어난 기록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0.245로 평범한 성적을 거두던 그가 올 시즌 이렇게 좌타자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선발투수를 의중에 두고 나름대로 좌타자 공략법을 개발한 게 주효했다는 것이 주위의 시각이다.
하지만 김병현의 선발투수 꿈이 조만간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우선 잠수함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기존 시각을 뒤집어야 한다. 또한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쓸 만한 마무리 투수를 구하기 어렵다는 상황이 김병현에게는 ‘행운’이면서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애리조나가 당분간 대형 마무리 투수를 확보하지 않는 한 김병현에게 불펜의 책임을 맡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LA다. 그런 면에서 박찬호는 행운아다. 교포들이 많은 만큼 한인 커뮤니티가 잘 형성돼 있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주변의 격려도 심심치 않게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애리조나의 홈인 피닉스에는 한국 교포가 그리 많지 않다. 김병현이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젊음을 만끽할 상황도 아니지만, 한국 사람이 적은 도시에 산다는 게 외로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김병현의 단짝친구는 잠과 컴퓨터게임이다.
일반적으로 프로야구 선수는 밤에 많은 경기를 치르는 직업 특성상 잠자리에 늦게 들고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다. 김병현도 예외가 아니며 야구선수 중에서도 특히 잠이 많은 편에 속한다.
지난 스프링 트레이닝 때 김병현은 아침 10시부터 실시하는 훈련에 참여하는 데 애를 먹었다. 물론 지각을 하거나 훈련을 빼먹진 않았지만, 일찍 일어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고심 끝에 김병현이 생각해낸 방법은 낮잠을 안 자는 것이다. 낮잠을 자면 밤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에 고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낮잠을 자지 않기 위해 주로 선택한 방법은 드라이브였다.
게임과 잠이 친구
벤츠 E클라스가 애마인 김병현은 오후 2∼3시면 어김없이 드라이브를 즐긴다. 아무래도 핸들을 잡으면 운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사실. 원해서 하는 드라이브가 아니라 밤잠을 잘 이루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사실이 씁쓸하지만, 그래도 이 방법은 그런대로 효과를 발휘해 스프링 트레이닝을 잘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김병현은 잠이 많다. 한마디로 그에겐 잠이 보약인 셈이다.
김병현의 또 다른 취미는 컴퓨터 게임이다. 원정경기든 홈경기든 김병현의 소지품에는 꼭 노트북 컴퓨터가 포함되어 있다. 스타크래프트를 주로 하는 김병현은 주로 PC를 상대로 혼자서 경기를 즐긴다.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는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김병현은 게임을 잘하는 편이다.
김병현은 혼자서 훌쩍 떠나는 여행도 좋아한다. 시즌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가족들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돌아다닌 적이 있다. 김병현은 시끄러운 성격이 아니라서 이런 ‘나 홀로 여행’이 편하다고 한다. 가끔 친구가 동행하지만, 대부분은 혼자서 짐을 꾸린다.
미국 내에서 꾸준히 연락하는 지인들도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서재응과는 자주 안부를 묻고 시즌 후 함께 훈련하기도 한다. 지난 봄에는 시카고 컵스 마이너리그 소속인 권윤민과 훈련했다. 가끔씩 박찬호와도 전화하고 서로의 도시를 방문하며 함께 식사도 한다.
미국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는 골프선수 박지은 정도. 애리조나 주립대 출신인 박지은과는 안부 전화를 할 정도로 우정을 쌓았다. 외국 생활을 오래한 박지은이 이런 저런 충고를 해준다고 한다. 종목은 다르지만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운동선수라서 말이 잘 통하는 편이라고 한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상대가 홈런을 펑펑치는 홈런 타자나 3할을 가볍게 넘기는 정교한 타자라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피해가는 투구를 하게끔 되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꿈에서도 상대하기 싫은’ 타자가 각 팀에 즐비하다. 그런데 김병현은 오히려 이들과의 대결을 즐긴다. 김병현은 마무리 투수의 특성상 안타 한 방에 경기의 승패가 오가는 벼랑 끝에서 등판하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얼마 전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아메리칸리그 타율 부문 선두를 질주하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즈키 이치로와 한판 승부를 벌였다. 김병현은 그와 대결하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숨막히는 대결에서 이치로의 타구를 플라이볼로 유도해 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김병현의 미소는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병현은 이치로와 상대하는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7년 연속 타격왕 출신에다 메이저리그 첫해부터 신인왕은 물론 타격왕까지 노리고 있는 선수와의 대결에서 김병현은 긴장하지 않고 여유있게 게임을 즐긴 것이다.
김병현 앞에만 서면 꼬리를 감추는 강타자가 바로 마크 맥과이어와의 홈런왕 경쟁으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의 새미 소사다. 올해까지 4년 연속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강타자 소사는 제아무리 대투수라 해도 부담스러워하는 괴물타자다. 하지만 김병현은 그와의 대결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다. 모두 여덟 번 상대해서 단 한 개의 안타도 허용치 않고 있다. 그중 여섯 번을 삼진 처리했으니 더 이상 보충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지난해 아메리칸리그 홈런왕 트로이 글로스도 3타수 무안타로 눌려 있다. 1994년 내셔널리그 MVP 휴스턴의 제프 백웰도 김병현과의 네 차례 대결에서 철저히 당했다. 박찬호의 팀메이트 셰필드도 삼진 한 개를 포함 3타수 무안타다. 박찬호도 셰필드가 김병현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뉴욕 메츠의 포수 마이크 피아자도 김병현에겐 안타가 없다. 올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는 ‘영원한 3할타자’ 샌디에이고의 토니 귄과도 두 번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했다. 올 시즌 마크 맥과이어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70개에 도전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배리 본즈도 3타수 무안타에 그치고 있다.
정면으로 승부를 건다
물론 그렇다고 천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찬호에게도 강점을 보이는 콜로라도의 토드 헬튼은 김병현에게도 호락호락한 타자가 아니다. 헬튼은 김병현을 상대로 5할 타율에 홈런도 한 개를 빼앗았다. 다저스의 좌타 거포 숀 그린 역시 두 번의 대결에서 모두 김병현을 울렸고 그 역시 홈런을 뽑아냈다. 얼마 전 통한의 역전 3점포를 허용했던 샌디에이고의 라이언 클레스코도 그리 달갑지 않은 타자다. 하지만 전체적인 비율로 봤을 때 김병현은 이들과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렇게 철저하게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을 압도하는 김병현의 비결은 무엇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본인의 말처럼 이들과의 대결을 절체절명의 결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게임으로 즐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만큼 본인의 공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구위에 자신이 있으니 피해가지 않고 정면승부를 거는 것이고, 피해가는 투구 패턴에 익숙해져 있던 강타자들이 오히려 당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풀타임 2년차의 새내기이지만 구원투수로 팀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김병현의 성공은 그를 잘 아는 주변에서 어느 정도 예측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자리잡을 것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김병현은 현재까지의 성적을 스스로 절반의 성공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직 메이저리그 선발투수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개인기록이 최고 수준에 들어갈 정도로 올라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봉으로나 매스컴의 주목도 면에서 선발투수가 마무리 투수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점은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미 본인 최다 세이브를 세우고 차곡차곡 기록을 쌓아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도 김병현은 “내 목표는 선발투수”라고 밝히고 있다. 목표는 선발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세이브를 올려도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까지 말하는 대목에서는 당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메이저리거로서의 꿈은 한 시즌 20승을 올리고 노히트노런까지 기록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지금까지의 성공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는지 모른다. 아마도 선발투수로 정식 발령을 받는 그날부터 김병현이 생각하는 진정한 성공신화가 시작될 것이다.
올 시즌 김병현은 메이저리그 진출 1호인 박찬호도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꿈에 도전하고 있다. 바로 소속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이다. 아직까지 박찬호의 소속팀 LA 다저스도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남아 있다. 만약 다저스가 ‘가을의 축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면, 박찬호는 미국 진출 7년 만에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게 된다. 반면 김병현의 소속팀 애리조나는 현재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로 다저스보다 한 걸음 더 포스트시즌에 다가서 있다.
지역구 스타에서 전국구 스타로
아직까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포스트시즌 경험은 연봉계약이나 본인의 경력에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현재의 팀 성적이 유지되고 김병현이 포스트시즌 마운드에 선다면, 그리고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단기 시리즈에서 세이브를 얻어낸다면, 김병현은 페넌트레이스에서 거둔 세이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을 느낄 것이다. 또한 지역구 스타에서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물론 개인성적도 팀성적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지만, 개인적인 성공이 팀성적으로 직결되기는 어려운 게 냉정한 현실이다. 따라서 포스트시즌 진출은 올시즌 김병현에게 주어진 지상과제가 되고 말았다. 셋업맨으로 시즌을 열었지만, 확실히 마무리 투수로 포스트시즌을 맞이하게 된다면, 김병현은 자신의 꿈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선발투수였다가 마무리 투수로 변신한 경우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마무리 투수를 하다가 선발로 전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일부 마무리 투수를 하다 선발로 돌아선 경우는 메이저리그 경력 초반에 선발투수 경험이 있던 투수들이 대다수다.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경험이 단 한 번에 불과한 김병현에게는 잠수함 투수가 통할 수 없다는 정설을 뒤엎어야 하는 한편, 마무리 투수에서 선발로 전환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또 다른 통념을 깨뜨려야 한다.
정상적으로 대학을 다녔으면 이제 4학년. 동기들이 이제 프로 진출이냐 새로운 진로 모색이냐 하는 출발선에 서려 할 때 김병현은 일찍부터 프로야구의 본고장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김병현은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하지만 그의 꿈은 저 멀리 지평선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20승, 노히트 노런의 그날까지 김병현은 달릴 것이다. ‘작은 거인’이라는 새로운 애칭으로 불릴 그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