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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구경합시다..
별 역사적인 장소가 아니다보니 더 부연 설명은 필요없을 듯 합니다..
1929년 프랑코 독재 시절이다 보니 스페인 현대사의 설명 좀 하겠습니다!!
1931년 4월 스페인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선거에서 스페인의 41개시가 공화정을 지지하고, 지방은 군주제를 지지하는 투표 결과를 내었습니다..
많은 도시가 공화정을 선언하였고 수도 마드리드는 이미 1930년 사모라를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구성되며 공화정을 선언한 상태..
기독교 교도인 사모라가 초대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1931년에는 공화파 의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룬
제헌의회가 구성되었다.
민주 인사인 마누엘 아사냐는 개혁 정신을 지닌 사회주의자들과 공화파 인사들로 이루어진 초대 정부를 이끌었다.
군주제가 무너지고 제1공화정(1873~1874)이 붕괴된 지 약 60년 만에 제2공화정이 탄생한 것!!
1931년 12월,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고 제1조는 '스페인은 노동자들의 공화국'이라고 되어 있다.
지역의 자치주의와 평화주의가 포함되어 있는 진보된 민주 헌법이었다.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규정했으며 이혼, 농업 개혁, 노동 계약, 군대의 인원 감축,
여성의 참정권과 같은 스페인에서는 혁명적이라고 여겨지는 법률들이 통과되었다.
군대와 교회 그리고 부자들로 이루어진 우익 세력은 혁명적인 체제를 원하지 않았다.
교회의 고위층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소수의 부유한 자본가들은 자신의 재산을 은행에 동결시키거나
해외로 유출하기까지 했습니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공화국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점진적인 개혁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사회 계층을 타파하는 완전한 혁명을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익 세력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배타적인 태도로 인한 정치·사회적인 긴장이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사회주의 정부(1931~1933)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농지 개혁.
농지 개혁은 정치적 혁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통일된 기준이 없었다.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토지수용법으로 지주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경작 농민들에게 많은 토지가 분배.
이러한 급진적인 조치는 전국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고 1933년에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사회주의 정부의 위기는 시작.
반란의 진압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자비한 행동을 급진 사회주의자들과 우익 세력들이 맹렬히 비난.
이에 아사냐는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
선거에서 급진파와 연합한 우익 세력, 농민, 전통주의자가 승리했다.
1933년 선거에서 우익 세력이 다수 표를 획득했지만, 내각을 구성하기에는 부족하여 중도 연합을 구성.
분열을 겪고 있었던 좌파와 극우파와의 대립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보수층을 대표하는 우익동맹은 급진파와 연합하여 좌익 공화파를 제거한 뒤 아사냐 정부가 단행한 개혁 조치를 무효화하고
교회에 대한 특권 부여와 자치법 폐지, 새 농지법 공포 등의 보수적인 정책을 폈다.
좌익은 무정부주의자와의 연합을 모색했다.
1934년 10월에 카탈루냐와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중심으로 총파업이 일어났고, 동시에 전국적으로 반란.
두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진압되었다.
1931년의 제2공화국은 스페인의 모든 역사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정치적인 과오들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지만 실제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보수파와 중도파는 공화정이 시행하는 정책에 대해서 거부감을 나타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공화제를 지지함과 동시에 소련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폭력적인 혁명주의를 선택.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중도파가 설 자리는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공화정으로 야기된 갈등과 혼란이 마침내 1936년 7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코파와 좌파간의 스페인 내전..
1931년 국민들의 투표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양되었지만 아직 시민적으로 성숙되지 못하고
오랜 왕정으로 인하여 사회 운영에 대한 경험이 없던 국가 지도층의 분열로 스페인은 1차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유럽을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들었죠!!
국론의 분열외에도 스페인 내전(1936~1939)의 발생과 전개는 1930년대라는 국제적 상황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1930년대는 이데올로기가 만발한 시대.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세 가지 주의(主義)의 투쟁이 이 시대 정치사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죠!!
실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에 몸을 바쳤습니다.
사상에 대한 정열이 역사를 움직인 시대였고, 이런 시대적인 특징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
스페인 사회의 독특한 사정이 내전의 직접 원인이기는 했지만, 세계 경제 공황, 국제 파시즘의 대두,
국제 공산주의 운동 등의 여러 요인들도 스페인 내전의 원인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직·간접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30년대 후반 스페인의 국내외 정치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초반 스페인은 농업 문제와 지역 자치 문제, 노동 운동 문제 등이 서로 얽혀서 사회적·정치적 위기에 놓여 있었다.
알폰소 13세가 이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자 1923년부터 1931년까지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국회를 해산하고 무력 독재 정치를 폈다.
1931년에 실시된 지방 선거에서 공화파가 대거 진출했다.
공화파의 진출은 왕권 약화와 왕당 정치의 폐지를 의미했다.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공화제 정부가 들어섰다.
공화파는 왕당파와 교회의 낡아빠진 지배 사상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했다.
새로 탄생한 공화국 정부는 교회의 힘을 약화시키고,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려 노력했으나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열악했고 사회는 낡은 봉건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에도 나열했던 사항이며 산업혁명에 적응하지 못한 스페인의 인프라가 타 유럽에 비하여 극도로 열악했던 사정에 의한 것!!
1936년, 사회당 계통의 노동자총동맹(UGT)과 무정부주의자 그룹인 노동자국민동맹(CNT)이 서로 손을 잡았다.
이른바 인민전선(Frente Popular)이 형성된 것.
1936년 2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인민전선은 과반수의 지지를 얻었다.
국민들은 집권에 성공한 인민전선 정부에 대하여 '좋은 정치'를 갈망했고,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가 된 아사냐는
'좋은 정치'를 위하여 힘을 쏟았다.
그는 정치범 석방, 농민의 조세와 지대 경감,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실업 대책, 중소기업 보호, 교육 개혁 등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을 단행했다.
또한 아사냐 정부는 팔랑헤당의 활동을 불법화하고 프랑코 장군을 카나리아 제도의 경비 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한편 총선에 패배한 대지주들과 부르주아들은 왕당파와 팔랑헤당으로 분열되었지만,
두 세력 모두 인민전선 정부의 타도에 골몰했다.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와 지주, 대자본가, 군부 등이 범 파시즘 세력을 형성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 인민전선 정부를 방해했다.
어떤 자본가는 고의로 생산을 중단하여 노동자를 실업 상태로 내몰기도 했고 팔랑헤 당원은 인민전선 지도자의
집에 폭탄 테러를 하거나 기관총을 장착한 차를 몰고 다니며 인민전선 지지자들을 사살하기도 했다.
파시즘 세력의 편에 선 법원은 이러한 폭력 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했다.
나아가 파시즘 세력은 인민전선 정부가 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선전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은밀하게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할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왕당파 지도자가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쿠데타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파시즘 세력에게 좋은 구실을 만들어주었고 마침내 보수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은 군부가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리한 내전의 서곡..ㅠㅠ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원인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1936년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오랫동안 대립해온 '두 개의 스페인', 즉 '두 개의 광신적이라 할 만한 정열과 이상'이 파괴적인 형태로 충돌한 것.
결국 스페인 내전은 '두 스페인'이 공존의 길을 찾지 못해 마지막으로 도달한 유일한 출구였다.
역사가들은 18세기부터 '두 스페인'에 관한 개념을 말해왔는데, 하나는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급진적이고 범 세계적인 지식인과 진보주의자들의 스페인이고, 다른 하나는 가톨릭적이고 맹목적이며 엄격하고
스스로 폐쇄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스페인이었다.
1936년 당시 군대와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과 같은 국가 기관 내에서까지도 이러한 '두 스페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의 스페인 사회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가 아니었다.
양 진영에는 각각 군인도 있고 사제도 있었다.
또 중산층과 지식인층, 가톨릭교도와 반교회주의자, 전통을 옹호하는 계층과 진보적인 그룹 사이에 갖가지 알력과 상극도 존재했다. 말하자면 당시의 스페인 사회는 가로와 세로로 분단되어 서로의 틈을 메우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 넓고 깊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이미 100여년전에 겪었던 시련을 스페인은 공산주의의 성장과 께 겪어야 하는 비극을 맞이했던 것..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사 봉기가 일어났다.
다음 날인 18일, 프랑코는 좌천당해서 근무하고 있던 카나리아 제도에 계엄령을 발동하고 아프리카 반란군의 지휘를 맡았다.
세계를 뒤흔든 스페인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일, 이미 스페인령 모로코에 가 있던 프랑코는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군에게 본토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이 본토 상륙 작전은 전투의 국면을 좌우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군의 작전상 실수로 프랑코의 본토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결과 '실패로 끝났을 쿠데타'가 스페인 전체의 '내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즉, 반란군을 지지하는 한쪽의 스페인 국민과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는 또 다른 한쪽의 스페인 국민,
다시 말해 '두 스페인'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전은 공화국 정부군 쪽이 우세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주요 도시와 우수한 무기, 많은 자원, 공업 지대, 풍요한 농촌 지대, 외화 등이 모두 공화국 정부군의 손 안에 들어 있었다.
한편 반란군은 각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군수 물자마저 부족했다.
하지만 양쪽 진영의 사기를 비교해보면 반란군 쪽이 더 높았다.
공화국 정부가 교회와 군대를 억눌러온 데 대한 반란군 진영의 복수심, 그것이 바로 반란군 쪽의 사기를 높이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반란군 진영은 봉기한 곳이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횡적인 연락망이 충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만큼은 한 명의 군사령관이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통솔했다.
공화국 진영은 공화국 정부와 혁명을 지향하는 여러 정파가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내전이 '전쟁이냐 혁명이냐' 라는 소모적인 논쟁만 일삼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초기 단계부터 유럽과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지원했다.
이는 스페인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했다.
공화국 정부군측에서는 작가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이 참여한 의용군으로 이루어진 4만여 명의 국제여단이
활약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
헤밍웨이은 여러가지로 이후 스페인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작가입니다!!
외국의 원조가 시작된 이후로 공화국 정부군 진영에 주어진 인적·물적 원조가 반란군 진영에 주어진 것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투에서는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정규군으로 이루어진 반란군 쪽이 절대적인 우세를 보인 가운데, 1939년 3월 28일 마침내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반란군이 승리했다.
2년 9개월 동안 스페인을 보수와 혁신으로 양분한 스페인 내전에서 약 30~6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25~50만 명의 공화국 정부군과 민간인들이 프랑스로 망명했다.
공화국 정부군의 패배 원인에 대해서 당시 공화국 정부군 편이었던 역사가 산체스 아르보르노스는
"공화국 정부를 넓게 뒤덮고 있던 '태만의 정신', '미래를 향한 비전의 결여', '충분하지 못한 조직화'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
한편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스페인 내전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스페인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아버렸다.
스페인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어떻게 우리의 현대사의 질곡과 비슷한 점이 많죠!!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스페인에는 옛날부터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숙명론적으로 표현한 우화가 있다.
"성모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을 하나님에게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풍토(風土)를 부탁했다.
하나님은 이것을 들어주었다. 다음에는 가장 좋은 과일과 밀을 부탁했고, 가장 뛰어난 말과 칼도 부탁했다.
하나님은 이것들도 모두 들어주었다. 그들은 다시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춤을 부탁했고,
또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가장 용감한 남성을 부탁했다. 하나님은 이것도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좋은 정부(政府)를 부탁했다. 그러자 당황한 성모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사들이 하루도 천당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스페인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좋은 정부만은 얻지 못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악정에 시달리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19세기 중엽부터는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하는 나쁜 전통이 생기게 되었다.
한 스페인 전문학자는 1841년 이래 스페인에서는 202회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1975년에 사망한 프랑코는
그 202회째의 성공자였다고 전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헤밍웨는 논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는 존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 1937년 5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에서 화요일까지 전개된 상황을 묘사했다.
몬태나 대학의 스페인어 강사로 근무하는 미국인 청년 로버트 조던이 1936년부터 1년의 휴가를 얻어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로버트 조던은 열렬한 공화주의자로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하여 정부군의 일원으로 과다라마 산중으로 파견된다.
그곳에 기거하던 게릴라 부대에 합류한 조던은 마리아라는 스페인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조던은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면서도 다리 폭파의 사명감을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마침내 다리는 폭파되고 조던은 말 밑에 깔려 중상을 입었지만 마리아와 전우들을 후퇴시키고
홀로 기관총을 움켜쥐고 내습하는 적을 기다리며 숨을 거둔다.
헤밍웨이는 그가 사랑하는 나라 스페인에서 1936년에 파시스트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자 공화국 정부군에
구호차를 구입하기 위한 자금으로 4만 달러를 제공했다.
또한 이듬해 나나 통신 특파원으로서 스페인으로 건너가 내전의 참상을 직접 보도하기도 했다.
스페인 정부군에 협력하여 영화 〈스페인의 땅〉의 제작에 종사하기도 했으며 귀국 후에는 전미작가회의에서
파시즘 타도를 역설했다.
이러한 행동들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그대로 반영되어 개인과 인류와의 관계, 자유를 위해서는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인류 전체에 대한 굳은 연대 의식의 중요성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소설 의 모태가 되는 기도문..
"모든 인간은 인류의 일부이며, 완전히 독립된 개인은 있을 수 없다.
죽은 한 사람의 인간을 위하여 울리는 조종(弔鐘)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느냐고 물을 것도 없이 모든 사람인 그대를
위하여 울리느니라."
- 《죽음에 임해서의 기도》, 존 던
조지 오웰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작가..
조지 오웰은 배반당한 혁명을 우화적으로 묘사한 《동물농장》과 전체주의를 풍자한 《1984년》을 쓴 작가다.
또한 《카탈루냐 찬가》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스페인 내전 시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 소속 의용군들과 함께 싸운 경험을 쓰면서
노동 계급 투쟁과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믿음뿐만 아니라, 동시에 스탈린주의와 그 옹호론자들에 대한
굳건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입장이 스페인 내전에서 그가 이끌어낸 결론이자 이후 평생의 정치적 태도의 기본 축을 이룬다.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고, 그 후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1936년 이래 나의 모든 작품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고자 쓴 것이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처음으로 완전하게 믿게 된 것도 스페인에서였으며,
그 가능성이 스탈린주의자들의 손에서 파괴되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도 스페인에서였다.
이처럼 스페인 내전은 조지 오웰에게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스페인의 지식을 바탕으로 짜집기를 한 글입니다!!
독재자 프랑코에 대해서도 언급해 봅니다..
저도 배운다는 차원..
1892년에 태어나 1975년 집권중에 생을 마감합니다!!
프랑코는 1892년에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군인이었던 그는 모로코의 게릴라전에서 용맹을 떨치며 유능한 장교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12년부터 1925년까지 모로코에서만 근무했다.
그 후 계속 승진하여 33세에 장군으로 진급,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초의 최연소 장군이 되었다.
그는 지휘에 능했으며 사회의 규범을 군대식으로 해석했다. 즉 군인은 훌륭한 지휘 하에서만 복종을 잘하고
국민 또한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민간인의 불복종은 바로 반란이었다.
따라서 1934년에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도 프랑코 장군의
엄격한 규율 지상주의에 의한 것이었다.
프랑코는 기묘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지만 처량하고 작은 목소리 때문에
인상적인 대중 연설가는 되지 못했다.
가끔씩 그는 공무를 뒤로 하고 며칠씩 낚시와 사냥을 즐기곤 했다.
그는 매우 가정적이며 전통적으로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모든 사람이 그의 면전에서는 겁에 질려 떨면서
양같이 온순하게 행동할 정도로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다음은 모로코에서 일선 외인부대를 지휘할 때의 이야기이다.
이 일화에서 프랑코의 규율 지상주의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한번은 보급된 식료품이 매우 좋지 않아서 병사들의 불평이 터져나왔는데, 겁 없는 졸병이 프랑코의 얼굴에
배급받은 음식을 던져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프랑코는 식당 당직 장교를 급히 불러 불평한 병사 앞에서
'식사의 질을 즉각 끌어올려라'고 명령하고서는, 티끌만큼의 동요 없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 병사를 끌어내 즉각 총살형에 처하라.'"
준엄한 규율이었다. 프랑코는 이처럼 상사에게 대드는 자는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무자비한 규율 지상주의자의 태도를 지닌 군인이었다.
프랑코는 마드리드에 입성한 1939년 4월부터 1975년 11월, 그가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통치했다.
그는 1936년 9월에 동료 장군들에 의해서 스페인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스페인의 동전에 새겨져 있듯이 총통이고, 국가원수이고, 정부 수반이며, 또 내각의 의장이기도 했다.
프랑코는 1938년 1월과 8월에 공포한 두 개의 법령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모든 법률과 법령을 공포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부여받았다.
그의 법률 담당 변호사들은 그의 권력에 대해서 '프랑코는 입헌 독재자이고, 그의 권한은 자기 스스로 내리는 한계
외에는 제한이 없다'고 말해왔다.
프랑코 자신이 언명했듯이 그의 독재권 행사에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유일한 존재로서, 그는 언제나 옳고 언제나 현명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야 했다. 정치는 물론 모든 국민의 일상 생활을 장악했던 프랑코는
무슨 일이든, 무슨 정책이든 최종 결정권자였다. 한 마디로 모든 카드가 '그의 손 안'에 있었다.
또한 프랑코는 단호한 절대 군주였다.
"짐은 곧 국가다."라고 루이 14세는 말했다지만 '프랑코는 곧 스페인'이었고,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는 항상 "나는 역사와 천주님에게만 책임진다."고 말했다. 편리한 논리였다.
프랑코는 한 마디로 '위대한 스페인'을 외쳤다. 가톨릭 왕들이 다스렸던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걸쳤던
웅대한 제국으로서의 스페인이야말로 프랑코의 뇌리에 입력된 위대한 스페인이었다.
그리고 프랑코는 이 '위대한 스페인'이 '평등 선거'나 '의회 민주주의' 때문에 망했다고 믿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스페인을 쇠퇴하게 한 것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사상이었고 자유 민주주의라는 깃발 아래
사리사욕에 날뛰는 정당 정치인들이었다. 프랑코는 "나는 정당을 미워한다."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기도 했다.
내전이 끝나자 그는 모든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분쇄했다.
그에게는 군대, 강력한 가톨릭 교회, 그리고 팔랑헤당의 지지가 있었다.
이런 든든한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끄럽고 위험한 민주주의를 말살시키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이 씨를 말렸고, 자유주의자, 수정주의자,
나아가서는 막연히 민주주의자로 낙인찍힌 사람, 그리고 반프랑코 분자로 지목되는 사람들을 투옥시켰다.
정치 단체나 노동조합 등 일체의 조직이 철저히 파괴되었고 반정부 성향의 언론사는 폐쇄되었으며 언론인은 모두 투옥되었다.
그 누구도 대항할 자가 없었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내전이 끝난 후, 힘에 의한 안정을 찾았을 때 그는 "우리는 투표 행위 따위의 위선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얻지 않았다.
우리는 총칼로써 그리고 가장 훌륭한 동지들의 피로써 정권을 얻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는 획득한 권좌는 절대로 어떤 경우든 내놓을 수도 없고, 필요하다면 총칼과 피로써 수호하겠다는 무서운 결의의 표명이었다.
정권을 잡은 프랑코는 피폐해진 스페인 경제를 재건하고, 자신이 해방시킨 스페인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야만 했다.
1940년대 말에는 전력이 부족하여 산업시설뿐 아니라, 가정용 전력까지도 제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특히 농업 생산이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는데, 계속되는 가뭄과 비료의 부족으로 경작지의 40%를 점하던 곡물 생산은
1931~1935년 사이의 생산 수준에 비해 13%나 감소했다. 결국 1940년대에는 밀을 대량으로 수입해야만 했다.
1950년대까지 프랑코는 1937~1939년 스페인 내전 중에 만들어진 통제 기구들로 경제를 재건하려 했다.
당시에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된 정책은 경제 자립과 국가 주도주의(간섭주의)였다.
즉 정부는 자급자족과 국내에서의 자본 조달을 통해서 국내의 경제가 국가의 간섭 아래 고율의 관세를 통해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받을 수 있게 했다. 이와 같은 보호 정책은 높은 생산 원가와 경쟁력 약화에 따른
국내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한편 가격과 봉급은 정부에 의해서 통제되고 무역과 환율 또한 엄격히 규제되었다.
1957년, 정부는 내각을 새로운 기술 관료들로 구성했다.
새 내각은 스페인을 서구의 선진 자본주의, 특히 유럽 시장에 통합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신경제 정책을 펼쳤다.
새로운 내각의 이러한 신경제 정책에 대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은행은 "만일 스페인이 번영을 원한다면
'시장에 대한 공포증'과 '자립 경제'라는 정형외과의 도구를 버리고, 외국 투자와 대외 무역에 국가를 개방해야 한다."고
스페인의 새 내각에 충고했다.
이런 충고에도 프랑코는 이차대전이후 민주화가 전개된 서유럽 사회에서 아직 독재를 지향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외면을 받았으나, 2차대전 당시에 중립을 지향한 프랑코의 정책의 영향으로 2차대전 이후 전개되기 시작한 동서냉전에서
스페인이 소련에 협조하는 것이 두려워진 미국의 주선으로 프랑코 체제를 유지한채 서유럽의 일원으로 당당히 진입한다!!
천덕꾸러기의 화려한 개선.. 역사의 아이러니!!
서유럽의 지원에 힘입어 스페인 경제 전문가들은 서비스업 분야의 발전에 중점을 두면서 스페인 경제의 개방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서비스업 분야의 성장은 관광 산업의 발달을 불러왔다!!
이는 농업 분야에서의 잉여 노동력을 흡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관광 산업은 초기에 손목이 드러나는 투피스 형태의 수영복을 보여줌으로써 주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는 1960년대에 들어서 외국 자본의 투자 유치뿐만 아니라 관광객 유치를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관광은 당시 가난하고 낙후된 스페인을 경제적으로 회복시키는 구세주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다르다."라고 선전하면서 유럽 국가의 중산층들도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내고 태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스페인이 물가가 싼 국가라는 이미지도 갖게 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에 몰려든 관광객들은 스페인 경제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썼다.
1970년대에 들어서 연간 3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밀려들어 관광 수입이 30억 달러에 이르렀다.
1930년대 스페인에 오는 관광객들은 스페인에 산재해 있던 예술성이 풍부한 문화재들을 보러 왔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는 지중해 연안의 해변이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코스타 델 솔 같은 곳은
1년에 300일 정도 햇빛이 나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이는 석탄이나 철강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관광 산업의 호황은 또한 60만 명의 계절 노동자가 고용된다는 것과 건설 경기가 살아난다는 것
(호텔 객실수는 1950에서 1975년 사이에 7배나 증가했다)을 의미했다.
냉전에 힘입은 프랑코 정권의 제의 발전은 노동자와 가난한 지방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지역간 빈부 격차로 인해 자기 고장을 떠나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의 산업 지대와 마드리드, 사라고사 등 대도시로 이동.
이 지역들은 농촌 출신의 노동자들의 중심지로 변화되었다.
반면, 농촌 지역은 더욱 더 빈곤해져갔고, 사회보장 시설 수준 역시 매우 낮았다.
이처럼 1957년부터 채택된 경제 정책과 1964년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 계획은 사회 전반의 수요와 복지
문제를 보다 폭넓게 내다보지 않고 오직 생산 증대에만 치중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경제적인 혜택은 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경제 개발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데서 나타났던 비효율성과 그에 따른 스페인 국민들에 대한 사회보장의 수준 저하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없었다.
계속된 통제 정치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1966년에 국가 조직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프랑코 정권은 이 법에 대한 승인이 평화로운 스페인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선전했다.
즉, '평화에 한 표를, 발전에 한 표를!'이었다. '스페인의 평화'는 관광객 유치를 위한 외침이었다.
스페인에 온 수많은 관광객들 어느 누구도 호텔이나 교통 수단의 파업으로 고생을 하거나 가두시위를 목격하지 못했다.
스페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스페인 사회는 1960년대 말까지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치적 동기로 인한
극단적인 혼란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표면상의 평화는 1960년대 말부터 위기와 갈등으로 변해갔다.
프랑코는 텔레비전과 승용차를 소유하고 축구를 즐길 수 있는 노동자들은 혁명 세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학생들은 외국의 이념에 의해 길을 잘못 들어선 부류라고 간주했다.
교회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코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곤 했지만 프랑코는 그 책임이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프랑코의 착각과 오해가 집권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다.
갈등의 또 다른 요인으로는 1970년 초반 제조업 중심으로 직업 구조가 개편되고 또 산업 인구가 증가하면서
발생했던 노사 갈등을 들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금지되었지만 단체교섭권은 인정되었다.
또한 산업 자본가가 금융 자본가로부터 분리되면서 지배 계급 자체도 다원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은 집권 세력 내의 이해 다툼으로 인해서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은 점점 늘어가는 시민 사회의 개혁에 대한 요구로 인해 내부적인 결속이 약화되었고
결국에는 국가에 의한 통제 및 억압 정책이 한계에 달함으로써 체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장기 집권자의 안주와 착각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이 집권 후반기에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
프랑코는 믿음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다.
뿐만 아니라, 프랑코의 추종자들은 가톨릭이 스페인의 본질이고, 그들의 체제를 공고히 해주는 이념적 유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교회의 지지는 매우 중요했다.
프랑코 체제는 교회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일반 결혼과 이혼을 금지했으며,
공화국 정부에 징수된 재산을 교회측에 되돌려주기까지 했다.
또한 교회가 교육을 전담할 수 있도록 정책적·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1953년에는 바티칸과 화친 조약을 체결하여 바티칸 당국이 스페인에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고
국가의 재정 지원도 약속했다. 이처럼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에서 국가와 교회의 밀월은 오랫동안 견고하게 지속되었다.
이렇게 견고하게 지속되어온 프랑코 체제와 교회와의 밀월 관계는 교회 내부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남으로써 깨지기 시작했다.
가톨릭 사제들은 스페인 노동조합 제도의 불합리성과 하류 계층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비난했으며,
이에 일부 고위 성직자들도 동조했다.
또한 1950년대 초반부터 스페인 교회 내에서 일어난 종교의 형식과 이념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던 움직임으로 인해
프랑코 체제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페인 가톨릭 교회의 젊은 성직자들은 정치·사회적으로 과격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신학자들과 지식 있는 신부들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보였으며, 일부 노동 계층 신부들은 노동자 위원회의 열렬한
행동 대원이 되어 경찰과 정부에 공개적으로 도전하며 교회를 노조의 집회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바스크 지방에서 신부들은 바스크 출신 주교의 임명과 종교 행사에서 바스크어 사용을 요구했고,
심지어 어떤 신부는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의 행동 대원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프랑코 체제는 이에 대응하여 바스크 출신의 신부들에게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하고 많은 신부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1974년과 1975년에는 바스크 지방의 빌바오 주교가 바스크 민족은 그들 고유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가택연금을 당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주교단은 교회의 자유로운 권리를 옹호하고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책자를 발간했다.
교회는 이미 프랑코 체제측에 있지 않고, 그 반대편에 있었다.
이렇게 1965년부터 명백해진 교회와의 갈등은 프랑코를 가장 화나게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프랑코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코는 다른 어떤 통치자들보다 교회에
많은 지원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회의 이러한 반발은 프랑코에게
그 무엇보다도 큰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프랑코는 교회가 잘못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가톨릭의 원칙과 가르침에
역행하는 자가 자신이라고 비난하는 교회의 행동을 인정할 수 없었다.
프랑코는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책임이 있었지, 교회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멘탈과 카르스마를 갖춘 사람..
명문 구단에 비하여 조금 부족한 멘탈과 실력을 갖춘 세비아 FC 기념품 매장..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가 사망했다..
내전이후 36년이나 지속되었던 프랑코의 철권 통치가 종식된 날!!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의 이야기 그 후는 또 다른 장소에서..
너무 길었죠!!
제가 공부를 한다는 차원에 장황하게 정리했네요..ㅠㅠ
마지막 방문 장소로 이동합니다..
오래된 유적이 있는 세비아의 별종적인 장소!!
그 곳을 향해 움직입니다..
구도시의 엔카르나시온 광장에 있는 이것..
현대 미술가이며 건축가인 위르겐 메이어 헤르만의 작품!!
세비아의 오래된 산업인 직물산업에 착안하여 벌집모양의 씨줄과 날줄로 된 목재 건축물..
이음새가 철재로 되어 있어 목재 건축물로 잘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고 만져보면 분명히 목재!!
3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환상적인 옥상의 테라스에도 올라갈 수 있다..
환상적인 세비아의 공중 경치를 볼 수 있는 장소!!
높은 건물이 없다보니 메트로파라솔의 테라스면 모든 세비아의 조망이 가능하다!!
아래쪽은 메트로 파라솔 건축중에 발견된 로마유적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