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聖誕祭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현대문학>(1955)
'성탄제聖誕祭'란 예수가 탄생한 크리스마스를 가리킨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인간의 원죄를 사하기 위해 화목제로 자기 한 몸을 희생했다. 죄 없는 어린 양인 예수가 속죄양이 되어 자기 몸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행위에 대해 우리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시 <성탄제>는 그 제목과는 달리 기독교와 별로 관계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고 깨닫게 되듯이, 이 시에서 시인은 성탄제 무렵에 자기를 낳은 아버지의 사랑을 새롭게 느끼고 아버지와 시적 자아의 새로운 만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는 인심과 삭막한 도시 문명 속에서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찾아본다는 것은 삶의 근원적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다시 읽는 한국의 명시」 김원호 지음
맹태영 옮겨 적다